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이 그린 라 퐁텐 우화
장 드 라 퐁텐 지음, 최인경 옮김, 마르크 샤갈 그림 / 지엔씨미디어(GNCmedia)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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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샤갈'하면 학교 앞에 자리잡고 있었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카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그 발음이 어쩐지 좋아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약속이 있을 때 가끔 찾아갔었다. 처음에는 '샤갈'이 화가라는 것도 몰랐지만, 그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것을 귀동냥으로 알게 되었을 때, 그 카페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샤갈'이라는 이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났다.  사실 '샤갈'때문에 눈에 띈 책이지만, 그 안에 든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다.

어렸을 때 이솝우화를 즐겨 읽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우화작가인 라퐁텐이 이솝풍으로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니, 어쩌면 같은 우화작가였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들을 다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글자를 떼던 시절에 어린이용으로 가장 먼저 접했을 이야기들을 이렇게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게다가 샤갈의 43점의 그림과 함께하니, 마치 작은 미술관이 내 품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그림들이 이해하기 쉽다거나 단순한 것은 아니다. 라퐁텐의 우화들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를만한 그림도 몇 점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걸까.

어렸을 때는 단순히 동물들의 이야기로 지나쳐버렸던 이야기들이 우리 삶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기발하면서도 재미있다. 권선징악의 교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우화들이, 이 책에서는 하나하나가 각각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끝에 설명이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예를들어, 몸집이 커다란 소를 부러워한 개구리가 그 소 같은 몸집을 갖기 위해 자신의 배를 부풀리다가 결국에는 배가 뻥 터져 죽는다는  -소만큼 커지고 싶어한 개구리-라는 우화가 있다. 그 우화 마지막 부분에는 라퐁텐이 써놓은 듯, "세상은 바보 개구리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부자들은 성주처럼 큰 집을 짓고 싶어하고, 성주들은 왕만큼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싶어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약간은 냉소적이면서도, 어쩐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의 마무리같이 정겨움도 느껴지고, 그러나 그냥 흘려 들을 수 없는 진리가 숨어있는 것 같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에이, 어렸을 때 다 읽은 건데 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책에 어느 순간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솝우화집이나 라퐁텐의 이야기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여전히 읽히고 있는 것은, 동물들로 묘사되어 있어 우리의 삶을 차갑지만은 않게, 유머러스하게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화가 아닌, 샤갈의 그림에 좀 더 중점을 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좋은 그림과 교훈적인 내용을 한 번에 음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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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심리학 - 생각의 오류를 파헤치는 심리학의 유쾌한 반란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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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라는 학문은 참 흥미롭다. 만약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였다면, 어쩌면 이 학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게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진지하게 바라볼 줄 알게 되는 것. 어쩌면 이름만 안 붙여져 있었을 뿐이지,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그 때부터  심리학은 가장 오래된 학문영역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살아가는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듯,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 영역 또한 그렇게 간단히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이 궁금하여, 심리학의 대가라는 프로이트의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다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므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도와는 달리, 그 깊은 세계를 파헤쳐 가기까지의 과정은 (조금 과장해서) 험난한 듯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괴짜심리학] 은 기존의 심리학책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나같은 독자에게 '심리학이란 참 재미있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심어준 유쾌한 책이다. 

-정말 사주팔자가 인생에 영향을 미칠까?-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시간과 날짜의 심리학부터, 거짓말과 속임수, 미신과 초자연, 암시와 선택, 유머와 웃음, 이타성과 인간관계의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속에서 누구나가 궁금해할만한 소재들로 채워져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혈액형학이나 별자리에도 관심이 많은 나에게 가장 흥미깊었던 것은 -시간과 날짜의 심리학-이었다. 1940년대 후반 버트럼 포러라는 교수는 심리학개론을 듣는 학생들에게 성격 검사지를 작성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성격에 대한 판정을 내렸다며 각자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실제 자신의 성격과 일치하는지 점수를 매기게 했다. 검사지에 실렸던 문장을 통째로 소개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면서 '어머, 딱 내 성격이네'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검사를 한 학생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점쟁이의 말이 그럴듯한 까닭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사람들의 성격을 뭉뚱그려 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시간과 날짜에 관한 사람들의 심리가 단순히 여흥이나 장난으로 그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출생부터 죽음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밖에도 TV를 통해 전국민이 참여한 거짓말 맞히기 실험, 여섯 단계만 거치면 세상 사람을 다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밀그램 실험, 부정한 숫자로 간주되는 13이 정말 불행을 가져오는지 알기 위해 윌리엄 파울러 대위가 조직한 13클럽, 검은고양이가 악운을 불러온다는 믿음을 검증하기 위해 직접 검은고양이 앞을 지나다니는 실험 등, 평소에 우리가 무서워하거나 궁금해 한 내용들이 들어있어 실제 생활과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나는 평소에 궁금해하기만 했던 것들을, 이렇게 직접 독립변인과 종속변인을 설정하여 실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보면 이 책은 위대한 연구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와이즈먼은 심리학 교수이면서, 프로 마술사라고 한다. 어쩌면 프로마술사라는 독특한 이력이 이런 재미있는 책을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의 오류를 파헤치는 심리학의 유쾌한 반란-속에 참여하고 싶은 분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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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거짓말
기무라 유이치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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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소설은 구입하지도 않고, 잘 읽지도 않는다. 책 속에서 그려지는 남녀간의 사랑에서 느껴지는 것은 허무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비극적이면 비극적인대로.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에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격으로 몇 날 며칠을 가슴앓이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말 그대로 그런 작품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이 작품 또한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그리 깊은 감동을 준다거나, '내 책장에 꽂아 놓고 두고두고 읽어야겠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입으로는 연신 '유치해, 유치해. 끝이 다 보이잖아'하면서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웃고 있었다. 

