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잘레스 씨의 인생 정원 -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배운 삶의 기쁨
클라우스 미코쉬 지음, 이지혜 옮김 / 인디고(글담)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질주하던 커리어의 고속열차에서 난생처음으로 강제로 하차당한 셈이니 울어야 할 것도 같고, 의미를 찾지 못하던 직업에서 해방되었으니 웃어야 할 것도 같았다.

 

 

은행원 니클라스는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는다.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잘린 그는 안달루시아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곤잘레스 씨를 만난다.

 

자신의 밭에서 일평생 농사만 짓고 살고 있는 곤잘레스 씨와 도시남 니클라스의 만남.

일만 아는 독일인과 느긋한 스페인 농부는 어떤 교감을 가지게 될까?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 그저 그렇게 흔하디흔한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귀농을 꿈꾸는 도시 사람의 이야기일 거라고.

이런 맥락의 이야기들이 최근 들어 많이 나왔고, 느림의 미학을 외치며 시골생활 예찬을 하는 책들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곤잘레스 씨와 니클라스의 조합도 그러려니 했었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많은 곳에 플래그를 붙이게 될 줄 짐작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요즘 세상에서는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니 말이지.

 

 

 

곤잘레스 씨의 정원에서 정원일을 도우며 니클라스는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곤잘레스 씨와의 대화를 통해 지금을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삶의 가치

인간의 가치

시간의 가치

물질의 가치

노동의 가치

생명의 가치

나눔의 가치

사랑의 가치

 

 

 

그는 어떤 물건이든 돈으로 사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한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조차 적잖은 돈이 들지 않았던가.

그의 세계에서는 죽음조차 공짜가 아니었다.

 

 

 

농사는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다.

자연의 법칙이 그렇다.

예전처럼 사는 게 싫어서, 힘든 노동이 싫어서, 노동에 비해 턱 없이 모자른 노동의 대가가 싫어서

다들 도시화되고, 산업화되어 버렸다.

홀로 꿋꿋이 퇴비를 만들어가며 유기농 농사를 짓는 곤잘레스 씨의 정원엔 독약이 뿌려지지 않은 먹거리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비싸지만 그곳에서 채소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땅에 골프장을 지어서 한몫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주변의 땅을 사들이고, 남아있는 곤잘레스 씨의 땅을 헐값에 사기 위해 곤살레스 씨를 궁지로 몬다.

어디서 많이 보아온 일들이다.

 

 

 

 


지금껏 그는 느림이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발리 돌아가야 했다. 교통, 경력 쌓기, 심지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세상이 몰락하기 시작한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는 지 모른다. 무슨 일이든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해나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의미 있는 뭔가를 창출해내는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곤잘레스 씨의 정원

그곳에서 일을 하며 인생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메워가는 니클라스.

하지만 곤잘레스 씨를 협박하는 사람들의 횡포는 늘어가고 니클라스는 그를 돕고 싶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차에 화물차 연대가 파업을 선언하고 하루 이틀 사이에 대형 마트의 물건들이 동이 나면서 곤잘레스 씨 정원 앞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선다.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어 놓는 곤잘레스 씨를 보며 니클라스도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단순히 귀농이나 농사짓기, 시골생활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찰나의 순간에 느끼는 이 시대의 불공정한 시스템과 현대인의 잘 못된 소비습관에 대해

곤잘레스 씨의 정원을 통해 우리를 일깨워주는 지혜의 책이다.

 

 

 

세상 모든 일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조바심을 치며 고통받게 돼 있어. 최악의 경우에는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려 들다가 생명체의 조화로운 리듬을 망가뜨리고 말지.

 

 


우리는 이미 필요한 걸 다 가졌어. 그런데 더 많이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

 

 

소유욕.

이미 다 가지고 있지만 최신, 새것으로 교체하기 위해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다 쓰지도 못할 기능들을 가진 것들을 탐한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

현대사회가 끊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이다.

 

 

 

 

 

 

 


계획적 진부화라는 말을 들어본적 있나?

