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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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멤버, 오노 요코의 남편, 마음의 병을 앓는 이에 의해 사망. 이것이 내가 존 레논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아, 하나 더 있다. Let it be 라는 노래. 이제는 아주 옛날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그 때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비트]를 통해 이 노래를 알았다. 존 레논은 1970년 밴드가 해산할 때까지 멤버들과 13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그 후 그 혼자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75년 오노 요코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4년 동안의 공백기를 갖는다. 그 후 발표된 그의 음악은 예전 음악과 그 빛깔이 뚜렷하게 달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 4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4년의 공백기에 존에게 일어났던 일의 실화같은 상상이다. 

창작활동을 멈추고 주부로 생활하는 존 레논. 매년 여름휴가를 일본에서 보내는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주니어, 그리고 집안일을 돌보아주는 다오씨가 있다. 어느 날 존은 롤빵을 사러 나갔다가 어머니를 닮은 여성을 보고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다리가 웃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날부터 시작된 정체불명의 복통과 변비. 그의 변비 앞에서는 그 어떤 강력한 변비약과 관장약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고통과 씨름하는 그에게 아내 요코는 '아네모네 병원'을 소개해주고, 진료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젊은 시절 그의 기억 한 구석을 차지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그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시작된 사람들과의 조우를 통해 존의 가슴에 있던 응어리의 정체가 드러난다. 과연 '아네모네'병원은 어떤 곳이고, 안개 속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그를 찾아오는 것일까. 

이 작품은 오쿠다 히데오의 데뷔작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서 만났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약간 다르다. 무작정 웃게 만들면서도 삶에 대한 가볍지 않은 시선을 가진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으나,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약간 더 짙은 듯하다. 얼마 전 읽은 그의 책은 [스쿠살, 도쿄] 였는데 화장실에 관한 에피소드 부분에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한창 사람이 붐빌 때인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실 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참 많이 웃었다. 특히 화장실에서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다. 누가, 팝스타 존이 화장실에서 그처럼 애를 쓰리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사람의 상처는 몸에 있을 때보다 마음에 있을 때 더 치유하기 어려운 것 같다. 몸에 있는 상처는 약을 발라주고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져 새살이 올라오지만, 마음에 있는 상처에 약을 바르고 새살이 돋길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과정이다. 그 상처와 기억의 시간들은 언제 어디를 가든지 우리들을 따라다니면서 더 자주 아프게 하고 항상 느끼게 한다. 존의 변비는 악몽에응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날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지 못하고, 마음에 응어리가 되어 버린 결과가 악몽으로, 변비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고보면 상처란, 상호작용을 한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한다. 

'아네모네' 병원에서의 치료방법도 괜찮았지만, 결국 존은 자신의 상처를 그 스스로 보듬고 고친다. 상처를 통해 또 한 번 성장했고, 가족과의 사랑을 통해 그는 변화했다. 4년 동안의 공백기 후에 발표한 그의 앨범이 그 전의 음악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이 작품에 실린 것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항상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정겨움에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오쿠다 히데오의 손에서 재탄생된 팝스타 존의 파란만장 변비 해결기.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히 재미만으로 이 작품을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 웃음과 함께 인간을 향한 깊이있는 시선을 가진 작가 오쿠다 히데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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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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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달라이라마의 나라, 신비하고 성스러운 나라. 티베트 사태가 일어나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티베트에 대한 이미지다. 그 전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내가 가고 싶어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으며, '티베트'라는 단어를 발음하기만 해도 어쩐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약간의 당혹감마저 느꼈었다. 티베트사태가 보도되자, 나는 그곳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더럽혀진 것 같아 아쉬웠고 그들의 절박한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던 '티베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많은 여행서적을 보며 그들의 진짜 모습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이 작품은 내가 알지 못하는 티베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하고 중국 본토까지 열광시킨 티베트 작가의 티베트 이야기. 아라이의 장편소설인 이 작품의 원제는 [진애낙정-먼지는 결국 아래로 떨어진다]이다. 권력을 하나의 먼지로 비유하여 비록 중국이 하사한 명칭이지만 '투스'라는 제도가 티베트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잔잔하면서도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바보'는 마이치 투스의 둘째 아들이다. 만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임신시켜 '바보'가 나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만 제외하고 그가 바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거나 전쟁을 두려워해야 하는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들은 바보가 보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그는 바보이지만 귀중한 '뼈대'를 타고 났다. 태양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투스의 아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평온한 티베트에 양귀비 씨앗이 들어오면서 변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양귀비 씨앗을 둘러싼 전쟁, 재산의 축척, 중국에서 일어나는 빨간 한족과 하얀 한족의 싸움은 세상이 흔들리는만큼 티베트도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바보'는 독특한 인물이다. 평소에는 정말 바보처럼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기 일쑤지만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마치 몸에 신이 내려온 것처럼 별안간 소리를 질러 알려준다. 그런데 평소에 그가 하던 말이 과연 바보스러운 것이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모두 다르듯, 그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었을 뿐이다. 다만, 투스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좇는 것을 그만 좇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 주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바보'는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행운이 따르는 인물이었지만 변화하는 세상은 그에게 무릎 꿇기를 강요한다.

