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만나는 영국 동화 - 곰 세 마리부터 아기 돼지 삼 형제까지 흥미진진한 영국 동화 50편 드디어 시리즈 3
조셉 제이콥스 지음, 아서 래컴 외 그림,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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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편의 동화는 익숙한 듯 다른 느낌으로 읽혔다.

약간 바보들의 대행진 같은 느낌이랄까?

어리숙한 사람, 예쁘고 잘 생긴 남자와 여자, 마음씨 착한 사람, 나쁜 마녀, 욕심 많은 인간, 자기 보다 잘난 사람을 못 참는 사람들.

그들이 일궈내는 이야기엔 잔혹함과 무지와 바보스러움과 경악할 이야기들이 담겼다.

영국 동화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잭'

이 소년은 거인들을 속이고 그들을 죽이는 재주가 있다.

그뿐인가,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잭과 콩나무>는 그나마 귀여운 이야기였다.

<거인 사냥꾼 잭>은 거인 처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영국 동화엔 거인이 참 많이 나온다.

어쩜 아주 오래전 영국엔 정말 거인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동화는 헛소리 같지만 전혀 헛소리는 아니니까.

<닮지 않은 자매>와 <우물의 세 머리>에선 친절을 베푼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밀짚모자>, <고양이 가죽>, <골풀 외투>는 신데렐라 탄생의 배경 같다.

이 이야기를 읽었던 누군가는 재투성이 신데렐라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드디어 만나는 영국 동화>에선 게으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운 좋은 사람들 이야기도 많다.

<톰 팃 톳>을 읽으며 한 달 내내 아마로 실을 자은 새가 불쌍할 정도다.

나는 마법에 걸린 왕이 새로 변한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 이름을 못 맞추는 왕비를 보다 못해 자기가 일부러 이름을 알려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아무 생각 없는 왕비만 행복하게 잘 살았다!

<게으름뱅이 잭>은 또 어떤가.

내가 게으름뱅이 잭의 엄마였다면 복창이 터져서 죽어버렸을 거다~

영국 동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고담의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다.

고담은 배트맨을 연상시켜서 꽤 하드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아! 정말 이렇게 바보들만 사는 동네였다니!

게다가 잘난 척들은 오지게 하는 양반들만 사는 곳이 바로 '고담'이라~

이 제목에 곁들인 속담 또한 "너 난 날 내 났다"라는 잘 뜯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중간중간 만나는 아서 래컴의 컬러풀하고 환상적인 삽화가 이 책을 더 돋보이게 했지만





페이지 사이사이 깨알처럼 박혀 있는 존 바튼의 그림들이 훨씬 동화의 매력을 살려냈다.

자주 들어서 아는 이야기도 고전처럼 원작으로 읽으니 새롭게 느껴지고, 내가 아는 이야기들이 많이 각색된 이야기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림 동화와 이솝 우화와는 다른 결의 영국 동화.

아서왕과 멀린도 나오는 거 보면 이 책에 담긴 50편의 동화는 영국인들에게 오랜 시간 웃음과 교훈을 준 이야기 같다.

이 이야기들에서 파생된 이야기들이 영국 문학 곳곳에 스며있을 거 같다.

이야기에서 배울 점을 제목 아래에 속담으로 연결시켜 둔 편집이 맘에 든다.

우리나라 동화처럼 권선징악이 확실하고 매듭이 분명하게 지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엔 기분이 찝찝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이 이야기들이 어딘가에서 진행 중인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그게 더 즐거웠다.

열린 결말은 내게 또 다른 상상의 시간을 주니까..

머리 식힐 책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을 동화다.

동화라서 마냥 아름다울 거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원래 동화는 잔혹한 현실을 위트 있게 꼬아 놓은 이야기라는 걸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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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책세상 세계문학 12
샬럿 브론테 지음, 신해경 옮김 / 책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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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쓰임이 있어. 나는 여기서 팔 년을 쓰였지.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쓰이는 거야. 그 정도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실행해볼 만하지 않아? 그래, 그래, 그런 목표라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 그걸 달성한 수단을 짜낼 정도로 돌아가는 머리만 있다면.'



제인 에어를 읽었음에도 내 기억엔 그리 남아있지 않았다.

이번에 <제인 에어>를 읽으며 왜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제인과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틀안에서 자라고, 울타리 안에서 그 세상이 다라고 생각했었던 사람이었다.

내 안의 무엇은 그 틀을 깨고 싶어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제인 에어는 나를 가로막는 틀을 자꾸 깨고, 부수고, 나아갔다.

나는 그게 부러우면서도 싫었다.

