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의 마지막 여름
마이클 셰이본 지음, 이선혜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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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은 오랜만에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책 이야기야 늘 하고 있지만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했거든요.  오늘은 한 번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이 책이 '왁! 완전 재미있어!'라고 말할 수 없는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내가 아는 세상과 당신이 아는 세상, 그 차이가 다른 관점에서 이 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테니까.
 
혹시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 이라는 책 읽어봤어요? 난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아직도 못 읽었어요. '못'읽은 게 아니라 읽는 걸 잊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읽어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눈 앞에 재미있는 책이 나타나면 금방 또 잊어버리거든요. 그런데 이 두 책이 자주 내 발목을 잡아요. 출판사가 광고효과를 노린 건지도 모르지만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일탈 등을 그린 작품들의 표지에는 으레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계보를 잇는다' 거나, 그 두 작품을 뛰어넘는 수작이라는 표현이 적혀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표현이 적힌 책을 읽었을 때는 늘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대체 뭐가 뛰어나다는 거지?' 하고.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못한 건지, 아니면 작품이 정말 재미가 없는 건지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없죠.
 
이 책도 그랬어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일탈과 예상되는 결말을 그린 이 책 표지에도 여지없이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이 언급되어 있었고, 나는 또 '으흐흐흐흠;;' 하고 당황스러워했죠.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했고요.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이런이런 삶을 살았어'라고 말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단 한 번의 일탈 없는 평탄한 인생을 걸어왔기 때문일까요. 물론 나도 괴로운 적도 많았고, 내 자아라거나 인생 자체에 대해 고민한 적도 많았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방황은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주인공은 아트라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한 남자에요. 그는 도서관에서 매력적인 아서와 아름다운 여인 플록스를 만납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서가 게이라는 걸 알아챈 아트는 아서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에 대해 늘 경계하지만 어느 순간 그를 사랑하게 돼요. 하지만 플록스와의 관계를 끊지는 못하죠. 그들은 아서의 친구 클리블랜드와 제인과 어울리면서 즐거운 여름을 보내는데요, 그런데 아트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알아요? 아트의 아버지는 갱단이에요. 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 같아요. 아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대신 죽음을 맞았고, 그 일이 있은 후 아트는 계속 방황한 것처럼 보여요. 아버지와도 거리를 두려고 했고. 하지만 클리블랜드 때문에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된답니다.
 
아트는 굉장히 우유부단한 사람이에요.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아서, 혹은 플록스와 섹스하죠.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서인지, 플록스인지조차 알지 못해서 주위 사람에게 상처를 줘요.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한 방황?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와의 관계? 그렇죠. 방황할 수도 있죠. 아직 젊으니까 즐기고 싶을 수도 있고, 자기가 진정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고민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트는 '고민'이라는 이름으로 방황이 아닌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자기 자신을 지킬만한 중심이랄까 강함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들, 술,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뤄지는 섹스. 그러다 누가 하나 죽고나서야 살짝 정신을 차리는 것처럼 보이고, 결국은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이 끔찍했지만 아름다웠네 어쩌네 하면서 끝을 맺죠. 몰라.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답답했고, 인생이 이렇게 간단한 게 아닐텐데 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표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푸른 하늘 밑에서 나도 누군가와 저렇게 두 다리 쭉 뻗고 지내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거든요. 하지만 원래 작가의 문체가 그런 건지 번역이 그런 건지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읽고나야 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이지 겨우 이해한 문장도 있었고, 내용을 유추해야 하기도 하고. 정서적으로도 잘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별 세 개 반을 준 건, 어쩌면 한 번 더 읽으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별의 갯수는 나중에 또 정해도 되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한 번 읽어봐요.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들고, 무슨 생각을 할 지 궁금해요. 아! 근데 게이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면, 조금은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네요.
 
