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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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단의 독보적인 천재 작가 오쓰이치.

그의 환몽 컬렉션 메리 수를 죽이고를 만났다.

글의 성격에 따라 필명을 달리하여 글을 쓰는 이 작가는 재밌게도 자신의 작품 해설도 다른 필명으로 짤막하게 달아 놓았다.

마치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라고 외치는 거 같다.

다중 인격체의 집합체라고 해야 할까?

맨 처음 책을 받고는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집으로 생각했었다가 뒤통수 맞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다양하지?

그렇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7편의 단편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판 환상특급이다.

그만큼 짧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남긴 잉크병

쓰다만 잉크가 들어 있는 잉크병을 엄마로부터 택배로 받은 다카하시는 관처럼 황량한 방 안에 잉크병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북앤드를 샀고, 그러자니 책을 꽂아야 할 거 같아서 책을 사고, 사 놨으니 읽어야 할 거 같아서 읽다 보니 책이 늘고, 수납을 위해 책장을 사고, 그러다 책상을 사고, 그러니 공부를 해야 할 거 같아서 공부를 하고...

잉크병 하나의 기적

약에 취해 학교도 빼먹고 자유분방하게 살던 다카하시는 아버지의 쓰다만 잉크병이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줄 알았을까?

어쩜 무기력한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양심적인 사랑이었을까?

작은 선택의 결과가

작은 선행의 결과가

인생에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가져오는 신비한 체험을 이 이야기를 통해 하게 된다.


[염소자리 친구]

바람길에 자리한 집 베란다엔 이상한 물건들이 가끔 찾아온다.

가까운 미래에서 온 신문조각처럼...

학교 폭력. 왕따. 친구. 살인. 자살.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게 바꾸려 했던 행동.

누군가를 위한 일이 결국은 또 다른 누군가를 버리게 되는 일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간은 언제나 비워진 자리를 어김없이 채우는 법이니까.

다른 누군가를 대체해서라도...

눈앞의 우유 팩에 그녀가 토해낸 숨이 지금도 가득 차 있다.

살아있던 마지막 날, 사라지기 몇 시간 전의 그녀의 숨결이.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꽤 매력적인 캐릭터를 발견한 단편.

바로 무나카타라는 캐릭터다.

무나카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지금까지도 친구가 없다. 그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명확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며칠씩 목욕을 안 하는지 머리카락은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때가 껴 있었다. 옷은 누레서 누가 봐도 며칠, 어쩌면 몇 주는 빨지 않은 것 같았다.




묘사만 보더라도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당신이지만,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무나카타의 예리함과 끈기와 노력.

그리고 상황 판단력에 무릎을 치게 된다.

소년 탐정의 예리함과 재치가 이야기를 매력을 더해준다.

이 이야기에도 역시나 작은 선행이 깃들어 있다.

그냥 지나쳐도 되었겠지만 지나치지 않고 무나카타에게 건네주었던 십엔.

그것이 나중에 자신의 누명을 벗겨주는 원동력이 될 거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친구에게 사심 없이 빌려준 십 엔은

그녀가 누명을 쓰고 왕따를 당했을 때 홀로 외로웠던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메리 수 죽이기]

메리 수는 2차창작 관련 용어 중 하나로, 작가의 소망이 불쾌할 정도로 투영된 오리지널 캐릭터를 가리킨다고 한다.



스스로를 호빵 같은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지망생은 게임 캐릭터가 첫사랑이고, 게임 관련 2차창작을 하며 교내 동아리에서 글을 쓴다.

2차창작물의 주인공 소녀는 작가의 바램이 투영된 소녀였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예쁜 소녀.

어느 날 선배 한 명이 한 말에 자극받아 자신의 작품 속 메리 수를 없애기로 작정한다.

자신의 바램이 잔뜩 투영된 메리 수를 없애려면 스스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더 꼼꼼히 조사하고, 그러는 사이에 몸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게 된다.

공상보다 현실이 점점 더 편해지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잊게 된다.

호빵 시절엔 창작활동으로 자신의 바램을 충족시켰지만, 이미 현실에서 그런대로 멋진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까맣게 잊고 지낸다.

어느 날 찾아온 동아리 친구는 그녀에게 자신만의 글을 써보라 권한다.

