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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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즈키는 2년 전 데라하라의 얼간이 아들로 인해 아내를 잃었다. 처참한 교통사고. 교사였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얼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즈키는 데라하라의 회사로 취직한다. 약을 팔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복수심 뿐이다. 그런데.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복수심이 회사에 들켰다. 곧바로 테스트를 준비한 그의 파트너. 약을 팔기 위해 끌어들인 일반인을 죽이라고 협박당하는 사이, 바로 그의 눈 앞에서 그 얼간이가 일명 '밀치기'라 불리는 킬러에 의해 차도로 떠밀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는, 이사카 고타로는 감성보다 이성이 발달한 작가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유쾌하고 엉뚱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능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지만,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골든슬럼버] (왜곡된 정보와 사람들의 근거없는 믿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가), [모던타임스] (정보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를 읽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건해졌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고 풍자가 뛰어나며 자칫 어두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조차 평범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로 연출해버리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래스호퍼] 는 스즈키 외에 자살유도킬러로 불려지는 구지라와 칼잡이 세미의 시점에서 차례대로 전개된다. 많은 사람들을 자살하도록 종용한 후유증으로 그들의 망령을 보는 구지라와 꼭두각시처럼 이와니시에게 휘둘리는 세미, 회사의 지시를 받고 밀치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미행하는 스즈키는 '밀치기'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킬러와 킬러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 스며들게 된 어둠의 세계, 우리가 그 동안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포스럽고 두려워해야 할 그들에게 연민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차마 느낄 수 없을 감정, 연민이 스즈키 뿐만 아니라 구지라와 세미에게조차 느껴진다.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고 칼로 숨을 끊어놓는 것일까. 그저 '하는 수밖에 없잖아'라는 생각 하나로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양심에 지고 만다.


 

 어떤 동물이든 밀집해서 살면 변종이 생기게 마련 아니오. 색이 변하기도 하고 안달하게 되면서 성질이 난폭해지지. 메뚜기떼의 습격이라고, 들어봤소? ...사람도 일정한 공간에서 복닥거리다 보면 이상해지지...초록색 메뚜기라 할지라도 무리 속에서 치이다 보면 검어지게 마련이지. 메뚜기는 날개가 자라 멀리 달아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소. 그저 난폭해질 뿐...도시에서는 특히 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가 어렵지. (p213~215)


구지라와 세미도 그런 변종 메뚜기(그래스호퍼)였다고 생각한다.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이상해진 메뚜기.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어서 누군가의 생을 빼앗으며 살아왔던 메뚜기.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자신들의 인생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변종 메뚜기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스즈키다. 스즈키 또한 구지라와 세미같은 메뚜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안에 남은 복수심이라면 그런 메뚜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밀치기'를 만나고, 최소한으로 남아있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오히려 그 자신을 구원했다. 그 보상으로 스즈키에게 주어진 것은 앞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시간과 죽은 듯 살지 않겠다는 의지다. 

[골든슬럼버] 와 [모던타임스] 처럼 이 작품에서도 사회와 정치에 대한 작가의 비판 정신이 돋보인다. 감정적인 면으로도 지나치지 않으며 그렇다고 또 이성적인 면만 강조되어 있지 않은 적당함이 좋다. 킬러들의 대결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문장 하나하나가 담백하다. 두근두근한 긴장감,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연적인 질문까지. 이사카 월드로 격하게 초대합니다!


   태어났으니 사는 수밖에.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는 건 인간의 몹쓸 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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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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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마음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됐다, 이런  기분이 교감한다는 거구나 싶을 때조차도 쉽게 안심할 수 없고, 한 발짝 다가왔다 싶으면 어느 새 두 발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이들이다. 특히 소녀들은 보통 여자보다도 더 갈대와 같아서 어느 때는 헤헤 웃다가도 어떤 말 한 마디에 금방 토라져버리는 특성(?)이 있다. 나도 여자지만 그들보다 10여 년은 더 나이를 먹어서인지 나조차도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이 든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 점심을 먹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교실에서 연예인과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울타리는 눈에 보이는 그것보다 더 견고해서 울타리 밖의 누군가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모두 무장태세를 갖추고 경계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훨씬 부드러운 울타리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은 나도 안다. 내 친구를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얘는 나랑만 친해야 해, 라는 어쩌면 다소 아기같고 이기적인 욕망들. 남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오직 자신들만을 지키고자 하는 소녀들의 그 집념으로 나도 한 때 상처를 받은 적이 있으므로 그 아픔에는 공감한다. 