음. 글이 너무 길어졌어요. 재미있는 책이었다면 '완전 재미있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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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인 서울 Agit in Seoul - 컬처·아트·트렌드·피플이 만드는 거리 컬렉션 in Seoul 시리즈
민은실 외 지음, 백경호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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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었는데 새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페이지마다 숨어서 종이를 휘리릭 넘길 때 슥 빠져나와 머리를 아프게 했던 그 냄새는 어쩐지 서울의 냄새와 닮아 있다. 옆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늘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자동차들로 가득한 곳.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았음에도 '서울'하면 떠오르는 것은 높은 빌딩과 도시를 상징하는 온갖 것들이었다. 그런 서울이, 내가 숨쉬고 있는 이 도시가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처럼, 어쩌면 이 도시도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외에 다른 알맹이로 속을 채우고 조금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함께 나는 서울탐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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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낯선 듯 익숙한 곳

이 책에서 소개된 장소는 잠깐만 눈을 옆으로 돌렸다면 쉽게 '아! 여기!'라고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정동길'이 그랬다. 나는 그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달리다 보면 내 몸을 내가 주체할 수 없어졌다;;) 돌담길을 지나쳤다.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 무작정 앞만 보고 걸었지만 밤에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걷던 그 길은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사진에 있는 빨간 공중전화 박스는 그 때부터 있던 것으로 분위기 있는 돌담길과 함께 늘 영화촬영의 중심이 되곤 했더랬다.  



생각해보면 그 곳은 우리의 지나간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었다. 덕수궁으로 많이 알려진 경운궁과 근대 초기의 건축물,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 등 벽돌 하나하나에 시간의 숨결이 묻어있다. 참고로 그 역사적인 건물에서 나는 공연도 보았고,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심슨관에서 수업을 받았다. 크하! 

돌담길을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곳곳이 미술관이다. 물론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벽에도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매우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속속들이 둘러본 적은 없지만 정동극장 앞 벤치에 앉으면 정동 라디오 공개 방송의 음원을 들을 수도 있다 하니 도심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기에 적당한, 그러면서도 예술적인 공간으로 변모한 듯 하다.   



정동길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대학로나 삼청동의 길도 이 책을 통해 만나면 낯선 듯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2. 아니 이런 곳이!!

나는 친구들에게 가끔 '서울ㅊㅗㄴㄴㅕㄴ'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너 여기 알아? 여기 가 봤어?'라는 질문에 '아니 잘 몰라'라고 대답하기 일쑤니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당연하지만. 새로운 곳을 발견하기보다 익숙한 곳만 찾다보니 아무리 서울에서 오래 살았어도 즐겨 다니는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런 곳.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뭐야, 이런 곳도 있단 말야'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눈에 띄었던 곳은 삼청동길에 자리잡은 <북카페 내 서재>였다. 사진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곳에 가면 왠지 다락방에 숨어 책을 읽는 듯한 구수한 느낌이 들 것 같다. 과학, 인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3000여 권 서가에 꽂혀 있으며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향기로운 커피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니, 나처럼 책에 빠진 사람에게는 꼭 한 번 탐방(?)해야 할 장소가 아닐까. 삼청동에 간다면 삼청파출소 옆에 있는 벼룩시장도 꼭 들러보고 싶다. 히. 
  




3. 그런데 가격이 착하지 않아

아기자기하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여기에 소개된 장소가 꽤 비싼 곳이 많다는 점이다. 커피값도 그렇고, 음식 값도 그렇고. 서울 투어를 한 달 내내 하다가는 모아놓은 돈을 다 탕진할지도. 이 책을 따라 쇼핑이나 헤어관리를 받으면 한 달 이내가 될 지도 모르니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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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을 듯. 만약 [아지트 인 서울 2]가 나온다면 그 때는 구수한 사람들의 냄새가 나는 곳도 소개해줬으면 좋겠다. 이 책은 인형같았다. 책에서 풍기는 냄새처럼 선뜻 다가서기 힘든 딱딱함이 있달까. 가장 오래 머물러 있으나 가장 알지 못하는 곳 서울. 그 서울의 곳곳, 골목길골목길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사진도 많고 찾아가는 길, 운영시간, 판매하는 물건의 가격 등도 세세하게 나와있어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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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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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소설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책장에 우리 소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작품을 무시한다거나 재미없다고 생각한다기보다 내가 그들의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핑계 같지만 어쩌면 그것은 시나 소설에 관한 해석에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문학작품에서조차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예전 교육방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해석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답은 맞춰야 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문학=시험용'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나에게 우리 문학은 늘 심오한 것이었다. 재미를 느끼기보다 글자 한 자, 문장 하나도 그냥 읽어서는 안 되고 숨겨진 뜻은 무엇일까, 작가는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를 늘 생각했다. (그렇다면 외국문학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고는 못하겠다. 다만 그 횟수와 깊이에 차이가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상 수상'이라는 어구가 붙으면 그 책과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말았는데(이건 외국문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이 곧 재미와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옷! [고래]를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재미도 있거니와 '음, 상 받을만해!'라는 생각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끄덕.
 
