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는 헤르만 헤세 A Year of Quotes 시리즈 2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유영미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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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위로해주는 따뜻하고 깊은 글들]

 

요즘 저는 이유 모를 우울감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 어제 저녁에는 첫째의 사소한 한마디에 폭발해서 버럭하고, 아침에는 고집부리는 아이 모습에 또 버럭.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괜히 애꿎은 아이들에게 화살이 날아가버리는 것 같아서 등교시키고 난 지금 엄청난 자괴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다시 없을 휴직 기간이니 이 시간을 즐겨야 할텐데 왠지 모르게 불안해서 괜히 서성거리게 되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성인 ADHD 처럼 산만해요. 이럴 때는 그렇게 애정하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거 필요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 책을 몽땅 사들였어요. 옆지기가 알면 깜짝 놀라 펄쩍 뛸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인가;;), 쇼핑을 즐기지 않는 제가 자꾸 뭘 사는 것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집안일은 쌓여 있고, 그래도 아이들 없을 때 조금이라도 마음을 추스리려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책은 필수입니다. 복잡한 서사를 가진 책 말고요, 그렇다고 육아서나 자기계발서는 더욱 아니고요, 짧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책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럴 때는 어떻게 아는지 운명처럼 또 책이 찾아오더라고요. 요즘 상태 안 좋은 제가 조금씩 읽고 있는 책은 헤르만 헤세의 글귀가 담긴 [매일 읽는 헤르만 헤세]입니다.

 

사실 저는 헤세의 작품들을 어렵다고만 생각하며 멀리하던 중이었어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헤세 x 정여울] 편을 읽기 전까지는요. 정여울님의 능력 덕분이겠지만 그 때까지 헤세에게 가지고 있던 거리감 같은 것이 한번에 사라졌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난 이후에는 헤세의 책을 앞에 두어도 그렇게 두렵지(?) 않더라고요. 물론 여전히 그의 작품을 전부, 완벽하게 이해한다고는 말씀 못드리지만 적어도 도전하기에 머뭇거림이 없어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매일 읽는 헤르만 헤세] 책을 만났을 때부터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작품도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될테니까요.

 

매일 매일 하나씩 읽기에 전혀 부담없고, 마음만 먹으면 이틀이면 완독할 정도의 짧은 글이 담겨 있어요(하지만 단시간의 완독은 추천드리고 싶지 않아요 :)) 한 구절 읽고 명상하기 딱 좋은 그런 내용입니다. 날짜가 적혀 있어 해당 날짜에 하나씩 읽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마음 내키는 날에는 눈 딱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기도 했어요. 그렇게 펼친 페이지가 그날의 저에게 가르침을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요.

 

오늘 제가 펼친 페이지에는요.

 

어떤 물건을 잃어버린 순간 그 물건은 그 가치가 과대평가되고, 훨씬 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인간의 약점 중 하나다.

p 200

 

어쩜 이렇게 저를 잘 아시는지요! 집에 책이 쌓여가면 한번씩 정리를 해요. 나눔도 하고, 친정으로 옮겨놓기도 하고요. 옮겨놓은 책은 어쨌든 아직 제 소유니까 괜찮지만, 이상하게 나눔한 책이 못견디게 읽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꼭 참지 못하고 구입하고선 왜 나눔했나 가끔 후회하기도 합니다. 엄청 미련하죠. 나눔할 때는 그 느낌에 뿌듯해 해놓고서는, 어느 순간 그 책을 잊지 못해 후회하다니. 아마 헤세의 말처럼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훨씬 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으로 다가오기 때문인가 봅니다.

 

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따뜻한 그림들에 위로받는 듯한 기분도 들어요. 편지와 일기글에는 친절하게도 연도까지 표시되어 있고 인용된 그의 작품들도 짧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상적인 부분은 헤세의 시도 접할 수 있다는 점이예요. 매월의 첫 페이지에는 시로 장식되어 있어서 어쩐지 그 달이 시작될 때 꼭꼭 챙겨읽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삶과 죽음, 문학과 에술에 관한 글을 읽다보니 생전 하지도 않는 필사가 하고 싶어집니다. 그냥 읽고 흘려보내기에는 아쉬워요. 종이에 펜으로 꼭꼭 눌러담아 마음 속 깊숙이에 간직하고 싶은 글들. 다양한 문장들을 통해 그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 벅찼던 책이었어요. 더불어 날뛰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아 더 소중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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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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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선택]

 

사회를 향해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며 날카로운 시각으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 나카야마 시치리가 이번에는 '안락사'를 소재로 독자에게 묻습니다. 만약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이 고통받고 있다면 당신은 안락사를 선택할 용의가 있느냐고.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의 고통이란 과연 어느 강도일까요. 얼마나 아파야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걸까요.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채워지고 그 어떤 삶의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시간이, 과연 '삶'이라 부를만한 것일까요?

