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사랑쿠폰북 1 -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이혜정 지음, 최일룡 그림 / 뜨인돌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에 다닐 때 장난처럼 번지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연인들끼리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모 사이트에서 다운받는 것이었는데, 인쇄된 그 종이가 너무 예뻐서 남자친구가 없을 때인데도 홀로 보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나도 남자친구가 생기면 여기 적혀 있는대로 다 해봐야지!'하며 서랍 속에 넣어두기도 했는데, 작은 종이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쿠폰이 이렇게 알록달록 예쁜 그림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사랑쿠폰북 1이라 이름 붙여진 이 책은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쿠폰북 2에 더 호기심이 생겼지만, 일단 어떤 책인지 판단해야 할 것 같아 무작정 손에 들었다. 생각보다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디자인에 첫 장에는 사진을 붙여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라는 코멘트까지 달려 있어 무척 세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쿠폰북 사용설명서에 애정지수 체크리스트까지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을 만들면서 무척 많이 고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을 차례로 넘기면 여러 가지 대형 쿠폰이 등장한다. '등 뒤에서 꼭 안아주기'를 비롯하여, 영화의 한 장면처럼 키스해주기, 잠들기 전 전화로 사랑노래 들려주기, 지금 그녀가 가장 원하는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 등등 여자들의 마음을 콕콕 알아주는 재치있는 쿠폰들이 가득하다. 

게다가 맨 뒷장에는 앞의 대형쿠폰들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절취선으로 자그마하게 부착되어 있다. 한 장 한 장 분위기와 어울리는 예쁜 그림들과 뒷장에 쓰여있는 멋진 코멘트들은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이나, 혹은 사랑을 더욱 강하게 다지고 싶은 연인들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이미 나이를 먹어버린 탓일까. 책의 깜찍함과 센스에 감탄하면서도 막상 이 쿠폰들이 실제로 쓰일 일이 있을까 걱정스러워진다. 내가 필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배려이지, 쿠폰들로 인해 촉발되는 마음이 아닌 것이다.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하는 제목의 책이 등장할 정도로, 여자와 남자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그와 함께 나누면 나의 의도가 그에게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경험을 지금까지 많이 해왔기 때문에 과연 남자들이 이 쿠폰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걱정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든다. 

하지만 이 책을 낸 사람들도 쿠폰북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쿠폰'이라는 하나의 도구를 사용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아닐까. 연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과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바로 그것일테니까. 

매일매일 사용한다면 효과가 떨어질 것이므로 어쩌다 한 번씩 투정부리고 싶을 때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이 쿠폰들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사랑 쿠폰북2에 더 관심이 많다. 여자들의 마음을 콕콕 찌르면서 낭만적인 쿠폰북이 만들어졌듯이, 다음 책에서는 어떻게 남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보았을지 사뭇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시대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상대-중고-중세-근세-근현대로 나누어지는 이 시대들을 다시 세세하게 살펴보면,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고분 시대-나라 시대-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도시대 로 나누어진다. 이 시대 구분 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대는 헤이안 시대와 에도 시대인데, 이 둘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헤이안 시대는 귀족들의 시대로 고상하고 우아한 느낌이 강한 반면, 에도 시대는 이른바 초닌(町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시대로 자유분방하고 성(性)에 있어서도 구속하거나 구속받으려 하지 않는 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제2막'은 이러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아주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미야베 월드 제2막'의 첫번째 작품이었던 [외딴집]에 이어 출간된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는, 현재 도쿄 스미다 구에 해당하는 에도 시대의 혼조를 배경으로 전해지던 일곱 가지의 기이한 이야기에 작가 자신의 상상력이 덧붙여져 쓰여졌다.

한쪽으로밖에 잎이 나지 않는 갈대에 얽힌 히코지와 오미쓰의 이야기인 <외잎 갈대>를 비롯하여, 아가씨가 연모 상대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한밤중에 에코인 경내에 가서 자갈을 주워오는 오린의 이야기 <배웅하는 등롱>, 죽은 남편에 얽힌 미스터리를 그린 <두고가 해자>, 범인을 잡는 데 방해가 된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잎이 나지 않는 나무의 이야기에 살을 붙인 <잎이 지지 않는 모밀잣밤나무> , 사람의 심리를 치밀하게 표현한 <축제음악>, 천장을 부수며 내려오는 거대한 발에 얽힌 이야기인 <발 씻는 저택>과 마지막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그린 <꺼지지 않는 사방등>까지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재치있고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에도시대의 오캇피키(하급 관리 밑에서 범인의 수색과 체포를 맡았던 사람)에 해당하는 에코인의 모시치는 어느 이야기에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약간의 통일성 또한 보여준다. 

