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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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렸을 때 나는 무척이나 까무잡잡했다. 부모님은 무조건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지만 어렸을 때 내 별명은 한 때 시커먼쓰였다. 악의가 없는 친한 친구들의 장난이었음에도, 나는 꽤 상처 받았었다.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체질이 변해서 그런지 지금은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길을 가다가도 마주치는 새하얀 피부의 여성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하얀 피부의 아이가 부러웠던 것일까.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주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에게 해당하는 현상으로 흑인 작가들의 중요한 주제였다고 한다.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넬라 라슨의 대표작 [패싱]은 그러한 혼혈인들의 패싱 행위와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는 '종족'이라는 개념을 두 여자 주인공을 앞세워 그려낸다. 아이린 레드필드는 친정 집에 쉬러 갔다가 어렸을 적 친구 클레어 켄드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흑백 혼혈인 클레어는 놀랍게도 자신의 남편에게, 자신에게는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멀리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힌 아이린은 결국 자신의 생활에 클레어를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날 남편과 클레어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챈다. 결국 안정감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아이린과, 흑인 사회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클레어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레드필드 부인, 그 점에 관해 저를 잘못 아신 겁니다. 전혀 그런 게 아녜요. 난 그들을 싫어하는 게아니라 증오해요. 우리 검둥이도 그래요. 자신이 검둥이로 변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말이지요. 이 여자는 애정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주위에 검둥이 하녀를 두지 않아요. 나도 그녀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것들은 나를 오싹하게 해요. 소름 끼치는 그 검은 악마들....언제나 도둑질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짓도 하는.-p74, 75

클레어의 남편 잭은 클레어에게 흑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아이린과 그녀들의 친구 거트루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클레어가, 아이린이 어째서 패싱을 하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는 패싱을 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흑인과 백인의 대립에 관한 사항을 알려주길 꺼려하는 아이린의 모습은 결국 그녀 자신이 '종족'이라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타낸다. 

백인과 흑인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흑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식민지 경영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종족간의 접촉이 증가했고,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편리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백인이 피부색이 다른 종족을 멸시하는 인종차별이 발생했다. 아프리카의 주민들이 예전에는 미국으로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니, 어째서 피부색만으로 사람의 우위를 결정할 수 있었는지 새삼 헛웃음이 나온다. [패싱]이 발표된 것은 1929년. 지금은 2008년. 약 80년의 세월의 차가 나는데도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인종차별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국제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많은 혼혈 아이들이 살아간다. 잘 적응하고 즐겁게 생활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중에는 피부색으로 인해 놀림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국제화와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가 인간을 피부색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피부가 하얀 친구를 부러워했던 것도 이미 정해져있던 상대적인 기준에 영향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까맣지도 않지만 하얗지도 않은, 조금 까무잡잡한 내 피부를 두고 다른 사람의 피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얀 피부도 아름답지만, 까만 피부도 아름답다는 것을 TV와 책으로 배웠다. 오히려 골격이 아름답고, 피부결이 좋은 것은 흑인이 백인보다 뛰어나다니 피부색이 아니라 골격과 피부결로 따졌다면 백인이 흑인에게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말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도 얼떨떨하다. 클레어가 선택한 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선택이었는지..다만, 흑인의 피를 숨기고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았던 클레어보다도, 아이린에게 더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안정감'이라는 줄 하나를 힘겹게 잡고 있던 그녀에 대한 연민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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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라,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권태현 지음, 조연상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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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이라도, 누군가 나에게 "~다, ~은 ~이다,~해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듯한 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떠한가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지, 그 사람의 생각대로 내가 살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한 주제에 관해 마치 세상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사람마냥 말하는 사람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내 생각도 그저 나의 아집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며 넘어가면 될 것을. 그렇게 생각하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만나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편하게 글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나운서이고, 개그맨 유재석의 연인으로 유명한 나경은 아나운서가 심야 라디오에서 낭송했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한참 사람의 감성이 살아 움직이는 새벽, 고요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읽혀지는 이 글들을, 그 밤에 깨어있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나는 한창 내 마음이 격한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이 글을 읽었다. 마음이 허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 무언가 내 마음을 움켜쥐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나경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자신의 목소리로. 