아마도 싫었던 이유는 제인이 가진 그 강인한 정신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진 틀을 깨기 시작한 건 서른이 넘어서부터니까.

그 이전엔 순종적이고, 여자로서 지녀야 하는 덕목들이 내 발목을 잡았고, 난 한 번도 그걸 깨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

그렇게 깨어진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저 내 현실 그대로의 안온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제인 에어를 읽으며 나는 그녀의 생각이 성숙해짐에 따라 스스로를 책임지며 나아가는 모습에 마음이 떨렸다.

내가 처음 만났던 제인에게서 지금 내가 보던 모습을 봤더라면 지금하고는 다른 나로 살고 있을까?





"위치! 위치라니! 당신의 위치는 내 심장 속이야. 그리고 지금이나 앞으로나 감히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가지에 있지. 자, 갔다와요."



로체스터의 열렬함이 꼭 능숙한 바람둥이 같아서 순진한 제인의 혼을 빼내려는 거 같았다.

유려한 말솜씨가 나이 어린 소녀를 성숙한 여자로 만들어 버려서 정신을 빼놓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로체스터와 제인의 나이 차이 때문에도 거부감이 있었던 거 같다.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지 못한 어린 나에겐...



"아니, 너는 스스로를 떼어내야 해. 아무도 널 도와서는 안 돼. 너는 스스로 네 오른눈을 뽑아야 해. 스스로 네 오른손을 잘라야 해. 네 심장은 산 제물이 되어야 하고, 너는 네 심장을 찌르는 사제가 되어야 해."


위기의 순간마다 제인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한다.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의 그녀는 무적이다.

그렇게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언제부터 놓쳤을까?

나는 제인을 만나는 동안 내가 나를 놔버린 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했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멈춰버린 순간이 언제인지, 나와의 시간을 갖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됐는지, 왜 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나는 그의 슬픔에서도 빠져나가야 한다.



많은 사랑들이 상대방의 슬픔에 절여져서 스스로의 생각을 접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내가 주체가 아닌 상대방을 우선으로 두는 행위가 숭고한 사랑이라 믿는 어리석음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그것이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지 숱하게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18살의 제인 에어는 단호했다.

그의 슬픔으로부터 제인 에어를 지켜냈다.

그러기에 다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황들을 이해할 시간을 충분하게 가질 수 있었기에 장애를 가진 로체스터를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쩜 그랬기에 손필드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겠지..

안 그랬다면 손필드의 불꽃놀이에 자신을 불태웠을지도 몰라.



신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 힘을 주셨소.



신존의 이 말은 제인 에어를 관통하는 말이 아닐까?

그 힘을 온전하게 잘 활용한 건 제인 에어니까.

신존(다른 버전에선 세인트 존)이라는 이름이 참 낯설지만 이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는다.

이 신존이란 인물을 꿰뚫어 보는 제인의 무의식이 새삼 존경스럽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혜안을 가지고 있다니! 그래서 많은 여성 팬을 갖게 되었겠지만..

그건 아마도 제인이 마음이 하는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해주는 말보다는 남들의 말에 좌지우지되고 마는 요즘 사람들에게 제인은 경각심을 주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의 결함을 느끼고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은 나와 동등한 자였다. 내가 논쟁할 수 있는, 내 논리가 정연하다면 저항할 수 있는 자 말이다.



논리가 있는 것과 냉정한 것은 다르다.

제인은 논리가 있었고 그건 그녀의 생각하는 힘이었다.

<제인 에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생각하는 힘'이 아닐까?

충분히 생각하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 자의 행보는 어지럽지 않다.

고전을 다시 읽을 이유 하나를 또 찾아냈다.

로체스터와 신존과 제인의 대화를 곱씹으며 상대를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법을 다시 배운 기분이다.

이 소녀가 여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참 경이롭다.

고집 세고, 앙칼지며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던 제인의 마음 바닥에는 인정받지 못한 억울함이 존재했다.

그 억울함이 템플 선생님의 지혜로 풀어진 다음에야 제인은 제인 다워질 수 있었다.

제인 같은 억울함을 분노로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템플 선생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것 또한 고전을 읽으며 깨닫게 되는 지혜인 거 같다.

아마도

내가 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껴지는 그때마다 이 책을 다시 펼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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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애덤스 이야기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2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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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는, 니컬러스 애덤스는, 그 안에 있는 어떤 자질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자질은 영원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라질지도 몰랐다.



<바질 이야기>를 읽고 나서 닉 애덤스 역시 비슷한 시대를 통과한 소년의 이야기라 생각했었는데 <닉 애덤스 이야기>는 첫 이야기부터 뭔가 살벌하면서도 위험한 삶의 여정 같았다.