일부러 한정된 기간에만 제대로 기능하도록 제품들을 조작한다는 의미지. 프린터, 휴대전화, 자동차, 옷가지도 다 마찬가지야.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 견고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러면 당연히 사람들이 소비를 덜 할 것 아닌가. 휴대전화가 10년을 간다면 뭣 하러 2년마다 바꾸겠나. 말하자면 꾸준히 이익을 내려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불필요하게 대량으로 낭비하고 있는 거야. - 176페이지

 

 

이 이야기에는 지금의 현실을 꿰뚫는 시선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배부른 자들을 더 배불리기 위한 것임을 콕  찍어 이야기해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광고에 속아 현명한 소비를 하지 못하고 결국엔 자신들의 삶의 질을 더 망가트리고 있다.

 

 

 

 

 

 

 


천연자원을 둘러싼 전쟁이 지속되고 환경오염까지 일으키는 상황을 이대로 내버려 둘 것이냐, 아니면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와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냐는 결국 개개인의 소비행동을 통해 결정하게 되지.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열려있어.

 

 

니클라스가 곤잘레스 씨의 정원에서 보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깨닫고 달라지지만

현실로 돌아가는 일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현명한 소비에 대해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현명한 소비를 하며, 노동의 대가로 이루어지는 농업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느림의 미학이란 결국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진 것들이 내 몸에 쌓여갈 때 그것이 행복하고 건강한 에너지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임을 말하는 거 아닐까?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고, 빠르게 나아가고, 빠르게 변화되는 속에서 우리가 미쳐 챙기지 못하고 놓쳐 버린 것들이

결국은 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병들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열린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네. 끊임없이 배움을 즐기고, 낯선 것을 대할 때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을 품게나. 두려움은 행복의 가장 큰 적이거든. 중요한 건 결국 그게 아닌가? 행복하게 사는 것 말이야.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래서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어떤 위기가 와도 서로 도우며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아서.

현혹되는 삶보다는 현명한 삶을 바란다.

하지만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한다면 조금 더 많은 좋은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을 거 같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에피소드가 결국 언젠간 우리에게도 일어날지 모른다.

자급자족이 안되는 세상에서 나는 그 위기를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한때 시골생활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무작정 꿈만 꾸던 시간이었다.

귀농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이었다.

매일을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내야 하는 삶은 도시에 찌든 내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꾸고 싶다.

자연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내는 삶을.

 

 

곤잘레스 씨의 정원에는 못 미치더라도

느리게 살면서

건강하고 풍요로운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미 풀빛 그림 아이 71
숀 탠 지음, 김경연 옮김 / 풀빛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십칠 년 동안 매미는 묵묵히 일했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고.

 

매미는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과 공존하며

인간이 시키는 일을 하지만

그 어떤 대우도 받지 못하는 매미.

 

회색빛 그 안에서 녹색 광선처럼 매미는 존재한다.

숀 탠의 그림은 무채색으로 빛난다.

숨 막히는 도시 속에 갇힌 사람들의 심장처럼.

매미는 17년의 긴 세월을 지나 은퇴한다.

옥상 난간에 서 있는 고달퍼 보이는 뒷모습은

거대하고 화려한 비상을 앞두고 있음을 예견하지 못한다.

 

 

은퇴는 제2의 인생의 시작점이다.

화려하고 우아하게 변신하여 훨훨 날게 될지

곤두박질치며 추락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매미는 화려한 변신을 한다.

훨훨 날아 숲으로 들어간다.

 

매미들은 모두 날아 숲으로 돌아간다.

가끔 인간들을 생각한다.

웃음을 멈출 수 없다.

 

 

 

매미에게서 찌들고 허덕이는 인간 군집을 본다.

매미의 변신에서 틀을 깨고 다른 인생을 접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세상은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사회의 부속품.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다.

 

 

그것이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홀로 녹색을 띤 매미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많은 시점에서

우리는 인생 궤도를 수정해간다.

용감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자유다.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매미는 온몸으로 얘기한다.

화려한 비상이 남아 있음을.

 

 

나이에 상관없이

물질적 유무에 상관없이

지금 어떤 삶을 사느냐에 관계없이

준비가 되었던

준비가 되지 않았던

 

 

어느 시기에 도달하면

변신의 시간이 주어진다.

 

 

공평하게 오지만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

 

 

 

 

 

 

 

매미가 십칠 년 동안 묵묵히 일만 했을까?

모진 시간 동안 비상을 꿈꾸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준비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화려한 날개 뒤엔

그런 지난한 시간이 있었음을

선명한 붉은색이 하늘 가득 푸른 숲으로 날아간다.

