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10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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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고 있지만 만화영화로만 봤지 원작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는 고전이다.

작은 아씨들.

마치가 네 자매의 이야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으로 읽는 이 이야기는 중간중간 뜬금없는 눈물샘을 자극한다.

서로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요즘 같은 세상에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나이 보다 성숙한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씩씩해 보이기도 하면서 계몽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쟁터에 가 있는 아버지를 그리며 어머니와 하녀 한나 네 자매는 꿋꿋하게 서로를 위해주며 살아가고 있다.

이 어린 아가씨들은 모두 제각각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메그는 가정교사로 이웃집 아이들을 가르치고, 조는 마치 할머니의 말동무로 용돈을 번다.

베스는 집안일을 돕고, 에이미는 막내지만 자신의 일은 야무지게 해낸다.

빈둥거리며 엄마가 모든 걸 다 해주는 시대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가난하지만 자존감 있는 이 자매들은 이웃집에 사는 부잣집 도련님 로리와 이웃사촌으로서 우정을 키워가고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가며 성장한다.

자매들의 성격 묘사가 실제 자매들과 비슷해서 나는 어릴 때 메그에게 많은 공감을 했고, 조랑 똑같은 동생 때문에 골치를 앓았고, 베스와는 딴판인 셋째 동생의 성격을 보며 베스 같은 동생이 있기를 바랐다.

사랑은 두려움을 날려 버리고 감사함은 자존심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집 로리의 할아버지와 베스의 우정이 잃어버린 손녀딸을 그리는 노인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세심한 소녀의 배려로부터 이루어졌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고집 센 노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다정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은 불통 시대에 베스처럼 상대방의 진심을 알아주고 받아주는 마음이 결국은 소통의 끈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천방지축 조가 머리칼을 잘라서 25달러를 마련해 온 대목에서는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언제나 웃음과 감동을 주는 조의 이야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에는 몰랐는데 마치 여사의 가르침은 참 인내심의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려졌다.

화를 내는 적도 없고, 아이들의 고민거리마다 적절한 훈계와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대화법이 나조차도 숙연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과연 나는 마치 부인처럼 고상하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 상상해봤지만 절대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알게 될 뿐이었다.

자만심은 훌륭한 사람도 망치고 마는 법이니까. 진정한 재능이나 장점은 오랫동안 묻혀 있지 않아. 또 설령 아무도 몰라 준다 해도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제대로 발휘한다면 만족을 얻을 수 있단다. 겸손만큼 값진 것은 없는 법이야.

 

 

적당한 결핍이 오히려 자잘한 즐거움과 사랑을 더해 주기도 하는 법이거든.

나는 메그가 검소하게 시작하면 좋겠구나. 엄마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며, 한 남자의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자인 데다 그건 어떤 재산보다도 값진 것이니까 말이야.

 

 

과연 현실에서도 저렇게 말해주는 엄마가 있을까?

그렇다면 다들 섶을 지고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삶을 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참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읽으면서 내내.

고전은 역시 고전이라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이 가르침은 온당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부와 명성을 좇다 보면 결국 개인의 행복은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 희생은 자식들에게도 똑같은 희생을 갈구하게 되고, 악순환은 되풀이 되게 마련이다.

사랑 없는 부모에게 사랑 없는 자식들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 자식들이 이룬 사회는 애정이 결핍된 사회로서 개인의 행복 따위는 하찮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은 부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부모로부터 습득하지 못한 사랑과 믿음과 행복에 대한 것들이 왜곡되어 가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 고전이 새삼 가슴에 남겨두는 따스한 감정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워싱턴을 아무리 뒤져 봐도 우리 착한 딸이 아빠한테 보내 준 25달러로 살 수 있을 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찾을 수가 없더구나.

 

 

 

딸이 머리칼을 잘라 마련한 25달라를 받아 쥔 아빠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다정한 말로 고마움과 사랑을 전할 수 있다니 아름다울 수밖에.

마치 할머니처럼 속과 다른 말을 내뱉는 어른도 있고, 로렌스 할아버지처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할 수 있는 어른도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어른일까?를 생각해 보게 됐다.

