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크리스토성의 뒤마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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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 하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떠오른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으로만 알았는데 동명의 성이 실제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이책을 통해.

뒤마의 가장 전성기에 지어진 성이었고, 엄청난 건축비가 들어간 이 성에서의 삶.

그 자잘한 일상을 매의 눈으로 포착해서 글을 썼다.

이 책은 뒤마의 신문에 실린 글들은 모은 책이다.

뒤마는 흑인 혼혈이었다. 이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안다고 했는데 알았던 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작품 몇 개를 읽었을 뿐.

뒤마가 다작가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책은 그런 뒤마를 조금 더 알게 되는 책일 거 같다.

19세기 흑인 혼혈 다작가 뒤마

그럼에도 꼬인데 없이 느긋하고 유쾌했던 그를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프리차드라는 개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각종 사고를 도맡아 일으키고,

알렉시라는 흑인 하인의 당돌함은 당황스럽기까지 하는데 뒤마가 호인이었는지 호구였는지 나도 헷갈린다.

이 에세이는 뒤마라는 작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글마다 위트가 넘치고, 뛰어난 관찰력 덕분에 그가 사람을 얘기하는 건지 동물에 대해 얘기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동물들의 행동을 빗대어 인간을 설명했는지도 모르겠다.

프리차드가 등장했다. 두 귀가 나란히 바르고 겨자색 눈에다 누리끼리한 털 그리고 꼬리 부분에 멋진 깃털을 달고 있었다. 사실 그 꼬리 깃털 빼고는 못생긴 동물이었다. 그런데 내가 세네카의 『비종교성 작가들 선집』에서 배운바 인간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는 “옷차림새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이런 판단이 인간에게 적용된다면 개에게도 적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있어서 그런지 마치 내가 뒤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간혹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어법 때문에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도 든다.

 

 

 

 

 

 

나는 고독을 아주 좋아한다.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고독은 안주인이 아니라 애인이다. 일을 하는 사람, 특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고독이다. 사회는 육체를 달래주고, 사랑은 마음을 달래주고, 고독은 영혼의 종교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고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지상천국의 고독, 다시 말해 동물로 가득 차 있는 고독을 좋아한다.

 

 

짐승은 싫어하지만 동물은 좋아한다는 뒤마.

그래서인지 그의 성은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았다.

원숭이 3마리, 앵무새 2마리, 고양이 한 마리, 꿩 한 마리, 수탉 한 마리, 12마리의 암탉, 독수리 한마디, 다섯 마리의 개들.

조그만 동물 왕국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뒤마의 이야기는 짤막한 에피소드와 함께 다채롭게 이어진다.

두께에 비해 가벼운 이 책은 들고 다니며 짬짬이 읽기에 좋다.

명성에 걸맞은 대작들만 남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을 다채롭게 남긴 뒤마의 모습에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 갑자기 가까운 사람이 된듯한 기분이다.

뭔가를 알아가는 게 즐거운 건 당연한 거지만, 몰랐던 누군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책은 알렉상드르 뒤마를 새롭게 되살려 놓은 책이다.

만약 뒤마가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고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삼총사나 몽테크리스토 백작같은 작품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다스러운 삼촌의 옛이야기를 남김없이 들어준 조카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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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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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운영하는 독서클럽에서 리즈의 추천을 받아 알려지게 된 이 이야기는 일흔이 가까운 나이인 작가의 첫 소설로 평생을 야생동물을 연구해 온 과학자가 미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 뱅크스의 해안 습지를 배경으로 쓴 한 소녀의 성장기이다.

다만.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러브스토리이기도 하고

살인사건이 담긴 범죄소설이기도 하고

법정소설이기도 하다.

시작은

늪에 떠있는 한 청년이 발견되는 이야기로부터 비롯된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니. 카야는 깜짝 놀랐다. 무언가에 닻을 내린 느낌. 무언가로부터 풀려난 느낌.



카야.

습지 소녀.

어느 날 엄마가 뒤돌아 보지 않고 떠났다.