사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분위기가 어둡다고 느껴왔기 때문인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외딴집]이 너무 어려웠다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외딴집]보다 쉽게 읽힐지는 모르지만, 이 책은 짤막한 단편들 안에 에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겹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결코 가벼운 주제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자신들의 죄를 덮어버리기 위해 쉽게 사람을 죽이거나, 진심을 감추고 오랜 세월 감정의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부부가 등장한다. 외양만 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풍조는 현재와 비교해서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슬프고도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가슴에 왈칵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작가의 글쓰기는 정말 굉장하다. 

내가 시대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슴 속에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고 외국이고를 막론하고, 전통적인 의상과 풍습, 풍경 묘사들을 상상할 때면 나도 그 시대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이야기는 정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표지 또한 책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마치 책 속의 인물들이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날카로운 시각과 뛰어난 글쓰기로 매번 나의 가슴을 감동과 놀라움으로 뒤흔드는 미야베 미유키. 다음 작품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것인지 무척 기대가 된다. 

오늘밤 이 책과 함께 에도 시대 사람들과 어울려 보심이 어떨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
수잔 캔들 지음, 이문희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며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한 크리스티는 1971년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영국여왕으로부터 데임이라는 작위까지 하사받는다.  아직까지도 전세계의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그녀이지만, 정작 인생의 반려자인 첫 번째 남편으로부터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 듯 보인다. 1926년, 돌연 아가사 크리스티는 실종되는데 그로부터 11일 후 발견된 그녀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숙박계에 적은 이름은 남편 아치의 내연녀의 이름이었고 그 2년 뒤 그들 부부는 이혼했다. 

이 책의 주인공 쎄쎄 역시 추리소설 작가이다. 그녀 역시 첫번째 남편과 전쟁을 치루듯 이혼했으며 현재 두 번째 결혼을 준비중이다. 그녀가 사는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크리스티타운'이라는 곳이 지어졌는데 그 곳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소재로 한 추리극 테마도시. 분양의 시작을 알리는 날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속 탐정인 제인 마플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지만, 정작 제인 마플 역을 맡은 배우는 시체로 발견된다. 희생자는 쎄쎄와 그녀의 약혼자에게 결혼식 때 출 춤을 가르쳐주던 리즈. 리즈에게는 루라는 남편이 있고, 그들 부부는 서로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의혹을 품고 스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의 실마리를 찾던 쎄쎄는 테마도시의 투자자인 이안 크리스티를 의심하게 되고, 그 와중에 두 번째 희생자가 발견된다. 

작품은 '추리'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읽고 있으면 어쩐지 칙릿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어두침침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주인공부터가 왠지 '브리짓 존스'를 생각나게 한다. 커다란 체구에 사랑에 마음 아파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여자. 그런 주인공 때문인지 살인동기도 '사랑'과 관련이 깊다. 추리하는 과정에서도 긴박감을 느끼기보다는 '이 주인공이 과연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그런 점때문에 조바심과 긴장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유쾌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약간 기대에 못미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아가사 크리스티가 11일 동안 실종되었던 사건이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사실은 작가인 쎄쎄가 그 날의 일을 추리해가는 것으로, 작품 속의 쎄쎄와 크리스티가 비슷한 점이 많아 마치 주인공이 두 명인것 같은 느낌도 든다.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그녀의 로맨스는 마치 양념처럼 여기저기 흩뿌려저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쎄쎄의 사랑과 크리스티의 사랑. 추리소설이었지만 어쩐지 알싸한 느낌에 쉽게 떨쳐내지 못할 책을 만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 알마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의사는 꿈많은 어린 아이들이 한 번쯤은 그려봤을 희망의 직업이다. 아파서 정신도 못차리고 자신의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와서 돌봐주면 큰 병이 아닌 이상 얼마 안 가 훌훌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힘들기는 하지만 때때로 큰 병을 고쳐주기도 한다. '생명'을 구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하얀 가운과 너무 잘 어울려서 나는 어렸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을 천사라고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의사라는 직업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물론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고 어려운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어쩌면 순전히 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욕을 가장 많이 먹는 직업 중 하나가 됐다.  불친절한 의사와 간호사, 막대한 병원비, 찾아가면 기분이 어떤지,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검사부터 하라고 내모는 병원.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얻어오는 것은 나을 수 있다는 희망 (물론 감기나 증세가 심각하지 않은 병은 제외하고) 이 아니라 자신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는 병원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되어버렸다. 