작품에는 많은 색이 등장한다. 양귀비 씨앗이 자라 열린 열매에서 나오는 하얀 액, 중국에서 일어난 하얀 한족과 빨간 한족의 싸움, 하얀 겨울을 상징하는 순결한 백색,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흘렸을 피의 붉은색.  '바보'가 물든 것은 어떤 색이었을까. '바보'는, 그리고 티베트는 '변화'라는 색에 물들었다.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풍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생활 속에 온갖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투스'라는 이름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힘없이 무너진다. '변화'를 딱히 한 가지 색으로 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가장 강력하고 유혹당할 수밖에 없는 색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티베트에 역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가 아닌 티베트의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는 충분하다. 밋밋하지만 천연덕스러운 바보의 말투 속에서 티베트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작가 아라이의 티베트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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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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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말을,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말을 나는 여전히 입에 달고 산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듯, 우리 삶의 경계도 희미하기는 매한가지다. 어떤 행동을 해야 어른이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던 상처는 자꾸만 속으로 곪아가고, 당당하리라 굳게 다짐한 결심들도 어느 한 순간 스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 

내가 경험한 상실은 익숙했던 사람이 그저 자신의 길을 찾아나선, 내 안에서만 일어난 부재였으나 열일곱 니은이가 잃은 것은 영원한 생명의 부재였다. 어디선가 한 번 만날 것을 기대하지도 못한 상실 앞에서 니은이는 그저 넋을 잃고 슬픔을 제 속에 담아둔 채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슬픔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니은이의 상실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친한 친구 나무가 가진 모든 것에, 세상 약해 보이는 사람들 모습 전부를 향해 날아가 찢고 망가뜨린다. 그런 니은이의 마음을 감싸준 것은 아빠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처용포, 왕고래집 할머니와 장포수 할아버지가 있고, 신비로운 고래의 전설이 이제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려 하는 처용포였다. 

평생을 고래만 생각하며 고래잡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늘그막에 한글 공부를 시작한 왕고래집 할머니의 모습은 상실의 고통을 서서히 희석시키며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면서 니은은 이제 자신의 시간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진정한 삶의 모습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기억은 뜨겁거나 차갑고 뾰족하거나 거칠었다. 시장바구니를 현관에 내려놓으며 숨을 고르는 엄마, 출근하다 되돌아와 서류봉투를 찾는 아빠 모습이 뜨거운 덩어리처럼 가슴에서 회오리쳤다.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란 없었다. -p97
나와 니은의 상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이란, 기억이란 그렇다. 잘 먹고 잘 지내고 씩씩하게 잘 살아내다가도 어느 한순간 소중했던 기억들이 칼날처럼 가슴을 저민다. 나는 애써 그 아픔을 무시했다.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 열심히 생각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그러니 차라리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란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랬다. 나는 귀를 막고 도망치고 있었고, 그것이 어른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바위그림이 왜 중요해요?"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 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p236
하지만 작가 김형경은 이야기한다. 잘 떠나보내기 위해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해야 한다고. 산다는 건 무엇이고, 기억한다는 건 무엇일까. 언젠가 그 많고 많은 기억에 짓눌려 여전히 가슴이 아프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나는 조금은 알듯도 싶다. 상실에 맞서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한쪽을 내주어야 함을. 그렇게 내 가슴에 품고 조용히 상실과 마주하다 보면 그 자리에 어느덧 다른 이름의 감정이 존재하게 될 것임을. 어쩌면 단순한 나의 소망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다. 

어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꼭 그리 '어른'이라는 단어에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가슴 속에 각자 다른 나이를 가진 자신의 여러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이제 내가 아이이니 어른이니 하는 그런 평가에 휘둘리지 않겠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며, 다친 내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달릴 뿐이다. 신화같은 삶의 고리들을 거부하거나 내치지 않을 뿐이다. 

