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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왕국 ㅣ 유산 시리즈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평점 :
하늘궁의 벽 안은 비어 있고 복도는 미로였다. 그건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비밀이 숨은 장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들을 파헤칠 것이다. 아주 낱낱이.
<십만왕국> 제목에서 아주 방대한 이야기의 서사가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데뷔작이기에 뭔가 아쉬운 점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나는 이 경탄스러운 이야기가 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처음부터 이렇게 완벽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이 이야기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
* 신들의 전쟁
대혼돈에서 태어난 나하도스, 어둠의 군주는 억겁의 세월을 홀로 존재했다. 그러다 그에게 동생 이템파스 광명의 신이 생겼다. 둘은 서로의 반대 영역으로 견제하고, 싸웠다. 그러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형제이자 연인인 둘 사이에 대지의 여신 에네파가 끼어들었다. 에네파가 성장하면서 그녀는 이템파스의 영역을 조금씩 보이지 않게 건드리며 변화를 추구했다. 나하도스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이었지만 이템파스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둘이었던 사랑은 셋으로 변했고, 나하도스와 에네파는 뜻을 함께 했다.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이템파스는 에네파를 죽인다.
그로 인해 신들의 전쟁이 발발하고 승리를 거머쥔 이템파스는 나하도스와 그의 자식들을 자신의 피조물인 아라메리에게 복종 시켰다.
인간의 노예가 된 신이라니!!!
* 예이네
아라메리의 후계자였던 엄마는 한때는 전사의 나라였으나 신들의 전쟁 이후 가장 한미한 종족이 되어버린 다르의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예이네는 엄마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테카르타에게 부름을 받고 하늘왕궁에 도착한다.
후계자로 인정받고 승계식을 치러야 하지만 예이네는 자신이 절대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의 쓰임은 따로 있으니까...
그러나 예이네가 하늘궁전에 온 목적은 따로 있다. 바로 엄마를 살해한 살인자를 찾기 위함이다.
예이네는 하늘궁정에 도착하자마자 괴물의 습격을 받지만 어린아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그렇게 예이네는 노예가 된 신들과 만나게 된다.
때때로 나는 내 육신에 담긴 영혼보다 내 핏줄에 흐르는 피가 더 무섭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소녀 예이네.
그녀의 몸에 깃든 영혼의 무게와 엄마의 살인범을 찾겠다는 의지와 그녀를 노리는 다른 후계자들과 그녀를 이용해 자신들의 자유를 찾으려는 신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혼을 빼놓는다.
거기에 더해서 어둠의 군주 나하도스와 사랑에 빠지는 예이네의 욕망은 이 이야기를 로맨스로 만들어 버린다.
어쩜 이리도 어색한 곳 없는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신과 인간의 사랑과 복수와 질투와 파괴의 이야기를.
3부작의 1편을 읽었을 뿐인데 이미 하나의 시대를 마감한 느낌이다.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난 예이네.
전세가 역전된 이템파스가 겪을 앞으로의 고난.
자유를 얻은 나하도스와 그의 자식들의 앞날에 무엇이 있을까?
십만왕국에서 무너진 왕국으로 그리고 신들의 왕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실타래는 전혀 예측 불허다.
신들의 능력과 그 신들을 노예로 삼은 높은 피의 인간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신들을 착취하는 모습도, 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을 고문하는 데 사용하는 필경사의 마법도, 같은 혈족이지만 높은 피의 상위 1%들이 누리는 천상의 권위 밑에서 낮은 피의 혈족들이 하인으로 부려지는 이 십만왕국의 모습은 지금 이 현실과 다를 것이 없다.
모든 부와 기술을 거머쥔 거대 기업들이 만들어 가는 이 세계에서 점점 '신'이 되어가는 인공지능의 발달은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그 순간 무너진 왕국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필멸자들의 운명이 어떠할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렇게 신들의 왕국이 되어가는 미래가 인간에게는 어떻게 작용할까?
"변화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내 옆에 나타난 나하도스가 말했다. 데카르타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지만 나하도스의 눈빛에 적개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변화해야 할 것이다. 아라메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아무런 변화도 동요도 없는 세상을 유지했다.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었지. 앞으로는 피를 흘려서라도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준엄한 나하도스의 말이 앞으로 가졌던 모든 것을 잃을 지경에 놓인 아라메리족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오랫동안 누렸던 권력을 내려놓고 다른 민족과 함께 상생하는 삶을 마련할까? 아니면 전쟁이라는 무기를 들고 끝없는 반목과 대립을 이어나갈까?
앞의 몇 페이지를 읽으며 복잡한 이야기라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몇 페이지의 복잡함은 이야기의 복잡함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부족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아주 새로운 세상을 정말 판타스틱하게 펼쳐낸 N. K. 제미신의 필력에 계속 감탄하며 읽었다.
판타지를 좋아하지만 이렇다 할 판타지 소설이 없어서 아쉬웠던 중에 <십만왕국>을 만났다.
내겐 가뭄에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신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여 새로이 생명을 부여한 <십만왕국>
드라마화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 이야기를 상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