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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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밍겔라 감독, 랄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1997년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한 이 영화는, 그러나 사실, 나에게는 깊은 감흥을 주지는 못했었다고 기억된다.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10대의 나는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내 머리 한 구석에는 '그 영화는 나와 맞지 않았어' 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책으로는 느낄 수 있을까 하여 손에 집어든 원작소설. 늘 그렇듯 책과 영화에 대한 감상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겠지만, 책은 영화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캐서린, 알마시를 간호하는 해나와 젊은 군인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책에서는 알마시와 해나, 공병인 킵, 그리고 스파이로 활동했던 카라바지오가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홀로 알마시를 간호하는 해나에게 아버지의 친구인 카라바지오가 찾아오고 폭탄해체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도인 공병 킵이 머무르면서 네 명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전쟁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 황폐해진 마음을 핥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리고 알마시가 사실은 독일 첩자가 아니었을까 의심하면서.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 해나와 킵의 사랑도 작품 안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소재임에는 확실하다. 전쟁 속에서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 준 것,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싶게 만드는 것, 그 모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비롯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와는 달리 작품 안의 네 사람은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일 뿐이다. 알마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잃었고, 해나는 아버지를, 카라바지오는 손가락을, 인도인이지만 영국인과 함께 싸우는 킵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었다.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크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모두와의 생활을 통해 평안과 위로를 얻고자 발버둥친다. 

이야기의 주체는 알마시이기도 했다가 해나가 되기도 했다가 때로는 카라바지오, 때로는 킵이 된다. 시선과 공간, 시간 모두가 경계없이 자유롭다. 결말부분처럼 다른 공간의 사건이 같은 시간대에 서술되기도 하고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자는 그것을 '다중성'이라고 표현했는데, 나에게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마치 둥근 유리구슬 안의 장식품들처럼 다가왔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격렬한 감정의 변화도 잘 느껴지지 않고 그저 삶을 이어갈 뿐이던 등장인물들의 테두리가 어느 날 '원폭'을 계기로 깨져버리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로를 돌보고 치유하려던 그들이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것 같은 느낌. 

이 작품은 전쟁소설이자 연애소설이기도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소설이기도 하다. 그 '다른'에 대해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 어렵고, 어렵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깊이 있고 고요한, 색다른 매력의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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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이상한 소리 - 일본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서은혜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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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맞으면서 근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막부 체제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권력의 판도가 바뀜과 더불어 서양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시대를 맞아들이게 된 것이죠. 이와 함께 당연히 문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문학이 갑자기 '나는 근대문학이야!' 라고 선언할 수도 없고, 그 시점까지 읽혀지던 문학의 형식이 갑자기 변화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생활면에서는 아마도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천천히, '근대문학'이라고 불려질만한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겠죠. 너무 깊이 들어가면 어려워지고 또 그렇게 깊이 알 필요도 없지만 확실히 이 책에 실린 단편집들은 '근대'라고 불리던 때에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의 작품이니 일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표제작은 나쓰메 소세키의 <이상한 소리>이며 그 외에 구니키다 돗포의 <대나무 쪽문>, 시가 나오야의 <오오쯔 준끼찌>, 미야모토 유리코의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이단자의 슬픔>, 시마자키 도손의 <클 준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망원경과 전화>, <삽화>, <산다화>, 오오카 쇼헤이의 <모닥불>이 실려있습니다. 대부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없는 작품들 중심으로 엮어져 있어 새로운 자극을 받음과 동시에, 그들의 문학 세계가 이렇게도 깊고 깊은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할까요. 일본어를 전공한 저로서는 일본문학에 있어서도 조금은 알고 있다는 거만한 마음이 폭삭 사그라들고 말았답니다. 대신 앞으로는 겸손한 마음으로 문학작품과 작가들을 대해야겠다는 마음이 솟아났지요.  

