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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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다. 모호하고 복잡해서 내용 자체가 이해되지 않거나, 등장인물들의 감정 자체가 이해되지 않거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은 후자에 해당했는데, 물론 주인공들이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안타깝게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최초의 죄를 덮기 위해 계속 누군가를 상처입히거나 늘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그들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워낙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의 포근함과 마음편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순한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나라면 일이 벌어진 다음 그냥 신고해버렸을 것이다. 미우라 시온의 [검은빛] 도 읽는 동안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등장인물들이 [백야행]에 나오는 그 사람들 같아서, 어째서 인생을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마음 아파서.  어쩌면 그것은 큰 고생 없이 평탄하게만 살아온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어둠인지도 모르겠다.
 
노부유키와 미카, 다스쿠의 운명에 최초로 폭력을 가한 것은 쓰나미였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슬프고 안타깝긴 하지만 살다보면 교통사고처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가족과 이웃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뒤 벌어진 '살인' 에 대해서도 우리는 '절대~해서는 안된다' 라는 잣대를 들이밀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는 법이고, 때로는 그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자신일 것이었다. 아프지만 그 상처를 서로 어루만져주고 그 상처를 발판 삼아 처음 먹었던 마음 그대로만 실행했었다면 노부유키도, 미카도, 다스쿠도 어둠 속이 아니라 빛 속에서 진심으로 웃으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마음 속에는 늘 선과 악이 공존하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도, 나쁜 사람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가면서 늘 고민하고 되돌아보며 되짚어봐야 할 숙제다.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동안에는 행복해야 하니까. 자신의 아이가 늘 좋을 수만도 없는 것이고, 폭력에 의해 망가진 삶이라고 해도 항상 나쁠 수만은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인생은 그런 작은 순간순간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언제나 힘들다. 불행하다. '살인'의 기억을 잊지 못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없고, 내 눈에는 집착으로만 보이는 감정으로 다시 또 누군가를 죽이며, 자신의 입장을 이용해 사람을 이용한다. 무엇인가에 매달려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는 하지만 정말로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는 무기력함. 서로의 마음과 거짓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앞으로의 생활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그저 살아가려는 마음. 말 그대로 모두 어둠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단순하게만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거짓을 덮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며, 자신의 마음도 괴롭히면서까지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일생을 뒤흔들어버린 여러 종류의 폭력. 하지만 그 폭력에 대항할 방법이 과연 또 다른 종류의 폭력밖에 없었을까. 작가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인생에 복수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인간의 복잡함과 다중성을 그려내려 한 듯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책이 참 불편하다. 지금이니까, 그 어떤 진정한 어둠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몰아붙여진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나는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가게 했던 검은 욕망의 빛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었다고 여전히 말하고 싶다. [백야행] 의 주인공들에게도, [검은빛]의 주인공들에게도, 어디선가 검은빛만을 따라 가고 있을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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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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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홋. 요즘 들어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 예전에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나면 그 여운을 만끽하느라 책을 안고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뒹굴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이상한 웃음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히, 라거나 오홋, 이라거나 냐하, 같은. 뭔가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하고 싶지만 한꺼번에 많은 생각이 몰아닥쳐서 그 말을 요약한 것이 저런 웃음소리로 표현된 게 아닌가, 나 스스로 내 자신에게 고개를 갸웃. 어쨌거나 이 책 역시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후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유명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은 어쩐지 읽기 싫어!'라며 비뚤어진 고집으로 한참을 외면했었던 작가 중 하나인 이사카 코타로. 제작년이었던가, [피쉬스토리]를 읽고 나서 '내가 왜 이 작가를 모른 척 했던가' 를 수없이 되뇌이며 이사카 월드로 곧장 빠져들고 말았다. [사신치바], [골든슬럼버] 등 때로는 감성으로 때로는 유쾌함과 진지함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이번 작품 역시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일러스트는 보너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찰리 채플린이 등장했던 영화 <모던타임스> 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가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조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효율성과 편리함을 위해 생산되었던 기계가 오히려 사람을 조종하고 다시 생성해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기억도 함께. 이사카의 이 작품에서는 기계에서 조금 더 진화되어 형체는 갖지 않았으나 그 어떤 기계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뛰어난 '정보' 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실이 아닌 것도 진실로 만들어버리고, 쉽게 왜곡되어 사람들의 두 눈을 순식간에 가릴 수 있는 인터넷과 정보는 수십 개의 팔을 가진 괴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등장인물들의 삶을 위협했다.
 
