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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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장 많이 걱정하는 점은 '길을 잃으면 어쩌지' 가 아닐까.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상품이라면 그런 걱정은 조금 덜 하겠지만 내 입맛에 딱 맞는 상품을 찾기 어렵다면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먹고 싶은 것을 행복하게 먹고 싶은 일정을 계획할 것이다. 그런데 참, 계획은 세우고 꿈에는 부풀어 있으나 막상 떠나려 하면 자꾸 안주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디서 샘솟는 것인지. 그 안주하고 싶어지는 마음 밑바닥에 깔린 것은 불안이다. 낯선 나라에 가서 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혹시라도 길을 잃어 국제미아라도 되면 어쩌나.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내 자신이 정말 싫지만, 어쩌나. 이리 태어난 것을. 흑.
 
나는 완전히 계획적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히 무계획적인 사람도 아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을 때 가끔 패닉상태가 되곤 하는데 아마도 임기응변이 부족한 탓일 게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보다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낯선 곳에서는 특히, 국내에서도, 색안경이 씌워지곤 하는 나에게 혼자 떠난다는 것, 길을 잃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라니! 나에게는 공포스러운(?)일이 이 작가에게는 행복한 경험이었나 보다.
 
평범한 여행 에세이는 아니다. 어디가 좋다, 어디의 음식이 맛깔스럽다가 아닌 그 도시에서 만난 건축과 미술, 온갖 예술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단상이 페이지를 메꾸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 한국이 아니라 그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매력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책의 제목과 어울리는 에피소드들이었다. 무심코 들어간 골목에서 발견한 맛집, 열흘 넘게 속옷을 세탁하지 못하는 생활, 비누 없는 빨래, 기차에서 만난 독일 여배우.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요리조리 보고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지 못했다면 찾아낼 수 없었을 소소한 행복들이 부러웠다.
 
1부에는 여행과 관련된 글들이, 2부에는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는데 2부의 내용은 조금 어려웠고 낯설었다.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리감도 있었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시켜 주는 글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보다는 1부의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었는데, 우스운 것은 나는 왠지 이 작가가 아기같고 공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돌기둥을 배경으로 여신이 되고 싶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모델을 제안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진작가에게 내가 당신의 모델이 되겠으니 알아서 자신을 입히고 분장시키라고 부탁하는 모습에서는 어린아이같은 천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 깊이 있는 여행서는 아니지만 작가에 대해, 그가 어떤 여행을 하고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알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떠나기 전 오래 비울 집을 청소하고 싱크대를 소독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늘 여행 앞에서 망설이는 내가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여행을 통해 한나라는 독일 여배우를 만나고 생각지 못한 행복을 얻었던 것처럼 '여행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구나, 완벽하지 못한 여행도 있을 수 있구나'를 느끼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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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나비처럼 1
야설록 지음 / 형설라이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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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하면 '조선의 마지막 국모, 흥선대원군에 대항한 여인,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시해당하고 정치적 평가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왕비' 라는 수식어를 흔히 떠올린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려 본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는 책에서도 민비 민자영은 대차고 강인한 성품으로 그려져 있었고, 국사시간에는 그녀가 조선을 위해 이루려고 했던 업적보다도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었다는 사실이 유독 강조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역사적인 인물에게서 그들의 사생활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들의 단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온 생애를 우리가 전부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실제이든 허구이든 역사소설의 재미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약간은 다른 감정으로 그들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조선의 국모가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한 남자를 사랑했던 민자영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천주교도 박해,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경복궁 재건 사업, 민비의 간택과 대원군과의 대립, 을미사변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무명'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천주교 박해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혹독한 생을 살아왔던 무명이 신들린 듯 사람을 베어 죽이던 인생에서 벗어나 자영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험난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낯간지러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드러내놓고 사랑을 갈구할 수 없었던 시대적 특성과 신분의 차이로 인한 두꺼운 벽을 반영했기 때문이겠지만 오히려 은은하면서도 서정적인 감정이 더 열정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무명으로 인해 여러 번 등장하는 결투 장면이다. 흥선대원군의 심복인 이뇌전과의 숙명적인 대결, 큰 부상을 입은 후 한층 성장한 검술 실력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데, 그런 장면들의 묘사가 약간 과장되었다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약간 판타지적인 느낌이 살아있어 마치 한 편의 무술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하늘에는 달이 둥실 떠 있고, 그 달과 바람을 가르며 뛰어오르는 무명과 이뇌전-이라는 영상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층 고풍스럽게 만들어준다고 해야 할까. 물론 피와 살이 튀는 장면은 제외하고.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닌지 모를 무명이라는 인물과 민자영의 사랑이 주제인만큼 정치적인 상황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미약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요소들도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민비의 이야기를 할 때 국내외 정세를 제외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명의 입장에 너무 큰 비중을 둔 점이라 할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글쓰기는 쉽지 않았을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민비의 이야기보다 무명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이것은 둘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무명의 일대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조승우와 수애가 주연을 맡은 영화의 선전을 보고 이런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어쩐지 영화보다 책이 더 멋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검술을 겨루는 긴장감과 각 인물들의 심리도, 민자영과 무명의 애틋한 감정도 글이 더 섬세하게 나타냈을 테니까. 와인과 초콜릿을 즐겼다던 조선의 마지막 여인과 그녀를 목숨처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밤을 지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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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전설 : 동양편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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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접했던 책은 '전래동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를 위해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가 나오고, 호랑이를 피해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있으며, 두꺼비가 뚫린 구멍을 막아주어 고약한 새엄마가 요구한 일들을 모두 해낼 수 있었던 콩쥐가 나왔던 전래동화 전집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작은 책장 가득 꽂혀있던 그 전집들이 나의 행복이었고 나의 자랑이었다. 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스스로 글자를 깨우쳤으며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홀로 일어나 책을 읽었다니 어쩌면 소위 말하는 그런 신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헴.
 
