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콤한 픽션(최지애. 걷는사람. 2023. 304쪽)
: 전혀 달콤하지 않은 현실들. 어찌할 수는 없다. 묵묵히 견디는 수 밖에.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매일매일 보이는, 그리고 겪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 소재는 흔하다. 하지만 작가의 글솜씨가 나쁘지 않다. 앞으로가 기대될 만큼.
서술 스타일은 「달용이의 외출」이 가장 좋았지만, 최애로 꼽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2. 나와 퓨마의 나날들(로라 콜먼, 박초월 역. 푸른숲. 2023. 448쪽)
: 런던에 살던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 지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던 중 볼리비아의 야생동물 생추어리에서 잠시 봉사활동을 하기로 한다. 불법으로 포획, 밀매되어 학대당하다 구출된 퓨마 와이라를 담당하게 된 저자는 원래의 체류 기간보다 훨씬 길게 머물며 와이라와 점차 친해지고, 생추어리에 적응하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내용 요약만 하면 기존의 야생동물 교감 에세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는 다른 결의 감동이 있다. 볼리비아 최초의 야생동물 생추어리의 현실적인 모습들, 특히 동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열악한 정글의 환경. 단순히 뜨거운 샤워를 못하거나 푸세식 화장실만이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숲 안에서만 지내서 햇빛이 모자라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기도 하고 탄수화물만 먹어서 배가 부어오르기도 하는 현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또한 동물과의 생활도 많은 도시 사람들이 막연하게 상상하듯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와이라는, 그리고 그 곳의 구조된 동물들은 겁이 많고 경계심이 가득할 수 밖에 없고, 야생동물이기에 편리한 대로 길들여지지도, 길들일 수도 없다. 예산 문제와 산불, 정부의 규제는 어쩌면 뻔한 거고.
그래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야생성을 회복하는 와이라와 다른 동물들의 모습은 힐링이다. 거기에 더해 저자의 회복도. 다만 모두 느리다. 느릴 수 밖에 없고, 빠를 필요도 없다. 저자는 현재 영국에서 환경 및 예술 운동 단체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하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게 이야기한다. 와이라처럼. 비록 사람들에게 학대당하고 잘못 이용되었지만 본성을 잃지 않은 야생동물들처럼.
3. 나, 나, 마들렌(박서련. 한겨레출판. 2023. 272쪽)
: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들. 김초엽 작가의 추천사대로 이 모든 이야기가 한 명의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박서련의 인물들은 다 강단있다. 겉보기에는 고민 많고 결정하기 힘들어할 지라도, 자신만의 원칙이 있고 그걸 지키고자 한다. 사실 첫번째 작품(「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가 정말 좋았어서 나머지 작품들에 대해서도 호감을 담뿍 가진 채 읽기 시작했고, 다 괜찮았다. 비록 첫번째 작품도 그리고 다른 작품 중에서도 플롯이 전형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저자가 창조해 낸 평범하지만 특별한 인물들이 너무 좋아서, 난 다 좋았다.
4. 타인의 외피(앨런 에스킨스, 강동혁 역. 들녘. 2016. 400쪽)
: 미니애폴리스에서 한밤중에 교통사고가 난다. 피해자 제임스 퍼트넘은 죽기 직전 "놈들이 그 여자를 찾기 전에 그걸 찾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피해자의 동거녀에게 접근해서 피해보상 소송을 걸게 하려던 변호사는 피해자가 신분 도용을 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루퍼트 형사에게 제보한다. 루퍼트는 피해자의 형을 찾아가지만 그는 피해자가 자기 동생이 아니라고 한다.
(약스포)
용두사미. 뭔가 있어보이던 도입부와 달리 갈수록 구조가 단순해진다. 피해자의 동거녀와 형사의 관계도 별로고, 나름 반전이라고 설계했을 부분도 뻔하다. 읽으면서 혹시... 했는데 역시였어. 결말은 맘에 들기는 했는데 "와, 사이다!" 이게 아니라 "그래, 차라리 그래 버려라" 쪽이다. 사실 가장 거슬리는 건 번역. 왜 그렇게 '오빠,오빠'거리나. 원문이 그럴 리 없는데. 작가의 전작이 정말정말 좋았어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실망했다.
