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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연말에 갑자기 바빠져서 그랬는지, 눈 감았다 뜨니 내일이 섣달 그믐이네. 지난 1년간 307권, 107,662쪽 읽었다. 하루 평균 294.96쪽. 


아쉽다. 사실 올해 초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루에 300쪽을 읽을 수는 없을까? 그래서 꽤 열심히 읽었는데. 12월에 좀더 분발했더라면 좋았을 걸. 


내년에는 좀더 에너지를 끌어올려 봐야지. 하루에 300쪽을 읽고 온전히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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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놓은 리뷰가 다 날아갔다. 이런 거 정말 오랜만이네... 세밑 액땜이라고 생각하고, 자세한 리뷰는 새해에 올리기로...


1. 나라가 당신 것이니(김경욱. 문학동네. 2021. 412쪽)

: 코드네임 라이카. 한때 정보부 최고의 블랙요원이었던 그는 이제는 70을 넘어 아내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노인이다. 매일같이 확인하던 신문 광고 중 자신의 이름으로 뜬 부고를 보고 그는 스승이자 상사였던 김실장이 보낸 메세지임을 직감한다. 그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전 동료였던 코드네임 피셔맨, 코드네임 재단사를 찾아가 김실장을 찾는 여정에 오른다.


세 노인네의 여정이 쉽지는 않다. '왜 이렇게까지...?'하는 의문도 생각의 한구석에 계속 자리잡고 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단서들을 해석하고 과거의 기억을 짜내고... 그 와중에 김실장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거라는, 그리고 자신을 부른 거라는 믿음은 맹목적이다. 어쩌면 노망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영광된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서글픈 외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노인네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끝까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이들의 빗나간 현실 인식에 응원을 해줄 수는 없지만. 


원래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진 않지만 재밌게 읽었다. 이렇게 늙지는 말아야겠지만, 그게 과연 의지만으로 될 지는 모르겠다. 쇠약해지는 내 정신력을 지탱하기 위해 과거의 영광스러운 장면 하나쯤 간직하는 건 어쩌면 최후의 방어 수단일 지도 모른다.



2.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이꽃님. 문학동네. 2020. 200쪽)

: 중2인 형수와 우영은,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pc방에서 소위 잘난 아이들이 천 원, 이천 원씩 빌려가서 갚지 않는 게 싫어서 일부러 좀 떨어진 후진 pc방에 간다. 그런데 가는 길에 반에서 항상 혼자 있는, 분위기가 음침해서 별명이 '다크 나이트'인 은재를 발견한다. 은재가 복도식 아파트의 방범창을 뜯고 들어가는 걸 목격한 형수와 우영은 그걸 촬영한 후 은재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은재가 들어가는 집은 은재 자신의 집이고, 늘 술마시고 은재를 때리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들어가려던 거라는 걸 알게 된다.


화자가 행운이다. 화자는 조금은 지질하지만 무난하게 착한 아이들인 형수와 우영을 알아보고 관찰한다. 그리고 가끔 나서서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재밌는 건, 행운이 그들에게 다가가더라도 그걸 잡아야 한다는 거. 행운을 잡느냐 그냥 보내느냐는 온전히 인간 자신의 몫이다.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의 결말이 동화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전혀 아니다. 은재 애비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듯 하지만 명확히 결말이 난 것도 아니고, 우영 애미는 해결 기미도 안 보이니까. 그래도 이만큼만이라도 감사했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행운이 늘 다가가기를.



3. 한 방울의 살인법(닐 브래드버리, 김은영 역. 위즈덤하우스. 2023. 376쪽)

: 독극물로 쓰일 수 있는 11가지의 화학물에 관해 개괄하고, 그 물질들이 살인에 사용된 예를 이야기한다. 대부분 이름은 익숙한 것들이다. 인슐린이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생각해보면(그리고 책 본문에서도 말하듯) 모든 물질은 적정량을 사용하면 약이고 잘못 사용하면 독이다. 


'독약, 은밀하게 사람을 죽이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부제와 달리 사실상 모든 독극물은 검출이 된다는 얘기를 빼먹지 않는다. 본문에 나와 있는 화학적 지식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사실 책 가장 뒤의 부록에서 깔끔하게 독의 특성과 장단점을 정리해 줬다. 뭔가 독극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그 부분만 봐도 될 듯.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은 청산가리, 비소다.



4. 선샤인의 완벽한 죽음(범유진. 안전가옥. 2020. 368쪽)

: 무아도에는 무아교가 있다.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 환경에서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무아교에서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되려던 때 학교의 여신이며 무아 교육기관의 상징과도 같았던 선샤인이 나무에서 떨어진 시체로 발견된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는 학교 측에 대한 반감으로 '내가 선샤인을 죽였다'는 메모가 학교 곳곳에 붙고, 재단 측에서는 이를 무마하고자 방송반이면서 간절하게 학업 등급을 올려야 하는 이레이를 통해 다큐를 만들고자 한다.


이 작가의 단편이 좋아서 읽었는데, 앞으로는 단편 위주로만 읽어야겠다. 캐릭터들이 다 너무 전형적이다. 특히 빌런이 너무너무너무 유치하다. 물론 어느 이야기에서나 빌런은 단순하고 유치하기 마련이지만 여기선 유치함을 학생들이 충분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좀더 간접적이고 치밀하게 악을 드러냈어야 했다. 반대편을 족족 죽여버리는 것도 너무 단순하고. 결말도 딱히 충격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악설은 맘에 들었다.



5. 실버뷰(존 르 카레, 조영학 역. RHK. 2023. 288쪽)

: 비오는 런던의 아침, 젊은 여성 릴리가 스튜어트를 방문한다. 릴리는 서신을 전달하고, 스튜어트가 읽는 동안 기다린다. 스튜어트는 첩보국 책임자. 릴리는 오랜 기간 요원이었던 엄마의 편지를 전달한 것이다. 한편 줄리언은 금융종사자로 일했던 런던을 떠나 이스트앵글리아에 서점을 연다. 손님이 거의 없는 가운데 에드워드 에이번이라는 노신사가 해 질 무렵 드문드문 방문하더니, 줄리안의 부친을 언급하며 친근한 척을 한다. 에이번은 서점 지하의 빈 공간을 고전 위주의 '문학 공화국'으로 꾸미자고 제안한다.