작가 김형경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콕콕 찌른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이 마치 심리학책이 소설화한 것 같았다면, [꽃피는 고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끊임없는 성장을 아름다운 온정과 신비로운 고래를 등장시켜 담담하게,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위로받았으나 아팠고, 그로 인해 많이 울었다. 그러나 이 눈물이 오늘의 나를 더 빛나게 해 줄 것이다. 내 삶을 더 빛나게 해 줄 니은이가 다짐한 규칙, 나도 그것만은 지켜봐야겠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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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1 - 청소년 성장 장편소설 아사노 아쓰코 장편소설 1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해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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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관심을 갖는 스포츠는 '축구' 하나다. 그것도 월드컵같은 큰 대회가 있을 때만 '와와' 거리며 쫓아다니는 변덕쟁이 팬일 뿐이다. 올림픽이 열리면 가슴 두근거리면서 시합을 지켜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뿐, 어떤 한 종목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야구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저 멀리 있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시절 기억의 영향이 큰 듯 하다. 뜨거운 햇빛, 시끄러운 고함소리, 보이는 것은 운동장이 아니라 아이인 내 눈에 커다랗게만 보이는 어른들의 넓은 등이 고작이었다. 야구, 그것은 저 먼 우주의 이름모를 행성처럼 내게는 낯선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야구를 하는 소년들의 이 이야기를 읽고 '대체 야구가 뭐야'라며 야구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묻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야구 이야기만 꺼낼라치면 '난 야구 같은 거 잘 몰라'하며 도리질을 쳤었는데 지금은 야구가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몸이 근질근질하다. 나는 야구를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야구를 하는 모습이 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언가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 아마도 그것일 게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는 나에게 이런 달뜬 마음을 갖게 한 두 사람이 있다. 오만하고 이기적이지만 천재적인 투수 하라다 다쿠미와 푸근하고 너그러운 그의 포수 나가쿠라 고. 두 사람은 배터리다. 야구에서 짝을 이루어 경기를 하는 투수와 포수. 배터리. 도시에서 전학 온 다쿠미의 공은 어른이 인정할 정도의 엄청난 힘과 속도를 자랑한다. 그런 다쿠미의 공을 한 번 받기 시작한 고는 희열에, 정열에, 다쿠미의 그 오만한 자신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의 포수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야구 자체에 세상의 중심을 두고 자신의 던지는 행위에만 관심이 있는 다쿠미와, '다쿠미의 공'을 중심에 둔 고는 부딪힐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다쿠미의 성격도 그들의 갈등에 한 몫한다. 하지만 소년들은 변화하는 법! 다쿠미는 고로 인해, 고는 다쿠미로 인해, 소년들은 성장한다. 

야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어떤 운동에나 협동심은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을 내세우기보다 팀 전체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야구 또한 단순히 던지고 치고 받는 행위 자체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와 협동하면서 진실된 마음을 배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쿠미에게 있어 야구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유'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마음 따뜻한 고는 그런 다쿠미와 단순한 친구는 될 수 없지만 그의 공을 받는 포수의 자리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다른 이에게, 주변 사물에,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무관심했던 다쿠미의 가슴을 변화의 바람이 뚫고 지나간다. 고는 다쿠미와 다쿠미의 공으로 인해 번뇌하고 방황하면서 어엿한 소년으로 성장해간다. 