나는 과거를 계속 되감기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스타일이다. 내가 실수했던 것, 잘못했던 것,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긴 것을 끊임없이 반추하면서 내 자신을 고문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들이 제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좋은 기억이든, 싫은 기억이든 과거는 우리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반석이 되어준다는 것을. 언젠가는 과거가 될 현재를 내 마음 안에 꼭꼭 다져 넣고 싶다. 

작가는 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패배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말은 쉽다!-라고.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지를 나는 또 알고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막연한 생각만으론 안 된다. 두려워하지 않고 그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용기는 그 동안 자신이 노력하며 쌓아온 저력과 잠시도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이 함께 만났을 때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실패하는 순간에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축적해둘 수 있어야 한다. -p165

책은 나의 모습들로 가득하다. 거절 못하는 나, 오해하는 나, 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나, 습관적으로 생활하는 나, 상상을 즐기는 나,  미소짓는 나.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키워드들이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라 내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삽화들이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해서 외롭고 갈 곳 없는 내 마음을 가만히 껴안아 주는 것 같아서 그 순간만큼은 내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공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내 옆의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껴준다는 것.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그럼으로써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것. 책을 읽는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표지에서 새 두 마리가 서로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내가 다른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준 든든함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당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공감지대를 형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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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에 사는 사람들 - 무한카논 1부 무한카논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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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고등학교 때 우연히 비디오로 본 적이 있다. 음악선생님이 구한 테이프를 비디오가 재생하기 시작하고, 나는 곧 화면에 빠져들어갔다. 일본인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풍성한 몸집의 여자가 얼굴에 온통 흰칠을 하고 빨간 입술을 한 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어째서 등에 나비가 안 달렸는데 -나비부인-이라고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가사키에 들어온 미국 군인 핀커튼과 사랑을 하고, 그 사이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얻었지만 핀커튼의 배신으로 주저없이 죽음을 택한 여자. 사랑 없는 삶보다 영원한 안식을 택한 여자. 이 책은 그런 -나비부인-의 사랑의 역사에서 시작된, 오랜 사랑의 기록이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혜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의 무한 카논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무한 카논. 각 성부마다 악곡의 처음으로 돌아와서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는 카논, 즉 돌림노래를 의미한다. 소재를 [나비부인]에서 얻었다고 해서 시리즈의 이름도 참 고상하게 붙였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째서 이 책에 무한 카논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가 된다. 머무르는 시간과 사람은 다르지만, 끝없이 돌고도는 사랑의 이야기들. 한 번 손에 쥐면 놓을 수 없는 영원한 아픔과 신비에 마음이 매료되어 버린다. 

'너'라고 시작되는 독특한 도입부. 그 '너'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도키와 (노다) 가오루의 딸 츠바키 후미오다. 소식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온 후미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고모 앙주에 의해 아버지의 역사를 듣게 되지만 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비부인-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비부인과 핀커튼의 사이에서 태어난 벤자민 핀커튼 주니어(JB).  그가 사랑을 통해 낳은 아이 노다 구로도. 그리고 노다 구로도가 사랑을 통해 낳은 아이가 바로 노다 가오루다.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아버지 노다 구로도와 어머니 노다 기리코를 차례로 잃은 소년 가오루는 아버지의 친구인 도키와 시게루에 의해 도키와 가문의 양자가 된다. 마모루의 구박을 견디면서 누나 앙주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가오루는 앙주의 친구 아사카와 후지코에게 사랑을 느끼고 평생 그 사랑을 지켜나가기로 맹세한다. 