90여쪽을 읽다가 얘네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내 추측이 맞는 건지, 에드워드가 줄리언보다 핵심 인물인 건지 등등 갑자기 의문이 밀려와서 알라딘 책 정보를 봤더니 '이들이 애써 숨겨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면 소설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 안심하고 계속 읽었다. 스파이 세계란 참으로 쉽지 않구나. 스튜어트와 에드워드, 그리고 에드워드의 아내 데보라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끼워맞춰지는 세계사의 잔혹한 사건들과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스파이 부부의 관계가 꽤 흥미롭기는 했지만 사실 가장 관심있었던 건 줄리언 서점의 지하, 그리고 서점 윗층. 그나마 그 공간들이 이 소설에서 숨통을 틔여 주지 않았을까. 


첩보원으로 산 이들이 비록 조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했을지언정, 슬프게도 그들 자신의 평화는 얻을 수 없음이 아이러니하다. 그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거지, 뭐.



6. 약속(데이먼 갤것, 이소영 역. 문학사상. 2023. 512쪽)

: 죽어가던 엄마는 아빠에게 말했다. 오랜 기간 가족과 자신을 돌봐준 흑인 하녀 살로메에게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주라고. 어린 아모르는 구석에 앉아 그걸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장례식 후 아빠는 모른 체 한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에 모인 오빠와 언니에게 다시금 그 얘기를 꺼내지만 오빠 안톤도 언니 아스트리드도 한 귀로 흘려버린다. 


이 이야기는 단순하다. 오랜 기간 묵혀둔 약속이 지켜지는 이야기. 하지만 감동적이지는 않다. 당연히 지켜져야 했을, 별 거 아닌 초라한 오두막집 한 채에 대한 소유권이 이전되지 않은 이유는 인종차별에 근거한 무관심과 오만함 때문이기에. 살로메의 아들 루카스가 얘기했듯 사실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집, 땅 모두 원래는 원주민인 흑인들의 것이다. 그 일부를 돌려주기까지가 무려 30년이 걸린 것이다. 


이야기가 아름다워지는 지점은 아모르의 마음이다. 가족들의 거만함과 무심함에 질려 밖으로 돌지만 자신의 신념을 잊지 않고 그대로 살아내는.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는 만큼 남아공의 사회상과 정책 변화에 대해서도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다. 엄마의 장례식에 초경을 한 소녀가 결국 올바른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을, 그래서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는 것을 읽는 게 참 좋았다. 



7. 트로피컬 나이트(조예은. 한겨레출판. 2022. 312쪽)

: 무서운 이야기는 왠지 흑백일 거 같다. 무서운 영화들은 온통 붉거나 온통 검은 색이지만, 이 책은 총천연색으로 무섭다.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빛나기도 한다. 혼자 사는 노인의 측은지심이(<고기, 석류>), 오랜 기다림의 사랑이(<릴리의 손>), 외로움 끝에 자신에게 손 내밀어 준 동창에 대한 우정이(<가장 작은 신>)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폭력을 당한 사촌동생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마음이(<새해엔 쿠스쿠스>). 다 해피엔딩이기는 하지만 가장 다행이었고 가장 맘에 들었던 건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어쩌면 이 작품은 해피엔딩이 아닐 지도 모르지만. 



8. 잠자는 추억들(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역. 문학동네. 2022. 152쪽)

: 장D.는 20여년 전의 추억을 회상한다. 10대 후반,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방황하던 파리의 거리에서 만났던 여러 여인들. 무작정 집 앞에서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던 소녀와 어머니를 대신하고자 했던 어머니의 친구, 그리고 한참동안 화자의 곁을 지켰던 준비에브. 


저자 특유의 섬세한 추억들이 하나하나 '마치 익사자처럼' 떠오른다. 다만 뒷부분의 뤼도 사망 사건 이야기는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랄까. 내가 이 저자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꽤 '격렬한' 사건이어서 그랬나보다. 이제껏 읽었던 모디아노의 작품들 중 가장 줄거리가 명확한 작품이었고, 내가 이 저자를 사랑하고 그의 글에서 늘 위로를 받지만 이 책 또한 그러했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리워지는 모디아노.



9. 학교로 간 스파이(이은소. 새움. 2020. 272쪽)

: 감정을 모두 제거하는 훈련을 훌륭히 소화해 낸 남파간첩 정천. 남한에 침투하던 중 임무에 실패해 동료를 잃고 자결하려는데 고정간첩이 나타나 그녀에게 새로운 임무를 전달한다. 중학생 한 명을 포섭해 북한으로 데려가는 것. 능력을 살려 영어 전담교사로 취직하려던 그녀에게 기간제 교사 자리가 주어지고, 임해주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잠입한 그녀는 타겟에게 다가가는 게 쉽지 않은 한편 옆자리의 비실한 기간제 교사 강석주가 친한 척 하는 게 영 마땅치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뜻밖에 찡했다. 남파 간첩의 시선에서 보는, 뭐 하나 부족함 없이 풍족한 아이들이 저지르는 철없는 행동들과 이기적이고 퇴폐 자본주의에 찌든 적폐 고인물들의 어이없는 짓들. 하지만 마음 속에 백석의 시를 품은 임해주는 조금씩 풀려간다. 사실 내가 찡했던 부분은 이게 아니라 임해주가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죽어야 가족들이 산다고 믿는, 어쩌면 순진한 임해주의 믿음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이런 소재가 가볍자고 들면 한없이 가볍고 작정하고 삐딱하게 나가자면 또 그럴 수 있을 텐데 그 완급을 잘 조절한 작가의 필력이 훌륭하다. 



10. 죽은 자가 말할 때(클라아스 부쉬만, 박은결 역. 웨일북. 2021. 264쪽)

: 독일 법의학자인 저자가 15년간 재직하면서 겪은 수많은 죽음들 중 12가지를 이야기한다. 반드시 형사사건만 있는 건 아니다.아무래도 선별해야 하니 특이한 죽음들을 이야기하지만, 자연사한 경우도 많다. 이 경우 부검을 하는 이유는 죽음의 원인을 밝혀 그 어떤 죽음도 억울하게 두지 않기 위해서다. 각각의 케이스도 흥미로웠지만 사실 난 이 대목이 가장 와닿았다.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끝이지만 남은 자에게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 '억울함'이라는 게 반드시 죽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거, 새삼스러웠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책 초반부에 저자가 독일 의학계의 농담이라면서 '의사는 제때 도착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부검의는 모든 걸 알지만 너무 늦었다'는 말은 하는데, 죽은 자에게는 늦었다할 지라도 그 부검을 통해 산 자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의미있는 게 또 있을까 싶었다. 부검에 대한 의식이 조금은 새로워지는 경험이었다. 



