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김선우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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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p50 <즐거운 편지>, 황동규  

시는 시험에나 나오는 시험범위의 하나로만 여겨졌던 중학교 시절, 나에게도 마음을 울리던 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중학교 3학년 친구들과 함께 보러 간 영화 <편지>에 등장한 이 시를 한동안 잊을 수가 없어서 시집을 뒤적거렸었다. 그리고 무슨 마음에선지 예쁘게 필사를 해서 다이어리에 고이 남겨뒀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때의 나는 어렸었지만,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지만 영화가 남겨준 감동 덕분에 오래도록 그 시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는 나에게 무척 어렵다.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작가의 마음과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작품에 대해 이리저리 해석을 하지만 그 소설이, 시가 어떤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 작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모든 시들이 강렬한 느낌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아니므로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이 어떤 시를 선별해서 읽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때문에 여러 작가들의 시가 함께 들어있는 모음집은 참 반갑다. 게다가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시라니, 이번만큼은 시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시에 대해 도전하는 마음을 갖다니 참 어리석다라며 스스로도 자책하며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그만 시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에 대한 시이다 보니 언어들이 말랑말랑하다. 읽으면 느낌이 확 오는 시들도 꽤 된다. 하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장석남 시인과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다. 예전에는 시 뿐만 아니라 해설들도 어려워서 시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분들의 해설은 또 다른 문학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에 마음이 젖고, 해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은 성미정 시인의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사랑으로 상대가 아닌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모습이 시와 해설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시와 해설을 돋보이게 해주는 삽화 또한 멋지다. 시의 주제와 분위기에 맞도록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그려넣어진 삽화들은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클로이라는 사람. 앞으로 삽화가 들어간 책을 살필 때에는 꼭 찾아봐야겠다.

여전히 시는 내게 어렵고 소설을 읽을 때처럼 느낌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시 모음집으로 조금씩 시에 다가가다보면 언젠가 시가 진정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시는 어른이 읽는거야 라는 핑계를 대며 시집을 멀리했던 학창시절. 이제는 시집에 눈과 손이 자꾸 닿는 것이 이미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덕분에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시들이, 좋아질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p34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성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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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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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내겐 기억에 남는 그녀의 작품 두 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과 [꽃보다 아름다워]가 그것인데 두 편 모두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특징이 있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랑도 좋다. 삶도 좋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하는 가족의 모습은 가슴을 절절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깊은 새벽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다가, 엄마와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그녀의 산문집이라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 작가와 소통하지만, 진정한 작가의 속마음을 알기란 쉽지 않다. 간간히 출간되는 이런 산문집이야말로 어쩌면 작가의 진실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의 창구가 아닐까. 편집 과정에서 얼마나 삭제되고 생략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라도 엿볼 수 있다는 것. 나는 참 즐겁고 가슴 벅차다. 친구가 대사가 너무 좋다면서 꼭 보라고 일러주었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친구의 권유에도 노희경 작가가 그리는 사랑의 모습은 익숙치 않아서 남겨두었는데 그 작품에 등장한 대사를 이렇게 책으로나마 일부분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삶, 사랑,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는 한 여자,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는 여자를 부러움의 눈길로 쳐다보는 작가는 마치 나의 모습 같다. 사랑은 나를 가슴 뛰게도 하지만 내게 사랑은 불안과 고민의 다른 이름이다. 나를 다 버리면 사랑이 내게 온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 적어도 사랑이 끝났을 때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내 자신은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왜 작가의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라는 말에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작가가 말하는 '사랑하지 않는 자'란 바로 나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만 선택하기에는, 난 너무 속물이다. 작가 또한 사랑만 선택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것은 아닐까. 