촉망받는 시나리오 작가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던 나카무라 나오키. 슬럼프에 빠져 무작정 기차를 타고 도쿄를 벗어나 하카타에 도착한다. 자신의 직업과 과거를 숨기면서  Dogwood라는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게 된 나오키는 마음의 문을 닫고 건조하게 살아가지만, 어느덧 옆 라면가게에서 일하는 아가씨 고토미와 사랑에 빠진다. 나오키는 고토미와 보내는 행복한 시간 속에서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이웃들의 이야기에 감동받게 되고 그것을 시나리오로 만들어 친분이 있던 PD에게 이메일로 전송한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도망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죄쯤으로 여겨주길 바라면서 보낸 이메일은 급기야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을 타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나오키는 고토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위해 기회만 엿본다. 하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도쿄로 훌쩍 떠나게 되는 나오키. 이제 초점은 나오키와 고토미의 사랑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맞춰진다. 

책을 손에 들고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금새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누구나 알아차릴 것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유치해. 좀 지루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붙들고 있게 되는 것은 작품 속에 숨어있는 요소가, '따뜻함' 이기 때문은 아닐까. 누구나 원하지만 쉽사리 주위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함.  사회가 발달하고 사람의 생활이 점점 편리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인간적이고 마음 따뜻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어지는 것도 분명하다. 범죄율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서 이웃과 통성명도 하지 않고, 하물며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쉽사리 하지 못하게 된 현실만 직면하다가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마주했을 때는 가슴 속에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이웃이 함께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장소의 부재, 그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작품성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쉽게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책 속에 등장하는 나오키와 고토미의 이웃들이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졌던 것도. 

100%는 아닐지라도, 작품을 통해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폭풍우 치는 밤에] 와 이 책 [행복한 거짓말]을 통해, 왠지 기무라 유이치라는 작가는 마음 따뜻한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판에 박힌 구성으로 이야기를 평범하게 풀어냈지만, 지금은 이걸로 족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도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각자 자기에게 솔직하게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촌스럽고 보기 흉해도 땅바닥을 발로 밟아가며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인생의 맛이 진국이다.-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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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자화상
제프리 아처 지음, 이선혜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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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는 고갱과의 말다툼 끝에 면도칼로 왼쪽 귀를 잘랐고, 이 사건 뒤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그가 오른쪽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미술사가들은 고흐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화상을 그렸을 것이라 판단했다.( 진실은 그만이 알고 있다.) 반 고흐와 그의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한 장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아!그 사람!"이라는 말을 내뱉지 않을까. 한 쪽 귀에 붕대를 감고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이 쪽을 응시하는 한 사람. 나 또한 미술 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림을 보고 감상하는 것을 즐기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술과 관련된 책에 눈길이 간다. 특히나 고흐의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요즈음, 그의 자화상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그린 책은 아무래도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한 저택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팔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영국의 명문가 집안의 빅토리아 웬트워스가 살해당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9.11 테러가 일어나던 날, 안나 페트레스쿠는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그의 상사인 브라이스 펜스턴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고흐의 자화상을 손에 넣는 것을 막기 위해 몰래 런던으로 움직인다. 한편 FBI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에 브라이스 펜스턴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안나와 그의 사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FBI의 감시와 브라이스 펜스턴이 고용한 암살범으로부터의 추격. 똑똑하고 용기있는 그녀의 숨막히는 여행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우리를 흥분시킨다. 