5. 일주일(최진영. 자음과모음. 2021.160쪽)
: 10대들의 이야기. 작가는 이 시대의 10대들에게 마음이 많이 쓰였나보다. 사실 난 10대였던 때가 너무 오래전이어서인지 첫번째 작품 「일요일」에는 크게 공감했지만 나머지 두 작품에는 그저 호기심이 더 컸다. 아무래도 같이 일요일을 보내던 천진했던 세 친구가 각자의 환경에 따라 다른 길을 가는 모습이 세대를 통틀어서 가장 보편적인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작가의 따뜻함이 끝까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느껴져서 좋았다.
6.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임민경. 들녘. 2020. 208쪽)
: 임상심리 전문가가 살펴 본 문학 작품 속 자살 사례들. 『안나 카레니나』, 『인간 실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벨 자』, 『댈러웨이 부인』,『리틀 라이프』등 여섯 작품을 분석했는데, 뒤의 세 작품은 작품을 통해 작가를 분석하고자 시도했다. (따라서 뒤의 세 작품에 대해서는 난 일부만 동의하고 받아들였다.)
저자가 자살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들 - 심리적 고통, 양극성 장애 등 - 은 어쩌면 뻔할 수 있지만 저자의 전문적인 시각이 더해져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저자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분석이 내가 예전에 읽고 썼던 리뷰와 일치했을 때 많이 기뻤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또 조금 더 확장하게 됐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저자의 조심스러운 태도 - 전공이 아닌 분야(문학)를 건드리는 데 대한 - 와 행간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었다.
7. 모든 것들의 세계(이유리. 자음과모음. 2022. 159쪽)
: 환상적이고 귀엽고 짠한 이야기들. 그렇지만 난 좀 답답하기도 했다. 인물들이 다 너무 착해서. 특히 두번째 이야기 「마음소라」의 결말은 좀 짜증났다. 그거 너 혼자만의 만족 아니니? '난 착한 사람이야'라는. 그렇게 해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그냥 또 한명의 여자를 구렁텅이에 그대로 놔두는 거야, 겨우 기어나온 여자를. 부디 양희가 빠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를.
세 편 모두 독특한 소재와 설정이 맘에 들었다. 작가만의 반짝임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등장인물들에게 내가 느끼는 답답함은 아마도 내가 더 세상에 찌들어서겠지. 찌듦을 조금이라도 벗겨내기 위해서라도 이 작가를 계속 찾아 읽어야겠다.
8.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마사 스타우트, 이원천 역. 사계절. 2020. 356쪽)
: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알려주는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는 모두 살인마이거나 범죄자이며, 주위에 이런 범죄자가 흔하지 않듯 대부분의 소시오패스들은 숨어 있을 거라는 착각을 깨준다. 저자는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양심'이 없는 상태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규정하고 이를 소시오패스라 통칭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전체 인구 수의 4%, 즉 25명당 1명이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범죄자들 중의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소시오패스들은 우리 주위에 더 많은 셈이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저자는 소시오패스에 대해 다섯 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읽다보니 상당히 열받기도 했는데 저자는 이러한 소시오패스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소시오패스를 알아볼 수 있는 최고의 단서는 바로 동정 연극이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보편적으로 두려움을 자극하기보다는 동정심에 호소한다." 178쪽
"25년 동안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지금, 나는 소시오패스들이 동정을 좋아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등잔 밑이 어둡기 때문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딱한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그냥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게임을 계속하길 바라는 소시오패스라면 동정받기 위해 계속 연기를 해야 한다. 숭배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선량한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는 것이 소시오패스를 더욱 쟈유롭게 만든다." 179쪽
"누구를 믿을지 판단할 때는 당신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연기하지 않는지 살펴보라. 그런 연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일관되게 사악하며 터무니없이 부적적한 행동이다." 181쪽
저자는 이러한 소시오패스들과 엮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이들 소시오패스들은 당장은 남을 이용해서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도 조목조목 들긴 하지만 솔직히 이 부분만큼은 정신승리로만 보였다. 사실 이 책에서 소시오패스에 관한 부분보다는 일반적인 심리 이론이나 정신분석학적 이론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하인츠의 딜레마나 피아제의 도덕 발달 단계 등은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약간의 산만함이 이 책의 단점이다.