그런 작가와 나는 너무 닮았다. 사랑에 실패하고 자기연민에 빠져 한동안 슬퍼했던 일을 나는 이제서야 부끄럽게 생각한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계절이 바뀌 듯 우리의 인생도 변화를 거듭하며 삶은 계속된다. 마냥 끝일 것만 같은 순간도 진정 끝은 아니다.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가끔은 슬퍼한다.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을. 그리고 내 마음도 변해버린 것을. 

사랑 앞에서 나는 부끄러울 수 밖에 없기에 나는 그녀의 가족 이야기가 더 좋았다. 이미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신 부모님을 향해 내뱉는 부끄러운 고백들, 출생에 관해 뒤늦게 알게 된 진실,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막내딸로 다시 살고 싶다는 소망들.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갖는 감정이란 그런 것인가 싶었다.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나조차도 부모님을 앞에 대하면 차마 꺼내지 못할 말들이 조금쯤은 있으니. 

이 책을 읽고 나니 노희경 작가가 그저 작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기쁘다. 드라마를 통해 사랑과 가족, 희망을 전하는 사람. 비록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지 매일 밤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있어 좋다. 

사랑이 믿음보다 눈물보다 먼저 요구하는 것, 그것은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예민함이다.-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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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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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원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전 기니피그가 되는 게 지긋지긋해요. 내 기분이 어떤지 아무도 묻지 않는 게 지긋지긋해요. 지긋지긋한데, 이 가족은 젠장 도무지 지겹지가 않아요-p296
 
흘려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작가는 가족을  '내다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 정의했다고 한다. 엉뚱하다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가족은 어쩌면 정말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족이 있어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하는만큼, 때로는 미움이 배가 될 때가 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남보다 더 큰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소한 말 한 마디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반응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 이해받고 싶고 어리광피우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최초의 정의는 가족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손자손녀. 그리고 우리의 탄생은 축복 속에서 이루어져야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탄생이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여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고 싶은 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피츠제럴드. 안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안나의 언니, 케이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 어릴 때 발병한 백혈병으로 케이트는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의 부모 사라와 브라이언은 케이트에게 골수를 기증해 줄 맞춤형 아기를 갖기로 결심한다. 세간의 관심을 끌며 사라는 안나를 임신했고, 그렇게 '언니를 위해' 태어난 안나의 삶이 시작된다.
 
시작은 안나의 탯줄이었다. 그것은 케이트의 재발여부에 따라 성장주사, 공여자림프구 주입, 림프구 기증, 골수 채취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신장을 이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언니에게 모든 것을 바쳐왔던 안나는 신장기증을 거부하고-내 몸의 권리를 차기 위해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라며 변호사 캠벨 알렉산더를 찾아간다. 결국 전직 변호사였던 엄마 사라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 아빠 브라이언은 안나 편에 서서 증언을 하면서 그들의 가정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안나의 눈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내 마음도 억울함으로 가득하게 했다. 안나와 큰아들 제시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케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 늘 케이트만을 챙기는 엄마 사라는 내가 안나였어도 소송을 하게 만들만큼 안나에게 잔인하다. 하지만 막상 사라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또 그런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아이는 커녕 미혼인 나이기에 엄마인 사라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시리도록 전해져온다. 사라 뿐만 아니라 아빠 브라이언, 케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집에 염증을 느낀 큰아들 제시가 털어놓는 각자의 이야기는 과연 이 소송에서 누가 진정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되묻게 한다. 소송은 진행되고 결과는 나오겠지만 안나든 사라든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이겼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케이트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바라보는 케이트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아름답다. 소송을 제기한 안나에게 원망을 품었을만도 한데 그녀는 한결같이 차분하다. 게다가 사라의 눈을 통해 보여진 케이트의 첫사랑은, 나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주고 싶을만큼 애처롭기까지 하다. 결국 이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지, 누군가의 눈을 통해 케이트를 바라보는지에 상관없이 매순간 목과 가슴을 꽉 막아버린다.
 