어른이랍시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이겨먹으려고만 하면 스스로 단절을 가져온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김지혁 일러스트의 아름다운 그림이 이야기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즐거웠다.

그녀들의 가르침을 어른이 된 지금에도 계속해서 상기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사랑하고, 상처 주었으면 바로 사과하고, 가족에게서 나온 힘으로 세상을 좀 더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곧 영화도 개봉된다 하니 그 영화도 봐야겠다.

원작과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줄 테니.

고전은 읽을수록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게 해준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니 책 읽을 맛이 나는 시리즈다.

작은 아씨들.

이 네 자매의 후속편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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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고양이
모자쿠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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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내게 요란하게(?) 다가온 고양이가 있다.

잔소리 고양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잔소리들의 폭격.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낄낄 거리게 된다.

고양이가 강아지 보다 귀엽고 다정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컴퓨터 화면을 얼마나 계속 보고 있는 거야?

벌써 한참 지나지 않았어?

그러다 점점 눈 나빠진다!!

가끔은 멀리 보고 그러라고!!



 

꼭 그거 사야 해?

전에도 비슷한 거 샀잖아?

또 충동구매?!

쓸데없는 소비 줄이자고 말했잖아!!

 

 

 

4컷 만화에 담긴 끝이 없는 잔소리가

나중엔 애정의 척도로 느껴진다.

게다가 단순한 모습에 표정이 잔소리 모드인 이 고양이가 화를 내고, 야단치고, 어르고 달래주는 모습이 예전 엄마한테 듣던 소리나 동생들한테 듣던 소리라 자꾸 그 시절이 생각나서 뭉클했다.


잔소리라는 게 듣기는 귀찮지만

근본적으로 애정이 깔려 있기에 마음에 남는 게 사실이다.

잔소리하던 사람이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건 애정이 식었다는 뜻이니까.


이 책은 나의 고양이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은 책이다.

고양이의 잔소리가 귀엽게 느껴지고 너무 잘 어울려서 내게 있던 무서움이 사라지는 중이다.


트위터에 올렸던 4컷 만화가 입소문을 타고 책으로 새로 태어났다.

세상 어디에서건 공통으로 쓰이는 잔소리가 고양이의 입에서 나오니 더 실감 나는 이유가 뭘까?


잔소리에는 나를 위한 애정이 담겨 있음으로

잔소리 고양이를 보다 보면 덜 외로워진다.

누구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잔소리.

그 잔소리의 진수를 고양이가 말해준다.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님들에게도

나처럼 고양이가 무서웠던 사람에게도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곁에 없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그리움을 달래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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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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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분명히 예전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준은 소심하고,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집을 알아보러 갔다가 강도를 만나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려다 머리에 총을 맞는다.

병원에서 깨어난 준은 점점 회복되어 가는 와중에 자신이 뇌 이식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죽을 목숨을 극비리에 진행된 뇌 이식으로 살려낸 도겐 박사와 다치바나와 와카오 두 조수가 그를 보살핀다.

회복이 잘 되어 일상으로 돌아온 준.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과격해진 자신의 성격으로 회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메구미에게도 예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내 마음은 변하고 있다. 이건 분명하다.

메구미, 너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져간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고 느낀 준은 뇌 이식을 할 때 자신에게 뇌를 기증해준 기증자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알게 된 기증자의 성격은 예전의 준과 거의 비슷한 성격이었다.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성격변화와 과격한 공격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뇌 이식.

간이나 심장과 같이 뇌도 이식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뇌를 이식받은 사람?

뇌를 기증한 사람?


다른 사람의 뇌를 기증받아 목숨은 살았지만 점점 기증자의 성격과 행동을 갖게 되는 준.

점점 자신을 잃어버리는 준은 자신이 다중인격을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에서도 동료들의 무능함을 비웃고, 싸움이라도 나면 죽일 듯이 덤비고, 사소한 시비에서 살의를 느끼는 자신을 점점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준은 메구미의 사랑마저도 거절한다.


이 뇌 이식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들이 있다.

