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바스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박종대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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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바스는 지휘자를 포함해 나머지 모든 오케스트라를 받치는 기본 골격 같은 겁니다. 비유하자면 웅장한 건물을 세우는 토대라고 할 수 있죠. 오케스트라에서 바스를 빼버리면 바빌론의 언어 혼란 같은 대혼란이 생기고, 누구도 왜 음악을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일명 소돔과 같은 곳이 되어 버립니다.

커다란 악기 콘트라베이스, 콘트라바스, 더블베이스.

모두 같은 악기의 이름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을 때 혼합되어 쓰인 말이고, 더블베이스는 영어권에서 부르는 명칭이고 본래의 이름은 콘트라바스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콘트라베이스로 명칭 되었었는데 이제는 콘트라바스로 원래의 이름을 찾았다.


옛날 좀머 씨 이야기를 필두로 쥐스킨트를 알게 되면서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사서 읽었던 그 시절엔 이 콘트라바스에 대해서 그저 푸념 정도로만 생각했다.

인기 없는 악기를 다루는 인기 없는 남자의 별 볼일 없는 푸념.

나이가 들어 이 책을 재독하면서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쥐스킨트의 이야기를 다시 해석하게 되었다.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원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콘트라바스 연주자였다.

화려한 소프라노를 돋보이게 해주고, 수많은 악기들의 뒤에서 간간이 음을 넣어 그들을 받쳐주는 역할.

항상 필요하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역할.

사회의 중추는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들...


콘트라바스는 태초의 악기입니다. 태초의 소리를 낸다는 말이죠.





방음이 잘 된 공간이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공간이다.

외부와 차단되어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그곳은 바로 콘트라바스를 위한 곳이기도 하다.

악기의 음이 낮고 굵은 콘트라바스는 독주가 불가능한 악기다. 그럼에도 까다로운 악기이기에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은둔자 쥐스킨트에게 어울리는 악기이자 공간인 콘트라바스의 무대.


이 작품은 모노드라마로서 연극 무대에 가끔 오른다.

이야기 속의 콘트라바스 연주자는 맥주로 목을 축이며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콘트라바스의 위용에 대해, 그의 쓸모에 대해, 자신의 짝사랑에 대해, 자신의 결심에 대해.

이 모든 이야기엔 세상을 바라보는 쥐스킨트의 신랄함이 담겨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느껴지는 세상의 이치...

이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였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읽혔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겠죠.


각가의 이유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리가 있다.

원했던 자리던 원치 않았던 자리던.

각자가 맡아야만 하는 자리.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다.

묵묵히.


쥐스킨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 사람들도 그 일을 원해서 하는 건 아니라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라고.

돋보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며, 거추장스럽고, 자리만 차지하는 거 같아도

그들이 없으면 완벽해지지 않는다고.

그러니 당신이 지금 누리는 모든 안락함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수고로움이라고.


조근조근 이야기하다 흥분하고, 사랑에 빠진 연민을 보여주다 갑자기 극적인 결심을 하지만

결국 똑같은 나날을 보내고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올 거 같은 콘트라바스 연주자.

언제나 일탈을 꿈꾸지만 언제나 제자리인 콘트라바스 연주자.

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걸 느끼게 되면 그가 호기롭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해내기를 바라게 된다.

콘트라바스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

그것이 불러올 반향이 어떠할지는 지켜보는 우리 모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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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로켓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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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쿠다 제작소에는 뭔가가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

이케이도 준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가슴 뜨거워지게 하는 뭔가가 있다.


기술력 우위의 중소기업

거대한 대기업의 비열한 공략.

어려운 시기에 드러나는 인간성.

비즈니스의 정석.

기본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항상 기본을 무시하는 사람들.

그들이 벌이는 한 판 승부는 독자들에게 조마조마한 긴장감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우주 로켓 개발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연구원직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쓰쿠다는 경영자로서 7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로켓을 쏘아 올리는 꿈을 위해 기술 개발에 투자해서 특허권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쓰쿠다 제작소.

사업엔 항상 고비가 있게 마련인데 그날은 가장 큰 거래처에서 앞으로 거래를 중단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대기업 나카시마가 쓰쿠다가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어왔다.