닉의 등장은 겁 많은 소년이었다.

아버지와 삼촌과 밤낚시를 온 닉은 혼자 텐트에 있게 되자 무서워서 총을 세 발 쏜다.

아버지와의 신호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총을 쏘라는. 덕분에 겁쟁이라는 말을 듣게 됐지만.

인디언 부락에서 난산의 고통에 신음하는 산모를 돕는 아버지 곁에서 심부름을 하던 닉은 생명의 탄생과 동시에 아내의 괴로운 비명소리를 감내하지 못한 남편의 자살 현장을 보게 된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마주하게 되는 밤.

그것이 닉 애덤스의 첫인상이었다.






동생과 닉은 서로만을 사랑할 뿐,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다. 다른 가족은 그들에게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닉 애덤스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다.

위험한 십 대의 닉 곁에 여동생이 있다.

사냥 금지 동물을 죽인 이유로 수렵 감시인에게 쫓기며 동생과 근친상간적인 뉘앙스를 띄운다.

닉 애덤스라는 인물이 헤밍웨이를 대변하는 느낌이라서 이 부분에 약간 멈칫했다.

낚시를 좋아하고, 글을 쓰며 어딘지 동떨어진 세상을 살고 있는 느낌을 가진 닉 애덤스.

전쟁터에서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가다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청년이 전쟁의 참상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으로 보여서 마음이 애잔해졌다.



닉은 헬렌의 기분이 안 좋을 때 글이 제일 잘 써졌다. 딱 그만큼의 불만과 불화가 필요했다.



가정을 가진 닉 애덤스

자신의 아들과 함께 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닉 애덤스.

친구와 스키를 타며 자유를 만끽하는 닉 애덤스.

그의 내면은 닉의 이야기처럼 자꾸 세월을 건너뛴다.

바질이 질서정연한 성장기를 보냈다면

닉 애덤스는 월든 같은 성장기를 보인다고나 할까?

자연 속에 버티면서 어디로 튈지 모를 감수성을 가진 남자가 자신을 누르며 사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자신이 위대한 작가가 되리라는 걸 알았던 닉 애덤스.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어린 헤밍웨이와 청년 헤밍웨이와 중년의 헤밍웨이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새롭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건 아니다. 모든 것은 결국 부진해진다.




힘 있는 문체는 배경 묘사에 탁월해서 마치 내가 그 숲에 숨어서 닉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투박한 듯 세련된 문체는 묘하게 중독적이라서 읽고 있는 내내 삶을 살아내는 닉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거칠고 잔인한 느낌과 함께 다정하고 세심하며 굳건한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닉 애덤스.

단편이 주는 다채로움이 <닉 애덤스 이야기>의 최대 묘미다.

그래서 닉 애덤스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려 명의 동명이인의 삶을 그려 놓은 거 같다.

그게 바로 헤밍웨이인 거 같다.

실제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새로운 내 모습도 결국엔 부진한 모습이 되기에 부진함을 떨치기 위해 매해 또다시 새롭게 다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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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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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워진 바다는 때로 마을에 생각지 못한 은혜를 베푼다. 이는 척박한 밭이나 갯바위에서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여 수년간 마을에서 고용 하인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외딴섬마을에 선물처럼 찾아오는 뱃님.

뱃님이 오시면 마을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집집마다 건강한 사람이 고용 하인으로 팔려가는 곳.

10살 미만의 아이도 손을 보태야 하는 섬.

매일 새벽 바다로 나가 먹을 걸 낚아야 하는 남자들과 매일 해초를 줍거나 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여자들.

그렇지만 근근이 먹고살기만 하는 섬마을.

그들에게 아픈 가족은 밥을 축내는 부담스러운 존재였고, 굶주림은 그런 이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뱃님은 쌀을 싣고 지나가는 배가 섬의 암초에 걸려 좌초하는 것을 말한다.

섬마을 사람들은 그 배의 물건과 배의 파편 하나까지도 싹싹 쓸어 담는다.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고, 시체는 바다로 보내고 배는 해체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뱃님을 부르기 위해 소금을 굽는다...

현장 증언 사료를 기반으로 치밀하게 글을 쓰는 작가답게 그의 묘사는 세밀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섬마을의 특성을 잘 드러내면서도 이질감을 묘하게 잘 덮어둔다.

이사쿠를 통해 그 마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게 하는 작가의 필력은 읽는 내내 긴장감을 고조 시킨다.

처음으로 소금을 굽게 된 이사쿠는 어른 대접을 받는 거 같아서 우쭐해진다.

그래봐야 열 살일 뿐인데 그보다 더 나이 든 아이처럼 느껴지는 이사쿠.