사랑의 무한카논 시리즈인만큼 등장인물 수도 많고, 그 만큼 많은 사랑이 등장한다. 나비부인의 비극적인 사랑, JB의 사랑, 노다 구로도와 마츠바라 다에코의 가슴 아픈 사랑, 그리고 가오루의 사랑까지. 지금까지 일본 작가들은 연애, 또는 사랑에 관해 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김 빠진 콜라를 마시는 것처럼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사랑의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혜성에 사는 사람들]은 괜히 마음이 설레고, 아파서 책 읽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이 한 권으로 '일본작가들은 사랑이야기를 잘 못써'라는 내 생각을 싹 없애버렸다. 어둡고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이 책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4대에 걸친 소용돌이 같은 사랑. 거기에 세계대전의 역사적 정황까지 곁들여 완벽하게 매료시킨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이야기에 시마다 마사히코의 팬들이 왜 그렇게 설레어 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3부작으로 구성된 무한 카논 시리즈. 그 1권을 접한 지금, 어서어서 다음 권이 나와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1권에서  막 싹트기 시작한 가오루와 후지코의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난 죽어서도 죽지 못할 거야- 라고 외친 가오루. 그의 사랑의 끝이 어떠하든, 무한 카논 시리즈에 한 번 발을 내딛은 사람은 이 주체할 수 없는 매력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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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 꽃으로
권태성 글.그림 / 두리미디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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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책을 읽다 혼자 엉엉 울어버렸다. 밤이라 센티멘탈해진 탓도 있었겠지만, 책을 읽다 통곡에 이르는 눈물을 흘린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 심오한 뜻을 가진 책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한 두 번 겪었을, 그런 사소한 일상들이 동글동글한 그림체 안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 책이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었다면, 이리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하지 못했을 것도 같다. 눈 앞에 보이는 인물들이 때로는 내가 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때로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되었다. 

책은 12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병들어 버려진 유기견의 이야기를 다룬 <괜찮아요>, 사랑이야기인 <러브레터>, <극장 앞에서>, <고백>, ,<셀로판지처럼>, <이쁜이>, 정신대 할머니들의 고통을 담은 <다시 태어나 꽃으로>, 아마도 작가 자신의 가족사일 <힘>,< 꼼장어와 김치찌개> 등 작지만 소박하고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 담겨져 있다. 특징적인 것은 작가 자신의 신변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행이에요..보이진 않지만 주인님한테서 기쁜 냄새가 나네요. 행복한 냄새가 나네요. 그걸로 됐어요. 그걸로..전 잘 지내니까 잘 있으니까 그걸로 됐어요..괜찮아요..정말로..전..정말 괜찮아요..-p31
<괜찮아요>를 읽으면서 일본작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하드보일드 에그]를 떠올렸다. 주인공의 친구는 버려진 동물들을 모아 자신이 기르고 사랑해주고 있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사람은 참으로 잔인하고도 책임감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떤 생명을 자신이 맡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은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예뻐해주었던 그 생명에 대한 책임을 하찮게 취급하고, 금방 잊어버린다. 끝맺는 부분의 백내장에 걸려 버려진 강아지의 사진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 강아지의 눈빛을 원래 주인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

<김학순> -p150


대학 때 홈스테이를 온 일본인들과 -나눔의 집-을 찾은 적이 있다. 꺼려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우리들보다 그 일본인들이 더 관심있어 했다. 그 곳에 살고 계신 할머니들은 정말 평범한 우리나라 국민이었다. 우리가 찾아가자, 반가워 하시며 이것 먹어보라, 저것 먹어보라며 챙겨주셨고, 안마라도 조금 해드리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그런 할머니들의 마음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기고 있는 것은 과연 일본이라는 나라일까. 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일본보다, 역사를 쉽게 잊고, 여인들의 아픔을 잘 헤아려주지 못하는 우리들의 탓이 더 크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태어나 꽃으로>로 접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가 앞으로도 잊어서는 안 될 우리 모두의 역사이다. 

<괜찮아요>의 강아지가 자기 주인 곁에서 행복을 맛보고, <다시 태어나 꽃으로>의 할머니가 내세에는 평범한 여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다만, 그 때가 너무 늦지 않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기를. 나의 기도는 항상 -작은 것에 기뻐하자-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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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 -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
이상엽 외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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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나면, 내 마음 속에 단어들이 물밀듯이 넘쳐나서 빨리 감상을 적게 만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무 글도 쓰지 않았는데 모든 말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있다. 그럴 때는 어쩐지 그냥 책을 한 번 쓰다듬는 것만으로 그 책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에도 빠진다. 마치 책이 내가 되고 내가 책이 된 듯한 느낌. 혹은 그 책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 같은 느낌. 그래서 그런 책들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내게 [윈난]은 그런 책이다. 

