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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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라지고,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제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의 출간을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표지'입니다. 마치 한폭의 그림같은 표지가 너무나 매혹적이에요. 책을 소장하는 이유로 내용만큼이나 표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로서는 정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표지들인데요, 특히 이번에 출간된 [위대한 앰버슨가]의 표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련한 향수같은 감정이 느껴져 시즌4의 또다른 작품인 [악의 길]과 함께 '어느 책을 먼저 읽을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용으로 사용 중인 전면 책장에 언젠가는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책들을 꽂아두게 되길 바라봅니다!

 

[위대한 앰버슨가]에서 '결정적 한순간'을 맞닥뜨린 인물은 이 집안의 유명한 망나니 '조지 앰버슨 미내퍼'입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그가 천벌을 받아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그런 인물이에요. 하지만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앰버슨가'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그 명성과 부가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신은 오직 주어진 것을 충실히 누릴 뿐이라고 생각하죠. 조건도 조건이지만 정신까지도 완벽한 금수저의 길을 걸어온 그가, 한 여성에게 매료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모건. 바로 조지의 어머니 이저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유진 모건의 딸인데, 조지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걸까요. 유진 모건이 자신이 받들어 모시는 '앰버슨가'의 명예에 위협이 될 거라는 것을요.

 

"내......어머니는 당신이 오, 오늘 여기 온 걸 전혀 알 생각이 없을걸. 다른 날이라 해도 마찬가지고!"

"내가 자네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집에서는 당신을 원하지 않아, 모건 씨. 지금이건 다른 어느 때건. 이만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지는 유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았다.

p 332

 

이미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을 제가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저는 이 장면을 비중있게 다루었을 것 같아요. 닫히는 문 소리를 엄청 크게 한다든지, 닫히는 문 사이로 조지와 유진의 눈길이 마주치는 장면을 슬로우로 진행시킨다든지 해서요. 제가 이 장면을 조지의 '결정적 한 순간'으로 꼽는 이유는, 이 때를 계기로 조지의 행동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자신에게 청혼했다가 자동차 산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자 유진을 다시 만나게 된 이저벨은 분명 설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는 남편과 아들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겠지만 남편이 병사하자 그녀와 유진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 조지입니다. 뼛속까지 앰버슨가의 사람. 자신에 대한 평판은 평범한 사람들의 시기로 여기지만, 어머니의 평판은 추문으로 여겨 어떻게든 이저벨과 유진 사이를 막으려고 하는 아들. 결국 헌신적인 어머니인 이저벨은 아들의 소망, 혹은 강압에 못이겨 유진과 결별하게 됩니다.

 

육성으로 '이눔의 자식, 그러지 마'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조지는 끝까지 이저벨에게 잔인해요. 그리고 앰버슨가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갑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걸 잃게 된 조지는, 한때는 루시에게 '자신은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떵떵거렸던 조지는, 고모를 부양하며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화학 회사에서 일하게 되죠. 작품의 초반에 묘사된 앰버슨 가의 부와 명예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후회와 절망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하지만 조지에게 '결정적 한 순간'이 있었듯, 유진 모건에게도 '결정적 한 순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으로 인해 아마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결말에 만족하지 않았을까요. 100여 년 역사의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네 명의 작가 중 하나인 부스 타킹턴. 게다가 [위대한 앰버슨가]는 모던 라이브러리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영어 소설 100선'중 하나에 꼽힌 수작입니다. 독서의 재미를 정말 충분히 맛보게 해주었던 재미있는 작품이었어요. 부스 타킹턴의 또 다른 작품들도 어서 만나보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이 작품에서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렸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타이타닉이 출발할 때의 환성과 그 호화로운 분위기는 이 배가 영원히 그 명성을 유지할 것만 같았죠. 하지만 배는 침몰하고 역사상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타이타닉의 한때 누렸던 명성과 그 침몰은, 앰버슨가의 그것과 닮아 있어 특히 영화를 애정하는 저로서는 그리운 느낌으로 [위대한 앰버슨가]를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혹시나 저처럼 <타이타닉>을 즐기신 분들이라면 이 작품에서 비슷한 감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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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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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귓가에 울리는 소리없는 절규!!]