진퇴양난에 빠진 스쿠다 제작소는 주거래 은행에서도 더 이상 대출을 해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사면초가의 쓰쿠다 제작소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일까?


구멍을 뚫고, 깎고, 연마한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그게 제조의 기본이죠.

곧 망할 거처럼 보이는 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손쉽게 먹을 셈으로 소송 기간을 무한정 늘리려는 대기업 나카시마.

그에 대항하는 쓰쿠다 제작소는 믿었던 고문 변호사마저 맥을 못 추면서 암담한 상황까지 오고 만다.

그러나 나카시마의 횡포에 질려 법률사무소를 나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가미야 변호사가 쓰쿠다 제작소를 맡으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다.


쓰쿠다 제작소가 특허를 낸 밸브는 로켓 엔진에 쓰이는 것으로 민간 로켓 사업을 추진하던 대기업 데이코쿠중공업은 간발의 차로 특허권을 놓치고 만다.

자체 개발 로켓을 쏘아 올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진 데이코쿠중공업은 쓰쿠다 제작소의 특허권을 사려고 접촉을 시작한다.

하지만 쓰쿠다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자신의 로켓 발사의 꿈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특허권을 팔지도, 사용 허가도 내주지 않고 밸브를 만들어 납품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동안 참고 있었던 직원들은 반발하고, 쓰쿠다에게 대드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도전의 끝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다.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는 쓰쿠다 제작소의 끝은 어디일까?

쓰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를 희생시킬까?

사장이 자신의 꿈 때문에 회사를 버린다고 생각한 직원들은 어떻게 나올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짓은 그만둬.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서로 믿고 협력하는 게 진정한 비즈니스 아닌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서로 믿고 협력하는 관계를 지켜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세상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존재하는 사람들 때문에 돌아간다.

쓰쿠다 제작소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이야기가 따뜻해지고, 그들이 있어 이야기의 끝이 희망스러워진다.


끝이 어떨지 가늠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케이도 준의 필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돈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인간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자신들의 꿈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들.

결국 누군가의 옳은 결정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이야기다.

진정한 비즈니스란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말함이다.

근시안적인 임시방편보다는 힘들어도 조금 더 먼 미래를 설계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한 때에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을 거 같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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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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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노의 인생이 하나하나 법정에 새겨졌다. 잔혹한 사건을 일으키고도 남을 만큼 비참했던 인생.

애인이 변심하자 스토커가 된 여자.

애인이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자 그곳에 불을 질러 아내와 쌍둥이 아이들을 죽게 만든 살인마.

그 와중에 쌍꺼풀 수술을 한 성형 중독자.

창녀였던 어린 엄마와 의부의 학대, 강도죄로 소년원에 갔던 살인마.


어디 하나 그녀를 제대로 설명한 문장은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저 문장은 그녀라는 살인마를 완성시키는 문장이자 그녀의 죄목이기도 하다.


무죄의 죄.

제목의 느낌은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야 서서히 조여오듯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보여지는 정황들로

그럴 것이라는 말들로

본인의 의지로.

사건은 본질을 잃은 채로 하나의 사형수를 만들어 냈다.


스스로 죽기를 자처한 여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온몸으로 기다린다.

그녀의 어릴 적 친구들의 설득도, 그녀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그녀의 뜻은 확고하다.


유키노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다. 그것이 정말 '악마'가 보이는 얼굴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의 법정을 본 것일까.


유키노는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것이 그녀의 삶의 원동력이었으니까.


본질은 왜곡되고, 왜곡된 이야기는 사실이 되었다.

죄지은 자들은 침묵했고, 유키노는 그 모든 것들을 혼자 짊어졌다.

그녀가 믿었던 사람들은 죄다 그녀를 이용했고, 그녀를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글은 처음인데 정말 첫 장부터 사람을 끌어당기는 필력이었다.

뭔가 반전이 있을 거 같은 이야기의 맥락 앞에서 맘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순간에서야 이 이야기의 진정함을 깨닫게 된다.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고

인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묵직한 이야기가 마치 벚꽃처럼 흩날려서 읽을 때는 꽃잎에 취했다가

다 읽고 나서야 꽃무덤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이야기.

무죄의 죄.