11. 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캐트리오나 워드, 이경아 역. 검은숲. 2023. 516쪽)

: 니들리스 거리 끝에 테오라는 이름의 남자가 살고 있다. 11년 전 아동 실종 사건에서 조사를 받은 후,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언론의 무분별한 취재에 의해 용의자로 낙인찍혔다. 집의 창문을 모두 가리고 두문불출하며 가끔씩 상담치료만 다니는 그는, 가끔씩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을 겪는다. 한편 디는 11년전 동생이 사라진 후 무너져버린 가정에서 자랐고, 사라진 동생을 평생 찾아다닌다. 


처음엔 뻔하다고 생각했다. 음침한 집, 창문을 모두 판자로 가려버리고 외출조차 안 하는 혼자 사는 남자.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딸이 있고, 아름다운 녹색 눈을 가진 고양이도 있다. 그럼 그 딸은 진짜 자기 딸인가? 그런데 고양이와 딸은 왜 서로 피하지?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읽는 걸 멈출 수가 없었고, 디의 등장에 더더욱 호기심이 증폭됐다. 그리고 330쪽을 읽고 꽤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된 거구나... 드러난 진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을 더 열심히 읽었고, 또다른 반전이 있었다. 


사실 그 반전은 처음의 내 짐작과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앞에서 나름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기에 이 또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쓴 의도를 읽고 조금 위로받았다. 이 이야기가 그냥 그런 스릴러가 아니어서, 살아남는 이야기여서 작가에게 고마웠다. 



12.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이꽃님. 문학동네, 2018. 224쪽)

: 2016년, 은유의 아빠는 재혼을 앞두고 그동안 은유에게 무관심했던 태도를 싹 바꾸어 새삼 함께 여행을 왔다. 모든 게 못마땅한 은유는 여행지에서 1년 후 도착하는 '느리게 가는 우체통'에 자신에게 쓴 편지를 집어넣는다. 그런데 34년 전인 1982년의 은유라는 열 살 아이가 답장을 한다. 장난치지 말라는 답장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답장을 보내는 2016년 은유. 그런데 30여년 전의 은유의 답장은 몇 개월씩 건너뛰며 전해지고, 2016년 은유가 1년을 사는 동안 1982년의 은유는 나이를 쑥쑥 먹어간다.


사실 두 은유의 비밀은 진작 눈치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2016년 은유가 이렇게라도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위로를 받고 성장을 해서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멍청하게 구는 아빠가 용서받는 건 짜증났다(이건 이런 화해/치유(?)를 이야기하는 모든 소설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진실이 드러났을 때 눈물이 흘렀다. 가족 이야기라는 게 그렇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돌아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재밌는 좋은 청소년 소설이었다.



13.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없겠지만(캐스린 매닉스, 홍지영 역. 사계절. 2020. 416쪽)

: 완화의학이란, 증상을 완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목적을 둔 의학으로서, 주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행해진다. 이 책은 완화의학 의사인 저자가 40여년 간 호스피스 병원에서 일하며 마주한 환자들과 죽음들의 이야기이다.


처음 세 챕터의 죽음이 평온해서 초반부터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네 번째 챕터 '외로운 무도회장'은 약간의 충격이었다. 고환암 병동 환자들의 유머러스함에 감탄하며 읽고 있었기에 더했다. 이 책은 많은 죽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저자 자신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비록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진 않지만 저자는 의사 생활 초반에 비해 특히 심적으로 매우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매일같이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성숙해지지 않기란 힘들겠지. 


사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저자를 비롯한 완화의학 의료진들이 의료적 처치 뿐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이고, 저자가 인지행동치료 훈련을 받은 상태여서 더욱 그러했겠지만, 임박한 죽음 앞의 환자들과의 다정하고 설득력 있는 대화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모습에 나 또한 위로받았다.



14. 브로콜리 펀치(이유리. 문학과지성사. 2021. 304쪽)

: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 다 착하다. 산책로에서 마주친 안 좋은 표정의 그녀에게 손 내밀고(<빨간 열매>), 복싱 선수가 상대방을 때리기 싫어서 손이 브로콜리로 변하고(표제작), 애인 때문에 사고로 죽고 나서도 애인이 보고싶어서 돌아왔으면서 결혼한 애인을 보고도 원망 안 하고(<손톱 그림자>), 애인이 떠나면서 두고 간 이구아나를 건사하고(<이구아나와 나>). 가장 답답했던 건 <둥둥>의 목은탁이었고 결말은 처음엔 그애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해설에서 얘기한 게 더 맘에 들었다. 그런데 <빨간 열매>의 결말은 좀 이상해. 그들의 결실을 먹고 그런 꿈을 꾸는 건 왠지...


그래도 다 재밌었다. 이 작가를 발견해서 기쁘다.



15.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찰스 부코스키, 설준규 역. 모멘토. 2015. 196쪽)

: 부코스키 말년의 일기. 죽기 직전까지는 아니고, 2년 전 쯤까지의 일기다. 말년이라지만, 죽음이 목전이라지만 전혀 수그러들거나 약해지지 않는 성질머리. 타이프라이터 대신 들여놓은 맥으로 매일 글을 쓰고 격일로 경마장에 가고,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고찰한다. 저자 특유의 시니컬함과 신랄함이 보인다. 혈기왕성하고 불평많은 귀여운 늙은이. 부코스키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분신 치나스키를 애정한다면 계속 미소지으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6. 랑과 나의 사막(천선란. 현대문학. 2022. 160쪽)

: 랑의 엔진이 꺼졌다. 아니, 심장이 멈췄다. 랑의 엄마 조에게 그러했듯, 랑을 땅에 묻어야 한다. 인근에 사는 지카가 찾아와 랑을 묻은 후 며칠 동안 우두커니 서 있는 나 고고에게 함께 바다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과거로 갈 수 있는 태풍의 벽으로 가기로 한다. 오랫동안 사막의 모래 속에 묻혀 있던 나를 발굴해 준 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


짧지만 깊다. 로봇인 자신에게는 마음이 없다는 고고에게 마음을 얘기해 준 랑. 그리고 그 마음을 사막을 건너는 내내 보여준 고고. 고고의 그리움이 고고를 사막에서 이끌었다. 길을 잃지 않게. 결말이야 예상대로 흘러갔지만 고고의 여정만으로도 충분했다. 고고의 마음만으로도.