이 중 한 작품만 살짝 소개드려 볼까요? 저는 구니키다 돗포의 <대나무 쪽문>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유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옆집에는 무척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는데요, 얼마나 가난하냐 하면, 바로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까말까한 가정인 것입니다. 더운물에 만 밥에 반찬은 단무지. 때에 전 홑이불을 함께 덮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또 한 번의 밤을 보내는 부부에게는 집을 따뜻하게 할 목탄도 이제는 없습니다. 결국 아내는 부유한 옆집의 목탄을 하나 둘씩 훔치게 되고 가난한 처지를 한탄하며 남편과 싸움까지 벌입니다. 울컥한 남편은 또 목탄 가게에서 한 자루를 훔쳐오고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결국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맙니다. 

부유함과 가난함, 안타까운 생활의 차이가 짧은 이야기 안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두 가정을 연결하면서도 단절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대나무 쪽문'입니다.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그 문을 넘어서는 일이 젊은 부부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인 겁니다. 가난에 대한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가 결국 목을 맨 장면은,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목을 매어서는 안된다' 같은 생각이 제 안에는 자리잡고 있거든요. 어쩌면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자의 호사스러운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가치가 있다는 작품이라고 해놓고 왜 별점이 다섯 개가 아닌지, 궁금하신가요? 이 별점은 작품에 대한 별점이라기보다 번역과 표기에 대한 별점입니다. 출판사에서는 '현행 외래어표기법이 표방하고 있는 영어 중심의 일방적인 표기법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각 언어의 독자성에 대한 존중을 취지로 수년 전부터 모든 외래어에 대해 원어 발음에 가장 가까운 한글표기방식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또 '현행 문광부의 외래어표기법은 규정의 통일성을 위해 영어식 발음을 따르고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만, 언어에 따라서는 우리말 된소리가 현지음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라고도 했고요. 

저는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책읽기가 참 많이 불편했습니다. 출판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예전에 제가 잠깐 일했던 출판사에서는 국립국어원의 표기 규칙을 따르고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일본어 'つ' 는 창비출판사에서는 '쯔'로 국립국어원에서는 '쓰'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도 몇몇 발음은 우리말의 된소리와 발음이 비슷하기는 합니다. 한국어로 표기하기에 불편한 점도 있고요. 하지만 출판사에서도 국립국어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만큼, 표기규칙은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는대로 표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학교에서도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게시되어있는 표기규칙대로 일본어 표기방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교육과 실제 쓰이는 표기가 달라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위에서 작가와 작품을 소개할 때 작품은 책에 있는 그대로, 작가는 국립국어원의 표기규칙과 학교에서의 수업내용에 따라 수정해서 올려봅니다. 

또, 번역 면에서도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빠, 타까 짱이 이질에 걸렸대요......" 하고 그런 표정을 지어가며 말했다. -p64, 시가 나오야의 <오오쯔 준끼찌>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그런' 표정이란 대체 어떤 표정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질에 걸린 듯한 표정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던 걸까요? 문장을 보니 원문이 어떻게 쓰여있었을 지 짐작은 갑니다만, 그 동안 읽었던 근대단편문학 중 이런 식의 읽기 힘든 번역은 처음이었습니다. 문장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랄까요. 적확한 우리 표현을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도 잘 압니다. 일본어는 생략과 축약의 미(?)를 갖는 언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할 때조차 그 미를 고스란히 가져와서는 안 되겠죠. 우리 정서에 맞게 고치는 것, 그것이 바로 '번역' 아니겠습니까. 이 작품집은 시장에 내놓은 일종의 '상품'입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의미가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상품은 독자들로부터 원망만 사게 될 거에요

이러니저러지 불평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이렇게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큼은 행복한 일입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프랑스, 중국, 폴란드, 러시아 편도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모두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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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18: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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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분 1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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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분이면, 당신은 앞뜰의 잔디를 깎고, 머리를 염색하고, 하키 경기 3분의 1을 관람할 수 있다.

 19분이면, 당신은 스콘을 굽거나 치과에서 이를 하나 넣거나 다섯 식구의 빨래를 갤 수 있다.