차라리 어울리지 않으면 마음은 편하나 천지가 당한 것은 은근한 따돌림이었다. 바보처럼 착해서 늘 이용당하고, 화연이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끝내 대놓고 말 한 번 못해보다가 결국은 자신을 버린 천지.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천지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늘 화연이와 어울려야 했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지 그건 장담할 수 없다. 천지의 선택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되었다고 질타할 수만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 전부일 수 있으니.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천지보다는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 다른 이로 하여금 내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게 하지 못하도록, 거짓 때문에 내 진짜 모습이 가려지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상처받을 이유는 없다고 당당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는 필요하리라 믿는다. 조금 외롭긴 하지만 내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다른 친구는 금방 나타나니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려령 작가의 [완득이]를 다른 독자들처럼 재미있게 읽었다.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결코 유쾌하지 않을 일들이겠지만 유쾌함이 느껴져서 좋았고, 방황하는 완득이의 모습이 담담하고 간결하게 그려져 있는 듯 해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민감한 따돌림 문제에서만큼은 그의 묘사가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일단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쳐있다. 슬프지도 않은데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야 하는 시한부 인생을 그린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가슴이 아프기는 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정말 안 될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천지의 죽음을 너무 감상적으로만 몰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적인 욕심이겠지만 이런 일에 대한 냉철함과 이성적인 작가의 조언이 약간 부족한 듯 싶다. 작가가 교육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것까지 제시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주제의 글을 쓰고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내용은 들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무척 인위적이다. 천지의 언니 만지와 만지의 친구 미란, 또 천지와 같은 반이었던 미라, 화연이네 동네로 이사간 아파트에서 만난 오대오 아저씨와 천지 가족의 관계에 우연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어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 주제는 현실적이나 내용 구성은 허구적인 느낌이 강해 두 요소가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득이]에서 보여주었던 경쾌함이 이 작품에서 뜻밖의 경우에 엿보이는 것, 천지의 독백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시점, 과거와 현재가 일관성 없이 전개되는 것 등도 다소 아쉽다.

음..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불만이다. 책 중간 즈음에 '바로 이 때 초짜 선생님은 정신줄을 놓게 된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로 초짜 선생님이 정신줄을 놓고 마는 일을 두고' 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상황은 어떤 아이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정리한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작가도 글을 쓰기 위해 학교생활에 관한 취재를 했을 것이고, 아이들이 쓰는 말투와 행통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꼭 '정신줄을 놓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이 읽게 될 소설에서. 그저 씁쓸할 뿐이다. 

어쨌든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는 괜찮다. 누구나 쉽게 쓰지 못하는 주제를 이렇게 건드리기까지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계기로 우리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상처에 민감해지기를 바란다.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어서 깨닫기를, 자신이 주목받기 위해 누군가를 험담하고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빨리 알아주기를.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자신에게는 배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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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보거리>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상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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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루아는 [내 생애의 아이들]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이제 막 교단에 서서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을, 또 그만큼 아무 편견없이 깨끗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교사의 일상이 따스한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것은 그 책 한 권이었지만 자연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교사들의 지침서로 삼기에는 약간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또 그런 면이 오히려 풋풋한 초임교사의 매력을 더해주었던 듯 하다. 실제로 교사 생활을 한 그의 자전적인 경험이 담기기도 했는데, [데샹보 거리]또한 자전적이면서도 일기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크리스틴.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니펙 근교에서 생활하는 어린 소녀다. 모두 18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이야기 <두 흑인> 뒤에 이어지는 <프티트 미제르>에서 이것이 연작단편이라는 점을 짐작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두 흑인>에서 느껴지던 따스하고 다정한 가족의 이야기와 <프티트 미제르>의 다소 불행한 듯한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 가족의 이야기들이 이 크리스틴의 눈을 통해 펼쳐지니 분위기에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크리스틴은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상처를 안고 사는 우울한 아버지와 여행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엄마 밑에서 자라고 있다. 아버지가 등장하는 작품 몇 편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암울해지는 것은 바로 그의 상처 때문이기도 한데  <던리 우물>편에서 그 궁금증이 해소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엄마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이야기는 <집 나온 여자들>이다. 늘 여행을 꿈꾸었던 엄마와 크리스틴은 어느 날 드디어 여행을 떠난다. 수녀가 된 어린시절 친구와 만나고 아버지와 소식을 끊고 살았던 친척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화가 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도 엄마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자 눈물을 글썽이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외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도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꼬마 크리스틴의 눈으로 비춰지는 세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른스러운 점도 엿보인다. 