'용기는 친정에 두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와타나베. 첫 등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남편의 바람을 의심하는 아내 가요코에 의해 고문을 의뢰받은 오카모토 다케루에 의해 손톱이 뽑힐 처지에 당해 있는 것이다. 다행히 손톱은 뽑히지 않았지만 선배 고탄다가 맡았던 일을 끝내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바람에 후배 오이시와 파견을 나가는데, 고탄다가 어떤 일에 휘말렸음을 알게 된다.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별상담을 검색하면 누군가가 '일'을 하기 위해 검색한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오이시는 치한으로 몰리고, 상사 가토는 자살을 하며, 와타나베를 고문하려 했던 오카모토 역시 끔찍한 짓을 당하고 불쾌했지만 소중했던 친구 이사카 코타로 또한 칼에 찔렸다. 자신들의 뒤를 쫓는 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으나 진상을 파악하지는 못한 와타나베와 오이시, 고탄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아내 가요코가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숨가쁘게 달린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정보'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날조된 정보는 무섭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조차 판단할 수 없다. 왜곡된 정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고 하면 시스템이, 사회가 압박해온다. 한 사람의 만화가를 도시에서 쫓아내버리기도 하고, 순진한 남자를 순식간에 치한으로 몰아가며 누군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몰고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반화되고 정형화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예외였으니까. 예외는 사회를 위협하는 바이러스같은 존재가 되어 정형화와 일반화를 흐트러뜨린다. 그런 사회로 수용되지 못하면 사라져야 하는 것, 그것이 규칙이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양심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정보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느냐,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믿으면 믿을수록 진실은 사라지고 거짓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그런 시스템 안에서 와타나베와 고탄다, 오이시와 가요코는 큰 목적을 위해 정보를 악용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눈 앞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선택으로 연결되는지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회사 고슈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할까. 물론 그들도 한 때는 고슈의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기심을 느끼고 용기를 내고 뭔가 해보겠다고 뛰어들었다는 점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그런 그들이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손에서 생동감을 가진 존재로 활기차게 움직인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넘친다. 가장 평범한 듯 하면서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와타나베와 백치미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단력도 있고 어쩌면 가장 현명한 인물인지도 모를 아내 가요코, 순수해서 많이 상처받으나 용기를 낸 순간 그만큼 당당해지는 오이시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련미를 선보이는 선배 고탄다, 그리고 과묵함과 쿨함으로 무장한 오카모토와 호색남인 친구 이사카 코타로까지. 사실 더 많지만 어디까지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하나하나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들의 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분위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내 [골든슬럼버] 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과연' 했다. [골든슬럼버] 가 정보와 관련된 사건을 묵직하고 안타깝게 그리고 있다면 [모던타임스] 는 그보다는 코믹하게, 그러나 소재의 심각성을 잃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골든슬럼버] 와 [모던타임스] 를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그 재미가 배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어느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부품일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릴 수 있는 혜안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숨통을 조일 수도, 양심없는 누군가를 웃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영화 <모던타임스>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이던 찰리 채플린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 그건 나도 이해해. 하지만 있지, 생각이야 바꾸면 그뿐이잖아. 일이라서 했어도 나쁜 짓을 했으면 죗값을 치를 순간이 와. 아니 솔직히, 누굴 상처 입혔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이라서 괴로운 일을 해야 한다면,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 해야지...응, 고민하고 끙끙 앓은 다음 그래도 일이니까 한다. 그런 거라면 이해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상처 입히고 소란을 피우는 건 안 돼. -p584 (가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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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
론 커리 주니어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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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별과 달이 떠 있고, 그 밑에서 아이는 잠들어 있다. 시간은 여전히 흐르며, 저 멀리 별 하나가 지상으로 떨어지려 한다. 잠자는 아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알 수 밖에 없었던 지구의 종말, 그 종말로 인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시간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헌신했던 주니어. 운명은 정해진대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수많은 선택을 하지만 어떤 것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구종말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진부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 생명의 유한함을 느끼는 우리로서는 이 지구에도 언젠가는 끝이 찾아오지 않을까, 찾아온다면 어떤 형태로, 그 시기는 언제인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언제 어떻게 인류에게 종말이 다가올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인생을 마냥 아름다운 것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인지를 안다면 더 열심히 살 것도 같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어차피 없어질 세상, 열심히 살아서 뭐해, 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주니어는 그래도 인류를 위해,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에이미를 위해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삶은, 고된 것이다. 