유키노의 생은 무죄의 죄를 지고 가는 삶이었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많은 무고함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왜곡하는 사실은 어떤 죄를 물어야 할까?


벚꽃처럼 아름답고

꽃무덤처럼 아련한 이야기였다.


삶은 그렇게 명료함 앞에서 생각의 무게를 더하는 법이다.

유키노의 선택은 그래서 더 아프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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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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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시간 낭비가 이어질수록 피해자는 계속해서 는다. 무사안일주의의 귀결. 평화에 찌든 녀석들의 말로. 이 기회에 똑똑히 알아 두는 것이 좋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가 처한 현실이다.


고나가와 시티 가든 스완.

백조의 호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거대한 쇼핑몰에 4월 어느 일요일 무차별 총격전이 벌어진다.

범인들은 3D 프린터로 만든 총으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쏘았다.

그렇게 참극을 벌여 놓고 그들은 자살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을 모이게 한 사람들.

가해자가 없는 세상에선 피해자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질타를 받는다.


스완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범인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엎드려 있는 사람 중에 죽일 사람을 고르라고 말했다.

이즈미는 그저 천장을 바라봤을 뿐이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돔으로 된 유리 천장에 비치는 푸른 하늘을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죽을 사람을 골랐다고 생각하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기사와 댓글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든 것을 까발린다.


가타오카 이즈미.

백조의 호수 공연을 앞두고 주인공 자리를 따내려 열심히 연습하던 아이는 그날 이후 모든 걸 잃는다.

그날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스완 사건이 내게서 빼앗아 간 것은 비단 발레만이 아니다. 엄마의 마음, 엄마의 미소, 제대로 된 생활, 제대로 된 미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뉴스와 인터넷 기사에 담긴 이야기들만으로 하나의 사건을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그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면서 타깃이 된 사람에게 나 역시 무분별한 이야기를 보탰었다.

스완을 읽으며 그것이 얼마나 잘못인지를 깨닫고 반성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이야기를 잘 읽은 것이 될까?


가해자가 자살하고 없는 사건.

무수한 피해자를 낳은 사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데 책임질 사람들이 없는 무차별 총격 사건.


어떤 일에든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스완 사건에서 사람들은 이즈미를, 부상당한 채로 도망쳤던 경비원을 희생자로 삼았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 나와 고즈에가 체험한 그날의 진실.


이즈미는 그날 고즈에가 불러서 그곳에 갔다.

자신을 왕따시켰던 고즈에가 그날 이즈미에게 보여주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실을 이야기하고,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거짓말을 가지고 있다.

남들한테 다 말하지 못한 상황들은 그들 가슴속에서 그들 마음속에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을 알기 위해서 생존자들을 모임에 초대한 사람이 마련한 자리에서도 그들은 다 털어놓지 못한다.

만남이 거듭되고 서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각자의 이유로 그곳을 찾는 사람들.

생존자이지만 사망자 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의 광경들, 그날의 상황들. 그날의 후회들이 그들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단지 그곳에서 살아났다는 이유로 단죄할 수 있을까?

매일 그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그 시간을 되풀이 살고 있는 사람들..


오승호 작가의 글은 처음이다.

이 글로 이 작가의 이야기를 다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고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가다.


우리가 떠안은 석연치 못한 감정. 뉴스와 주간지에서는 전하지 않은,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도는 생각들. 결국 어떤 방법으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는 없고,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한눈에 봐도 알기 쉬운 흑과백으로 나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흑과백의 중간에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양쪽에서 모두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이즈미는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세상에 진실 아닌 진실을 투척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결정했다.

회색 지대에서 그녀는 영원히 춤출 것이다. 오데트와 오딜을 번갈아 가며...


우리는 백조이자 흑조였다. 그 그러데이션 속에서 어떤 색이 선택될지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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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죽음 - 다문화의 대륙인가? 사라지는 세계인가?
더글러스 머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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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영국에 사는 동생을 보러 갔을 때 동생이 한 말이 내내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올랐다.


- 언니, 30년 후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이 무슬림 아니면 중국인일 거야.

- 설마!