말로만 들었던 뱃님을 직접 보게 된다.

마을에 풍족함을 가져다준 뱃님을 보면서 이사쿠는 이 행운이 또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사쿠의 바람대로 또 다른 뱃님이 오신다.

붉은 옷을 입은 시체들만 남은 배.

온통 붉은 천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치장한 시체들을 태운 뱃님은 마을에 상서로운 기운으로 전해지고

그들의 붉은 옷은 여자아이가 있는 집마다 전해진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무서운 일은 마음이 해이해지는 것이야."


일본 기담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읽었다.

외딴섬마을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일들을 독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작가의 글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뱃님이 도착함과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그냥 보내!!!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마음속에서 요동친다.

그러나

풍족해서 해이해진 그들에게 그것은 또 다른 선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행운과 불운을 구분하지 못한 그들.

그럼에도 신은 불공평해 보이지만 공평하게 그들을 단죄한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행되는 일들이었지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것들을 내놔야 했다.

그래도 소멸하지 않게 안배한 신의 뜻을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에서 그들의 굶주림이 가져온 비상식적인 행동을 왈가왈부할 수 없겠지..

어쩜 이 세상 어딘가엔 이런 섬마을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은 밤새도록 소금을 구울 것이다.

뱃님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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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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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의외로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결합이었다. 식물과 한 몸이 된 인간은 밤이면 영양이 풍부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잠을 자고 해가 뜨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음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한편 식물은 인간의 팔과 다리를 얻었으므로 환경이 적합지 않으면 쉽사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너의 유토피아>를 읽으며 나는 미래를 여행했다.

번역서들의 SF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현실의 문제들과 감정들을 유독 우리나라 작가들의 SF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우리의 미래가 암울함과 동시에 어떤 희망을 자꾸 내포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나무들이 어떻게든 꽃가루를 날려서 암울한 미래를 숨 쉬지 못하게 만들면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정보라 작가의 작품은 세 번째다.

<저주 토끼>에서는 온갖 환상특급을 맛보았고, <지구 생명체는 항복하라>에서는 평소 와닿지 않았던 현실의 문제를 요모조모 이해하게 되었는데 <너의 유토피아>에서는 그저 또다시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엔 현실이 담뿍 담겨있다.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현실의 문제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경각심을 일깨운다.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영생불사 연구소>를 읽고 나면 그렇게 오래 살 것도 못 되는구나 싶고,

이동하는 존재의 <너의 유토피아>를 읽으면서 먼 미래 인간이 놓쳐버린 인간적인 마음이 기계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고,

<여행의 끝>에서 인육 바이러스로 인간이 살지 않은 지구에 홀로 남은 존재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게 되고,

사랑스런 아내가 매일 나 모르게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전화를 하는 <아주 보통의 결혼>을 읽으며 오만가지 상상의 끝을 보게 되고,

인간의 로맨스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기계의 짝사랑에 가슴이 시려 <One More Kiss, Dear>를 찾아 듣게 되고,

<그녀를 만나다>를 읽으며 잊었던 그녀의 죽음을 되새겨 보게 되고,

기억을 축출당하며 죽어가는 그녀를 위해 나도 같이 <Maria, Gratia, Plena>를 읊어보며,

<씨앗>을 읽으며 식물들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테러(?) 행위를 정보가 작가가 눈치 없게 글로 쓴 거 아닐까란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보라 작가는 현장에서 직접 온몸으로 체험하는 작가다.

이미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에서 알아챘지만 <너의 유토피아>를 보면서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들을 SF 속에 녹여내는 탁월함을 가진 작가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

8편의 짧은 이야기엔

우리 현실의 불편함이 담겼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곧 나와 상관있는 일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저런 종류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저 모양이었던 걸까? 이제는 모두 생명공학을 통해 유전자 조작된 상태로 태어나는 걸 보면 아마 수정란 상태에서부터 저런 사람들로 엔지니어링되는 모양이다.



상식이 더 이상 상식이 아닌 세상의 맛을 보고 나니 이 문장 앞에서 그냥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읽어가며 하나씩 떠오르는 어떤 사실들이 가끔 발목을 잡고, 가슴을 두드리게 한다.

그래서 잊혔던 이야기들이 다시 소환된다.

우리가 사는 게 바빠서 신경 쓰지 않았던 우리의 모든 것들에 시선을 닿게 하는 힘을 지닌 <너의 유토피아>속 이야기들...

나는 다시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걸까? 란 생각을 곰곰이 해본다.

미래를 보여주면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해 주는 정보라 작가님이 있어서 우리는 복받은 독자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를 살면서 내 삶에 닿지 않은 문제들을 비슷한 시선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작가님이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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