17. 익명 소설(앙투안 로랭, 김정은 역. 하빌리스. 2023. 228쪽)

: 원고 검토부의 책임자 비올렌 르파주. 어느날 막내 팀원 마리가 투고된 원고 중 보석을 발견한다. 카미유 데장크르라는 무명 작가의 <<설탕 꽃>>. 이 소설은 문단에서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하고, 공쿠르 상 후보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감춘 채 나타나질 않고, 소설 속 살인 사건과 같은 모습의 시체마저 발견된다.


줄거리만 요약해 놓으면 엄청 흥미진진한데, 이야기는 늘어진다. 비올렌의 심리 치료와 부분 기억 상실, 형사 소피 탕슈 경위의 촉, 눈이 안 보이는 원고 검토자 베아트리스 등 잘 풀어나가자면 얼마든지 이용가능했을 요소들이 많았음에도 변죽만 울리다 끝난다. 게다가 결말도 좀... 너무 끼워맞추기잖아. 용두사미다. 저자의 역량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구나. 다만 프랑스 문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만족한다.



18.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박해수. 네오픽션. 2023. 280쪽)

: 꽤 감각적인 도시 괴담들. 도시 괴담이라고 말했지만 소재들이 다 신선하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다만 결말은 다 짐작 가능하다. 그래도 재밌었다. 가장 재밌었던 건 표제작이지만  오래 생각하게 했던 건 「세컨드 헤븐, 천삼백 하우스」. 



19. 엘레나는 알고 있다(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엄지영 역. 비채. 2023. 272쪽)



20. 못 먹는 남자(정해연. 엘릭시르. 2023. 356쪽)

: 응급실에 근무하는 솔지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남자가 실려오자 학대 혹은 극빈을 의심하며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링거를 맞던 남자는 통장 잔고를 보여주며 솔지의 관심을 쳐내고 사라진다. 이 남자 제영은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을 아는 누군가의 죽음을 본다. 그게 괴로워 음식을 거의 안 먹고 버티는 것. 어느날 자신이 죽음을 본 사람 대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는 걸 보게 된다.


이 작가를 제대로 읽는 건 처음인데, 리뷰들이 좋아서 기대했다가 좀... 소재는 좋은데 전개가 늘어진달까.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다. 게다가 결말도 찜찜하고. 무엇보다 화자에게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다른 작품들은 안 읽을 거 같다.



21. 칵테일, 러브, 좀비(조예은. 안전가옥. 2020. 162쪽)

: 마음 아픈 호러 소설들. 분명 무서운 상황이고 무서운 대상인데, 마냥 무섭지만은 않다. 이렇게 되어버린 게 서글프고 속상하고... 가장 속시원했던 건 「초대」지만 가장 흥미진진했던 건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22.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셸비 반 펠트, 신솔잎 역. 미디어창비. 2023. 556쪽)

: 거대태평양문어의 수명은 4년 남짓이다. 워싱턴 주의 작은 마을 소웰베이의 아쿠아리움에 사는 마셀러스가 인간에게 감금된 지 벌써 1299일. 이제 수명은 160일 정도 남았다. 마셀러스는 밤마다 수조를 탈출한다. 어느 밤 뒤얽힌 전선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던 마셀러스를 야간 청소원 토바가 발견하고 구해준다. 토바는 30여년 전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이제는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 혼자이다. 한편 30세 청년 제레미는 얹혀 살던 여자친구에게서 쫓겨나고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도 아이 아빠가 되어 밴드도 그만두자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 충동적으로 소웰베이에 오게 된다.


뻔하고 따뜻한 이야기. 마셀러스라는 특별한 존재가 초반에 시선을 끌지만 결국은 사람 사이의 이야기이다. 마침 지쳐 있을 때 읽어서 아주 좋았다. 결말이야 일찌감치 예상했지만 책 속 인물들이 언제 알아차릴 지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진진했고. 뻔한 이야기라고 해서 사는 데 필요 없는 건 아니다.



23. 요즘 사는 맛(박서련, 천선란 외. 위즈덤하우스. 2022. 312쪽)

: 배민 뉴스레터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었다. 열두 명의 작가가 각각 네다섯 편씩 썼다. 박서련과 천선란 때문에 빌렸는데 의외로 기대감이 전혀 없던 요조와 임진아가 좋았다. 요조는 "어쭙잖은 무결함의 도취로 가는 길(198쪽)"을 스스로 막는다는 얘기에 호감이 생겼다. 부디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임진아는 많은 부분에서 나와 비슷해서 호감이 생겼다. 아침을 가장 화려하게 먹고 싶(219쪽)"어하는 마음이라든가 자기 전에 다음날 먹을 걸 생각하며 잔다든가 - 나같은 경우에는 이건 주말에만 해당되지만 - 하는 게 나와 비슷했다. 기대했던 박서련은 스스로도 말했지만 좀 "날로 먹(111쪽)"었다. 본인은 한 편만 그런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기대감을 생각하면...천선란은 글은 좋았는데 성향이 나와 전혀 달라서 아쉬웠고, 박정민은 첫 번째 글이 완전 '배민찬양'이어서 실망했다.


남들은 대체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서 읽었는데, 재미있었다. 여러 사람의 취향을 보는 것도 그랬고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켜먹든 스스로 정성스레 차려먹든 먹는 행위는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걸 보니 나만 이러는 게 아니어서 기뻤고... 뭐 그랬다. 