그림책은

가끔

뇌리를 스치는 순간을 잡아채는 재주를 지녔다.

숀 탠의 매미는

나에게 변신의 순간을 준비하라는 계시처럼 보인다.

화려한 날갯짓을 할 시간이 언제든

한 번은 올 것이다.

껍질을 벗고

날아올라

숲으로 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이야말로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다.

 

 

하나의 산봉우리에 이야기 하나.

저마다 산을 오르는 여자들이 지닌 현실은 서로 다르지만 그만큼 서로 비슷하다.

결혼 적령기를 지난 여자

불륜을 저지른 여자

결혼의 기로에 서 있는 여자

이혼을 앞둔 여자

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을 시작한 여자

마흔에 단체 만남에서 만난 남자와 산에 온 여자

 

등산을 잘 하는 여자

산을 처음 오르는 여자

산에 오른지 오래된 여자

혼자인 게 좋은 여자

혼자는 불안한 여자

과거를 회상하는 여자

미래를 꿈꾸는 여자

 

제각각의 여자들의 이야기가 산 하나와 연결되어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야기 따라 나도 같이 산에 오른다.

미덥잖은 동료가 의외의 궁합으로 친구가 되고

집안 행사 때면 비가 오는 자매들의 산행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미숙하다는 증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징인 야리가타케 정상에 거절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 힘으로라도 생각했던 건 사실은 자신의 페이스를 맞춰주었던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주었던 아버지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몇 번을 오르고자 했던 산은 번번이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것이 항상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었다.

다른 사람이 발목을 잡은 게 아니었다.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창에 발이 미끄러져 균형을 잃었다. 이 산길은 내 인생인가, 아니면 언니 눈에 비친 내 인생인가. 길이 질척거리는 데다 높게 죽죽 뻗어 있었을 나무들이 여기 와서 마구잡이로 구부러져 길을 막고 있는 것 같다.

 

 

 

일찍 결혼한 언니 덕에 양파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나.

하지만 사람들 눈에 그녀는 나이 먹었음에도 시집도 안 가고 취직도 안 하고 아버지 연금에 빌붙어 사는 한심한 여자이다.

자매의 산행은 언니의 잔소리로 막을 내릴 거 같았지만, 언니에겐 언니만의 문제가 있었다.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저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 이야기의 조연으로 출연한다.

이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그녀는 다음 이야기에 출연한다.

끊어진 거 같았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이어진다.

 

신선하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 그렇다.

이번엔 누가 등장할까?를 생각하며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로.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그녀들을 묶어주는 매개체이다.

등산 사이트에서 얻은 정보로 산을 오르는 그녀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알던 서로 모르던

 

여전히 내겐 일본 이름들이 낯설고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아서 힘들지만

이 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곳곳에 그 흔적들을 교묘하게 흘려 놓아서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앞둔 방식으로 등장하여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쪼개진 단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엮어가다니 새삼 더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나에의 소설은 고백 이후에 두 번째인데 확연히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맥락이 엿보인다.

모든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읽으면서 생각했다. 가나에 선생은 정말 이 모든 산을 다 올라 본 걸까?

정상까지 오르면서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까?

왠지 곳곳에 그녀의 흔적들이 보이는 거 같다.

마치 흔한 주변인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해 있는 거 같다.

 

일본의 많은 소설들이 우리보다 앞서가는 세계를 보여주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좀 더 앞서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아직도 결혼이란 관습에 묶여있고, 남자에게 의지해야 좋게 생각되는 모습들이 보여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즈키의 모자가 나는 제일 맘에 들었다.

 

내가 만든 모자는 내가 모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바쁜 매일매일에서 건져 올린 누군가의 자유로운 시간과 함께할 수 있다.

나도 슬슬 새로운 풍경을 잘라내러 가볼까.

 

 

산을 오르며 곤란을 겪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문제들을 산을 오르며 생각하고, 고민하고, 터뜨리고, 날려버린다.

정상에서 마주하는 풍경 너머로.

 

그녀들이 하나씩 쓰게 될 모자가

그녀들과 함께 자유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인생 어느 부분에서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자유의 모자를 쓰시길.

그리고 같이 산에 오르길.