언젠가부터 사진이 가득 실린 여행서적을 즐겨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사진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 많은 책을 접하고, 읽게 되면서 백 마디의 말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이다. 책에 실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어느 새 나도 그 사진의 일부가 되어 있으니까. [윈난]은 나의 그런 욕구를 100% 만족시켜주는 책이었다. 여행 전문가 7인의 조근조근한 서간체의 문장들도 내 마음을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먹먹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득 채워준 것은 윈난의 곳곳을 담은 수많은 사진들이었다. 사진에 관해 문외한이라 해도 좋을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윈난의 사진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된 것은 그 사진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윈난]은 표지부터 독특하다. 쑹짠린 사원이라 불리는 곳을 배경으로 맨 위에 이런 글귀가 보인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자의 낙원-.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했을까. 윈난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곳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생활을 이어가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정겨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다른 이가 적어놓은 글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순수하고 가슴 따뜻한 정을 간직한 곳이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각각의 마을에서 문화와 언어를 지키며 공존하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 모든 색깔을 한 단어로 압축해서 나타낼 수 없기에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여행자의 낙원인가 싶기도 하다. 

사진과 함께 쓰여진 일곱 분들의 마음을 바른 자세로 앉아 깊이깊이 느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해 그리움과 함께 윈난의 풍경에 대한 감탄을 토해내는 편지, 친구 혹은 선배에게, 인연을 맺은 소중한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귀들을 읽으면서 어째서 여행을 떠났는데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비록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는 홀로 훌쩍 사라지고 싶다가도, 좋은 풍경과 가슴 따뜻한 정을 느끼면 내게 소중한 누군가에게도 그것을 맛보게 해주고 싶기 때문인가보다.


 떠나기 전, 방수 재킷 속으로 지갑을 찾는데 내 손을 아주머니께서 꼭 잡더니 그냥 가라며 떠미셨어요. 아니라고 거듭 말을 해봤지만 소용없을 정도로 아주머니는 강경하게 내 등을 떠미셨어요. 결국 따스한 아주머니 손이 떠미는 대로 나는 포석로로 발걸음을 내디뎠어요. 포석로는 여전히 촉촉했고 덩달아 내 마음도 촉촉이 젖어 들었어요. -p183
<아름다운 고원의 아침>편을 쓰신 정일호님의 글귀에서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정은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하다. 아마도 집을 떠나 조금은 외로울 마음을 그 정이 어루만져주기 때문일 것이다. 고성의 변두리에 위치한 재래시장 한 켠 어둑한 벽 아래에서 찍었다는 붉은 꽃의 사진에서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고, 하늘을 닮은 미소를 짓는 소년의 사진이나, 공깃돌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사진은 정일호님의 마음을 적신 아주머니의 정마냥,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누가 우리를 소수라 하는가.
 누가 우리를 소수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충분하다.
그대가 우리를 가난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우리를 초라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소수인 우리는 작은 욕심으로 충만하고
가난한 우리는 맑은 가난으로 아름다우니.

-p205

윈난의 풍경을 보며 팔레스타인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는 자이납에게 편지를 보낸 박노해님의 글속에서도, 그리고 다른 분들의 글 속에서도 윈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윈난은 사람과 자연이 어울려야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발전이 가속화되고, 윈난에서 생산되는 푸얼차가 유명해진다고 해도, 윈난이 본연의 그 소박한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중국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나의 무지함 탓일까. '차마고도'라는 말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 곳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꿈의 도시 '샹그리라' 인 것 같다.
 
문득 책 앞 표지를 보니 <카메라가 쓰는 책.1>이라고 나와 있다. 앞으로 이런 책이 여러 권 나올 가능성이 큰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여행서적은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평화롭게 한다. 다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두 발을 꼭 잡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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