 19분이면, 당신은 세상을 멈추게 하거나, 세상에 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

 19분이면, 당신은 복수를 당할 수 있다.
바람이 지나간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알맞게 말 그대로 뼛속까지 시려오는 듯 차가운, 그렇지만 가슴 속 답답한 기운을 한 번에 가져가주는 상쾌한 바람이다. 아무리 상쾌하다 해도 지하철을 기다리는 일만 아니었다면 오래 맞고 싶지 않은 바람이었지만 오늘따라 햇살은 왜 그리 따뜻하고 찬란한지. 햇살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물들이 모두 반짝이는 듯 해서 나는 눈을 조금 찌푸려야 했지만 순간 나 자신까지 반짝이는 듯한 착각에 눈부심이야 조금 참아보기로 한다. 

장소는 한 번 지하철을 놓치면 10여분은 기다려야 하는 중앙선의 어느 역.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에 도착한 후 19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19분. 19분 전에 나는 역에 도착했고, 19분 동안 여기저기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나의 그 19분은 매우 평화로웠다.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을, 학교 다닐 때도 해본 적 없는 수업 거부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활기찬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몰래 빠져나오기를 잘 했다 싶었다. 나의 인생에서 19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또 조용히 흘러갔지만 누군가에게는 운명이 결정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리라. 

2007년 3월 6일 10시, 뉴햄프셔 주의 스털링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용의자는 피터 호턴. 호리호리한 몸에 안경을 쓰고 하얀 피부를 가진, 17세 소년. 그는 자동차 한 대를 폭파시키고 학교의 카페테리아, 교실, 화장실, 계단, 복도, 그리고 경찰에게 붙잡힌 라커룸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마주쳤던 사람을 모두 공격했고 시작된 지 19분만에야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러나 매슈 로이스턴을 포함한 10명의 사망자와 아름다운 얼굴을 잃게 된 헤일리 위버를 비롯한 많은 수의 부상자, 신체적인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남은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학생들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은 사건은, 피터 호턴에게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 지를 밝혀내며 다시 시작된다.

   모두들 내가 그 애들의 인생을 망쳤다고 하지만, 내 인생이 망가지고 있을 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요. -1권, p232
'맞춤형 아기'라는 다소 충격적인 설정의 작품 [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로 많은 감동과 아픔을 전해주었던 조디 피콜트가 이제는 '왕따 문제'와 '총기난사 사건'을 소재로 소외당하고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남은 평생 커다란 상처를 남길 사건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희생자들 외에 가해자 또한 상처받고 있지 않았는지를 깊이있는 시각으로 섬세하게 다루었다. 가해자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음을, 홀로 고통받은 시간에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이 작품을 읽다보면 2007년 4월 버지니아 주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조승희가 만들어낸 참담함과 아픔이 아니라 그의 무덤가에 누군가가 가져다두었던 편지와 꽃다발들이. 