 나는 처음에 '배터리'라는 제목을 보고 어째서 제목이 '배터리'인지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구 용어에 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일상에 사용하는 생활용품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처음 '배터리'의 진짜 의미를 알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처음 생각했던 그 배터리의 의미도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자기가 가진 힘으로 다른 것을 빛나게 해주는 '생활용품'배터리. 서로에게 고민과 갈등을 안겨주지만, 변화와 성장을 안겨준 '두 명의' 배터리. 모두 멋진 배터리이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든 또 다른 이유는 독특한 색을 띤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거만하지만 의외로 순수한 다쿠미, 푸근하고 너그럽지만 날카로운 고, 약한 몸이라 늘 힘드지만 내면에 강한 힘을 갖고 있는 다쿠미의 동생 세하, 장난스럽고 귀여운 친구들 사와구치와 히가시다니, 평범한 듯 보이지만 뛰어난 전략가의 기질을 갖춘 주장 가이온지, 우직하고 성실한 가도와키와 늘 실실 웃으며 본심을 숨기지만 의외로 복잡한 미즈가키까지, 이 작품 안에는 하나의 말로 포장할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 명 한 명 모두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빛나는 미래, 그들의 고민과 웃음은 끝나지 않은 야구경기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이게 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비록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그들이 부럽다. 그렇게 미치도록 무언가에 빠져들 수 있는 그들이. 같은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자신들의 열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게 아닐까 싶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좋아하는 일,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잘 모르는 야구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책을 읽어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6권이라는 분량이지만 감동적인 이야기에 빠져 6권 이상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음 속 잊고 있던 정열과 희망을 되살아나게 해 준 이야기, 사랑스러운 소년들의 이야기가 오늘밤 나를 잠 못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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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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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판단할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신문, 뉴스, 잡지, 그리고 인터넷. 범람하는 정보만큼 '진실'의 숫자도 가늠할 수 없을만큼 증가한다. 그 '진실'이 과연 '진실'인가.  확실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유통되는 정보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 '나머지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유통되었던 정보를 어리석을만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누가 나를, 이 나라 사람들을 정보를 통해 감쪽같이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 해볼까 말까였다.
 
아오야기 마사하루 또한 그랬다. 치한을 증오하는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가 있고, 물건을 배달하는 성실한 택배청년이었던 그에게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센다이에서 총리 가네다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을 무렵, 그는 친구 모리타 신고를 8년만에 만나고 있었다. 모리타는 아오야기에게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너 오즈월드가 될거야'라며 어서 도망치라고 한다. 뜻모를 소리에 어리둥절해 있던 아오야기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얼떨결에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전국민의 표적이 된다. 하지도 않은 일의 범인이 되어 도망치는 그의 뒤를, 산탄총을 쏘는 경찰과 아오야기가 나타나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그를 보았다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시민들이 뒤쫓기 시작한다. 센다이의 모든 시민들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시큐리티 포드에 의해 아오야기의 동태가 낱낱이 파악되고 그가 숨을 곳은, 안타깝지만 없다.
 
책을 읽으면서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은 '공포'다. 귀신이 등장하거나 피가 넘쳐 흐르는 엽기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공포 그 자체였다.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단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당사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은 오보와 오판에 의해 진실이 되어버리는지에 대한 공포. 곳곳에서 입수된 아오야기의 영상을 보면서 뚱한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어두운 구석이 있다느니 하며 성급하게 단정해버리는 아나운서의 말은 하나의 정보가 되어 '~라고 했대'에서 '~래'라는 포장된 '진실'이 되어버린다.
 
아오야기 사건에서 '방송'과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큐리티 포드는 범죄를 조장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범죄는 총리를 살해한 진짜 살인범을 찾지 않고, 아오야기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자들은 아오야기의 고향집까지 찾아가서 그의 부모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민다.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려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아버님'을 부르짖으며 한 마디 해주기를 외치는 기자들의 모습은 현실 속 기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기자들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사실도 아닌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으며 매달려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이사카 코타로는 아오야기의 아버지의 입을 빌어 비판한다. -이름도 못밝히는 너희 정의의 사도들, 정말로 마사하루가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걸어봐. 돈이 아니야, 뭐든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걸라고. 너희는 지금 그만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생을 기세만으로 뭉개버릴 작정 아니야? 잘 들어, 이게 네놈들 일이란 건 인정하지. 일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일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버스 기사도, 빌딩 건축가도, 요리사도 말이야, 다들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다고. 왜냐하면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각오를 하란 말이다(p450)-
 
아오야기의 도망은 그의 추억과, 그의 지인들의 추억이 얽히고 얽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 평범하고 즐거웠던 대학시절,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연인과의 이별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평범하고 소중한 시간들.  그 시간들의 파편이 아오야기가 도망치는 곳곳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더욱 작품을 읽는 사람의 가슴을 친다.
 
이 작품은 생생한 추격신과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최고의 재미와 가슴 절절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툭툭 내뱉는 말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치밀한 복선, 퍼즐식 구성, 투명한 감성, 철학적인 대화까지>로 뒷표지를 장식한 이 문구는 거짓이 아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분명히 이렇게 이 작품을 잘 나타낸 문구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나 나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겪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왜곡된 정보로 누명을 쓰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과연 내가 어디까지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마음이 먹먹해져 온다.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p210

 

깜짝 놀랄 만큼 하늘이 파랄 때면, 이 땅이 쭈욱 이어진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사람이 죽고,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다 거짓말 같아요.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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