- 봐봐.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만 다들 결혼 안 하고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거나 최소 한 명만 낳잖아. 하지만 중국인이나 무슬림들은 기본이 아이 셋이야. 그럼 몇 십 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만 유럽 인구는 점점 줄고, 우리나라도 인구가 점점 줄어가는데 저 사람들은 계속 인구수를 불리고 있잖아? 그게 아주 먼 미래의 일 같아? 30년 정도 지나면 인구수 대비로 따지면 이 세상을 차지하는 무슬림과 중국인의 수를 당할 수 없을걸.



섬뜩한 진실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영국에 갔는데 영국 사람들보다는 무슬림이나 딱 봐도 중국 사람들과 더 많이 마주쳤다.

동생이 사는 곳은 학군이 좋아서 집값이 조금 세지만 젊은 부부들이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 많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하지만 그곳에 중국인들이 터를 잡으면서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집값은 높아지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영국인들은 하나 둘 동네를 떠나고 결국 학군 좋았던 학교는 1, 2년 새에 절반 가까이 중국인 학생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올해부터 중국 말로 된 학교 공문도 온다고 한다.


더글러스 머리의 유럽의 죽음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가 느끼는 위기의식 또한 거짓이 아니다.

이민지가 많아지면 값싼 노동력이 생기기는 한다. 처음엔.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적응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 오게되고 ,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만의 타운을 형성하게 된다.

보통의 나라에 이민자들이 자리 잡는 순서다.


지금 유럽은 그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전쟁 난민들이 물밀듯이 국경 없는 유럽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비교적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이 간편하다. 모두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게 유럽의 장점이었지만 이젠 단점이 되었다.

영국은 EU 탈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여파를 지금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EU 탈퇴를 찬성한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이 이민자들이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표를 위해 이민자들에 대한 말을 삼키고

여론은 자칫 인종차별이라는 뭇매를 맞을까 봐 눈을 감고

유명 인사들은 그들에게 쏘아질 차별과 편견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이 유럽의 죽음 속에 담겨 있다.


우리에게도 낯설어진 동네가 있다.

대림동은 이제 조선족 자치구라는 말로 표현된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라고 배웠지만 이제 그 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우리는 집집마다 다문화가정이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우리가 인간의 도리로서 행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난민 문제는.

하지만 그들이 낯선 나라의 문화와 전통과 질서를 배울 생각이 없다면?

다른 나라에 살면서 자신들이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면?

이민자들의 수가 기존 유럽인들의 머릿수를 능가한다면?

유럽의 가치와 유럽의 질서와 유럽의 문화와 유럽의 마음을 따르려 하지 않는 이민자들의 수가 자신들 보다 더 많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정계나 재계에서 자리를 확보한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모든 것이 유리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글러스 머리가 대표하는 유럽인들의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자각은 하고 있지만 나설 수 없는 이 상황이 당대까지는 그럭저럭 이어질 것이다.

노회한 정치인들이 용기를 내지 않는 이유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책임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유럽은 점점 침범당하고 있다.

엄연한 사실 앞에서 본질을 무시하고 선정적인 이슈로 모든 걸 덮어 버리려는 저열한 정치와 여론은 결국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30년 후

유럽 대륙은 이민자들의 식민지가 되어 있을 거 같다.

그들이 몇 백 년 전에 그들을 식민지로 삼았듯이.

역사는 되풀이되고

지금은 과거의 역사가 유럽에서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더글러스 머리가 장황하게 말하는 사실들을 편견이라고만 생각하고 외면한다면

결국 유럽은 이 책의 제목처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금세기 안에 처음에는 주요 도시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나라 전체에서 우리 사회는 마침내 <이민자들의 나라>가 될 것이다. 한동안 우리가 행세만 하던 나라로 실제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대책 없는 선의는 결국 선을 넘을 빌미를 제공할 따름이고

그렇게 선을 넘어 침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좋은 식으로 해석하며 정치적 지지 표만 얻을 생각으로 행동한다면

결국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는 다음 세대들의 어깨에 올려질 것이다.


그야말로 유럽은 WE ARE THE WOLRD가 되어가고 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고, 그 두려움을 이제 겨우 드러냈을 뿐이다.

세상 모든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게 마련이고, 그 논리로 생각한다면 앞으로 몇 십 년 뒤엔 이민자들의 결정으로 유럽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유럽은 지금의 유럽과 같은 맥락으로 흐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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