24. 노을 건너기(천선란. 창비. 2023. 72쪽)

: 우주 비행사 공효는 자아 안정 훈련에 통과해야 한다. 자신의 기억대로 구현된 공간에서 작은 어린아이로서의 자신을 만나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 붉은 노을이 가득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했던 공효는 어린 자신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자기 안의 어린아이를 돌봐주라는 말은, 심리학 책에서나 언론에서 종종 듣는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어린 공효를 마주한 공효도 자신이 아는 자신과는 다른 자신에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자신이기에 함께 손을 잡고 노을 속을 통과한다. 이런 공효가 부러웠다. 난 어린 나를 만나도 잘 달래줄 수 있을 지 자신이 없기에. 그냥 같이 울어버리지 않을까. 어쩌면 그게 당시의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25. 슬기로운 작가 생활(존 스칼지, 정세운 역. 구픽. 2023. 356쪽)

: SF 작가인 저자가 '전업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주는 현실적인 충고. 저자 개인 웹사이트에 5년간 올린 글들을 편집했다. 매우 현실적이다. 저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출판계의 분위기와 수입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또한 매우 냉소적이기도 하다. 작가지망생 혹은 초보 작가들이 착각하거나 고집부릴 수 있는 부분들은 신랄하게 꼬집는다. 문학에만 매몰되지 말라든지, 글 몇 편 팔았다고 본업 때려치우지 말라든지, 네 재능은 형편없다든지... 저자의 솔직하고 냉소적인 유머러스함에 계속 낄낄대며 읽었다. 비록 미국 문단의, 20여년 전 이야기라 우리나라의 작가지망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라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와 소양을 잡는데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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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23-12-3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리뷰증발 액땜.ㅜㅜ
11번 니들리스 거리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헤헤. 해피 뉴 이어입니다, 유진 님.^^

Yujin 2024-01-02 14:17   좋아요 0 | URL
파일이 깨져버렸답니다ㅠ 이제 새로운 해가 밝았으니 새로운 책으로...ㅎㅎㅎ <<니들리스 거리>> 추천합니당^^ 에르고숨 님도 해피해피 뉴 이어~~
 

1. 달콤한 픽션(최지애. 걷는사람. 2023. 304쪽)

: 전혀 달콤하지 않은 현실들. 어찌할 수는 없다. 묵묵히 견디는 수 밖에.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매일매일 보이는, 그리고 겪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 소재는 흔하다. 하지만 작가의 글솜씨가 나쁘지 않다. 앞으로가 기대될 만큼.


서술 스타일은 「달용이의 외출」이 가장 좋았지만, 최애로 꼽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2. 나와 퓨마의 나날들(로라 콜먼, 박초월 역. 푸른숲. 2023. 448쪽)

: 런던에 살던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 지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던 중 볼리비아의 야생동물 생추어리에서 잠시 봉사활동을 하기로 한다. 불법으로 포획, 밀매되어 학대당하다 구출된 퓨마 와이라를 담당하게 된 저자는 원래의 체류 기간보다 훨씬 길게 머물며 와이라와 점차 친해지고, 생추어리에 적응하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내용 요약만 하면 기존의 야생동물 교감 에세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는 다른 결의 감동이 있다. 볼리비아 최초의 야생동물 생추어리의 현실적인 모습들, 특히 동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열악한 정글의 환경. 단순히 뜨거운 샤워를 못하거나 푸세식 화장실만이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숲 안에서만 지내서 햇빛이 모자라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기도 하고 탄수화물만 먹어서 배가 부어오르기도 하는 현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또한 동물과의 생활도 많은 도시 사람들이 막연하게 상상하듯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와이라는, 그리고 그 곳의 구조된 동물들은 겁이 많고 경계심이 가득할 수 밖에 없고, 야생동물이기에 편리한 대로 길들여지지도, 길들일 수도 없다. 예산 문제와 산불, 정부의 규제는 어쩌면 뻔한 거고.


그래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야생성을 회복하는 와이라와 다른 동물들의 모습은 힐링이다. 거기에 더해 저자의 회복도. 다만 모두 느리다. 느릴 수 밖에 없고, 빠를 필요도 없다. 저자는 현재 영국에서 환경 및 예술 운동 단체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하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게 이야기한다. 와이라처럼. 비록 사람들에게 학대당하고 잘못 이용되었지만 본성을 잃지 않은 야생동물들처럼. 



3. 나, 나, 마들렌(박서련. 한겨레출판. 2023. 272쪽)

: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들. 김초엽 작가의 추천사대로 이 모든 이야기가 한 명의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박서련의 인물들은 다 강단있다. 겉보기에는 고민 많고 결정하기 힘들어할 지라도, 자신만의 원칙이 있고 그걸 지키고자 한다. 사실 첫번째 작품(「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가 정말 좋았어서 나머지 작품들에 대해서도 호감을 담뿍 가진 채 읽기 시작했고, 다 괜찮았다. 비록 첫번째 작품도 그리고 다른 작품 중에서도 플롯이 전형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저자가 창조해 낸 평범하지만 특별한 인물들이 너무 좋아서, 난 다 좋았다. 



4. 타인의 외피(앨런 에스킨스, 강동혁 역. 들녘. 2016. 400쪽)

: 미니애폴리스에서 한밤중에 교통사고가 난다. 피해자 제임스 퍼트넘은 죽기 직전 "놈들이 그 여자를 찾기 전에 그걸 찾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피해자의 동거녀에게 접근해서 피해보상 소송을 걸게 하려던 변호사는 피해자가 신분 도용을 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루퍼트 형사에게 제보한다. 루퍼트는 피해자의 형을 찾아가지만 그는 피해자가 자기 동생이 아니라고 한다.


(약스포)

용두사미. 뭔가 있어보이던 도입부와 달리 갈수록 구조가 단순해진다. 피해자의 동거녀와 형사의 관계도 별로고, 나름 반전이라고 설계했을 부분도 뻔하다. 읽으면서 혹시... 했는데 역시였어. 결말은 맘에 들기는 했는데 "와, 사이다!" 이게 아니라 "그래, 차라리 그래 버려라" 쪽이다. 사실 가장 거슬리는 건 번역. 왜 그렇게 '오빠,오빠'거리나. 원문이 그럴 리 없는데. 작가의 전작이 정말정말 좋았어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실망했다.



5. 일주일(최진영. 자음과모음. 2021.160쪽)

: 10대들의 이야기. 작가는 이 시대의 10대들에게 마음이 많이 쓰였나보다. 사실 난 10대였던 때가 너무 오래전이어서인지 첫번째 작품 「일요일」에는 크게 공감했지만 나머지 두 작품에는 그저 호기심이 더 컸다. 아무래도 같이 일요일을 보내던 천진했던 세 친구가 각자의 환경에 따라 다른 길을 가는 모습이 세대를 통틀어서 가장 보편적인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작가의 따뜻함이 끝까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느껴져서 좋았다.