따로 또 같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발의 소녀 라임 청소년 문학 38
킴벌리 브루베이커 브래들리 지음, 이계순 옮김 / 라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이다, 너는 충분히 배울 수 있어. 너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한 말에 귀 기울이지 마. 네가 아는 것, 그러니까 너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장애를 가진 발 때문에 엄마에게 모진 학대를 당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학교도 다니지 않는 에이다.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엄마와 동생 제이미와 함께 살지만 엄마는 에이다를 쓸모없는 년이라고 부르며 걸핏하면 때리고, 싱크대에 가둬둔다.

글은 배운 적도 없고,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인 에이다의 삶.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모르고 살고 있는 에이다에게도 바깥에서 불어오는 전쟁의 바람은 피할 수 없다.

독일군의 폭격에 대비해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라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제이미가 학교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한 날.

엄마 몰래 조금씩 걷는 연습을 했던 에이다는 제이미와 함께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한다.

낯선 곳에 도착한 두 남매. 그러나 그 어떤 가정에서도 에이다와 제이미를 선택하지 않는다.

관리자 토튼 부인은 두 아이이들을 데리고 스미스씨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두 아이를 스미스씨에게 맡긴다.

그날로부터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스미스씨는 에이다의 발이 내반족이라는 걸 알아보고 병원에 데려간다.

의사는 어릴 때 치료했었더라면 고칠 수 있었을 거라 말하고 완치는 안되겠지만 수술을 하면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목발을 짚고 조금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된 에이다.

아이들을 보살피지 못한다고 하던 스미스씨는 에이다와 제이미를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사주었으며 음식도 배불리 먹인다.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는 스미스씨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낯선 곳으로 피난 온 아이들과 자신의 고통 속에 갇혀 외부와 차단하고 혼자 고립되어 고통을 되씹고 사는 수잔이 만남으로서 작은 울림이 생긴다.

옥스퍼드 대를 졸업한 수잔은 남자들의 세계에서 취직이 어렵게 되고, 결혼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가족과도 소원해지고, 의지가 되었던 친구가 죽자 삶의 의지를 잃은 채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 보살핌을 제대로 받은 적 없는 외로운 두 아이들이 떠 맡겨졌다.

수잔은 엄마와는 다른 시선으로 에이다를 보고, 이끌어주고,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에이다는 이 많은 것들을 누리는 게 두렵다.

어차피 다시 되돌아가야 할 곳엔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쩐지 크리스마스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함께 모인다, 행복하다, 축하한다는 이야기들에 나는 위협을 느꼈다. 내가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이모는 내가 행복하길 바랐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스미스씨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수잔은 자기를 이모라고 부르라고 한다.

이곳 생활에 적응되면 될수록 에이다는 점점 두려워진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에이다를 보며 가슴이 저릿저릿 해진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누군가가 베푸는 작은 친절도 받아들일 줄 모른다.

평범한 것들도 에이다에게는 특별한 것이다.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너무 많은 걸 가졌다. 그래서 몹시 슬펐다.

 

 

에이다의 발을 수술하기 위해 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수잔은 에이다의 엄마에게 편지를 쓰지만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다 어느 날 반송되어 온 편지를 본다. 이사 갔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실망한 아이들에게 수잔은 전쟁 때문에 잠시 거처를 옮긴 것이니 곧 연락이 올 거라 말한다.

전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마을로 함께 피난 왔던 아이들은 부모들이 와서 거의 다 데리고 갔다.

에이다와 제이미만 빼고.

에이다는 수잔과 함께 하면서 글을 배우고, 조랑말을 키우고, 목발을 짚고 거리를 걷는다.

엄마가 알면 난리 날 일이다.

엄마 때문에 사람들은 에이다가 모자란 아이라고 생각해왔다.

장애가 발이 아니라 머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제 발은 머리랑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이제 에이다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장애는 부끄러운 게 아니고 감춰야 할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받았던 학대는 가끔 그녀 마음속에서 뛰쳐나와 통제 불능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수잔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달래준다.

에이다에 의해 옷이 찢기고, 할큄을 당해도 놓지 않고 그녀를 안고 달래준다.

엄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수잔에게서 받은 에이다에겐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갖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코앞에 닥치고 많은 부상병들이 마을로 실려 온 날 에이다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뉴스나 영화관에서 보는 영상에는 이런 장면들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피상적으로만 접했던 전쟁의 참상을 직접 확인한 에이다에겐 그날이 그녀의 전쟁에서 살아낼 방법을 알려준 계기가 된다.