이 책은 구성이 약간 독특하다. [쌍둥이별]처럼 등장인물들의 시각에서 조금씩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 시각에는 '~다!'라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도 포함된다. 그것이 신인지, 아니면 그저 미래를 알고 있는 '목소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목소리로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가 이야기할 때 각 문단 앞에 숫자들이 붙어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곧, 그것이 지구의 멸망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종말과 함께 또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것일까, 아니면 끝이 있기에 아름다웠던 모든 것을 일컫는 것일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느껴지는 것은 세상에, 우주를 뛰어넘은 온갖 시공간에 진정한 '끝'은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모든 것에 끝이 있고, 그래서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 끝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시험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게 되는 것처럼, 끝이 있기에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여기에서 초점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시험만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끝'은 늘 찾아온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고, 한 생명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생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이 굳이 자손이라고 표현될 필요는 없다. 크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구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니까. 

중요한 것은,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때문에 그 끝이 다가오기 전까지를 채울 우리의 인생이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얻을지. 무엇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을지 헤아리는 지혜.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끝은 늘 다가오겠지만 그 끝을 어떻게 맞이하는가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순간순간의 그 선택이 우리의 삶과 마지막을 풍요롭게도, 고되게도 만들 수 있다. '에이,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하지는 말자.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들에는 중요한 것들이 많을 수 있으니. 

작가는 인류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로 우리 삶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가 설정한 인류종말은 결국 우리 삶의 마지막을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끝은 언제나 찾아와.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지. 하지만 그 사이사이를 메꾸는 것은 결국은 매 순간의 너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야, 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끝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그 끝은 두려움으로 장식될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가. 

소설이라기에도, 그렇다고 소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자꾸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상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주니어에게 들려오는 목소리, 다중우주의 개념 등은 마치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대게 만드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소중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언젠가 별이 가득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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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고스트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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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그렇지 않은 책이 없겠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는 순전히 '취향의 차이'다. 영상 뿐만 아니라 책의 분위기, 묘사, 이야기 등에도 영향을 크게 받는 나로서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리가 아팠고 속이 불편했었다. 분위기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내 몸 전체를 압박해오는 느낌을, 혹시 알려나. 내가 읽기 힘들어하는 작가는 지금까지 딱 한 명 있는데, 그는 일본작가 '기리노 나쓰오'다. 편견이라고 해도 할 수 없지만 [리얼월드] 를 읽고 난 후, 그의 책을 다시 손에 들기가 겁이 난다. 어쩐지 이 '조 힐' 이라는 작가도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들이 엉망인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진주빛의 토슈즈와 블랙 표지가 묘하게 어울려 발레와 관련된 예.쁜. 공포소설인가 했으나 모두 15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소재는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신간 공포 걸작선>으로 시작되는 음습하고 기괴한 공포가 마치 벌레처럼 스멀스멀 우리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그 뒤를 잇는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또한 왕따,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가족,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의사까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또 그렇지도 않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 뿐이다. 작품 속의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며, 아픔을 간직하고 있고, 그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조차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편하고 다른 의미에서 무서운 소설집이었지만 <팝 아트>라는 작품 하나만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혈액 대신 공기가 몸 속을 채우고 있는 공기주입식 소년 아트. 어머니는 사라지고 아버지의 무관심과 사랑 없는 분위기가 가득 채워진 가정에서 자란 '나'는 그를 만나면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였지만 '나'의 말을 잘 들어주고 가족보다 더 가깝게 위로해주었던 아트와 '나'는 누구보다 진한 우정을 나누지만, 사고로 인해 이별하게 된다. 이 작품은 공포나 호러소설보다 성장소설, 청춘소설이라는 이름이 더 알맞다. 가슴 속에 안타깝고 아련한 슬픔이 번져가지만 사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별 네 개를 주었을 정도로 읽을수록 괜찮은 이야기다. 