책은 날짜순으로 되어있다. 9월 10일로 시작되는 도입부. 아무 생각없이 책을 펼쳐들고 읽다가 순간 9.11 테러와 연관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째서 아직도 민감한 주제인 9.11테러를 묘사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해고와 동시에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 안나가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TV에서 9.11테러를 방송하던 당시, 나는 영화가 방영되는 줄 알았더랬다.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고, 연기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높은 건물에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뛰어내리던 장면. 책을 읽으면서 또 다시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인공적으로 다른 사건을 작가가 창조해내는 것보다 9.11테러를 사용함으로써 소설은 현실감과 생동감, 엄청난 긴장감을 갖게 된다.  

작품은 전 세계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처음에는 과연 이 사람들이 모두 작품에 필요한 사람들인지 의심스럽지만, 그 등장인물들이 끝에 가서는 모두 하나의 접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엄청난 놀라움과 희열을 맛보게 된다. 게다가 섬세한 묘사와 탄탄한 구성은 모두 한 편의 영화를 상상하게 했다. 책 중간에 FBI의 잭이 삼성의 휴대폰을 꺼내드는 부분이 있는데, 이렇듯 작가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게 써냈고, 이 점이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고흐의 자화상을 둘러싼 미스터리라고 해서 여타의 소설들처럼 혹시나 어설픈 진행을 보이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지만, 이 작품은 그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준다.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안나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말해 준다.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칭송받는 제프리 아처. 책 표지 뒤에 있는 뉴욕타임스의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 독자를 가지고 논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하룻밤에 다 읽어버린 소설. 하루빨리 제프리 아처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고 싶다.


              모든 것의 가격을 안다고 해서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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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
히사이시 조 지음, 이선희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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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 그리 길지 않은 삶을 뒤돌아보면,  몇 안 되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났을 때,  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준비할 때, 합격하고 이제 앞으로의 인생을 준비하는 현재까지.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는 항상 벼랑 끝에 서 있었던 듯하다. 하나의 목표의 끝에는 언제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벼랑이 존재했다. 지금까지 헤쳐온 벼랑은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경험들이었다. 벼랑이 끝났을 때 마치 내 삶이 끝난 것 같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목표로 한 것의 결과가 어떻든 삶은 어쨌든 계속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일이 끝났을 때, 마치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시간을 소비한다거나, 중요한 일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인생의 프로라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히사이시 조-,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히사이시 조. 일본에, 혹은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최고의 음악가라고 꼽을 만한 사람이다. 그가 참여한 히트작만 해도 우리나라의 <웰컴투 동막골>, <태왕사신기>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작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모두 어마어마한 작품들이다. 그가 펴낸 책 [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를 읽기 전에 나는 그저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여타의 음악가들과 다름 없을 거라 판단했다. 예술계통은 다른 일들과는 달리 노력이나 공부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99% 정도의 타고난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생각들이 결국 예술가들에 대한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1. 프로로서의 히사이시 조.


 프로란 계속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프로로서 일류이냐 이류이냐의 차이는 자신의 역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9

책 전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는 프로다'라는 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의 작업에서 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근거없이 그저 그 두 사람은 신뢰 관계로 묶여있고, 작업도 편안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음악이 좋지 않으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자신에게 의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절박한 심정으로 진검승부를 한다는 글을 읽으면서 역시 프로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두 사람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은 안일했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프로'를 생각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는다면 나는 아마추어로 끝날 수도 있겠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진정한 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매번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로'의 의미이다.

2. 음악가로서의 히사이시 조.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아수라장을 경험하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옴으로써 한 단계 성장한다. 높은 수준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면 그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p137

음악가로서의 그는,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감성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중시한다. '창조적인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성이다'(p29)라고 말하며 중요한 순간에도 이성보다는 직감을 믿어 성공하는 사례도 꽤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그의 모습에는 화려한 성향보다는 인간적인 경향이 더 짙게 나타난다. 작곡 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와 지휘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는 그도 공연 전에는 긴장을 하고, 자신의 곡이 감독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슴 떨려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작곡법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그를 보면, 음악가로서 아직도 그의 재능은 모두 보여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 무척 기대가 된다.

책을 넘기다보면 수많은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인간적인 히사이시 조, 예술가로서의 히사이시 조, 비평가로서의 히사이시 조. 막연히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사람의 이미지에서 이제 그는 진정한 프로와 진정한 음악가라는 이미지로 바뀌었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존재한다'며 음악가라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그. 비록 일본인이지만 일본음악에만 빠져있지 않고, 아시아에서 활동하면서 각국 음악의 장점과 단점을 볼 줄 아는 혜안도 가졌다. 음악에 대한 사랑을 잔잔히 느낄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를 자세히 알게 된 것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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