 

매 시즌마다 하나의 주제 아래 다섯 권씩 출간되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의 주제는 '결정적 한 순간'인데요, 저는 [악의 길]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부터 이 작품은 어쩌면 시즌 3의 주제인 <질투와 복수>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남자의 열정으로 시작된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여자의 배신과 그에 따른 질투와 복수가 담겨 있어 한편의 스릴러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결정적 한 순간'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며 읽는 과정 속에서 인간을 광기의 길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인지 혹은 운명인 것인지 등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이끈 그 한순간은 대체 언제였을까요.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요"

"무엇 때문에?"

"당신 때문이죠, 멍청이!"

 

이것이 씨앗이었다.

p 46

 

가난하고 다소 거칠지만 성실한 일꾼인 피에트로 베누는 니콜라 노이나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처럼 가진 것은 없으나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인 사비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니콜라의 딸인 마리아가 자신 때문에 사비나를 질투한다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려요. 사비나에게 불타올랐던 마음은 한순간에 사그라져 마리아를 향합니다. 그리고 저는 피에트로가 '악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결정적 한 순간을 바로 이 장면으로 꼽았어요. 피에트로를 그리 격정적으로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마리아의 아름다운 외모? 자신을 밀어내는 주인집 딸을 향한 오기? 원인이 무엇이었든, 저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피에트로는 주인집 딸인 마리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하인의 구애에 질색하던 마리아였지만 남자로부터 그런 열정적인 마음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새 피에트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고뇌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되어 결국 피에트로를 배신하고 오래 전부터 자신을 마음에 둔 프란체스코와의 결혼을 선택하죠.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한때는 격하게 입맞춤을 나누었던 남자가 감옥에 있게 되었는데도 마리아는 자신의 안전한 결혼식을 위해 피에트로가 조금 더 수감생활을 하게 되길 바라기까지 해요. 결국 그녀는 피에트로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 밀회를 즐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결혼은 돈 많고 안정적인 남자와 하고 싶었고요. 이리 보면 마리아의 모습은 지금 현대인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리아의 배신으로 결국 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 피에트로. 하지만 진정한 '악의 길'은 바로 마리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피에트로가 저지른 악행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끝내 외면하다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두려워해요. 마리아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작품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저는 왠지 이 두 사람이 끝없는 절망과 두려움의 나락에서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결혼 생활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여성 작가로서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라치아 델레다. 특히 [악의 길]은 사르데냐 섬의 독특한 풍경과 문화가 녹아들어 있어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한층 현실감있게 다가옵니다. 읽는 동안 어쩐지 뭉크의 <절규>가 떠올랐던 작품. 어쩌면 마리아와 피에트로의 내면도 이렇게 절규로 가득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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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걸 스토리콜렉터 106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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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의 영예에 어울리는 작품]

 

스릴러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마이클 로보텀의 '조 올로크린' 시리즈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도 출간될 때마다 챙겨서 읽기는 했는데, 사실 그리 큰 매력은 못 느꼈었어요. 신간이구나, 그럼 읽어야지-라는 느낌으로 계속 읽었었던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굿 걸 배드 걸]의 주인공이자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를 이끌어갈 사이러스 헤이븐을 만난 순간, 이 시리즈는 계속 모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는데 다른 독자분들은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유독 상처받은 존재에 끌려요. 대표적으로 요 네스뵈님의 '해리 홀레'가 있습니다. 알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해리 홀레의 상처는 어마무시하죠. 어둠이 항상 해리 홀레의 발 밑에서 그를 먹어치우려고 입을 벌리고 있어서, 어느 때는 해리 홀레 자신에게는 차라리 죽음만이 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오래오래 살아서 작품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이 사이러스 헤이븐에게 깃든 어둠도 해리 홀레와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짙습니다.

 

사이러스 헤이븐의 가족은 몰살당했어요.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 '누군가'를 밝히면 아직 읽기 전인 독자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여기서 참으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를 알고난 후 소설 바깥의 저도 충격을 받을 정도였으니 사이러스가 받은 아픔과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었을 겁니다. 상상만으로도 목이 턱 막혀와요. 어린 시절의 끔찍한 사건 때문인지 현재 그는 범죄 심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런 그가 거칠고 상처받은 작은 동물같은 소녀 이비를 만납니다. 참혹한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하지 않는 이비는 심지어 자신의 생년월일조차도 정확히 몰라요. 과거를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사이러스에게조차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 이비에게는 진실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어두운데 모두에게 사랑받던 피겨스케이팅 유망주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전혀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이 소녀가 감추고 있던 비밀들. 작품은 끝날 때까지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저도 이 범인 찾느라 한참을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고 했는데요, 범인이 밝혀지고 난 뒤에는 조금 어이가 없었어요. 사실 중간에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 기분이 범인과 관련있을 줄이야!! 결국 과거의 숨겨진 잘못은 어느 순간에는 드러나기 마련인가 봅니다.