6.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임민경. 들녘. 2020. 208쪽)

: 임상심리 전문가가 살펴 본 문학 작품 속 자살 사례들. 『안나 카레니나』, 『인간 실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벨 자』, 『댈러웨이 부인』,『리틀 라이프』등 여섯 작품을 분석했는데, 뒤의 세 작품은 작품을 통해 작가를 분석하고자 시도했다. (따라서 뒤의 세 작품에 대해서는 난 일부만 동의하고 받아들였다.)


저자가 자살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들 - 심리적 고통, 양극성 장애 등 - 은 어쩌면 뻔할 수 있지만 저자의 전문적인 시각이 더해져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저자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분석이 내가 예전에 읽고 썼던 리뷰와 일치했을 때 많이 기뻤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또 조금 더 확장하게 됐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저자의 조심스러운 태도 - 전공이 아닌 분야(문학)를 건드리는 데 대한 - 와 행간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었다.



7. 모든 것들의 세계(이유리. 자음과모음. 2022. 159쪽)

: 환상적이고 귀엽고 짠한 이야기들. 그렇지만 난 좀 답답하기도 했다. 인물들이 다 너무 착해서. 특히 두번째 이야기 「마음소라」의 결말은 좀 짜증났다. 그거 너 혼자만의 만족 아니니? '난 착한 사람이야'라는. 그렇게 해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그냥 또 한명의 여자를 구렁텅이에 그대로 놔두는 거야, 겨우 기어나온 여자를. 부디 양희가 빠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를. 


세 편 모두 독특한 소재와 설정이 맘에 들었다. 작가만의 반짝임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등장인물들에게 내가 느끼는 답답함은 아마도 내가 더 세상에 찌들어서겠지. 찌듦을 조금이라도 벗겨내기 위해서라도 이 작가를 계속 찾아 읽어야겠다.



8.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마사 스타우트, 이원천 역. 사계절. 2020. 356쪽)

: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알려주는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는 모두 살인마이거나 범죄자이며, 주위에 이런 범죄자가 흔하지 않듯 대부분의 소시오패스들은 숨어 있을 거라는 착각을 깨준다. 저자는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양심'이 없는 상태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규정하고 이를 소시오패스라 통칭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전체 인구 수의 4%, 즉 25명당 1명이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범죄자들 중의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소시오패스들은 우리 주위에 더 많은 셈이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저자는 소시오패스에 대해 다섯 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읽다보니 상당히 열받기도 했는데 저자는 이러한 소시오패스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소시오패스를 알아볼 수 있는 최고의 단서는 바로 동정 연극이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보편적으로 두려움을 자극하기보다는 동정심에 호소한다." 178쪽 

"25년 동안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지금,  나는 소시오패스들이 동정을 좋아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등잔 밑이 어둡기 때문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딱한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그냥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게임을 계속하길 바라는 소시오패스라면 동정받기 위해 계속 연기를 해야 한다. 숭배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선량한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는 것이 소시오패스를 더욱 쟈유롭게 만든다." 179쪽

"누구를 믿을지 판단할 때는 당신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연기하지 않는지 살펴보라. 그런 연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일관되게 사악하며 터무니없이 부적적한 행동이다." 181쪽


저자는 이러한 소시오패스들과 엮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이들 소시오패스들은 당장은 남을 이용해서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도 조목조목 들긴 하지만 솔직히 이 부분만큼은 정신승리로만 보였다. 사실 이 책에서 소시오패스에 관한 부분보다는 일반적인 심리 이론이나 정신분석학적 이론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하인츠의 딜레마나 피아제의 도덕 발달 단계 등은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약간의 산만함이 이 책의 단점이다.



9. 말없는 자들의 목소리(황모과. 래빗홀. 2023. 272쪽)

: 올해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이다. 저자는 타임슬립을 모티브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타임슬립 기술을 사용하는 국제기구 인터내셔널 싱크로놀로지(syncronology)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에서 인원을 선발해 과거로 조사단을 파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홀로코스트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일하는 한국인 청년 민호와 우익재단에서 장학금을 받는 일본인 청년 다카야를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시기로 보낸다.  민호는 당시 식민지 노동자로서 많은 이를 구한 마달출과 김평세를 관찰해야 하고, 다카야는 말 더듬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낙후 지역에 약을 공급하고자 노력하다가 죽음을 맞은 약장수 미야와키 다쓰시를 관찰해야 한다. 


이 저자는 날 자주 울린다. 이번에도 많이 아팠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조선인학살의 분위기를 피부를 느끼게 되어서. 그리고 어느 시기에나, 어느 곳에나 있는 소수의 좋은 사람들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이유없이 도울 수는 있지만 이유를 만들어서 학대하고 죽이면 안 된다. 이 기본적인 진리조차 모르는, 부정하는 인간들을 人間이라 할 수 있을까.



10. 밤을 탐하다(마이클 코리타, 최필원 역. RHK. 2013. 452쪽)

: '나' 프랭크는 특정한 직업 없이 떠돌면서 살아간다. 이 대학에서 한 학기, 저 바에서 한 계절. 소설 작법을 듣고 교수에게 습작을 제출하자 교수가 관심을 보이지만, 곧 그 관심이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관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연방수사관이면서 청부살인업자였다. 아버지가 했던 일들이 드러나자 아버지는 자살을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아버지의 절친이자 동업자였던 데비 매트슨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다. 어느날, 아버지의 별장이 있는 호숫가에 데비 매트슨이 돌아오기로 했다는, 아버지의 옛 친구이자 역시 이 일에 얽혀있는 에즈라로부터의 연락을 받고 프랭크는 세 사람의 별장이 모여 있는 호수로 간다. 데빈에 대한 생각에 빠져 엉뚱하게도 교통사고를 낸 프랭크는 피해자가 우기는 바람에 신고도 안 하고 노라의 정비소로 차를 갖고 간다.


전반적으로 잘 짠 장르 소설이기는 한데, 내용면에서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어떤 한 인간의 헛짓거리 때문에 일이 마구마구 커져서 등장인물들이 다 삽질을 하는 건, 너무 허무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죽는 건... 다만 뭔가, 영상으로 만든다면 볼만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윌로우 플로위지가 궁금했다. 그곳에서의 추격신과 총격신은 정말 볼만할 듯. 이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코넬리를 비롯해서 여러 기성 작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난 아직 잘 모르겠다. 겨우 두 권 읽었을 뿐이지만. 두어 권 더 읽고 판단해야겠다.



11. 여덟 편의 안부 인사(조해진 외. 강. 2021. 375쪽)

: 근황을 얘기해 주는 듯한 단편들. 특히 조해진의 「혜영의 안부 인사」는 정말로 대학 동창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세부 사항이야 다르지만. 