이 책은 비록 우리나라의 의료계는 아니지만, 어떤 나라에 가든 엿볼 수 있는 병원의 모습을 낱낱이 파헤치고 고한다. 환자의 컴플렉스를 함부로 발설하고, 환자가 자신의 의견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위급한 사람을 그냥 두고 떠나버리며, 환자를 위해 존재해야 할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제 그들을 귀찮아한다. 심지어 사보험과 공보험을 구분해서 치료받을 수 있는 서열을 정하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를 다용도실에 방치하며, 환자를 불안하게 하는 말들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과연 그들이 의사인가. 사람을 살리겠다고,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의료과실로 인해 멀쩡한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내놓고도 사죄의 한 마디는 못할망정, 나는 책임이 없다고, 환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 둘러대며 목숨과 맞바꿀 수 없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쥐어주며 적당한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예전 그런 기사를 보면서 나는 만약 우리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렇게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더러운 수법으로 일을 덮어버리려는  비열한 의사를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절대로 복수하겠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적이 있다.  의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수술을 잘 하느냐, 몇 분만에 어떤 수술을 끝냈느냐가 아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순수와 깨끗함, 고결함을 상징하는 그 하얀 가운을 입을 자격이 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병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도 좋지만, 그보다는 많은 의사, 간호사들이 읽어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쁜 의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다운 의사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부디 이 책을 계기로 의료사고로 인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거나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환자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연민. 제목부터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그 위에 부제처럼 적힌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라는 문구가 없었다면 그렇게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동정심,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추운 겨울 지하철역 입구 계단에 손을 벌리고 앉아있는 아기엄마나, 커다란 가방을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비틀비틀 걷고 있는 노인분들을 볼 때 내 마음이 꼭 그랬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그 모든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yes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감정이 향하고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그 사람의 온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민이냐 사랑이냐의 차이는 그것이 아닐까. 

허울 뿐이고 자기만족적인 감정은 결국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입힌다. 이 작품의 주인공 호프밀러의 불행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군인이었던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용감하다고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은 '나' 가 그의 이야기를 옮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호프밀러는 새 주둔지에서 우연히 케케스팔바라는 귀족을 알게 되었다. 케케스팔바에게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딸, 에디트가 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파티에서 에디트에게 춤을 청한 호프밀러는 사죄하기 위해 꽃을 들고 찾아간 것을 계기로 매일 오후 시간을 그녀와 그녀의 사촌 일로나와 함께 보내게 된다. 오직 연민이라는 감정 하나로 저택을 방문하는 그에게 에디트는 사랑을 느끼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매달리지만, 호프밀러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게다가 케케스팔바마저 딸 곁에 머물러주기를 간청하는 상황 속에서 호프밀러는 명예와 희생, 그리고 연민이라는 복잡한 감정 안에서 괴로워한다. 결국 망설이고 에디트의 사랑을 모욕한 그 앞에 떨어진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전부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도움을 준 이는 나에게 대부분 고마워했고, 나도 도움을 줌으로써  '누군가에게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섣부른 동정과 위로는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에디트에게 있어 호프밀러가 그랬다. 그녀는 사랑이란 감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주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상대는 오직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호프밀러가 애초부터 책임지지 못할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에 취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케케스팔바 노인을 웃게 만들 수 있고, 자신의 방문이 한 소녀에게 기다림과 설레임을 가져다 준다는 그 사실에 그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도움을 베풀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것인가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프밀러의 경우처럼 어설프게 베풀었던 친절이 화살이 되어  '무거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프밀러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모두 어쩌면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지만 정작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일테니까.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렇게 어렵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해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준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갈수록 그 죄가 잊혀질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양심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지막 부분은 정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해부당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 어땠나, 내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느 순간에는 호프밀러가 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에디트가 되어 책을 손에 쥔 순간부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았다. 향할 수가 없었다. 추리소설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분위기와,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면서 숨가쁘게 읽어내려간 [연민].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 오래도록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