 

[굿 걸 배드 걸]은 스티그 라르손 작품에 나오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픔을 간직했으나 사이러스에게 조력하는 이비. 혹시나 이번 작품에서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이 등장할까 내심 기대했는데, 역시 아직 그녀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시리즈를 예감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슉슉 읽히고 속도감도 좋아요. 어둠을 간직한 등장인물들도 좋았고요. 다음 작품에서는 이비의 과거가 밝혀질 지, 빨리 다음 편이 출간되어 이 궁금증을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네이버 독서카페 '책과 콩나무'를 통해 <북로드>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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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레이디가가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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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의 도가니탕으로 시작했으나 환상특급적으로 마무리된 이야기들]

 

책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출판사 북스피어 대표님의 작명센스에 대해 이번에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북스피어에서 출간되는 책은 또 무슨 시리즈인가를 먼저 살펴보게 되는데요, 아니나다를까! 미치오 슈스케의 [N]에는 <레이디 가가 시리즈>라는 이름이 붙어 있네요. '헉, 뭔 레이디 가가??!!'하며 책날개를 정독했더니 아무래도 레이디 가가의 팬이셨을 것 같은 마음이 잔뜩 담겨 있더라고요. '무대를 씹어 먹을 듯한 포즈, 초자연적인 의상, 의혹의 도가니탕, 욕을 먹는 그 모든 퍼포먼스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가창력, 환상특급적 피날레의 레이디 가가'라는데 대체 이 시리즈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감히 감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리즈도 딱 10권만 출간하고 그만두시겠다는데, 과연??!!

 

이 <레이디 가가> 시리즈의 포문을 연 작품은 미치오 슈스케의 [N] 입니다.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작품집으로,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뀌는 설정을 목표로 했다고 해요. 어느 장으로 시작해서 어느 장으로 넘어갈지, 어느 장을 제일 마지막으로 읽을지 등 모든 것이 독자의 손에 달린 작품. 작가는 독자들이 순서대로 읽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 작품들을 거꾸로 배치하는 트릭(?)까지 준비해 두었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첫 장을 선택하는 데 조금 망설여졌어요. 살짝 선택장애가 있는 저로서는 '그냥 맨 처음부터 읽다가 거꾸로 된 장이 나오면 그 때는 책을 돌려서 읽지 뭐' 했는데, 또 그러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 첫 장을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저의 선택은!!

 

본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 여섯 편의 이야기의 프리뷰에 해당하는 부분이 실려 있습니다. 독자는 그 부분을 읽고 어느 장을 선택할 지 결정할 수 있어요. 저는 결국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을 시작으로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이름 없는 독과 꽃>,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로 끝을 맺었습니다. 첫 장을 고르는 데만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 그 후부터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내용을 따라갔어요.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이야기, 결말을 예상하지 못해 안타까웠던 이야기, 결국에는 후회와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 등이 실려 있습니다.

 

전 저의 선택이 참 탁월했던 것 같아요. 각 장에는 '구름 틈새로 내려온 다섯 줄기 빛이 천천히 퍼져 다섯 장의 꽃잎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다에 피어난 빛의 꽃. 저마다 그 빛의 꽃을 발견한 후 누군가는 놀라움을, 누군가는 회한을, 누군가는 기도를 바치는 장면마다에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각각의 삶은 모두 다르고, 인생에는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이나 기대를 바라게 되는 마음을 이 빛의 꽃으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요. 제가 마지막으로 읽은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과 내용이나 메시지가 특히나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어쩐지 운명처럼 다가오기도 했답니다.