문득 돌아보면 내가 언제 이만큼 왔을까 싶은 날들. 그날들을 세세하게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때의 나도 나이기에.



12. 별을 향해 가는 개(헤닝 만켈, 이미선 역. 아침이슬. 2007. 244쪽)

: 1950년대 스웨덴의 작은 마을. 열세 살 요엘은 벌목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어릴 때 떠났다. 요엘은 친구가 없고, 매일 낡은 난로에 불은 피우고 아버지와 먹을 저녁을 지어야 한다. 모두가 갖고 있는 빨간 자전거를 갖고 싶지만, 가스레인지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버지가 무서워 얘기하지 못한다. 매일 저녁 계단을 올라오는 아버지의 발소리로 아버지의 기분을 파악하는 게 요엘의 관심사. 어느날 밤, 깨어난 요엘은 창문 밖으로 흰 개 한마리가 달빛을 받으며 총총 걸어가는 걸 보게 된다.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게 아니어도 요엘의 모습은 너무 짠해서 안아주고만 싶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버림받았다는 분노를 요엘에게 푸는 아빠. 요엘이 아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엄마가 없는 요엘. 우연히 유일한 친구가 생기지만 그 친구와의 관계는 그리 기껍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한걸음 크게 성장하는 요엘이 기특했고, 고마웠다. 그 아이가 아주 잘 자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아서.



13. 죽은 자의 꿈(정보라. 새파란상상. 2022. 372쪽)

: 죽은 채로 태어나 산 것과 함께 땅 속에 묻혀 살아난 '나'. 자신처럼 죽은 것을 보는 태경과는 공생 관계이다. 태경은 나를 때리고, 나는 태경에게서 생기를 빨아들인다. 친구의 장례식장에 간 태경은 죽은 친구의 영혼과 마주쳐 자신이 살해당했다며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제껏 읽은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그로테스크하고 가장 어두웠다. 작가의 초기작이라는데 재출간하면서 고치긴 했겠지만 이 저자가 처음부터 쓰고 싶었던 작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결말이 너무 슬프다. 그건 희망이 아니야. 희망 따윈 없어. 길고 긴 어둠 뿐. 



14. 아웃랜더 1.2.(다이애나 개벌돈, 심연희 역. 오렌지디. 2022. 636쪽, 600쪽)

: 1945년, 전쟁 중 종군간호사였던 클레어는 남편 프랭크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전쟁으로 미뤄뒀던 신혼여행을 온다. 남편이 지역 목사관에서 6대조 선조인 조너선 랜들의 기록을 검토하는 동안 목사관의 가정부로부터 인생을 뒤흔들 커다란 일이 일어난다는 점궤를 들은 클레어. 다음날 혼자서 선돌에 갔던 클레어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갈라진 거석 틈으로 빨려들어 200년 전으로 타임슬립한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파견됐던 조너선 랜들과 마주치지만 광폭한 그의 행동에 도망치고, 스코틀랜드 전사 제이미 일행에게 발견되어 그들의 성으로 향한다.


어쩌면 뻔할 것도 같았는데, 정말정말 재미있었다. 클리셰를 버무려 놓았지만 어느것 하나 진부하지 않았고 제이미의 매력도 점점 배가됐다. 이렇게 제대로 된 로맨스 정말 오랜만이다. 후속작이 모두 출간된 뒤에 읽을 걸.



15.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정보라 외. 현대문학. 2022. 388쪽)

: 작가 스무 명의 앤솔러지. 약간의 기호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괜찮았다. 처음 읽는 작가도 있었지만 역시나 이미 읽었던 작가들이 좋기는 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정보라, 황모과. 그리고 고호관의「그 어떤 존재」는 내가 이 소설집에서 원했던 딱 그 소설이었다. 



16.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루이스 어드리크,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3. 588쪽)

: 1차대전에서 독일군 저격수로 복무한 피델리스. 종전 후 죽은 절친의 약혼녀와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시카고로 향하던 중 노스다코다 주 작은 도시 아거스 타운에 정착해 정육점에 취직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가족들은 데려온다. 한편 아거스 타운 출신 델핀은 원주민 피가 섞인 조와 함께 기인 공연을 하고 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온다. 주정뱅이 아버지 로이가 방치한 집을 치우던 중 지하 식품저장실에서 시신 네 구가 발견된다.


스텝앤드어해프가 왜 그렇게 걷는지,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녀가 주운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마지막 챕터가 가장 좋았다. 이제까지 읽었던 이 작가의 작품들이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데 비해 이 작품은 마지막 챕터 덕분에 그래도 가장 따뜻했다.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마지막 챕터의 그 사십 년 전 일 때문에 이 작품의 이야기가, 그 따뜻함이 시작된 거였다.


이 작품이 작가의 초기작이던데 아마 작가가 여기서 언급한 원주민의 이야기, 그 아픔이 다음 작품들에서 그렇게 뻗어나가고 그래서 그 작품들이 씁쓸과 쓸쓸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 그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하지만, 난 정육점 주인들의 천사같은 노래소리가 더 듣고 싶다.



17. 종의 기원담(김보영. 아작. 2023. 320쪽)

: 세 편의 로봇 이야기. 연작이다. 화자는 한 명이고, 각각 읽어도 무난할 수 있겠으나 역시 세 편 이어서 읽어야 재밌다. 케이는 현재 가장 인기없는 모델 몸체를 갖고 있고, 가장 인기없는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케이의 연구는 유기생물체에 관한 것. 유기생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케이의 전공교수의 주장은 학계에서 헛소리로 치부될 뿐이다. 그런데...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무 일찍, 너무 대놓고 말해줘서 뒷부분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케이와 세실이 어떻게 될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하지 않다고.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자 흥미가 확 올라갔다. 도입부 역할을 한 첫 번째 이야기의 세계관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나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세계가 전복되고, 케이를 이해할 거 같으면서도 케이가 미워진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모든 게 올바른 방향으로,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작가가 오랜 기간 고민하고 다져왔던 이야기라는 게 절절히 느껴지는, 잘 완성된 이야기들이었다.