그녀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녀가 동아리에서 썼던 글들을 후배들이 찾아 읽으면서 그녀도 모르게 후배들 사이에 꽤 유명해져 있었던 것이다.

잊고 있었던 작가에의 꿈.

메리 수를 죽인 그녀는 예전처럼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쓰기 시작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날, 결심을 굳히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2차창작이 아닌, 내 세계의 여행이 시작된다.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자유가 두려웠던 것이다.



[트랜스시버]

영화 프리퀀시를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은 쓰나미로 아들과 아내를 잃은 남자의 애절함을 담았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매일 술에 취해 사는 그는 어느 날 아들의 유품인 무전기에서 지지직 소리가 나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그 무전기에선 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술에 취해 아들과 무전기로 대화를 하는 남자.

건전지도 없는 트랜스시버는 어디에서 아들의 목소리를 내는 걸까?

현실일까? 환청일까?

이 이야기의 묘미는 마지막 줄에 담겨있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드는 마무리가 압권.


[어느 인쇄물의 행방]

이렇게 신선한 이야기는 또 처음이다.

3D프린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신선하면서도 구역질 나는 이야기가 참으로 담백한 표현력으로 전달되는 방식이라니.

이런 미래는 오지 않기를 바란다.

소각장에서 연기로 사라진 "그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규정해야 옳은 걸까?

어느 계절

해바라기로 다시 태어날 "그것"에 후일에라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에바 마리 크로스]

이 이야기야말로 환상특급 백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토록 소름 끼치게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는 처음이다.

인간 악기는 어떤 소리를 낼까?

인간으로 만들어진 악기의 연주회...

사랑을 바치는 겁니다. 나쁜 거래는 아닙니다. 조건을 받아들이고 평안을 찾도록 해요.




사랑을 바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해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게 사랑일진대

너무 쉽게 포기한 대가가 어떤 건지는 두고두고 귀에 걸리겠지...

너의 에바 마리 크로스는 세상의 모든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지만

너의 귓가에는 언제나 남아있게 될 거야...



뭔가 일상이 지루해서 조바심 날 때

특별한 이야기가 읽고 싶을 때

신선한 자극이 필요할 때

이 양파 같은 작가가 쓴 메리 수를 죽이고를 손에 든다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매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테니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 것.

앞으로 새로운 이름의 오쓰이치를 만나는 기쁨이 새록새록 쌓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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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인간적인 하루들 - 미리 알아 좋을 것 없지만 늦게 알면 후회스러운 거의 모든 불행의 역사
마이클 파쿼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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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이 빼곡하게 담긴 책이다.

그래서 70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꽤 두꺼운 벽돌 책이다.

그 하루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건이 담겨 있다.

행복하고, 행운적인 이야기가 아닌 불행이 담긴 이야기라는 게 조금 생소할 뿐.

 

누군가의 불행을 읽고 나를 다독이는 건 너무 얌체 같은 짓일까?

 

새해 첫날 모두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라지만 그날마저 불행이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404년 검투사들의 목숨 건 싸움을 말리려 한 수도승 텔레마코스는 재미난 구경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광기에 휩쓸린 관중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다 돌에 맞아 죽은 수도승이라니...

그 이유가 구경거리를 방해한다는 거였다니.. 이 수도승의 죽음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9월 14일엔 우리가 아는 유명인사들이 유명을 달리한 날이다.

불운의 날이라고나 할까.

평범한 날인 거 같은데 평범하지 않은 슬픈 날이다.

1899년 세계 최초의 교통사고 사망자가 탄생(?) 한 날이기도 하고,

1982년엔 그레이스 켈리가 교통사고로 사망.

1927년엔 이사도라 텅 컨 이 자신의 목에 둘렀던 스카프가 자동차 뒷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그러고 보니 모두 교통사고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날은 특히 교통사고를 조심해야 하는 날로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겠다.

 

10월 20일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도둑을 알게 된 날이다.

1986년 브루나이 술탄은 자신의 동생 제프리를 재정부 장관에 임명했는데, 그 제프리가 바로 가장 큰 도둑질을 한 장본인이다. 횡령한 돈의 액수가 150억 달러라니. 그 당시에~

자고로 사치가 심한 사람은 돈 통 근처에는 절대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재정부 장관으로서 나라의 재정을 통괄하라 했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라고 하진 않았는데 말이지.