 

기존의 연작단편집과 크게 다른 점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고른 작품들마다 신기하게도 앞에 나왔던 인물이 뒤에 다시 등장하고, 그의 과거와 현재가 맞물려서 저는 딱 시간 순서에 맞는 흐름이었다고 느꼈어요. 저와 다른 순서로 읽은 분들은 이런 시간의 흐름이 역으로 진행된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작품들을 한편 한편 읽어나갈수록 미치오 슈스케가 만들어낸 이 세계가 돌고 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어떤 현상을, 혹은 어떤 생명을 가운데에 두고 마치 그 공간이 구심점인 양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죠. 말로는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입니다.

 

출판사 대표님은 바로 이런 점을 노렸던 걸까요. 처음에는 의혹의 도가니탕으로 시작한 작품집이었지만 환상특급적 피날레를 장식한 이야기들. 작가도 작가지만, 다음 <레이디 가가> 시리즈는 무엇일지 정말 너무나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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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수확자 시리즈 1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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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소재로 재미와 철학적 사색 모두를 얻을 수 있는 작품]

 

지금 당신이 사는 세상에는 굶주림과, 질병, 전쟁은 물론 죽음까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수'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나흘 정도면 재생 센터에서 완벽한 몸으로 다시 눈뜰 수 있죠. 이 유토피아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은 슈퍼컴퓨터인 선더헤드. '그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몇 번이고 젊은 몸으로 회춘해서 영원과도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을 조절하기 위해 생명을 끝낼 의무를 가진 '그들', 수확자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평범하다는 것에 지루함을 느낀다는 사춘기 소녀 시트라와 소년 로언은 수확자 패러데이의 선택을 받아 수확자 수습생이 됩니다. 패러데이는, 타인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 수확자의 임무에 있어 윤리와 도덕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두 사람을 수습생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다는 것, 죽음을 앞둔 이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패러데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이는, 말 그대로 타인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것을 광적으로 기뻐하는 사람, 고더드입니다. 특히 그는 한꺼번에 대량의 사람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하고, 그런 그를 비판하는 수확자들도 있지만 찬양하는 이들의 수도 무시할 수 없어서 수확령은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시트라와 로언에게 닥친 시련, 그 시련을 뛰어넘어 서로를 살리고자 하는 시도, 점차 무르익어 가는 두 사람의 애틋한 마음 등 대중소설로서의 재미도 충분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수확자들의 철학입니다. 곳곳에 삽입된 수확자들-패러데이, 퀴리, 고더드 등-의 <수확 일기>를 통해 그들의 고뇌와 욕망을 엿볼 수 있어요.


나는 일시적으로 신체 일부를 잃거나,

일시적으로 목숨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는 기벽을 여럿 목격했다.

사람들은 맨홀에 빠지고, 떨어지는 물체에 맞고, 빠르게 움직이는 차도에 넘어진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웃어 버린다..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 벌어져도 그 사람은 만화 속의 코요테와 마찬가지로

하루 이틀만 지나면 멀쩡해진 몸으로 돌아오니까.

 

불사성(不死性)은 우리 모두를 만화로 바꿔 놓았다.

-수확자 퀴리의 <수확 일기> 중에서, p226


자꾸 곱씹어보게 되는 <수확 일기>들. 타인에게 죽음을 전달할 권리를 갖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고민은 물론 수확자로서의 중압감, 그로 인해 꾸게 되는 악몽 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그 일이 결코 우쭐해할만 것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고더드처럼 수확자로서의 일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는 감상을 남긴 이도 있지만요.


내가 인류에게 바라는 가장 큰 소망은 평화나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우리 모두의 내면도 조금씩 죽기만을 빈다.

공감의 고통만이 우리를 인간으로 유지시킬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잃어버린다면

어떤 신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수확자 패러데이의 <수확 일기> 중에서, p449


죽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소멸된 것은 죽음 그 자체만이 아니었어요.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정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열정, 타인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하는 공감 능력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서 그런 생에 대한 열정과 공감 능력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기계와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수확자 제도에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수확자들과 그들이 하는 일에는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선더헤드. 이번 [수확자]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선더헤드는 시트라에게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선더헤드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시트라를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긴장감이 점차 높아지는 가운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게 된 로언의 행보가 특히 기대됩니다. 고뇌 없이는 걸어갈 수 없는, 걸어가서는 안 되는 수확자의 길. 그 길을 선더헤드가 응원하게 될지, 방해하게 될지 어서 2권으로 달려가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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