작가는 사건이 일어나면 으레 피해자들에게만 국한되기 쉬운 초점을 이 작품에서는 가해자인 피터에게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 단 한 명의 친구라 부를 수 있었던 조지 커미어, 조지의 엄마인 알렉스의 시점을 넘나들며 각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피터가 어떤 아들이었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듣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서 책을 읽어내려가기가 무서워질 정도였다. 아이라서, 순진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친구를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어쩌면 그 순진함만큼이나 같은 비율의 잔인함도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단지...네가 우리와는 다른 애들을 대하는 방식이 싫은 것뿐이야, 알겠어? 낙오자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애들을 괴롭혀도 되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 애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거야.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1권, p376
'인기있고 싶다'는 점에서는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고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구는 당연하다. 때문에 늘 괴롭힘과 놀림을 당하는 피터 곁을 떠나 인기있는 아이들과 어울리려는 조지의 행동을 아무도 비난할 수는 없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 인기는 사막에서의 물 한모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다름'을 '틀리다'로 판단하고 배척해버리는 판단의 부족함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왕따'는 민감한 문제다. 정신적인 학교폭력이며, 따돌림을 당한 학생들이 자살하기도 하는 등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왕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기란 어렵고도 어렵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어설프게 어른이 끼어들어 더한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얼버무림,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늘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말들,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는 그럴듯한 충고와 핑계들이 어쩌면 상처받은 아이를 더 외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일들은 인생이라는 웅대한 게획에서 퍼즐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2권, p86) 는 걸 깨닫는 때는 현재가 아니라 먼 훗날이 될 것이므로. 문제의 심각성은 알고 있으면서도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의 인생을 망가뜨려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누군가는 영원히 걸을 수 없고 누군가는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으며 또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점심을 먹거나 그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부모는 자살을 하기도 하고 피페해진 삶 속에서 한 조각의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이 듣기 싫거든, 적어도 자신을 세상 속으로 보내 준 자신의 부모 또한 영원히 자식을 잃게 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통의 순간을 그들이 함께 해주지는 못했어도 말이다. 그것 또한 부족하거든 자신 또한 스스로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도 기억해주기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한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거야. -2권, p358
조디 피콜트는 '회색지대'를 그리는 작가라는 점에서 무척 마음에 든다. [쌍둥이별]에서도 그렇지만 [19분]에서도 세상을 흑백논리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가해자는 없고 오직 상처받은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에만 의존한 결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쉼없이 달려운 진실의 마라톤 끝에서 그녀가 선택한 결말은 덤덤하고 현실적이다. 시사성 있는 소재, 섬세한 표현력을 잃지 말고 멋진 작품으로 다시 찾아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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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파스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보통날의 파스타 - 이탈리아에서 훔쳐 온 진짜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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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한 가지 지켜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뱃속을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나는 심지어 저녁을 먹고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먹음직스런 파스타 사진에 밀려오는 배고픔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특히 토마토 소스 파트타를 좋아하는데 평소 즐겨먹지 않던 크림소스 파스타 사진에도 입맛을 다셨을 정도다. 어디 파스타 뿐인가. 이탈리아의 만두 라비올리에 뇨키와 리조또까지! 캬~요리와 관련된 책은 밤에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스타는 비교적 만들어먹기 쉬운 요리다. 예나 지금이나 '혼자 있으면서 뭘 해먹어!'라는 신념을 굳게 지키고 있는 나조차도 '몇 번' 정도는 파스타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것도 몇 년 전 이야기지만. 전문성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마트에서 파는 파스타면과 소스를 사다 대충 만들어먹은 파스타는 나름대로 먹을만했다고 기억하고 싶다. 예전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기분 내기 위해 먹었던 파스타는, 지금은 일상에서 쉽게 만들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우리와 가장 친숙한 요리 중 하나가 되었다.

[보통날의 파스타] 는 제목 그대로 파스타에 관한 책이다. 이미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라는 책으로 친숙한 작가는, 이탈리아 요리학교를 수료했고 시칠리아에서 연수한 후 귀국 후 셰프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동안 그냥 무심코 입 속에 넣기 바빴던 파스타.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아왔던 그 파스타의 세계가 현란한 사진과 레시피, 정겨운 이탈리아 문화와 함께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였다는 것이다. 그 동안 스파게티의 다른 이름이 파스타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콘길리에, 라자냐, 펜네, 페투치네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또 꾸불꾸불하고 짧은 파스타의 이름이 푸질리라는 것도. 파스타의 다양한 종류에서부터 재료, 소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를 어떻게 즐기는지, 그들의 식생활과 문화는 어떠한지에 관한 이야기가 파스타와 버무려져 맛있게 전개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고등어 파스타에 참치 스파게티, 이름은 들어봤지만 본 적조차 없는 오징어 먹물 파스타 등 파스타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더불어 나의 배고픔은 깊어만 갔다.  

정보도 자세하고 맛있어보이는 사진에 덤으로 레시피까지 실려있지만, 사실 쪼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냥 먹고만 싶은데 이런 것도 다 알아야 해?' 라는.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셰프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정말 유용한 책이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는 살짝 지루할 수도 있는 책이니 고려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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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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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가족'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가족'이라는 단어를 입에 머금으면 나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내다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들'. 분명 우리나라 작가의 인터뷰 중 하나였는데 누가 말한 것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 사람이 저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은 내다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가족=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저렇게 모질게 말할 수 없었겠지.