이 작품과는 반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엄청난 기괴함으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마지막 숨결>이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사람들의 마지막 숨결을 모으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소재 자체와 분위기만으로도 음울해지지만 결말 부분은 뭐라 말 할 수 없는 잔혹함과 끔찍함이 전해져온다. 오멘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책을 펼치고 읽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공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끌었지만,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기묘하면서도 이상한 작가다. 앞으로 그의 작품을 또 읽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상상력과 그가 만들어낸 세계가 독특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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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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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여기 서서 양치질을 하고 있고, '과거' 어디쯤의 나는 잠을 자거나 TV를 보거나 내가 지난 밤 먹었던 오리훈제구이를 먹고 있고, '미래'의 나는 어딘가에서 서평을 쓰고 있겠지, 하는. 그런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마치 천장이 뻥 뚫린 아파트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다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나의 모습이라는 점이 조금 다를 뿐.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이 글을 적고 있을 줄 과거의 나는 당연히 몰랐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글을 쓸 생각이 없었으므로.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만났다면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너는 2009년 9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 30분에 [시간 여행자의 아내]라는 작품에 대해 리뷰를 쓰게 될 거야' 라는 그런 말을 했으려나. 

헨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사라져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돌아가신 어머니와 미래에 자신의 아내가 될 클레어를 만나고, 자신의 주치의가 어떤 성별의 아이를 얼마나 낳을지를 알게 되는 사람. 미래의 자신이 시간 여행을 통해 클레어에게 제공한 정보를 현재에 전달받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사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맞물려야 완전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간 여행은 우리에게 신비롭고 경이로워 보이는 것이지만 적어도 헨리에게 있어 그것은 '질병'이었다. 언제 사라질지 예측할 수 없고, 어디에 떨어질 지 짐작할 수 없어 힘들었다. 그러나 외롭고 어두운 시간 여행자의 운명 속에서 클레어를 만난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그제야 완성의 가능성을 내비춘다. 클레어와 헨리가 함께 해야 완성되는 두 사람의 시간, 두 사람의 추억, 두 사람의 운명. 

제목은 [시간 여행자]가 아니라 [시간 여행자의 '아내']다. 헨리의 아내 클레어. 어린 시절 나이 든 헨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늘 그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현재의 헨리를 만난 이후로는 그가 시간 여행을 갔다 무사히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주기는 일정하지 않고 그가 어디를 가는지, 밥은 잘 먹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곤경을 당할지 클레어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걱정하며 기다릴 뿐이다. 그가 먼 훗날 자신을 다시 찾아와 따뜻하게 안아줄 때까지. 

누군가를 오랫동안, 그리고 늘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예외는 없다. 처음의 확고했던 신념은 시간과 함께 옅어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오는 외로움, 그 사람으로 인해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주위의 간질임, 그리고 내가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의문까지.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고 즐거운 에너지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기다림은 그 대상을 완전히 받아들이겠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누구도 클레어에게 헨리를 기다리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다. 그저 그녀는 그를 놓을 수 없었을 뿐이다. 사랑하니까.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은 클레어의 '기다림'이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기다림'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이미 결정된 것이었어도 다른 운명의 그림판이 움직였을테니까. 마지막의 안타깝고 애틋한 장면은 그들 사랑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시간 여행을 하는 헨리로 인해 배경은 수시로 바뀐다. 27세의 헨리, 31세의 헨리, 43세의 헨리. 그리고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는 두 사람의 헨리. 앞과 뒤가 모순되지 않도록 작가가 꽤나 정성을 들여 쓴 작품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덕분에 읽는 동안 책의 앞뒤를 뒤적이며 그림이 맞는지, 다른 점은 없는지 애를 써야 했지만 그 점이 매력이다. 

기다림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려 본 적이 없거나, 그 때의 대상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나도 평생을 때때로 오랜 기다림을 동반할 수 있을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미래의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누구와 함께 있을까. 그 사람과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이 책을 같이 추억하고 싶다.


   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p354 (시간 여행자의 아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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