 

 

마침내 내가  싸워야 하는 대상과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얼마나 막강한 싸움꾼이 되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대가로 부모들이 매주 19실링을 내야 한다는 통지문을 받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엄마를 따라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온 에이다.

엄마는 다시 손찌검을 하고, 그녀에게 외출을 불허한다.

 

 

 

 

 

​사는 게 팍팍하고 힘들다지만 자신의 아이를 이렇게나 방치하는 부모가 있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했지만

세상에 널려있는 삶 중엔 이해 못 할 삶도 있는 법이다.

가족이라고 무조건 아끼고 사랑하고 그런 거 없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고 보니 가족이라서 더 아프고, 더 상처를 주고, 더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

에이다와 제이미. 그리고 수잔.

이 세 사람은 고립된 삶을 살아가다 우연한 기회에 같이 살게 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를 돌보며 가족보다 더한 가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피를 나눈 사람들보다 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더 가족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야기. 맨발의 소녀.

요즘 의도치 않게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을 읽게 되었는데 다행히 살벌한 공포보다는 그 상황에서도 사랑과 희망과 의지를 불태우는 이야기들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될 수 있다.

에이다에겐 수잔이 엄마를 대신할 테고

수잔에겐 에이다가 곁에 있어줄 테니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서로 든든하게 살아갈 것이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본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면술사 : 마크 트웨인 단편집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3
마크 트웨인 지음, 신혜연 옮김 / 이소노미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전 시대를 살았던 작가를 알아가는 시간이 이렇게 유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허클베리핀과 톰소여의 작가로만 기억했던

마크 트웨인.

 

그에게 넘치도록 있었던 재치와 블랙 유머가

21세기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니

사후 100년 동안 저작권을 인정해야 한다던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여덟 편의 산문과 두 편의 단편이 실린 최면술사.

난 단편보다는 산문들이 좋았다.

 

책 제목과 같은 최면술사.

어린 소년의 눈에 띄고 싶어 하는 갈망이 거짓을 인내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그 거짓은 진실이 되어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거짓이 되었다.

 

잘 꾸며진 거짓이 진실이 되어 사람들 마음에 새겨지면 진실을 눈앞에서 흔들어도 결코 인정하지 않게 된다.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세월을 부정 당하기 싫은 인간 내면을 잘 보여준 최면술사.

 


거짓 위에 세워진 영광이란 머지않아 상당히 불쾌한 마음의 짐으로 바뀌게 마련이에요.

 

사람들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게 얼마나 쉬운지! 그리고 그 거짓을 다시 되돌리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감기 치료법을 읽다 보면 이토록 무모할 수도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형 이야기는 왜 그리 답답하고 짠한지.

 

딸 수지의 일기에 적힌 마크 트웨인은 괴짜 그 자체이다.

 
 

아빠, 사탄 좀 혼내주세요. 저 밖 온실에 있는데 계속 거기서 움직이질 않아요. 범죄가 아래층에서 울고 있는데 말이에요!

 

어미 고양이 이름을 사탄으로 지어놓고

새끼 고양이 이름을 범죄로 지어 놓으면

저런 상황이 발생하는 법이다.


 

아빠는 어디에든 유머가 숨어 있지 않은 글은 좀처럼 쓰지 않으신다. 앞으로도 그러실 것 같다.

 

 

이토록 정확하게 자신을 알던 수지가 요절하고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수지가 살아있었다면 아빠를 능가하는 작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봤다.

 

요즘 4달러가 유행이지만

마크 트웨인은 3달러로 글을 썼다.

그러면서 정말 교묘하게도 소설이라고 써놓다니

마크 트웨인의 재치의 끝은 어디인가!

 

저는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죽어서까지 붙어다닐 엄청난 명성 두개를 얻었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선생님의 책을 거절했다는 것, 그리고 그 덕분에 유일무이한 19세기 최고의 멍청이 후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석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많지 않다.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에 마크 트웨인을 넣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 같다.

 

책 소개를 할 때

마크 트웨인을 웃음과 모험으로 기억한다고 썼다.

책을 읽고 나니 그를 다르게 기억하고 싶어졌다.

 

마크 트웨인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해학과 선견지명을 가진 멋스러운 작가이다.

 

진정한 글멋을 아는 작가

마크 트웨인.

 

그를 알아가는 시간 동안 모처럼 즐거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