이야기는 춘희와 그녀의 엄마 금복, 그리고 이름모를 노파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며 진행된다. 노파의 출현비중은 작품의 전체 양으로 볼 때 그리 크지 않지만 작품의 무대를 만들어낸 것은 결국 노파이니 그녀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분위기에도 그녀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어 금복의 인생 후반이 결정되고, 금복에게서 태어난 춘희 또한 노파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상이 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노파가 마련한 무대에서 금복의 인생, 춘희의 인생이 여러 등장 인물들과 맞물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한 편의 연극인 것이다.
 
이 작품은 문체가 독특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문장들임에도 각각의 문장이 구성지게 나열되어 있고, 이것이 책인지 이야기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찰지다. 책 속으로 내 자신이 쑥 들어가는 듯한 완벽한 흡입력과 리듬을 맛볼 수 있고, 설사 책을 앞에 두고도 이것은 책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듣는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만한 문체다. 이 문체가 없었다면 내용이야 어찌됐든 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보통 책을 읽으면서 그 의미와 숨은 뜻을 생각하려고 노력(?) 했던 것에 비해 이 책은 '그냥' 읽혔다. 이야기 속에 함께 녹아들어가 그저 즐겼다고 할까. 마치 내가 하나의 글이 된 것처럼 금복의 인생을 나타냈다가, 춘희의 인생을 나타냈다가 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다면, 그 동안은 등장인물이 죽거나 다치는 상황에 마음이 상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욕망, 희망, 삶이었고, 죽음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었다.
 
솔직히 '고래'라는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이 책은 '재미있다' 는 말로도 충분하다. 굳이 '고래'의 의미를 정립하고 싶다면 스스로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자신과는 소설관이 다른 심사위원의 동의까지 얻어냈다는 사실이 작가로서는 힘있는 출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한 은희경 작가의 평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을테니까. 이런 작품이 우리 문학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반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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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빈센트 람 소설
빈센트 람 지음, 이은선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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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그레이스 아나토미> 가 '의학드라마의 탈을 쓴 연애드라마'라는 평을 받고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이 크다.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에서 같은 시기에 인턴 생활을 시작하게 된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메러디스, 도도하고 얄미울만큼 똑똑한 크리스티나, 착하고 정많은 이지, 맹해보이지만 순수하며 결정적일 때는 제 역할을 다 하는 조지, 때로는 비열하지만 상처를 간직한 알렉스를 중심으로 엄하고 완고하지만 누구보다 인턴들을 챙기는 베일리와 따뜻한 아버지같은 과장님까지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히 힘을 발휘한다. 비록 그들의 연애사가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중심이 될 때도 있지만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왜 <그레이스 아나토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책 뒷표지에 '<하우스>보다 긴박하며, <그레이스 아나토미>보다 섬세한 의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라는 문구가 씌어있기 때문이다. <하우스> 는 띄엄띄엄 봤기 때문에 그 드라마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이게 대체 연애드라마야, 의학드라마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레이스 아나토미>는 꾸준히! 챙겨봤기 때문에 조금 할 말이 있다. 사실 뒷표지의 문구를 보고 이 책에 대해 살짝 기대를 했었는데,  만약 <그레이스 아나토미>를 보지 않고 이 책을 먼저 봤다면, 글쎄, 나는 <그레이스 아나토미>의 매력을 잘 파악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일단 시도는 좋다. 밍, 피츠, 천, 스리라는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시점에서 각 챕터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느 때는 환자들의 시선으로 전개될 때도 있다. 단순한 의학소설이 아니라 각각의 이야기가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는 점도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쉽지만 네 명의 캐릭터가 개성을 가지지 못한다. 밍과 피츠, 천과 스리는 네 명이라는 개인이면서 그 넷이 하나를 이뤄버린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레이스 아나토미>처럼 인물들의 특징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몰입이 잘 되지 않고, 밋밋하고 들쑥날쑥한 네 의사들의 등장에 '이건 또 누구 이야기야'라는, 생겨서는 안 될 의문이 생겨버린다. 

게다가 의학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동'이 적다. 내가 감동을 느끼는 점과 이 책이 전하는 감동점이 다른 것인지 몰라도 의학물의 탈을 쓴 연애물인 <그레이스 아나토미>에서조차 맛볼 수 있었던 감동과 생동감이 아무리 해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만이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거나, '병과 치유, 그 긴박한 과정 속에 숨겨진 생의 축복'이라는 문구는 참 좋은데. 흑. 

