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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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걸 전부 빼앗아 먹었기 때문이에요. 얘가 전부 빨아 먹는 바람에 나는 이제 뼈만 앙상하다고요.

 

태생부터 온갖 냄새 속에서 죽음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그르누이는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힘차게 생명을 이어가려는 아기.

영혼 없는 여자의 집에서 자라난 아이.

그리고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아이.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으면서 평범함에서 오는 오싹함을 느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거 같다.

무취의 인간 그르누이.

그래서 그가 보이기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

그것이 사람들에게 공포로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모두 자신의 체취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모두가 서로를 인식하며 산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우리도 모르게 맡아지는 상대의 체취로 아는 것이다.

그르누이가 공포스러워지기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르누이에겐 아무런 체취가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가 눈에 보이기 전에는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것이 그를 얼떨결에 피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르누이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르누이를 괴물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비릿한 냄새로 가득 찬 곳에서 태어난 그르누이는 냄새로부터 태어난 아이다.

어쩜 세상의 모든 냄새를 태어나는 순간 삼켜버렸는지도 모른다.

태생부터 남다른 그르누이의 인생 어느 순간도 따뜻한 적이 없다.

 

 

평범함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의 세계.

아마도 그르누이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취의 인간.

존재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만들어 낸다.

모든 향을 배합해서 자신을 가장 멋지게 만들어 줄 향수를 만들어 낸다.

 

 

향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앞에 두고 그르누이는 행복했을까?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못해 뇌리에 박힐 정도다.

 

 

간단. 명료. 깊이.

이것이 내가 쥐스킨트의 단편에서 느꼈던 것들인다.

향수에서는 공포와 절규를 느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포와 절규가 아닌 쥐스킨트식의 공포와 절규는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머릿속 어딘가에 남겨져 있다.

끈끈하게 매달려 있는 그 어떤 것처럼.

 

 

그가 병마개를 열었다. 누군가 거기에 서서 병마개를 여는 것.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첫 순간이었다. 그 남자는 작은 병의 내용물을 이리저리 흩뿌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갑자기 환한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아름다움이 퍼져 나갔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놀라움으로 가득했었다.

그때까지는 이런 장르적인 책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2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읽어 봐도 이 책을 능가하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그 어떤 장르적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해도 이 마지막 피날레를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르누이는 사람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보통 사람이길 바랐을 뿐인데... 그 보통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것들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로 사라지기로 했다.

영원히...

 

 

다양한 사람 속에서

다양한 사람으로서

다양하게 살고자 했을 것이다.

그게 장바티스트 그르누이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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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에센셜 에디션 2 - 셜록 홈즈 130주년 기념 BBC 드라마 [셜록] 특별판 셜록 홈즈 에센셜 에디션 2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마크 게티스 외 엮음, 바른번역 옮김, 박광규 감수 / 코너스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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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 만일 내가 능력을 과신한다거나 사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부디 내 귀에 대고 '노베리'라고 속삭여줘. 그래주면 정말 고맙겠어.

코너스톤의 셜록 홈즈 에센셜 에디션은 영국 드라마 셜록의 각본가 스티븐 모펫과 극중 셜록의 형 마이크로포트로 나온 배우 마크 게티스가 고른 셜록의 에피소드들이 담겼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 스티븐과 마크가 남긴 에피소드에 대한 짤막한 평과 뒤 페이지 전체가 블랙에 셜록이란 글자를 넣었다.

2번째 단편집엔 그 유명한 바스커빌가의 사냥개가 담겼고 셜록의 숙적 모리아티가 나온다.


홈즈가 실패하는 사건은 남들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홈즈가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우연히 진실이 밝혀지는 일도 간혹 있었다.

우연히 진실이 밝혀지는 이야기 노란 얼굴의 에피소드는 가슴이 찡해지는 사랑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아마도 곁을 두지 않는 셜록의 이성이 감성적인 부분을 간과했기에 미처 깨닫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모리아티는 런던을 주름잡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그자가 범죄의 역사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이유지. (중략)

모리아티는 아주 악마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유전 성향을 타고났어. 그자의 혈관에 흐르는 범죄자의 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기는커녕, 탁월한 정신적 능력 때문에 오히려 더 드세지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위험해졌어.

홈즈가 인정한 천재.

그 좋은 머리를 범죄에 사용하고 있는 모리아티.

그와 홈즈의 대결은 다 알고 있어도 볼 때마다 심장이 떨리고 긴장이 된다.


홈즈의 등산용 지팡이는 내가 떠날 때 봤던 그대로 바위에 기대어 있었다. 그러나 홈즈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들려오는 대답은 나를 둘러싼 절벽에 부딪혀 들려오는 메아리뿐이었다.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떨어진 홈즈와 모리아티.

양 방향에서의 천재들인 두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까?


1편이 홈즈의 매력을 잘 얘기해 주는 에피소드로 엮었다면

2편은 홈즈의 가장 드라마틱 한 에피소드들로 엮은 거 같다.