준의 존재를 감추고 그를 실험실의 도구로 생각하는 그들은 준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받고 그를 죽이려 한다.

실패한 실험용 쥐는 살처분하는 게 그들에겐 당연한 이야기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도겐 박사.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떠난 메구미.

그를 도와주는 척 접근해서 그에게서 정보를 빼가려는 다치바나.

준은 결국 자신에게 뇌를 기증해준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고, 자신을 지배하려는 그와 담판을 짓기로 한다.


획기적인 기술의 성공은 좋았지만, 그에 걸맞은 윤리의식과 사후 방비가 없었던 것에서 참극이 일어난다.

뇌는 생각을 관장하는 곳이다.

우리 몸 여기저기에 이러이러해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곳이다.

그래서 단순 기능만 하는 콩팥이나 간과는 다르다.


도겐 박사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을 등한시했다.

그로 인해 준의 목숨은 살렸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의학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 뇌 이식 이야기는 어쩜 조만간 이루어질 근미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이미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도 모른다.


근데 도겐처럼 생각하는 의사 때문에 준과 같은 희생자가 생긴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기증자의 뇌가 이식자의 뇌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이 이야기는 섬뜩하다.

하이드와 헐크처럼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면 본래의 자신은 사라지고 기증자의 살의만 남는 준.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준은 살인자의 인격과 마지막 싸움을 벌인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노화와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단지 젊게 오래 살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도겐 박사가 저지른 일은 분명 그런 문제의식 없이 자신의 연구성과만을 생각하며 일처리를 했기에 벌어진 참상이었다.

이야기처럼 뇌 이식도 가능한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과연. 뇌라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 조직을 그렇게 떼어서 이어 붙여도 되는 걸까?

인간의 모든 기능을 담당하는 뇌가 다른 뇌와 접합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이 이야기처럼 더 강하고 더 과격한 성질을 가진 뇌가 득세한다면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걸까?


생각할수록 섬뜩한 소재다.

준의 선택만이 답이라면 뇌 이식에 관한 연구가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긴다.

1991년에 발표한 작품이라니 게이고의 앞서가는 상상력이 더 돋보인다.


노화를 막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 결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지는 않는 거 같다.

자연 그대로. 그렇게 살고 싶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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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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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은 모든 사람의

귀와 눈을 멀게 한다.

특히 누군가를

죽게 했을 땐.

 

 

 

 

형이 살해당했다.

나는 울지 않는다.

우는 건 룰에 맞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형이 숨겨둔 총을 꺼내 베개 밑에 넣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 이 동네의 룰이다.

나는 누가 형을 죽였는지 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익숙지 않은 상황에 당황했다.

완벽한 스릴러이거나 범죄소설을 기대했던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분명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처럼, 음악처럼, 광고 카피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형식이지?라고 되뇌며 읽어가는 동안 점점 가슴이 묵직해진다.

최소한의 서사와 최소한의 글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그만큼 강렬하고, 그만큼 애절하다.

 

 

형이 숨겨둔 총을 허리춤에 감추고 윌은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가 L 층에 닿을 때까지의 시간은 60초.

그 60초 동안 한 층 한 층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한 명씩 사람을 태운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라져간 사람들이 윌에게 말을 건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거리.

그 거리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이 층층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한 사람 한 사람씩 탄다.

어릴 적 친구, 동네 형, 삼촌, 아빠. 그리고... 숀.

윌의 형 숀.

어제 총에 맞은 숀.

가슴이 뻥 뚫린 숀은 윌을 보고 운다.

 

 

그들은 내리 그렇게 살아왔다.

서로의 가슴에 구멍을 내며.

때로는 잘 못된 구멍이 새로운 복수를 낳기도 했다.

경찰도 법도 그들의 방식이 아니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방식이 있을 뿐.

 

 

윌도 그 길을 가려 한다.

내 형을 쏜 자는 형의 친구였다.

그저 갱단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친구를 쏘았다.

형은 단지 비누를 사러 갔을 뿐이었다.

가려움에 긁어대서 짓물러진 엄마의 손에 그 비누가 약이었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이 운명을 갈라 놓는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윌에게 모두 무언가를 보여준다.