늘 이야기하지만 책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이 글 또한 무척 주관적인 평임은 잊지 마시기를. 만약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느꼈다면 그 감동점을 부디 저에게 콕콕 집어주세요. 저의 감성을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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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벳 -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레이프 라슨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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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사람처럼 제각각이라, 한 번 만나면 그 느낌이 영원히 지속되는 책이 있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전하는 책도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책 중 지금 생각나는 것은 둘인데 그 중 하나가 [어린왕자] 다. 중학교 때인가, 처음 만난 [어린왕자]는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처음엔 단순한 동화였다가, 그 다음에는 철학이었다가, 또 그 다음에는 여우와 어린왕자의 연애소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늘 어린왕자. [스피벳]이 앞으로 나에게 몇 번이나 읽힐지, 또 그 때마다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피벳이 자꾸 [어린왕자]처럼 소중한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이 도착한 순간부터 정들어 버렸다. 넓고 크고, 내가 좋아하는 사이즈다. 예전에 [페이지 마스터] 라는 책이 있었다. 지금도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는데 그 책 크기만하다.   

휘릭 넘겨보니 본문 한 가운데는 공책같은 무늬가 있고 양 옆은 사진, 그림, 지도, 작은 글씨들이 채우고 있다. 작은 글씨야 주석이라 생각하면 그만이고, 사진은 참고용이라 생각하면 되지만 헥, 이 그림들과 지도는 뭘까.  

 첫 페이지부터 살짝 복잡해 보이는 지도가 등장한다. 이 책에서 그림과 지도는 중요하다. 스피벳은 열 두살이지만 과학 도해와 세밀한 지도를 학술지에 기고해 온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스피벳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스피벳의 정식 이름은 '테쿰세 스패로 스피벳'이다. 그가 태어나던 순간 참새(sparrow) 가 주방 창에 부딪혀 죽었기 때문이다. 스피벳에게는 농장 일을 하는 아빠와 과학자인 엄마, 누나인 그레이시가 있고, 총기사고로 죽은 동생 레이턴이 있었다. 스피벳은 도해에 관해서는 천재로 그 실력은 엄마의 친구인 욘박사가 인정했다. 그 욘박사가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스피벳의 도해를 보냈고, 스미스소니언협회는 급기야 스피벳을 저명한 베어드상 수상자로 선정한다. 시상식에 참석해달라는 전화를 받은 스피벳은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결국 몰래 짐을 꾸려 박물관이 있는 워싱턴까지 1800마일의 기막힌 여정을 시작한다. 

스피벳의 생활은 농장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생의 죽음이 자신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은, 그를 농장생활에 끼워맞춰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게 했고 그림과 지도 속에서만 생활하게 한다. 아버지에게 있어 자신은 쓸모없는 자식이고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인 못된놈이며, 그로 인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 스피벳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짐을 쌌다. 틀에 갇힌 생활에 익숙한 그에게는 열차를 세우는 것, 그 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모르던 세상이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아니라 가족 안에 있었다는 것을 스피벳은 깨닫는다. 마지막에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아빠, 가요' 라고 말하는 장면은 앞의 모든 여정을 끊임없이 주시한 독자에 대한 작은 감동선물이라고 할까.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히 본문 옆에 그려진 갖가지 지도와 그림, 그리고 주석들이다. 복잡하고 작은 그림이긴 해도, 본문보다 작은 글씨체라 살짝 눈이 아프기는 해도 그것들을 놓치면 스피벳을 읽는 재미가 반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무리 눈이 아파도, 설사 읽는 것이 귀찮아도 그 과정을 꾹 참고 견디면 스피벳의 매력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림과 주석들이 책을 여러 번 뒤적이게 하는 포인트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영화 <어거스트 러쉬>가 생각났다. 어거스트 러쉬도 스피벳도 모두 천재적인 소년이었고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뿌리 안에서 위로받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스피벳이 택한 위험한 여정의 목적지는 결국은 가족과 그들의 이해와 사랑이었던 듯 하다. 아픔은 치유되었고 스피벳은 더욱 성장했으니 그의 머릿속은 더 멋진 도해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과 성장소설의 묘미를 함께 지닌, 굉장히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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