이 책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결국 형태만 다를 뿐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점이 나를 오싹하게 한다. 내가 사라라면, 내가 케이트라면, 내가 안나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한 선택이 옳았다고, 내 자식들을 모두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과연 그렇게말할 수 있을까. 답은 없다. 그저 우리는 주어진 운명에 아파하면서 그저 그렇게 살아야 할 뿐인 것이다.
 
아쉽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 내 가슴을 죄어온 이 책의 결말에 실망했다. 늘 언니의 동생으로 있고 싶다고 말했던 안나. 그것이 그녀의 소망이기는 했지만 그 소망을 신은 너무도 가혹한 방법으로 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케이트는 언제나 안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안나의 존재가치가 빛을 보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안타까운 진짜 현실이 많기에 나는 그저 소설속에서라도 다시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안나의 가정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상'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미국도서관협회 선정 알렉스 어워드 수상작이다. 누구든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상이라도 받을만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이 오늘밤 또 내 가슴을 휘저어놓는다.
 
밤하늘에는 다른 별들보다 유독 더 밝아보이는 별들이 있다. 망원경으로 그 별들을 들여다보면 쌍둥이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두 별은 서로의 궤도를 도는데, 때로는 한 바퀴를 도는 데 거의 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들은 엄청난 중력을 일으켜 다른 것들이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백색의 별을 보았다면 나중에야 그 옆에 동반성인 백색왜성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첫 번째 별은 아주 밝게 빛나지만, 두 번째 별을 알아볼 때즘이면 너무 늦어버린다. -p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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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와 귀울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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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 전 읽은 [목요조곡]의 리뷰에서 밝힌 것처럼 온다 리쿠의 작품을 나는 참 좋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맛보게 될 실망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매번 그녀의 작품이라면 일단 손부터 대고 보는 것은, 그녀가 들려주었던 환상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몽롱하면서도 아득한, 그러나 오싹한 그녀의 이번 이야기도 [목요조곡]에서 맛보았던 만족감을 다시 200% 채워주었다고 해도 좋다. 

[코끼리와 귀울음]은 세키네 다카오라는 전직 재판관이 주인공인 연작소설집이다. 그는 온다 리쿠의 초기작 [여섯 번째 사요코]에 등장한 세키네 슈의 아버지로 이 책에는 세키네 다카오 뿐만 아니라 그의 큰아들인 슈운과 딸 나쓰까지 등장한다. 슈운은 우리나라에 아직 출간되지 않은 [PUZZLE]에, 나쓰는 [도서실의 바다]에 주인공이었다고 하는데 역시 이 책의 중심인물은 그들의 아버지인 세키네 다카오. 어쩐지 풍채가 좋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사람 좋은 인상을 가졌을 것만 같은 그. 개인적으로는 [여섯 번째 사요코]의 슈가 다시 보고 싶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풍기는 매력도 상상하다. 

휘황찬란한 달을 배경으로 나뭇가지마다 코끼리와 화분, 술병, 커피잔 등이 매달려 있는 동화같은 표지의 이 책에는 모두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책을 집어들었던 나는 이 한 권의 책에 이렇게도 많은 단편이 실려있다는 점에 놀랐다. 각각의 분량도 그리 길지 않아 과연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던 듯 하다. 

여운을 남기면서도 오싹하고 과연 이것이 현실세계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몽롱한 이야기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향기를 내뿜고 <코끼리와 귀울음>이 표제작으로 내세워졌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탁상공론>과 <왕복서신>이다. <탁상공론>에서는 슈운과 나쓰의 추리대결이 볼만하고 <왕복서신>에서는 미스터리와 함께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래도 둘 중 베스트를 꼽으라면 <왕복서신> 이라고 할까. 내가 상상한 세키네 다카오의 부드러운 마음과 그러면서도 전직 재판관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날카로운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훌륭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친근감이 들기도 하다. 번역의 힘이겠지만 그래서 더욱 원서의 문체가 궁금해지는 이야기라고 할까.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게 만드는 에피소드였다. 