18. 친구(시그리드 누네즈, 공경희 역. 열린책들. 2021. 256쪽)

: '나'의 친구가 자살했다. 문학계와 사회에서 인정받던 그는 나이듦과 밀려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의 제자였으며 한때 연인이었으나 최근에는 절친으로 지내왔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이 연락을 해왔는데 그가 구조해서 돌보던 그레이트 데인 아폴로를 맡아달라고 한다. 작은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아폴로를 데려온 나는 아폴로를 돌보면서 그를 회상한다.


화자의 조용하고 깊이있는 사색이 정말 좋았다. 반면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 죽음과 삶, 우정과 사랑은 정의내리고 부여잡는다고 잡아지는 게 아니다. 그냥 받아들이고 가꾸는 거다. 마지막 장면, 해변가의 아폴로처럼.



19. 내가 너에게 가면(설재인. 자이언트북스. 2022. 268쪽)

: 성주의 할머니 이종옥. 1998년에 크게 착한 일 한 가지를 한 대가로 저승사자들이 소원을 들어준다 한다. 소원은 손녀 성주가 밥을, 그게 안 되면 빵이라도 먹는 것. 복싱을 시작한 몇 년 전부터 곡기는 끊고 단백질만 먹는 손녀를 세 계절 동안 지켜보기로 한 할머니는 마땅한 데가 없어서 자신이 던져 부순 복싱 트로피에 깃들기로 한다. 복싱 선수이자 방과후 돌봄 교사인 성주는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열 살 소녀 애린을 만난다.


사실 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작가의 글솜씨가 좋아서 읽는 맛이 있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뻔하게 흘러가는 건 둘째 치고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할머니가 저승행을 미루고 성주를 지켜보는 설정이 맘에 들어서였는데, 그냥 그게 다다. 그걸 어떻게든 살렸으면 좋았을 걸. 내용도 서술도 너무 무난하기만 했다. 



20.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윌라 캐더, 윤명옥 역. 열린책들. 2010. 352쪽)

: 1851년, 카톨릭 신부 장 마리 라투르는 배가 난파되어 책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잃고 간신히 이곳 뉴멕시코에 도착한다. 친구이자 부교구장인 바일랑 신부와 함께 그는 40여년 간 뉴멕시코의 원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며 그들에게 소임을 다한다.


챕터 하나하나마다 에피소드들이 있고 두 신부의 삶과 성향을 보여준다. 대부분 신교의 영역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구교 사제들의 행보와 원주민들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카톨릭 신앙을 바르게 전달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사제들의 이야기가 광활하면서도 메마르고, 또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펼쳐지는데,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사실 난 지적이고 원칙주의자이며 고지식한 라투르 신부보다는 외향적이고 에너제틱하면서 라투르 신부가 원하면 어떤 사역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일랑 신부의 이야기가 더 알고 싶었다. 이제껏 이 작가를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장 좋았다.



21. 죽음을 선택할 권리(M. 스캇 펙. 조종삼 역. 율리시즈. 2018. 344쪽)

: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이야기하는 존엄사. 일단 첫 출간이 1997년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기는 해야 하는데, 서문에서부터 하나님을 언급한다. 사실 서문에서 하라 얘기는 다 한 거라서 단순히 저자의 주장이 궁금한 거라면 서문만 읽어도 된다. 난 전에 읽었던 다른 책에서 이 책을 몇 번 언급하길래 안락사 논쟁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읽었는데, 저자가 책 안에서 모순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 개의 에피소드에서 자신이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과잉진료(혹은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심지어는 유족과의 의논도 없이 끝낸 것을 후회는커녕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분명한 목소리로 반대한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자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반대는 하지만 알락사를 택한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영성의 측면이 간과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저자처럼 심적 문제만큼 영적 문제도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자가 환자 상담 중에 성경을 언급한 건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환자가 치료에 효과를 못 본 건 당연하다. 그거에 왜 인용 부호를 붙이고 환자가 못 받아들인 양 서술한 건지(141쪽). 좀더 냉철하고 전문적인 시각이었으면 좋았을 걸. 



22. 슈퍼 마이너리티 히어로(천선란 외. 안전가옥. 2020. 292쪽)

: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작은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 이야기 다섯 편. 첫 번째 작품 「캡틴 그랜마(Captain Grandma), 오미자」가 너무 재밌어서 신나게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가장 재밌었고 가장 찡했던 건 천선란「서프 비트(Surf Beat)」. 



23.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이혜리 외. 북콤마. 2020. 292쪽)

 



24.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이영도, 정보라 외. 황금가지. 2009. 464쪽)

: 꽤 오래전 앤솔러지이긴 한데, 정보라 작가 작품을 읽고 싶어서 대출했다. 역시 열 작품들 중 정보라의 「은아의 상자」가 가장 맘에 들었다. 표제작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SF단편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클리셰여서 조금 실망했다. 나머지 작품들도 대체로 제목과 첫 문단을 읽으면 내용 전개가 대충 짐작이 가고 그 짐작대로 전개가 되어서 편하면서도 조금 실망스럽게 읽기도 했다. 다만 김보영의「노인과 소년」은 글솜씨가 훌륭했고 정지원의「장미 정원에서」는 내 취향이었다. 



25. 러브 스틸러(스탠 패리시, 정윤희 역. 위북. 2021. 408쪽)

: 라스베거스 최대 규모의 무장강도 사건이 일어난다. 순식간에 2천만 달러짜리 목걸이를 훔쳐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난 일당들. 이들의 영상이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간다. 한편 출장요리사업을 하는 다이앤은 파티에서 알렉스와 마주치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만나며 집에 데리고 오는데, 알렉스는 다이앤의 아들을 본 후 그들의 인연을 알아챈다.


속도감있는 케이퍼 무비 스타일의 소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난 권선징악이 좋다. 이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결말이 나긴 하지만, 나름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결말 부분이 추리력은 1도 없는 나도 이미 짐작할 만한 것이었어서 딱히 재밌지는 않았다. 



26.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장강명. 문학동네. 2023. 404쪽)

: 처음 배치된 표제작이 정말 맘에 들었다. 내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만 끼고 있는 필터가 물리적으로 구현된다니, 이거야말로 정신승리와 우민 정책의 끝판이자 현대인의 구원 아닌가. 물론 나보다 훨씬 건전한 정신을 가진 작가는 이러한 설정의 폐해를 제대로 보여준다. 나머지 6편들도 사회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는다. 사실 전체 7편 중 4편이 이미 읽은 거여서 부담없이 읽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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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웠어요... 당신 작품 덕분에 버텼던 날들... 이제 편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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