그 자리를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 채운 브루나이 왕자.

그는 결국 자신의 모든 재산을 몰수 당했다.

 

11월 16일 러시아의 대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사선에 서 있었다.

러시아 황제는 영원히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려는 목적으로 매서운 계략을 꾸몄다.

1849년 지식인 몇이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죽음을 기다리는 끔찍한,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이 끔찍한 시간이 시작됐다. 추운 날씨였다. 정말 지독하게 추웠다. 그들은 우리의 외투뿐만 아니라 겉옷까지 벗겼다. 기온은 영하 20도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썼다.

영하 20도의 기온에 속옷만 입은 채로 총살을 당하기 위해 말뚝에 묶여있는 기분은 도대체 어떤 걸까?

하지만 이 모든 건 황제의 깜짝 쇼였다. 총살은 취소되었고, 위대한 작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최악의 순간을 지나왔다는 느낌 외에는.

그 덕에 우리는 이후에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외의 다른 작품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황제가 그날 진짜 총살형을 강행했더라면 우리는 저 작품들을 알지 못했을 테지.

 

12월 3일.

 

1992년 닐 팹워스가 최초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게 왜 불행의 역사냐고?

 

그날 이후 10대들은 상대에게 실제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멈췄고, 맞춤법을 지키는 일은 구식이 되었고, 운전자가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는 중 발생한 교통사고가 음주 운전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문자 메시지의 위대한 발명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단절로 몰아가고, 이렇게 많은 사망사고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세계의 언어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이 와닿는다.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도 SNS 발전 이후로 망가지고, 알 수 없는 언어가 되어 버렸으니...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

이날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복권에 당첨된 잭 휘태커

2002년 잭은 역사상 가장 큰 복권에 당첨되어 사람들을 돕고 선한 마음을 널리 전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그의 의지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트립바에서 돈을 뿌리고, 음주운전으로 체포되고, 교통사고를 내는 일이 잇따랐다.

 

 

돈이 그의 선한 면을 모두 먹어치운 것 같았어요.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자신의 보물을 가진 작은 친구 같았어요. 이름이 뭐더라? 골룸이었나? 보물이 당신을 먹어 치우죠. 당신이 그냥 돈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죠.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뒤끝이 좋았다는 예를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던 차에 이 잭 휘태커의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에 넘치는 많은 돈을 갖게 되면 사람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나 보다.

잭 휘태커는 복권을 찢어 버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이 불행한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게 있다면 행운과 불행은 자그마한 차이로 갈린 다는 것이다.

행운이 불행으로

불행이 행운으로

갈리는 그 지점.

 

그건 평소 나의 신념과 사소한 결정들, 나의 태도, 말, 행동들의 결집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운도 빼먹으면 안된다.

엄청난 행운을 걸머 쥐었어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을 자초한다.

행운도 그렇지만 불행 역시도 사소한 부주의가 야기한 것들이 많다는 것

어처구니 없는 불행한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 나에게 해당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위로아닌 위로도 받아 본다.

 

가끔은

반대적 의미로서

이런 이야기들이 삶에 위로가 된다는 걸 깨달은 시간이었다.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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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앱솔루트 달링
가브리엘 탤런트 지음, 김효정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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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끝났어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터틀은 '무식한 잡년'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깡통 속에 담겨 있던 뭔가가 왈칵 쏟아지듯이 그 말의 의미가 갑자기 그녀를 덮쳤다. 스스로 이름한 적도 없고 자세히 들여다본 적도 없는 그녀의 일부에 마틴이 이름을 붙이면 터틀은 그의 표현 그대로 자신을 인식하면서 자기혐오에 빠지곤 했다.





학대받는 소녀의 절망적인 현실

폭력과 구속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기 위한 처절한 투쟁

심리 드라마와 액션이 엉킨 문제작

강렬한 문구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오지에서 청소년 삼림 감시단을 이끌며 두 계절을 보낸 작가의 장편소설 데뷔작이다.