크게 재미가 있다거나 감동을 받을만한 책은 아니지만 조근조근한 문장은 마음에 든다. 약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지만 어린시절의 일기를 생각나게 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들, 때로는 순수하고 사심없지만 또 때로는 어른들 못지 않은 깊이있는 사고, 가족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다움과 애정이 묻어있는 동화같은 이야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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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미닛 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2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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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미닛 룰-돈을 챙겼든 챙기지 않았든, 프로라면 무조건 2분 안에 도망가야 한다는 은행털이범들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 시간을 넘기면 경찰에 체포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사건은 이 투 미닛 룰을 어긴 은행털이범 두 명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규칙을 어기고 2분이 넘게 은행 안에 머물러 있던 이들은 결국 경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아요. 수많은 초록색 지폐들 한 장 한 장이 꿈이고 소망이었다-라고 추억하면서요. 그들이 훔쳐서 숨겨놓은 돈은 무려 1600만달러.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음, 아무튼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86일 뒤 맥스 홀먼이라는 은행털이범이 출소합니다. 10년의 복역기간을 마치고 이제 보호관찰을 받는 그의 앞에, 그 오랜 시간 그를 지탱해주었던 단 하나의 존재 아들 리치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아들이 살해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가 86일 전에 일어났던 은행강도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홀먼은 직접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 거에요. 아들은 좋은 경찰이었다고, 자신과는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훌륭하게 성장해 결혼도 한 멋진 사람이었다고 추억하고 싶었지만 현실이 홀먼을 가만 두지 않았거든요. 자신의 논리와 맞지 않는 듯한 경찰 수사, 범인으로 지목된 용의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 자꾸만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경찰권력들. 이제 그는 10년 전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이제는 은퇴한 FBI 요원 폴라드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그가 말한대로 누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우리의 주인공 맥스 홀먼은 비록 은행털이범이었고 10년 동안 복역한 죄수였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친절하고(?) 다정한(?) 범인입니다. 개과천선의 훌륭한 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가 10년 전 폴라드 요원에게 체포당한 경위만 봐도 알 수 있죠. 그 일은 홀먼의 성격을 규정지어주는 중요한 사건이므로 궁금하시다면 직접 확인해 보세요, 히. 

전 다른 어떤 이유보다 그가 사건에 뛰어든 동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돈에 관련된 것도 아니며 오직 마음 속 하나의 등불이었던 아들을 위해서였잖아요. 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하고, 만약 아들이 나쁜 경찰이었다고 해도 그건 모두 자신의 유전자 탓이라 여기며 흐느끼는 홀먼에게서 연민이 느껴집니다. 사실 전 스릴러물에서 보여지는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살짝 이해가 간다고 할까요. 홀먼같은 남자에게라면 아마 많은 여성분들이 모성애와 함께 감싸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헉, 근데 이거 위험한 건가요! 

스릴러물답게 사건은 탄탄하면서도 조마조마하게 전개됩니다. 은행강도 사건이 등장하니 뭔가 돈과 관련되었다는 냄새는 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과 관련된 냄새인지는 확신할 수 없죠. 경찰이 네 명이나 살해되고 그들이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밝혀지면서는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돌아다니지만 결국 전 사건의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답니다.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의심하다가 빗나갔어요. 하지만 그것이 또,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는 묘미 아니겠습니까, 풋. 그러니 여러분도 흠뻑 빠져보세요. 