[목요조곡]과 [코끼리와 귀울음]을 읽기 전에 나는 약간 온다 리쿠를 멀리하고 있었다. 국내에 발간되는 책은 출간 즉시 사들이고는 있었지만 일종의 의무감이 수반된 행위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편의 작품을 통해 나는 또 온다 리쿠의 세계에 다시 진심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기쁘다. 내가 그녀의 작품에서 처음 느꼈던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즐겁다. 짧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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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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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은 종종 무서운 상상을 한다. 침대 밑에 무서운 괴물이 숨어 있다면 어떻게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의 나쁜 짓-이를테면 거짓말, 친구와 다투기 등-을 해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상상은 아이를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겁에 질리게 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런 생각들이 단순히 '상상'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현실세계에서 갑자기 아빠가 엄마와 동생을 남겨두고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남겨진 것은 25센트자리 동전 세 뭉치와 1달러 지폐가 가득 든 통, 현재 생활의 근거지가 된 고물차 한 대 뿐이라면. 생각만으로도 눈 앞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조지나는 상상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그 일을 겪었고, 지금은 엄마와 동생 토비와 함께 고물차에서 생활하고 있다. 살고 있던 집에서도 쫓겨나고 남은 돈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푼. 엄마는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하루에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집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몸을 씻어봐도 꼬질꼬질한 모습은 나아지지 않고 고물차 뒷구석에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는 생활에 질린 조지나는 어느 날 개를 훔치기로 결심한다. 훔친 개를 잘 숨기고 있다가 개를 찾는 전단지가 붙으면 주인에게 돌려주고 사례금을 받는다는 앙큼한 생각을 해낸 조지나. 그 날부터 보랏빛 공책에 '완벽하게' 개를 훔치기 위한 작전을 세우기 시작하고 급기야 동생 토비와 '윌리'라는 이름의 귀여운 개를 훔치는 데 성공한다.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조지나이지만 책을 잘 들여다보면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철없고 늘 징징대지만 편치 않은 생활에 늘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녀야 하는 동생 토비, 남겨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을 하지만 쉽게 돈이 모아지지 않는 현실에 지쳐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엄마는 마치 경기가 좋지 않은 우리의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친구들의 놀림과 선생님의 눈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조지나가 생각해 낸 방법을 단순히 옳다, 그르다의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를 훔치고 난 후의 그녀의 행동과 생각들이다. 

비록 자신과 가족을 위해 윌리를 훔치고 윌리의 주인인 카멜라 아줌마에게 접근했지만 조지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인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윌리를 낡은 집 뒷편에 숨겨놓고 먹이와 물을 걱정하고, 윌리가 외로우면 어쩌나,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하고 있구나, 이 일이 과연 성공적으로 끝날까 등 온갖 고민에 휩싸인 조지나는 그러나 방랑자 무키 아저씨를 만나면서 마침내 올바른 선택을 한다. '때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의 발자취가 더 중요한 법이야' 라는 무키 아저씨의 말은 자칫했으면 더욱 힘든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를 조지나를 위로하고 구원해주었고 무키 아저씨가 떠나간 자리에서 발견한 자전거 바퀴자국과 함께 그녀는 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그녀가 계획한 일을 그만두었을 때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완벽하게' 개를 훔치는 계획을 실행했다면 조지나는 아마도 편한 마음으로 보송보송한 침대에 눕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에는 원하지 않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때가 한 번쯤은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이 어렵다.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경기한파에 추운 날씨까지 더해져 몸도 얼어붙고 마음도 얼어붙기 쉽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마음을 녹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적당히 계산적이고 적당히 순수한 조지나와 그런 그녀 앞에서 아무 의심없이 온 힘을 다해 꼬리를 흔들어대는 윌리를 통해 그래도 붙잡을 것은 희망과 정직함 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조지나의 계획 실행서에 배시시 웃음이 비어져나오는 유쾌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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