 

어린 소년 마고메 다이치가 나쁜 의사 선생님이 자신의 아빠를 죽였다며 경찰에 신고합니다. 단순히 어린 아이의 착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이누카이 하야토와 아스카 콤비가 사건 청취를 위해 장례식장을 방문하죠. 그 곳에서 집으로 찾아온 의사가 두 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콤비. 그들은 연쇄살인을 직감하며 그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지 과거 기록을 조사하기 시작해요. 결국 '닥터 데스의 왕진실'이라는 사이트를 발견하게 된 경찰. 그 곳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안락사를 권유했던 '잭 케보키언'의 계승자라 지칭하는 '닥터 데스'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투병 중인 딸 사야카를 떠올리며 죽음의 존엄과 법의 울타리 안에서 고민하는 이누카이. 그러나 그는 경찰입니다.

 

[닥터 데스의 유산]은 범인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추리소설인만큼 범인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 범인의 의도, 그리고 닥터 데스의 범죄로 인해 고민하게 되는 사회 문제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간호를 오래 하게 되면 효자의 마음도 돌아서게 된다는, 병간호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에요. 심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가계를 위협하는 엄청난 치료비, 그에 뒤따르는 대출금 등을 떠올려보면 병간호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매일매일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자신은 그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 저라도 충분히 닥터 데스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내리기란 힘들 거예요. 누군가는 인간으로서의 죽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가 범죄에 이용당할 가능성을 배죄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는 것 같은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이누카이의 딸 사야카가 남긴 말이 울림을 줍니다.

 

"아빠, 안락사를 용납하지 못하는 거지?"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몰라도 완전히 찬성하는 건 좀 그래."

"그건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이야. 왜냐하면 사실은 가족을 죽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모두 근본은 똑같은 배려에서 나오는 마음이니까. 오래 산다고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잖아. 내 생각에 그 둘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의 차이 같아."

p 400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읽다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와 문학의 힘이 아닌가, 또 한번 나카야마 시치리라는 작가에게 감탄했던 작품이었어요.

 

** <블루홀식스>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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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시리즈 세트 - 전3권 - 수확자 / 선더헤드 / 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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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죽음을 선사해야 하는 수확자들!! 설정만으로도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수확자 시리즈>를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한 권당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재미있었어요. 수확자로서의 의무, 수확자로서의 권리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인 선더헤드의 고뇌,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을 다각적으로 다루고 있는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정의로운 수확자인 패러데이와 마리, 신참 수확자인 시트라와 로언 VS 수확을 즐기는 사악한 수확자 고더드의 대결 구도를 기본으로 작품이 진행되지만 층층이 쌓여가는 이야기 속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어요. 등장인물 모두 입체적이지만 특히 마지막 권인 [종소리]에서 드러난 음파교인 아스트리드의 신념 앞에서는 그만 저도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설정된 구도에 모두 우연은 없습니다. 어쩌면 작가가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머리속에 계획하고 글로 옮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근래 읽은 SF 중 최고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닐 셔스터면의 다음 작품은, 그게 어떤 설정이든 무조건 읽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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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3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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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까지 완벽한 최고의 SF]

 

드디어 장대한 <수확자> 시리즈가 막을 내렸습니다. 3권이자 마지막권인 [종소리]를 읽기 전부터 저의 관심은 악당 고더드가 과연 어떨 결말을 맞을 것인가, 선더헤드가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인듀라가 가라앉은 원인을 수확자 루시퍼, 즉 로언의 탓으로 돌려 그를 전세계가 저주하는 범인으로 몰아간 고더드는 모든 대륙을 통합하여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야망을 펼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더드의 발 아래 엎드리고, 누군가는 반기를 들면서 세상은 사망 시대 이후 찾아온 최대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죠. 고더드의 손아귀 안으로 세상이 떨어진 그 날로부터 3년, 얼어붙었던 시크라와 로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평범한 모든 이들이 불미자인 상황에서 오직 혼자만 선더헤드와 소통할 수 있게 된 그레이슨 톨리버. 그는 음파교 안에서 '종소리'로 불리며 예언을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신앙이 되어 음파교가 세력을 확장해나가지만, 선더헤드가 그레이슨을 '종소리'로 만든 이유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그의 발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지만 그레이슨은 절대 우쭐거리거나 거만해지지 않습니다. 그가 귀를 기울이는 오직 단 하나의 존재는 선더헤드. 과연 이 길이 어디로 통할지 그레이슨은 예측도 할 수 없지만, 그저 선더헤드가 하는 일이려니, 무슨 계획이 있겠거니 하는 이미지라고 할까요.