그 뒤로 두 언니가 떠나고

한 오빠가 떠나고

바로 위 조디와 카야만 남았다.

하지만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에 못 이겨 조디도 떠났다.

어린 카야만 남겨두고. 모두.

그리고 아버지도 어느 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철저하게 혼자가 된 카야는 습지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쏟지 않고, 아무도 그녀에게 손 내밀어 주지 않지만 카야는 살아남는다.

50년대와 60년대를 관통하며 시작한 이야기는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유색인보다 못한 습지 소녀 카야.

학교도 다니지 않고, 글도 모르는 소녀는 언젠간 엄마가 돌아올 거란 믿음으로 살아갈 궁리를 한다.

조개를 잡아 점핑에게 가서 판 돈으로 생필품을 구입한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 새벽에 일찍 몰래 마을을 다녀가는 카야.

그녀의 손을 잡아 준 유색인 점핑.

어느 날 한 소년이 카야에게 다가온다.

오빠 조디의 친구 테이트.

습지 동물의 표본을 모으는 카야에게 뜻밖의 선물을 해주던 테이트는 그녀에게 글을 가르친다.

첫사랑이다. 둘 모두에게.

테이트의 아버지는 진짜 남자란 부끄러움 없이 울고 심장으로 시를 읽고 영혼으로 오페라를 느끼고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카야을 돌보고 지켜주었던 테이트는 대학으로 떠나고 다시 돌아온다 다짐했다.

떠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카야의 외로움이 절절하게 습지로 스며든다.

체이스는 배에서 내려 카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을린 갈색의 긴 손가락, 펼친 손바닥, 카야는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를 만진다는 건 자신의 일부를 내어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찾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이 이야기는 단숨에 미국 전역을 석권하고

뉴욕타임스 37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

입소문으로 시작된 이야기의 힘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나도 사로잡혔다.

뼈저리게 느껴지는 카야의 고독이

테이트와 카야의 아름다운 사랑이

테이트가 지켜온 것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체이스의 공허함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무엇보다 카야의 강인함이 나를 설레게 한다.

인생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거라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사람들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사람의 이야기이자

야생의 이야기다.

트릭 없는 진솔한 이야기의 힘.

첫 작품인데 아주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성장소설이자 배신의 이야기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가 철저히 계산된 행동의 이야기이고.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면서 법정 소설이기도 하며

비밀이 가득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체이스가 교묘하게 결혼 얘기를 꺼내 미끼를 던지고, 지체 없이 카야를 침대로 끌어들인 다음 헌신짝처럼 버리고 딴 여자를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카야는 수컷들이 여러 암컷을 전전한다는 연구 결과를 읽어 이미 알고 있었다.

.

카야는 엄마와 똑같은 덫에 걸려들었다.

'음흉한 바람둥이 섹스 도둑들.'




잘 나가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잘 생긴 체이스는 여자를 가리지 않는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체이스가 어느 날 습지에서 죽은 체 발견된다.

사고사라고 생각했던 죽음이 살인사건으로 바뀌면서 카야가 용의자가 된다.

카야는 이제 습지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성이자 습지 연구의 전문가로 책까지 낸 작가였다.

이래서 아무도 나를 모른다고 하는 거야.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난 사람들 없이 사는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재판을 받는 카야.

사람들은 카야를 범인으로 몰아가려 한다.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누군가가 그들의 상처를 메워줘야 했으니까.

물 흐르듯이 세월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듯 이야기도 흐른다.

마치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글씨를 쓰듯 쓰인 문장들 같다.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장들이 습지 가득 고여있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가도 더할 나위 없이 청량해지고, 그렇게 숨통이 틔였다가도 걷잡을 수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원하는 온갖 이야기를 읽었다.

글이 시처럼 읽힌다.

읽어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듬뿍 담긴 이야기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모험을 떠났다 되돌아온 느낌이다.

누구보다 강인했던 카야.

마지막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글의 힘.

정말 오랜만에 길이 기억될 주인공을 만났다.

카야.

마지 걸.

습지 소녀.

그리고...

작가이자

생물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여자.