9. 말없는 자들의 목소리(황모과. 래빗홀. 2023. 272쪽)
: 올해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이다. 저자는 타임슬립을 모티브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타임슬립 기술을 사용하는 국제기구 인터내셔널 싱크로놀로지(syncronology)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에서 인원을 선발해 과거로 조사단을 파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홀로코스트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일하는 한국인 청년 민호와 우익재단에서 장학금을 받는 일본인 청년 다카야를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시기로 보낸다. 민호는 당시 식민지 노동자로서 많은 이를 구한 마달출과 김평세를 관찰해야 하고, 다카야는 말 더듬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낙후 지역에 약을 공급하고자 노력하다가 죽음을 맞은 약장수 미야와키 다쓰시를 관찰해야 한다.
이 저자는 날 자주 울린다. 이번에도 많이 아팠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조선인학살의 분위기를 피부를 느끼게 되어서. 그리고 어느 시기에나, 어느 곳에나 있는 소수의 좋은 사람들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이유없이 도울 수는 있지만 이유를 만들어서 학대하고 죽이면 안 된다. 이 기본적인 진리조차 모르는, 부정하는 인간들을 人間이라 할 수 있을까.
10. 밤을 탐하다(마이클 코리타, 최필원 역. RHK. 2013. 452쪽)
: '나' 프랭크는 특정한 직업 없이 떠돌면서 살아간다. 이 대학에서 한 학기, 저 바에서 한 계절. 소설 작법을 듣고 교수에게 습작을 제출하자 교수가 관심을 보이지만, 곧 그 관심이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관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연방수사관이면서 청부살인업자였다. 아버지가 했던 일들이 드러나자 아버지는 자살을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아버지의 절친이자 동업자였던 데비 매트슨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다. 어느날, 아버지의 별장이 있는 호숫가에 데비 매트슨이 돌아오기로 했다는, 아버지의 옛 친구이자 역시 이 일에 얽혀있는 에즈라로부터의 연락을 받고 프랭크는 세 사람의 별장이 모여 있는 호수로 간다. 데빈에 대한 생각에 빠져 엉뚱하게도 교통사고를 낸 프랭크는 피해자가 우기는 바람에 신고도 안 하고 노라의 정비소로 차를 갖고 간다.
전반적으로 잘 짠 장르 소설이기는 한데, 내용면에서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어떤 한 인간의 헛짓거리 때문에 일이 마구마구 커져서 등장인물들이 다 삽질을 하는 건, 너무 허무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죽는 건... 다만 뭔가, 영상으로 만든다면 볼만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윌로우 플로위지가 궁금했다. 그곳에서의 추격신과 총격신은 정말 볼만할 듯. 이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코넬리를 비롯해서 여러 기성 작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난 아직 잘 모르겠다. 겨우 두 권 읽었을 뿐이지만. 두어 권 더 읽고 판단해야겠다.
11. 여덟 편의 안부 인사(조해진 외. 강. 2021. 375쪽)
: 근황을 얘기해 주는 듯한 단편들. 특히 조해진의 「혜영의 안부 인사」는 정말로 대학 동창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세부 사항이야 다르지만.
문득 돌아보면 내가 언제 이만큼 왔을까 싶은 날들. 그날들을 세세하게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때의 나도 나이기에.