하지만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처럼 단지 '이야기'를 좋아했었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 권 한 권 펼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세계 속으로 떠날 수 있었던 책 속의 세상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전설이나 전래동화보다 더 깊고 환상적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때 읽었던 백두산 천지 전설, 금강산 설화 등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하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옛날 이야기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매해 여름이면 <전설의 고향> 이 방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상식시리즈에서 나온 [세계의 전설 : 동양편]에는 우리나라의 전설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몽골, 동남아시아 나라들, 이집트와 아라비아, 아프리카의 전설이 다양하게 실려있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도저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 구미호가 사람으로 변신해 해코지를 하거나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전설의 고향>에 등장할 것 같은 억울한 원혼의 이야기 등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이 읽어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전설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다른 나라의 다른 전설이지만 공통된 점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몽골의 전설 부분에서도 보여지고,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일본의 전설 부분에서 보여진다. 또한 어쩐지 [무영탑]을 생각나게 하는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와 여우가 낳은 영웅 강감찬과 여우의 아들로 태어난 유명한 일본의 주술사 아베노 세이메이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몽골과 중국, 일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각국에 어울리는 형태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던 이야기는 익숙함으로 몰랐던 이야기는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는데 그 중에서도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그래도 우리나라의 전설이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전설'이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우리나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왕의 딸과 결혼한 의인, 원혼의 억울함을 풀어준 지혜로운 사람, 여왕을 사랑한 마음이 불길로 변해버린 남자, 어린 시절 그렇게도 무서워했던 달걀귀신 이야기 등은 갖가지 전설을 나눴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푸근해진다.
 