자꾸만 이름을 불러 보고 싶다.

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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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가다 - 페미니즘 미술관
정일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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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그림에 빠져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점들을 만난 것입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남자가 보는 그림이 아닌, 여자의 몸이 되어 그림이 되는 것의 느낌을 상상해보았지요.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우며 분노할 만한 그림들. 명화로 칭송받는, 내가 좋아했던 꽤 많은 그림들마저 그러했습니다. 그림 속 여성 모델은 훈계의 대상이었고 관음과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거래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즐기고 찬미하는 예술이 누군가에겐 모욕이고 수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1부 그리는 여성, 내가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첫 장부터 눈길을 끈다.

프리다 칼로. 영화로 먼저 알게 된 프리다의 이야기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삶 자체도 그렇지만 그녀의 그림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쉽사리 떨치기 힘들었다.

1부에서 화가로서의 여성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서로 다르거나로 비교되어 이야기된다.

그녀들은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평가절하되고, 혹평을 받고, 무시당하고, 냉대 받아도 자신의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 화가들은 주로 가족의 공방에서 허드렛일을 맡거나 남성 화가의 조수를 하며 붓을 잡았다. 특별한 재능으로 훌륭한 그림을 완성한들 최종 서명은 아버지나 남자 스승의 몫이었다. 극소수 운 좋은 여성 화가만이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많은 그림들이 남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이 책의 표지 그림만 보아도 30여 년이 넘도록 미술관에 전시되어 찬사를 받은 작품이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으로.

그러나 이 그림이 마리 드니즈 빌레르라는 무명의 여성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그림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폄훼되었다.

 

여성의 이미지를 추하게 표현함으로써 '여성을 혐오한다'는 혐의를 받는 드가는 의외로 여성 화가들의 진출을 격려하고 후원했다. 반면 르누아르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싫어했다. 전문직 여성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여성을 아름답게 그려낸 르누아르가 여성을 차별하는 사람이었다니, 앞으로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성들에 대한 느낌이 달라질 거 같다.

하긴. 그림이나 사진이나 아름다운 모습 이면에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드가의 그림은 현실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미화되지 않은.

그림이 많은 남성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그래서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인들이 표현된 그림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만 할 거 같다.

 

 

 

 

모델과 관계를 갖는 것은 오랜 세월 남성 화가들에게는 공공연한 일로 간주되었으나, 여성 화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하고 부도덕한 행위였다. 그러나 렘피카는 별 주저 없이 관습에 도발했고 욕망을 따랐다.



램피카라는 여성 화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림이 지금 보아도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부를 거머쥐는 데 인맥을 동원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위험도 감수할 만큼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2부. 그려진 여성. 내가 주인공이다.

 

지난달에 읽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는 그저 글만 읽었던 모양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그리스 신화를 그린 그림들에 대해 다뤘다.

신화가 고대부터 가부장제를 강화하고, 여성들의 지위를 낮추는 의미로 해석되었다니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찬란하게 표현했다니 모르고 보고, 읽었을 땐 재미있던 것들이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니 비참하게 느껴진다.

여성편력이 황당하리만큼 왕성했던 제우스.

그의 불륜을 눈감아주지 않고 처단했던 헤라.

하지만 헤라가 벌을 준 건 제우스가 아니라 제우스로 인해 피해를 봤던 여성들이었다.

피해자임에도 벌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 이 현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가해자 제우스는 언제나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헤라에게 자신이 피해 입힌 여성들을 넘겼다.

이것 또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대부터 신화에서부터 가해자는 자유를 누리고 피해자는 벌을 받았다.

늘 그래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페미니즘 미술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잊힌 여성 화가들을 발굴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는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의 예술을 페미니즘의 잣대로 편협하게 만드는 위험도 따른다.





작가의 말처럼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로 모처럼 얻은 시선의 자유를 편협하게 만드는 건 사양한다.

다만 이 책을 통해 그림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지 못했던 많은 여성 화가들과 그녀들의 그림을 조금 '맛'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앞으로 그림을 볼 때 단순하게 아름답다, 예쁘다는 감탄사로 감상하지는 않을 거 같다.