홈즈의 변장술과 탁월한 연기력을 맛볼 수 있는 이야기들에서 이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셜록 홈즈의 매력을 맘껏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홈즈의 그림자 같은 왓슨의 담백한 이야기 속에 담긴 홈즈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모리아티와 마이크로포트의 등장으로 풍성해진 이야기와 명탐정 홈즈도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야기들은

홈즈를 좀 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홈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계획하여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것이 친구를 속이는 일이라고 해도.

범인을 잡기 위해 왓슨을 무능한 의사로 만들어 버리는 독설도 서슴없이 해버리는 셜록 홈즈.

그의 그런 기행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이해하는 왓슨은 아마도 문학 사상 가장 충실한 친구가 아닐까?


셜록 홈즈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에 있는 거 같다.

21세기에 읽어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되고, 기발한 범죄와 그것을 파헤치는 셜록 홈즈의 활약은 몇 번을 읽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표지의 두 배우는 영드 셜록의 주연 배우들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두 사람의 조합을 능가하는 셜록은 나오기 힘들 거 같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두 사람의 모습으로 책이 읽혀서 더 즐거웠고, 잊을 수 없는 셜록의 음악이 귓가에 맴돌았으며

그로 인해 틈틈이 드라마 셜록의 에피소드를 찾아보았다.


셜록 홈즈와 왓슨이 대를 이어 살아나는 이유가 뭘까?

적절한 캐릭터의 안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고로 빛나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두 사람의 캐미.

언뜻 왓슨 박사의 존재가 셜록에 비해 미흡해 보이지만 결국 셜록 홈즈라는 인물은 왓슨의 손에서 창조되는 인물이다.

왓슨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셜록은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셜록 홈즈의 모험을 읽으면 읽을수록 아서 코난 도일의 위대함을 느낄 뿐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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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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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에는 공공장소에서 도둑질이 일어날 때마다 경찰이 즉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산타를 체포한다. 좀도둑들이 가장 선호하는 변장이 바로 산타클로스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17편의 단편이 담기 이 책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설레는 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설렘 사이로 스릴 넘치는 일들도 가득하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미스터리 서점이 등장해야 한다는 공식.

그 공식에 충실한 단편들의 모음집이다.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게다가 이 책을 기획한 편집자 오토 펜즐러씨가 깨알 출연하는 것도 모자라 모든 작가가 자신들의 캐릭터들을 대 방출(?) 했기에

읽는 재미가 더더욱 좋았던 책이다.

그것뿐이냐!

이 책을 번역하신 번역가님의 습작(?)도 맛볼 수 있는 이래저래 미스터리 덕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책이다.


이름을 들어 본 작가님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님들의 글맛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그들의 히트 작품 속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등장한 이야기엔 멋진 도둑들과 그 못지않은 경찰들과 탐정들이 등장하는데 단편으로 그들을 만난 게 감질나도록 매력적이다.


게다가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야기를 엮은 작가들의 재치가 담뿍 담긴 책이라서 읽으면서 감탄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들을 읽으며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냈을까?


한 사람이 기획한 일이 17년간 계속되었다는 것도 기적 같고

독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재능을 아낌없이 기부한 작가들의 멋짐이 담긴 책이다.

오토 펜즐러라는 사람을 본적도 없지만 이 책들로 인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을 거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로렌스 블록의 [이보다 더 어두울 순 없다]

마치 셜록과 왓슨 박사 콤비 같은 헤이그와 칩.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셜록을 병행해서 읽고 있는 와중이라 자꾸 오버랩이 되어 인상적이었다.

이 두 사람의 시리즈가 있다던데 찾아서 읽어 보고 싶다.

로렌스 블록은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였는데 이렇게 단편으로 그를 먼저 만났다.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함께.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오토 펜즐러의 미스터리 서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17편의 이야기들이 기발함과 즐거운 매력으로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음이다.

연말 동안 짧지만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이 읽고 싶다면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추천합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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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코니 윌리스 소설집
코니 윌리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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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읽기 좋은 단편집.

제목이 길면서 임팩트 있는 코니 윌리스의 소설집엔 다양한 이야기들이 보통의 상상을 비껴간다.


언니가 보낸 크리스마스 유령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한다.

겨우 사 놓은 크리스마스 선물들을 환불하거나 기부해버리고

필요할 땐 사라지고 불필요할 때는 소파에 자리 잡고 누워서 TV를 보며 화를 돋운다.

과연 내 크리스마스 소원은 뭘까?

나도 몰랐던 크리스마스 소원을 크리스마스 유령은 알고 있다니!

인공지능은 누구의 직업도 뺏기를 원하지 않아요.

인공지능 에밀리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으로 지식을 뽐내면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을 뿐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뺏지 않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 인공지능은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

로켓 무용단에 가입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업그레이드한다.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 에밀리.

그런 에밀리가 존경한다는 여배우 하빌랜드에게 생긴 심경의 변화는?