 

시트라가 수확자 아나스타샤로서 고더드의 과거 악행을 폭로하기 시작하고, 그 과거가 현재 선더헤드가 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나면서 모든 인물과 모든 상황이 하나의 점으로 귀결돼요. 작품 속 등장하는 악인이라 해도 조금은 연민을 자아내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고더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악할 수가 있나요. 그가 맞이한 최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가 기대했던 강도에는 미치지 못한지라 그 점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로언과 시트라의 결말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고, 음파교를 철저하게 믿었던 아스트리드가 자신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는 저조차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사실 선더헤드가 이대로 폭주하지는 않을지, 공격성과 살의를 띠고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살육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이 살짝 있었는데, 이 선더헤드마저도 마지막에는 감동을 주네요. 인공지능의 긍정적인 예라고 한다면 바로 이 선더헤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길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누가 될까 너무 염려스러워요.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방대한 분량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 그 하나입니다. 유토피아의 파멸이자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감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너무나 완벽한 SF 라 칭송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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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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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이언 매큐언!!] 

 

한때 '악마적 글쓰기'로 불리며 제 마음 속 한 자리를 차지했던 작가, 이언 매큐언. 예전 그 때의 저는 그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인가 완전히 이야기 속에 푹 빠져버렸고, [속죄]를 읽고나서는 다시 없을 작품이라며 저만의 평가를 내리기도 했죠. 국내 출간된 그의 작품은 (저의 기억대로라면) 전권 소장 중이고, 결혼하면서 많은 책을 친정으로 보내면서도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는 애장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라 국내 초역인 줄 알았는데 예전에 [이런 사랑]으로 번역된 적이 있더군요. 구입만 해놓고 아직 읽지 못한 [이런 사랑]을 [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결국 읽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클래리사와 소풍을 간 남자 조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소년을 태운 채 날아갈 위기에 처한 열기구를 발견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주저없이 달려간 조. 그와 함께 뛰어온 다른 네 명의 남성과 함께 열기구에 달린 밧줄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몸무게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결국 하늘로 떠오른 열기구. 누가 먼저였는가를 가릴 새도 없이 다섯 명의 남자 중 네 명이 밧줄을 놓아버리고, 가벼워진 열기구에는 단 한 명의 남자 존 로건만 매달려있게 됩니다. 결국 추락한 그 남자. 조는 자신이 최초로 밧줄을 놓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는 이야기의 초반을 읽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이 윤리적인 문제를 다룰 것이라 예상했어요.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렸으나 밧줄을 놓은 것에 대해 잣대를 들이대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죠. 하지만 역시 이언 매큐언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의 예상과는 굉장히 다르게, 그는 독자에게 갑자기 '사랑'이라는 주제를 들이밉니다. 조와 함께 날아가는 열기구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던 남자 제리 패드가 난데없이 조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급변해요. 제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제리의 주장은, 조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고,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하는데 제가 아무리 앞뒤를 살펴봐도 그런 상징들은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었거든요. 혹시 이 남자가 열기구 사고 때문에 심한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리의 존재를 조의 연인 클래리사조차 믿어주지 않습니다. 제리가 보낸 편지도 조의 손글씨와 비슷한 것 같다고 하고, 자신은 집 앞을 지키는 제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해요. 순간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리의 존재는 조의 망상이 아닐까? 로건의 추락 장면을 목격한 조의 뇌가 충격을 감당하기 위해 제리라는 존재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던 조가 제리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모든 신경이 제리에게 집중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리가 등장한 시점부터 로건의 죽음으로 인해 받았던 양심의 가책은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이었거든요. 

 

다만 로건의 죽음에는 그의 아내인 진이 의심하는 한 가지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비밀 때문에 진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온전히 슬퍼할 수가 없어요. 슬픔보다는 배신당했는다는 분노, 그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때문에 그녀의 삶 또한 빠르게 무너져갑니다. 조와 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평소와 같은 보통 날들이었다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옆에 있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대처가 좀 더 이성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일상에 생기는 그런 균열들이 한 사람을 얼마나 괴롭힐 수 있고, 망상에 빠트릴 수 있는지 그 위력을 새삼 느꼈다고 할까요. 

 

독자의 뇌가 빠르게 회전하며 무엇이 진실인가를 가늠하고 있을 때, 마침내 '드클레랑보 증후군'이라는 용어와 함께 제리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그 지점에 이르기 위해 작가는 지성과 감성, 이성과 신앙의 시각에서 여러 측면을 검토하며 논리를 펼쳐나가는데요, 이 과정이 이해하기 쉽다고는 결코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마치 저의 뇌가 재배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몰라도, 저처럼 다소 이 작품을 어렵다 생각하신 독자 분이라도 그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이런 작품은 이언 매큐언밖에 쓸 수 없다는 느낌을 받으실 날이 분명 올 겁니다. 분명 매력 있는 작가이니 포기하지 말아주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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