나에게 가족은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명명해주었던 사람들이자, 사랑과 미움, 원망과 애정, 실망과 친밀함 등 온갖 감정들을 나누고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라는, '가족이 뭐냐!'라는 말들로 모든 것이 통용될 수 있는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 '가족이니까'를 외치면서 타인에게 원하는 것보다 더한 사랑과 관심, 관용과 배려를 요구하게 되는 관계.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한다. '이놈의 집구석, 징글징글해. 혼자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지만 어쩌면, 역시 가족 없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 말을 아무 느낌 없이, 간단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만해도 징글징글한 이놈의 집구석, 여기에도 있다. 아버지는 돈 잘 버는 무역업체 사장,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재혼했으나 곧 또다시 이혼, 누나는 어릴 적 받은 상처로 제대로 된 생활을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상태이며 멀쩡해 보이는 남동생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그리고 현재 아버지와 누나와 남동생은, 화교인 새어머니와 의붓동생과 함께다. 그런데 잘하는 것이라면 바이올린 연주,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생활하던 의붓동생이 사라졌다. 막내의 실종을 둘러싸고 가족들이 숨기고 있던 비밀이 하나씩 둘씩 밝혀지고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가족이었던가, 가족이라 해서 서로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자문한다.

아마도 작가는 막내의 실종을 기점으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먹서먹해 했던 가족들이 하나로 뭉치는 과정과 가족이므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 게다. 하지만 계산이 조금 어긋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소설 안의 이 가족들은 결코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사람들과 온전히 같을 수 없다. 혈연의 문제가 아니다. 거짓과 은폐의 문제다.

가족도 결국은 각기 다른 개개인이 모여 살아가는 집단인데 사소한 비밀 한 가지씩 없을 수는 없다. 친구관계, 만나는 사람, 그 날 있었던 일 중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실이라고는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던 관계가 막내의 실종을 계기로 갑자기 진실과 사랑, 희생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들 가족 중 가장 솔직한 사람은 누나 뿐이다. 불안한 정서의 소유자지만 미움과 증오, 연민과 애정을 숨김없이 표출하는 사람은 그녀 한 사람이다. 나머지는 모두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을 뿐. 그러므로 가족의 희생, 큰 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설정은 작위적이다.

이야기 면에서도 조금 아쉽다. 한 남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 그 남자와 아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의 죽음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키며 기세좋게 시작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세심함이 받쳐주지 못한다. 미스터리 형식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꾀했으나, 당연히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희망을 내놓으며 이야기는 갑자기 종결된다. 흐지부지. 뒷심이 부족하다.

작가는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고,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금 두렵다.

라고 말한다. 그녀의 그 말로 인해 나는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재미는 있었으나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라고 말하기가 조금 겁이 났다. 창작의 고통은 조금도 모르는 내가 과연 그녀를 두렵게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독자고 그녀는 작가다. 그녀의 작품은 '독자'가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싶다. '가족'이라는, 우리나라 사람 누구의 가슴을 울릴만한 소재로 글을 썼다고 해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졸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그녀에게 기꺼이,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훌륭한 작품' 이라는 타이틀을 주고 싶지는 않다.

글의 끝에서, 나는 가족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자문해본다. 어려운 문제다. 우리도 소설 속 가족들처럼 '집 안'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을 알고 있을 뿐이지 집 밖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가족에 대해 전부 알 수 없고, 가족도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가족이란, 자신의 눈으로 보는 모습들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가족'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가족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나를 둘러싼 '가족'에 대한 정의다. 작가가 나에게 '너는 가족에 대해 모른다'고 한다면 나는 그저 '다는 모른다' 라고 대답하면 그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되묻고 싶다. '당신은 가족에 대해 무얼 아느냐' 고.

완벽한 해답은 없다. 그저 함께 웃고 울고 화내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부대끼며 살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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