12. 별을 향해 가는 개(헤닝 만켈, 이미선 역. 아침이슬. 2007. 244쪽)
: 1950년대 스웨덴의 작은 마을. 열세 살 요엘은 벌목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어릴 때 떠났다. 요엘은 친구가 없고, 매일 낡은 난로에 불은 피우고 아버지와 먹을 저녁을 지어야 한다. 모두가 갖고 있는 빨간 자전거를 갖고 싶지만, 가스레인지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버지가 무서워 얘기하지 못한다. 매일 저녁 계단을 올라오는 아버지의 발소리로 아버지의 기분을 파악하는 게 요엘의 관심사. 어느날 밤, 깨어난 요엘은 창문 밖으로 흰 개 한마리가 달빛을 받으며 총총 걸어가는 걸 보게 된다.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게 아니어도 요엘의 모습은 너무 짠해서 안아주고만 싶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버림받았다는 분노를 요엘에게 푸는 아빠. 요엘이 아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엄마가 없는 요엘. 우연히 유일한 친구가 생기지만 그 친구와의 관계는 그리 기껍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한걸음 크게 성장하는 요엘이 기특했고, 고마웠다. 그 아이가 아주 잘 자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아서.
13. 죽은 자의 꿈(정보라. 새파란상상. 2022. 372쪽)
: 죽은 채로 태어나 산 것과 함께 땅 속에 묻혀 살아난 '나'. 자신처럼 죽은 것을 보는 태경과는 공생 관계이다. 태경은 나를 때리고, 나는 태경에게서 생기를 빨아들인다. 친구의 장례식장에 간 태경은 죽은 친구의 영혼과 마주쳐 자신이 살해당했다며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제껏 읽은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그로테스크하고 가장 어두웠다. 작가의 초기작이라는데 재출간하면서 고치긴 했겠지만 이 저자가 처음부터 쓰고 싶었던 작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결말이 너무 슬프다. 그건 희망이 아니야. 희망 따윈 없어. 길고 긴 어둠 뿐.
14. 아웃랜더 1.2.(다이애나 개벌돈, 심연희 역. 오렌지디. 2022. 636쪽, 600쪽)
: 1945년, 전쟁 중 종군간호사였던 클레어는 남편 프랭크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전쟁으로 미뤄뒀던 신혼여행을 온다. 남편이 지역 목사관에서 6대조 선조인 조너선 랜들의 기록을 검토하는 동안 목사관의 가정부로부터 인생을 뒤흔들 커다란 일이 일어난다는 점궤를 들은 클레어. 다음날 혼자서 선돌에 갔던 클레어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갈라진 거석 틈으로 빨려들어 200년 전으로 타임슬립한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파견됐던 조너선 랜들과 마주치지만 광폭한 그의 행동에 도망치고, 스코틀랜드 전사 제이미 일행에게 발견되어 그들의 성으로 향한다.
어쩌면 뻔할 것도 같았는데, 정말정말 재미있었다. 클리셰를 버무려 놓았지만 어느것 하나 진부하지 않았고 제이미의 매력도 점점 배가됐다. 이렇게 제대로 된 로맨스 정말 오랜만이다. 후속작이 모두 출간된 뒤에 읽을 걸.
15.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정보라 외. 현대문학. 2022. 388쪽)
: 작가 스무 명의 앤솔러지. 약간의 기호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괜찮았다. 처음 읽는 작가도 있었지만 역시나 이미 읽었던 작가들이 좋기는 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정보라, 황모과. 그리고 고호관의「그 어떤 존재」는 내가 이 소설집에서 원했던 딱 그 소설이었다.
16.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루이스 어드리크,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3. 588쪽)
: 1차대전에서 독일군 저격수로 복무한 피델리스. 종전 후 죽은 절친의 약혼녀와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시카고로 향하던 중 노스다코다 주 작은 도시 아거스 타운에 정착해 정육점에 취직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가족들은 데려온다. 한편 아거스 타운 출신 델핀은 원주민 피가 섞인 조와 함께 기인 공연을 하고 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온다. 주정뱅이 아버지 로이가 방치한 집을 치우던 중 지하 식품저장실에서 시신 네 구가 발견된다.
스텝앤드어해프가 왜 그렇게 걷는지,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녀가 주운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마지막 챕터가 가장 좋았다. 이제까지 읽었던 이 작가의 작품들이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데 비해 이 작품은 마지막 챕터 덕분에 그래도 가장 따뜻했다.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마지막 챕터의 그 사십 년 전 일 때문에 이 작품의 이야기가, 그 따뜻함이 시작된 거였다.