소설 초안으로 수십억 달러의 출판 계약이 성립되었다니 웬만큼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제목도 강렬하고

책을 설명하는 문구들도 강한 여운을 남겼고,

신선한 작가의 피로 이 흔한 이야기를 어찌 풀어냈을지 몹시 궁금했다.

읽기 편한 소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읽어 내렸다.

압도적인 자연의 묘사와 터틀의 상황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야생에 버려진 소녀의 생존기 같은 느낌이 가득한 이 이야기는 숨 막히는 현실감을 주변 환경의 묘사로 희석한 느낌이다.

줄리아 앨버스턴.

터틀, 개밥, 무식한 잡년

모두 같은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불리는.

여성 혐오증과 세상의 종말을 염려하는 강박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 시킨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그의 마지막 보물 줄리아.

그는 딸아이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일부러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서 그녀가 버티게 만든다.

자기만의 교육법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녀는 그것이 전부라 믿게 된다.

제이콥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줄리아에겐 아버지와 그녀. 근처에 사는 할아버지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사회생활과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지 못한 줄리아는 학교는 다니지만 친구는 없고, 성적도 좋지 않다.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그녀의 담임 애나 선생님이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도 그녀의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이는

고립된 환경에서 총과 칼을 쓰며 야생처럼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곧 세상이 멸망할 테니 아무것도 소용없고, 그런 세상에 너를 내보낼 수 없다는 마틴의 주장이 터틀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한밤중 자신을 찾는 마틴의 행동에 대해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그녀의 자아가 숨어 있었다.


 

 

 

 

 

마틴을 닮아서인지 그녀의 정신은 결코 강압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아니고 그의 일부도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인 시간을 즐겼고,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이런 시간이 간절했다.

숲속을 헤매는 소녀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 길을 따라 터틀이 도망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랬다.

누군가 그녀를 도와 그녀를 그 지옥에서 데리고 가주기를 절실히 바랐다.

모든 비슷한 이야기에서 그렇듯. 그녀를 위해 용기를 내어주는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 나는 믿었다.

그게 할아버지이거나 엄마 친구였던 캐롤라인이거나 담임선생님 애나이기를 굳게 믿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이자 공포이다.

사실 호평받는 첫 데뷔작인 이야기들을 올해 몇 편 읽었는데 다 특별했지만 이 이야기가 가장 특별했다.

깡마른 소녀의 강한 정신력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에 의해 단련된 것이기도 하다

종말이 올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에도 겁을 먹어서는 안되고, 물러나도 안되고, 악착같이 살기 위해 버텨야 한다는 걸 몸소 가르쳐준 마틴.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터틀.

몇 번의 탈출을 꿈꾸지만 그녀는 늘 돌아왔다.

매번 더 한 고통이 따랐지만 그래도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들의 상황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마틴은 터틀을 버리고 떠났으며 그가 없는 동안 터틀은 제이콥과 브레트와 어울리며 자신의 삶과 비교할 것들을 알아갔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도 결코 그 이전이 될 수 없는. 그런 여자가 되었다.

다시 돌아온 마틴에겐 작은 아이가 딸려왔다.

그 아이를 통해 터틀은 자신의 처지를 되짚어 보게 된다.

아무리 그럴싸한 언변을 토해내서 자신의 상황을 모면하려 해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소아성애자였다.



사실을 왜곡하기 시작하면 절대 원상으로 되돌리지 못해.




터틀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틴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를 배신하는 거 같았기 때문에...

그래서 탈출을 꿈꾸면서도 그의 곁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엄마를 잃고 그 충격과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빠에겐 터틀이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넌 내 거다." 마틴이 부지깽이를 휘둘러 그녀의 팔을 내리쳤다. 터틀은 진흙탕에 엎어졌다.




이야기의 결말로 치달을 때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다.

어째서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고 터틀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계속되는 공포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될까?

스스로의 의지.

그것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이 와도 잡을 수 없다.

터틀은 그 손길을 스스로 몇 번 내쳤다.

그런 후회가 그녀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겠지.

그리고 그녀와 같은 상황을 맞게 될 카이엔을 위해 터틀은 용기를 내었다.

자신을 위한 용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일에서 용기는 훨씬 빠르게 작용한다.

이 아름다울 수 없는 이야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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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7년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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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그날로부터, 우리는 지난 몇백 년 동안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줄줄이 이어진 박해와 집단 학살뿐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러고 나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이 뱃속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곪아간다.
            