주인공들의 사건해결에는 안도감을 느꼈지만 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도 들었어요. 결국 물질적인 풍요로움 앞에서 인간은 과연 나약하기만 한 존재인 걸까요? 전,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것을 욕심내면 제 인생에서 그보다 더 큰 것이 빠져나갈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고 여전히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전 심부름을 제외하고 로또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로또에 당첨된다면 평생의 운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운은 야곰야곰, 삶이 힘들 때 가끔씩 찾아와주는 것이 더 달콤하지 않겠어요? 부디 순간의 욕심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는 우리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살짝 해봅니다. 

감정에 지나치게 좌우되지 않는, 속도감 있으면서도 꼼꼼한 구성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 할런 코벤의 [결백] 같은 반전의 반전보다 모든 단서를 쭉 늘어놓고 마지막에 가서야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니 그 점은 참고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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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망가 섬의 세사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9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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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에로망가 섬으로 에로만화를 보러 간다! -라는 다소 엉뚱한 설정으로 뭉친 세 사람, 사토, 구보타, 히오키. 빅히트한 H사의 게임 <도태랑전철>에 등장하는 에로망가 섬은 일본어로 에로만화를 뜻한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실제로 바누아투공화국에 자리잡은 이 에로망가 섬에 가서 에로만화를 읽는 특집기사를 선보이기 위해 떠난 세 사람. 약간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히오키를 안내인으로 그나마 멀쩡한 정신의 사토와 애니메이션 오타쿠인 구보타의 모습은, 여자인 내 입장에서 다소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크흑. 

전작 [유코의 지름길]로 제 1회 오에 겐자부로 상을 수상한 나가시마 유. 유명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했다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유코의 지름길] 은 내게 실망스러웠다. 일본의 연작단편집을 좋아하고 즐겨읽는 나이지만 그의 작품은 너무나 한가했다고 할까.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아무런 감흥없이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에 비해 [에로망가섬의 세사람] 은 한층 나은 수준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한가로운 느낌과 주인공들의 엉뚱한 면은 변하지 않았지만 표제작인 <에로망가섬의 세사람> 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감정의 굴곡이나 따스한 동화같은 느낌을 살려 호기심을 자아냈다. 

에로망가섬으로 떠난 세 사람이지만 애니메이션 오타쿠에 수선스러워 보이는 구보타를 제외한 두 명은 각자의 고민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다. 히오키의 비밀은 후에 드러나지만 사토의 고민은 연애와 일상이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돌아간 일본의 생활이 자신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은 얼마나 가치있는 인간인지 생각한다. 출장의 탈을 쓴 휴가지에서도 돌아가서의 일을 생각한다, 는 설정은 현실감이 느껴져 좋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테니까. 에로망가섬에서 자신을 환대해준 존 존과 그의 다섯 딸들과의 생활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앉아 부드러운 버터처럼 그 동안의 갑갑함을 녹여버렸던 것인지 의외로 사토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그러고보면 속마음의 묘사가 부족하고 오타쿠의 성향이 있긴 하지만 살아있는 젤리처럼 보이는 구보타야말로 에로망가섬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있는 그대로의 구보타는 고민할 것이 그다지 없는 인물이었을지도. 

히오키의 비밀은 마지막 작품인 <청색 LED>에서 드러난다. 그가 에로망가섬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동기, 숙소에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이유,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짐을 모두 벗어버리고 담담하게 현실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과정이 겉모습은 무뚝뚝하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사람을 닮은 문체로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에로망가섬의 세사람>과 <청색 LED>는 못해도 보통은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SF와 관능소설로 분류된 중간 작품들의 분위기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여신의 돌>과 <알바트로스의 밤>은 메세지가 부족했고 <새장, 앰플, 구토>는 그다지 내가 선호하는 소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긴 하다. 

확실히 <유코의 지름길> 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아직 손에서 놓기에는 아까운 작가인 듯 하다.  두 번째 접한 작품에서 요렇게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다음에는 단편집이나 연작단편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접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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