우리나라의 전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전설을 집대성했다고 해도 좋을 [상식으로~]의 전설이야기.  [세계의 전설 : 서양편] 에서는 동양편과는 다른 어떤 매력으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줄 지 궁금하다. [상식으로~] 시리즈. 음. 역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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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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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오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조연으로 나온 배우들 중 몇몇은 내가 미드를 통해 알아온 사람들이었다. 미드에서는 주연급이었던 사람들이 조연으로 나오긴 했지만, 나는 숨겨진 사람 또 없나 하는 마음으로 꽤 즐겁게 등장인물들을 살필 수 있었던 듯도 하다. 조금 분위기가 다르지만 그건 티베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티베트는 나에게 그저 '여행'의 나라였다. 조금 독특한, 그러나 뭔가 얻을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은 고매한 성지. 사실 그 때만해도 티베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티베트 작가의 소설이라든가, 그 곳을 심도있게 여행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제야, 그 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티베트의 지나간 시간과 그들의 생활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 라는 작품의 영향이 컸다. 좋은 책들은 명확한 이유와 감정을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나에게 '난 좋은 책이야'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 작품이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번 [소년은 자란다]는 조금 더 깊이 티베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모두 열 세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평소 단편집은 그다지 잘 읽지 않아서 이 책도 단편모음집이라는 것은 책을 받아보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티베트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적당한 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촌'을 배경으로 시대의 흐름으로 핍박받는 라마승, 환속해서 양치기로 변모한 라마승, 마부, 약초캐던 소녀, 라마승을 외할아버지로 모시는 평범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감정들,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도시로 올라온 노인의 향수와 인간에 대한 그리움 등이 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색에 물들다]에 비하면 특별한 감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승전결이라 할 것도, 소설을 읽을 때면 으레 느끼곤 했던 긴장감이나 절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수필처럼, 혹은 일기처럼 티베트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나타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점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 책을 읽고나서 내가 무엇을 느끼기를 원하는가, 그냥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건이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무언가'를 쉽게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가 무엇이고, 무엇이 티베트인지를 한 마디로 명확히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단지 티베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소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듯, 프랑스와 영국, 일본이 그렇듯, 티베트도 이 세상의 한 곳일 뿐입니다. 그곳에도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꽃이 핍니다. 풀과 나무의바다에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라고 적은 작가의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시대의 흐름을 거치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라마승이 있고, 변화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누군가는 성장하면서 살아나가고, 누군가는 생명을 잃어가는 곳이 바로 티베트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심오한 명상과 고행으로 정신적인 성숙을 기도하는 현자들 뿐 아니라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취향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도 이 책을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아라이가 들려주는 티베트와 티베트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그 곳의 풍경이 보이고 그 곳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색에 물들다] 와는 확연히 다른, 소박하지만 약간은 쓸쓸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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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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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예전 그녀의 이야기들에는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라는 느낌이 강했고 그래서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가 [왕국]을 지나오면서 약간 변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아픔을 감싸안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왕국]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어쩌면 요시모토 바나나는 늘 그런 이야기를 써왔는데 내가 늦게 발견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 책 [무지개]도 [왕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안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타히티를 배경으로 은은하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줄거리에 집중하기보다는 분위기와 타히티라는 배경에 흠뻑 빠져들었으니까. 이 책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느낌들이 가득하다. 몽실몽실한 강아지와 고양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풍성한 정원, 이국적인 섬과 환상적인 레몬색 상어, 주인공과 오너의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 이야기까지 따스한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마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물결이 이끄는대로 몸을 맡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옥의 티라고 한다면 오너의 사랑고백이 약간 당황스러웠다는 점이랄까. 나는 사랑의 과정을 더 좋아한다.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설레하다가도 주저하면서 천천히 진행되는 그런 사랑의 과정을 즐기는 사람인지라 아무 예고없이 이루어지는 느닷없는 고백에 살짝 멍~했다.
 

살다보면 지칠 때가 있다. 버릇처럼 나오는 '아우, 지쳐'의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온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내 몸이 바닥 밑으로 가라앉는듯한 때가 가끔 한 번씩은 온다. 그럴 때는 자신만의 처방약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쇼핑을 하고, 또 나처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가슴 속을 재충전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좋은 일도 늘 좋을 수만은 없고, 나쁜 일도 늘 나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삶에 대해 좀 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됐지만 시련은 항상 힘들고 행복은 늘 좋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도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깔을 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임을 여전히 믿고 싶다.
 
중요한 것은 솔직하게 살아간다는 것, 그 어떤 핑계나 이유도 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느끼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소중한 사람은 언제 곁을 떠날 지 알 수 없으니. 후회없이 선명한 무지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용기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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