이 작품이 작가의 초기작이던데 아마 작가가 여기서 언급한 원주민의 이야기, 그 아픔이 다음 작품들에서 그렇게 뻗어나가고 그래서 그 작품들이 씁쓸과 쓸쓸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 그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하지만, 난 정육점 주인들의 천사같은 노래소리가 더 듣고 싶다.
17. 종의 기원담(김보영. 아작. 2023. 320쪽)
: 세 편의 로봇 이야기. 연작이다. 화자는 한 명이고, 각각 읽어도 무난할 수 있겠으나 역시 세 편 이어서 읽어야 재밌다. 케이는 현재 가장 인기없는 모델 몸체를 갖고 있고, 가장 인기없는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케이의 연구는 유기생물체에 관한 것. 유기생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케이의 전공교수의 주장은 학계에서 헛소리로 치부될 뿐이다. 그런데...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무 일찍, 너무 대놓고 말해줘서 뒷부분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케이와 세실이 어떻게 될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하지 않다고.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자 흥미가 확 올라갔다. 도입부 역할을 한 첫 번째 이야기의 세계관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나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세계가 전복되고, 케이를 이해할 거 같으면서도 케이가 미워진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모든 게 올바른 방향으로,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작가가 오랜 기간 고민하고 다져왔던 이야기라는 게 절절히 느껴지는, 잘 완성된 이야기들이었다.
18. 친구(시그리드 누네즈, 공경희 역. 열린책들. 2021. 256쪽)
: '나'의 친구가 자살했다. 문학계와 사회에서 인정받던 그는 나이듦과 밀려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의 제자였으며 한때 연인이었으나 최근에는 절친으로 지내왔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이 연락을 해왔는데 그가 구조해서 돌보던 그레이트 데인 아폴로를 맡아달라고 한다. 작은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아폴로를 데려온 나는 아폴로를 돌보면서 그를 회상한다.
화자의 조용하고 깊이있는 사색이 정말 좋았다. 반면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 죽음과 삶, 우정과 사랑은 정의내리고 부여잡는다고 잡아지는 게 아니다. 그냥 받아들이고 가꾸는 거다. 마지막 장면, 해변가의 아폴로처럼.
19. 내가 너에게 가면(설재인. 자이언트북스. 2022. 268쪽)
: 성주의 할머니 이종옥. 1998년에 크게 착한 일 한 가지를 한 대가로 저승사자들이 소원을 들어준다 한다. 소원은 손녀 성주가 밥을, 그게 안 되면 빵이라도 먹는 것. 복싱을 시작한 몇 년 전부터 곡기는 끊고 단백질만 먹는 손녀를 세 계절 동안 지켜보기로 한 할머니는 마땅한 데가 없어서 자신이 던져 부순 복싱 트로피에 깃들기로 한다. 복싱 선수이자 방과후 돌봄 교사인 성주는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열 살 소녀 애린을 만난다.
사실 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작가의 글솜씨가 좋아서 읽는 맛이 있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뻔하게 흘러가는 건 둘째 치고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할머니가 저승행을 미루고 성주를 지켜보는 설정이 맘에 들어서였는데, 그냥 그게 다다. 그걸 어떻게든 살렸으면 좋았을 걸. 내용도 서술도 너무 무난하기만 했다.
20.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윌라 캐더, 윤명옥 역. 열린책들. 2010. 352쪽)
: 1851년, 카톨릭 신부 장 마리 라투르는 배가 난파되어 책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잃고 간신히 이곳 뉴멕시코에 도착한다. 친구이자 부교구장인 바일랑 신부와 함께 그는 40여년 간 뉴멕시코의 원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며 그들에게 소임을 다한다.