그림에 숨겨진 또 다른 시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 갔으면 좋겠다.

다양한 시선이 다양한 사람들을 아우르고, 그 아우름의 힘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가져다줌으로.

고정된 시선으로 너무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새로운 시선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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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해피엔딩
크리스틴 해밀 지음, 윤영 옮김 / 리듬문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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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필립 라이트.

장래 코미디언이 되는 게 꿈.

현재에도 꾸준히 개그 감각을 높이려 애쓰고 있음.

나쁜 일들이 차례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워낙 사소했기 때문이다.

 

 

이 개그감으로 충만한 소년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설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로세로 180cm인 에디를 만나는 것?

허영스럽지만 예쁘고, 필립의 개그를 받아 쳐주던 엄마가 이상해진 것?

짝사랑 루시가 눈길도 안 주는 것?

단짝 친구 앙이 그를 거들떠도 안 보고 루시와 사랑에 빠진 것?

애정 하는 코미디언 해리 힐에게 무한정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을 하나도 못 받은 것?

이 소년의 이야기는 마치 버석거리는 사막에 내린 단비 같다.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촉촉하게 적시는 감동의 단비.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웃음을 주려 하는 모습이 어떨 땐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 때 좌절하는 모습은 귀엽고도 슬프다.

그래도 필립을 통해서 나는 다른 감정 하나를 알게 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비관하고, 자신을 괴롭히거나 타인을 향해 분노를 내뿜는 사람이 있다면

필립처럼 그 상황을 유머로서 모면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는걸.

특히나 어른도 아닌 아이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나 현실을 농담 한 마디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건

어른의 눈높이에서 볼 때 어이가 없거나, 애들은 어쩔 수 없다거나, 쯧쯧 거림으로 넘어가곤 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

아이의 엉뚱한 말이나 행동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걸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이 어리고, 철없고, 연약해 보이는 소년 필립은

누구보다 강단 있고, 따스하며, 유쾌한 아이다.

그리고 굉장히 어른스러운 감동적인 아이다.

속절없이 어느 순간 터지는 울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슬프고, 아프고, 애처로워서가 아니라

그 너머의 필립의 마음이 헤아려져서 터진 눈물이었다.

미다스(Midas)의 철자를 재배열하면 '난 슬퍼'(I'm sad)가 된다는 걸 아는가? 정말 기이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슬퍼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이상해진 이유가 암에 걸렸기 때문이라면 식상한 이야기가 될 테지만

누가 뭐래도 해피엔딩엔 식상한 이야기가 없다.

식상한 걸 특별하게 만드는 필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가 엄마 베개에서 발견한 건 조그맣고 복슬복슬한 동물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잘못 보았음을 깨달았다. 그건 조그맣고 복슬복슬한 동물이 아니라 엄마의 머리카락이었다. 엄마는 남은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 막아 보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웃기면서 동시에 정말 슬펐다.

 

 

필립은 집에만 틀어박혀서 밖을 나서지 않는 엄마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

열두 살 소년이 생각할 법한.

아니. 그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일을 감행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어른스러워서

그리고 그다음의 행동이 너무 아이스러워서 가슴이 절절해졌다.

제목처럼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누가 뭐래도.

청소년 소설인데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 같다.

아이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

우리가 아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아이의 생각과 마음은

이미 어른들을 넘어서서 어른보다 더한 어른일 수 있다는 이야기.

비슷한 나이의 조카들을 이제부터 다른 시선으로 보아야겠다.

그 아이들에게도 열두 살의 인생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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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묻다 시와서 산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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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집처럼 단아한 산문집이다.

일본 근, 현대 작가들의 수필집으로 스물일곱 명의 작가들에게서 추려낸 30편의 글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소설과 달리 수필은 작가의 꾸미지 않은 모습이 담겨 있어 뭔가 더 친근한 느낌이다.

 

글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해도 좋다. 하지만 글을 사는 쪽은 장사꾼이다. 일일이 주문하는 대로 떠맡다가는 배겨 낼 수가 없다. 가난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삼가야 할 것은 글을 함부로 많이 쓰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한 말이다.