이스라엘의 작가.
처음 접하는 글인데 굉장히 호감이 간다.
극적인 상황에 매일 노출되어서도 유머러스함이 빛을 발하는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내가처한 난처함이라던지 극박함이라던지 평소에 생각해오던 심각함들이 모두 우스워진다.

탈무드의 현실판을 읽는 기분이다.

찰나를 살아내는 긴박한 사람들의 일반적 일상
그안에 고스란히 담긴 선조들의 지혜를 은연중 삶에 접목시켜 사는 달관된 생각들

웃으며 읽다가 찡해지는 마음
어쩜 이렇게 극적일까? 하는 사람들의 모습
늘 전쟁과 테러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앓는 모습들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지갑도 챙기지 않고 걸어 다니고, 상점은 모두 문을 닫고, 텔레비전 방송도 없고, 웹사이트 업데이트조차 없는 날



속죄일.
그런날을 기릴 줄 아는 그들의 삶.
책을 읽다 이 대목에서
단 하루도 인터넷과 모든 편의시설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를 떠올린다.


벌레를 죽이는것과 개구리를 죽이는 것을 구별하는 선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살면서 그 선을 넘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작가는 이세상의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조금 더 예리하게 감지하고 조금 더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는, 또 하나의 죄인일 뿐이다.



아버지의 아들로
아들의 아버지로 살았 던 7년.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빠는 누가 지켜줘?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선 울 수 있는데...


바 또는 기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말하지만 옆집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는 이야기.

 

 


이스라엘에선 출간되지 않은 36편의 이야기
작가의 낯선이가 된 기분이 참 은근하게 좋다.
그가 정말 친한 사람들이 아닌
낯선이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일상들이
독특한 울림으로 내 마음에 남았다.

가족에 대해서
나아가 이웃에 대하여
더 나아가 우정에 대해
그리고 인류애에 대하여

이토록 소소하고
이토록 세련된 에세이는 처음이다

표지 딋편에 적힌 다양한 평들중
알렉산다르 헤몬의 평이 내 마음과 같다



 

   도대체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쓰면 어떤 것이라도 좋은 이야기가 된다.



고속도로에서 공습 사이렌이 들려온다.
'' 엄마랑 나는 식빵이야. 너는 파스트라미야. 우리는 최대한 빨리 샌드위치를 만들어야해.''
레브가 시라의 등 위에 엎드리더니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나는 두 사람 위에 엎드리고, 내 무게로 짓누르지 않도록 축축한 땅을 손으로 짚고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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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좋은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박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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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모습은 앞 모습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의 뒷모습만 보아 온 나에게
동물들의 뒷모습은 사람보다 더 이련하다

그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라면 더욱.

외롭다고 느꼈던 일상이 조금 나아졌다. 정글 같은 매일은 여전했지만.



매일 생존을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피곤함 속에도
따뜻한 온기를 나뉘주는 러블리덕에 작가는 힘을 얻는다

 

 

 

 

 

 

 

 

 

세상의 모든 문이 너에게만 닫혀 있다고 생각되는 날이 있을 거야.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너를 괴롭히지 마.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내 사람들을 찾아봐.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이 보이는 거 같다
외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따뜻한 마음도 간직하고 있는
그래서 이 책의 그림들엔
외로워 보이지만 따뜻한 온기가 담겨있다

한 번 보았을 땐
쓸쓸한 뒷 모습만 보였다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다시 보았을 땐
온기가 느껴졌다
기다리는 설레임이 담긴.

계속 보게되면
의지가 담긴 뒷 모습이 보인다
외로움과 온기에 가려서 감춰져있던
열심히 자기 길을 가는 그런 모든 생명체의 꿋꿋함이.


자기전 머리맡에 두고 보고 있으려니
그가 다가와 말을건다.

"이젠 그림책도 보는거야?"

마치 잠자리에서 책 읽는 딸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듯 아빠미소를 띠고
머리를 쓰담쓰담 해준다

그런 책이다.
읽다보면
누군가의 사랑스런 쓰다듬을 받게되는

곁가지로
때가 때인지라
크리스마스나 새해 선물로 참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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