챕터 하나하나마다 에피소드들이 있고 두 신부의 삶과 성향을 보여준다. 대부분 신교의 영역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구교 사제들의 행보와 원주민들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카톨릭 신앙을 바르게 전달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사제들의 이야기가 광활하면서도 메마르고, 또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펼쳐지는데,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사실 난 지적이고 원칙주의자이며 고지식한 라투르 신부보다는 외향적이고 에너제틱하면서 라투르 신부가 원하면 어떤 사역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일랑 신부의 이야기가 더 알고 싶었다. 이제껏 이 작가를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장 좋았다.
21. 죽음을 선택할 권리(M. 스캇 펙. 조종삼 역. 율리시즈. 2018. 344쪽)
: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이야기하는 존엄사. 일단 첫 출간이 1997년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기는 해야 하는데, 서문에서부터 하나님을 언급한다. 사실 서문에서 하라 얘기는 다 한 거라서 단순히 저자의 주장이 궁금한 거라면 서문만 읽어도 된다. 난 전에 읽었던 다른 책에서 이 책을 몇 번 언급하길래 안락사 논쟁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읽었는데, 저자가 책 안에서 모순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 개의 에피소드에서 자신이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과잉진료(혹은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심지어는 유족과의 의논도 없이 끝낸 것을 후회는커녕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분명한 목소리로 반대한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자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반대는 하지만 알락사를 택한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영성의 측면이 간과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저자처럼 심적 문제만큼 영적 문제도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자가 환자 상담 중에 성경을 언급한 건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환자가 치료에 효과를 못 본 건 당연하다. 그거에 왜 인용 부호를 붙이고 환자가 못 받아들인 양 서술한 건지(141쪽). 좀더 냉철하고 전문적인 시각이었으면 좋았을 걸.
22. 슈퍼 마이너리티 히어로(천선란 외. 안전가옥. 2020. 292쪽)
: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작은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 이야기 다섯 편. 첫 번째 작품 「캡틴 그랜마(Captain Grandma), 오미자」가 너무 재밌어서 신나게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가장 재밌었고 가장 찡했던 건 천선란「서프 비트(Surf Beat)」.
23.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이혜리 외. 북콤마. 2020. 292쪽)
24.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이영도, 정보라 외. 황금가지. 2009. 464쪽)
: 꽤 오래전 앤솔러지이긴 한데, 정보라 작가 작품을 읽고 싶어서 대출했다. 역시 열 작품들 중 정보라의 「은아의 상자」가 가장 맘에 들었다. 표제작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SF단편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클리셰여서 조금 실망했다. 나머지 작품들도 대체로 제목과 첫 문단을 읽으면 내용 전개가 대충 짐작이 가고 그 짐작대로 전개가 되어서 편하면서도 조금 실망스럽게 읽기도 했다. 다만 김보영의「노인과 소년」은 글솜씨가 훌륭했고 정지원의「장미 정원에서」는 내 취향이었다.
25. 러브 스틸러(스탠 패리시, 정윤희 역. 위북. 2021. 408쪽)
: 라스베거스 최대 규모의 무장강도 사건이 일어난다. 순식간에 2천만 달러짜리 목걸이를 훔쳐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난 일당들. 이들의 영상이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간다. 한편 출장요리사업을 하는 다이앤은 파티에서 알렉스와 마주치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만나며 집에 데리고 오는데, 알렉스는 다이앤의 아들을 본 후 그들의 인연을 알아챈다.
속도감있는 케이퍼 무비 스타일의 소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난 권선징악이 좋다. 이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결말이 나긴 하지만, 나름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결말 부분이 추리력은 1도 없는 나도 이미 짐작할 만한 것이었어서 딱히 재밌지는 않았다.
26.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장강명. 문학동네. 2023. 404쪽)
: 처음 배치된 표제작이 정말 맘에 들었다. 내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만 끼고 있는 필터가 물리적으로 구현된다니, 이거야말로 정신승리와 우민 정책의 끝판이자 현대인의 구원 아닌가. 물론 나보다 훨씬 건전한 정신을 가진 작가는 이러한 설정의 폐해를 제대로 보여준다. 나머지 6편들도 사회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는다. 사실 전체 7편 중 4편이 이미 읽은 거여서 부담없이 읽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