이 산문집엔 소세키의 글도 담겼지만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글도 여러 편 담겨 있다.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하는 후배 겸 제자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는 소세키의 말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새겨야 하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강진이 또 일어나 나는 굴러 넘어지듯이 계단을 내려가 다시 문기둥을 잡았다. 그게 그치자, 시간을 좀 두고 세 번째, 네 번째 여진이 이어졌다. A씨 집 지붕 기와가 와르르 흔들리며 무너졌다.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당구장의 높은 지붕에서 쉴 새 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와의 검은 그림자가 까마귀가 나는 듯 어지럽게 보였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오카모토 기도의 글은 간토 대지진이 났을 때 자신이 살던 마을이 전부 불타 버리는 경험을 썼다. 먼 곳에서 불꽃이 퍼지고 있었지만 바람의 방향이 이쪽에서 불어 가는 거라 괜찮을 거라 안심하던 마을 사람들이 얼마 안 되어 피난 짐을 싸게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대지진 이후 불필요한 물건은 절대 사지 않았다 하니 미니멀 생활의 선구자였던 거 같다.

다자이 오사무의 술의 추억은 청주에 대한 오사무의 절절한 경험담을 알게 된다.

오사무의 글은 이 수필로 처음 '맛'을 보았는데 뭔가 술 취한 가운데 생경하게 정신이 말짱해지는 그런 상태에서 쓴 글 같은 느낌이 든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던 거 같다.

암튼 그의 술 부족을 적절하게 어루만져 준 마루야마라는 배우의 배려심에 더 눈길이 가는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은 지루함에서 일어난 것이니, 이것이 사회의 안녕에 가장 위험을 초래한다. 그래서 정치가는 사람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내각을 경질하고, 문화를 퍼뜨리고, 여러 스포츠를 장려하고, 오락장이나 유곽, 공중 목욕탕을 설계한다.

 

 

병이 들어서야 지루함이 없어졌다 말하는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생각이 참 참신하다.

투병 중에 모든 관심사가 사라지고, 오로지 현재, 지금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것들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을 이야기했다.

평소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이 아프면서 사무치게 다가오는 느낌을 적었다.

작가는 아픈 와중에도 종이에 쓰지 못하면 마음에 글을 쓰는 거 같다.

병상에서조차도 뭔가를 깨달아야 하니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의 글 보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글은

시마지키 도손의 세 명의 방문객이다.

겨울

가난

늙음

이 세 명의 방문객에 대한 도손의 글은 자꾸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방문객 '죽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마 '죽음' 또한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김사량.

이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재일 조선인 문학의 선구적 존재로 여겨진다.

글에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고 있다.

남의 나라에서 고국의 하늘을 그리는 마음은 어떤 걸까?

 

 

 

 

조선의 하늘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할 만큼, 푸르고 활짝 개어 있다. 어서 그 아래를 걷고 싶은 마음이 요즘 들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립다. 이렇게 나는 언제나 조선과 일본 사이를 철새처럼 왔다갔다하겠지.

 

꽃을 묻다.

제목과 같은 제목의 수필이 처음에 실려있다.

꽃 무덤과는 다른 꽃을 묻는 놀이.

이렇게 창의적으로 놀 줄 알았던 그들의 삶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MSG가 빠진 음식은 처음엔 아무 맛을 못 느끼지만 자꾸 먹다 보면 본연의 '맛'을 알게 된다.

화려하고, 속도감 있고, 몰입감 있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이야기들만 읽다가 담백한 맛을 읽게 되니 머리가 청아해지는 느낌이다.

욕심 없는 글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단아한 글들이 생각을 정리케하고

소소한 글들이 미소를 짓게 한다.

작지만 큰 책이다.

전부 모르는 작가들이었고, 전부 처음 읽는 글들이었다.

이름만 알았던 작가들의 글을 만나게 되어서 좋았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지어냈던 이제 나는 그들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꽃을 묻듯이 그들의 이야기도 함께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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