윌이 지금 가고자 하는 길을 그들은 이미 지나갔다.

 

 

"안 와?"

 

 

친숙한 이 말이 가슴을 친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윌이 윌의 길을 갔기를.

윌이 가슴에 구멍 난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기를.

 

 

하지만

끝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스.스.로. 생각이라는 걸 하도록 두었다.

 

 

누군가는 비난을 감수하며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일생을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손가락질이라도 분명 정의롭지 못한 것이니 이겨내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는 용기 있는 자만이 끊어낼 수 있다.

 

 

윌에게 그 용기가 생겼기를 바란다.

 

 

강렬함이 내 안으로 쏟아진다.

시로 쓴 소설은 더 많은 감정을 가지게 했다.

 

 

이 새로움을 새해에 알리고 싶었다.

앉은 자리에서 30분도 안되는 시간에 읽어 버릴 이야기지만.

절대 그렇게 읽고 끝내지지 않는 이야기다.

 

 

어두운 거리의 희망은 스스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선택의 이야기다.

나에게 주어진 길에서 빤한 길을 갈 것인지, 다른 길을 갈 것인지.

어린 소년도 선택해야 하는 길이 있다.

 

 

어려운 고비에 설 때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이 있었지만 같이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그리고 같은 길을 갈 거라 믿었던 어린 소년의 선택에 대해.

 

 

아픈 영화 한 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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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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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각은 뇌가 바깥세상을 고도로 가공하여 처리한 '표현'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시각을 통해 보는 모든 것들을 비디오카메라처럼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설계된 시각계는 숨어있는 표시까지도 보게 만든다.

우리의 뇌가 가진 무궁무진함에 대해 들어봤다.

우리가 일생 동안 사용하는 뇌는 전체의 기능을 100분의 1도 쓰지 못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익숙한 길을 운전할 때는 거의 좀비가 되어 운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른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무의식은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근육을 연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시크릿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 책의 요지는 무언가 원하면 우주의 좋은 기운을 끌어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어쩜 그것은 우리의 뇌를 평범한 사람 보다 조금 더 활용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기도 하다.

이 책에 예를 들어 언급된 환자들의 이야기는 마치 환상특급이라는 드라마를 보는 거 같다.

보이지 않지만 장애물을 피해 가는 사람도 있고, 시력을 잃었음에도 시력을 잃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외계인에게 당한 적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한쪽 눈을 실명했음에도 무의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뇌가 편집하는 기억은 과연 온전한 것일까?

같은 일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것도 각자의 뇌가 각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니 기억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 거 같다.

 

읽을수록 뇌에 대해 알아가면서 우리가 우리의 뇌를 100프로 사용하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게 될까?라는 질문이 계속된다.

초능력이나 영적인 능력도 결국 뇌의 어느 부분을 잘 사용했기 때문이거나, 어쩜 어느 부분의 기능을 상실했기에 생긴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과 움직임은 뇌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다. 그러므로 심상 훈련은 단순한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연습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다.

 

심상 훈련으로 다이어트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눈 꼭 감고 집중해서 열심히 달리는 내 모습을 매일 꾸준히 그려본다.

몸에서 열기가 퍼지고, 땀이 흐르고, 심장이 무섭게 뛴다.

나도 모르게 헉헉거리며 마라톤을 뛰는 선수들 틈에 끼어서 같이 뛴다고 상상한다.

나의 이 심상 다이어트 훈련은 효과를 볼 것인가!

 

굉장히 어려울 거 같은 느낌을 받은 책이었는데 마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의 기분과 같다.

유익했고, 신기했으며, 주인 잘 못 만나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자꾸 퇴화해 가는 나의 뇌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적어도 뇌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좋았던 책이다.

사례들을 읽으며 주위에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어쩌면 뇌에 관련된 질환일 수 있거나 시각과 관계된 뇌의 회로에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음으로 병원으로 모셔야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물론 책 한 권으로 섣부른 판단은 금해야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잘 알아채지 못했을 상황들에 대해 배운 느낌이 들어서 내겐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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