영화 내용과 현실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접목시켜서 버무린 코니 윌리스의 글맛이 돋보이는 단편이었다.

결국 인공지능도 소수자에 포함되는 건가?

무대를 갈망하는 내 심장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아기들을 낳아 키우고 싶어 하는 심장으로 바꿔 심지 않았다. 혹은 내가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장애물에 대한 내 반응도를 조정하지 않았다.

SF의 여왕답게 그녀가 보여주는 세상은 특별한 감각이 있다.

거기에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덧붙여져서 그런지 따스한 기운으로 감싸인 오래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잃고 도착한 곳은?

외계인 알타이르인들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장난감 가게에서 사라져버린 애인의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 닉스 경기도 볼 수 있을까?

코니 윌리스식 중매는 성공할까?


가볍게 읽으면서도 쉼 없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

코니 윌리스를 작년 여름 둠즈데이 북으로 만났다.

8월에 비바람이 몰아치던 영국에서 둠즈데이 북을 읽는 기분은 몸살처럼 마치 페스트균이 몸에 달라붙어서 이야기 속의 시대 속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때만 해도 몇 달 뒤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그 시대와 똑같은 상황에 처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 코니 윌리스의 글의 느낌들은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주변부에서 거칠게 몰아치는 것들을 눈으로 보며 고요함 속에 파묻힌 기분.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이 소설집에서는

단순과 간결함을 유머와 온기로 버무린 작품들이었다.


고전미를 걸친 SF 이야기는 그래서 꽤 인상적이다.

코니 윌리스의 인상처럼 푸근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은 그만큼 날카롭기도 하다.

제목처럼 강렬하면서도 귀여운 앙탈 같은 이야기들을 즐기면서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를 대비해 본다.


강렬한 이야기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이다.

크리스마스 정신처럼 추운 곳에 온기를 주는 그들을 읽으며 연말을 보내게 되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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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하여 : 1979~2020 살아있는 한국사
김영춘 지음 / 이소노미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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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은 '민주'도 '정의'도 없는 정당이었다.

우리의 현대사를 알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지만 그것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왔지만 단편적인 기억들 사이로 숨겨진 이야기들의 진위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저자 김영춘은 학생 운동이 정점을 찍을 당시 대학생으로 현장에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지런히 담긴 책 한 권은

책배면을 금박으로 칠했다.

마치 금빛처럼 찬란하게 빛나기를 염원하는 것처럼.

암흑 속에서 지금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찬란하게 빛나서 모두에게 널리 사심 없이 알려져야 한다는 뜻처럼 보인다.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이 예상하지 못한 거리 항쟁이었다. 그러나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가 철저하게 기획하고 결심한 학살이었다. 부산 시민을 쓰러트린 개머리판이 이제는 광주 시민을 찌르고 쏴죽이는 총검으로 바뀌었다.

문학소년이 꿈이었는데 시대를 잘 못(?) 만나 책 대신 운동권(?)이 되어야 했던 그 시대의 청년.

그의 시선으로 본 8~90년대는 매일이 최루탄과의 전쟁이었다.

나는 언니 오빠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만 한다고 생각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암흑이 씻겨 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들의 젊음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최루가스에 승화되었다는 걸 안다.

딱딱한 역사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멋스러운 이야기로 듣는 우리의 현대사는 이제까지 읽은 책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다.





진실을 왜곡해서 거짓이 판치게 만들고, 정직하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정치에서 쉬 밀려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나 혼자서 다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은 증거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남는 걸 두려워했던 저자의 모습은 그의 글 보다 이소노미아의 참맛인 편집 뒷담화에서 더 잘 알게 되었다.

왜 출판사가 정치 이야기를 기획하면서 이분을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알고 나서 이 책이 또다시 다르게 보였다.

계파정치를 안 하는 사람이다 보니 편가르기를 하지 않고, 소위 '정치공학적으로'인위적인 프레임을 만드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조직 내에서 퇴출되기 십상인데 그럼에도 지금껏 여전히 정치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저력은 마담쿠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자가 지닌 영리함과 젠틀함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두 편집자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글을 읽다 보면 문학 작품 속에서 현대사를 읽는 기분이 든다.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물결에 부딪혀서 자그락자그락 소리로 이야기해 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덜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덜 고통스러운 마음은 희망을 느끼기에 최적화된다.


암울하고, 기약 없이 우리에겐 언제 좋은 정치인이 생길까?라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미 그런 정치인을 한 명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어려서, 정치를 알지 못해서, 역사의 흐름 속에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현대사를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현역으로 역사를 관통해 온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 고통의 시간을 괴롭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했다.

항상 이분법에 휘둘리다 이렇게 양쪽의 경계를 디디고 선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니 뭔가 균형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


영리함과 젠틀함을 탑재한 정치인의 글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

지나 온 시간이 고통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덜 고통스럽게 직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쪽의 시선을 강요당하지 않고

고른 시선으로 현대사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나와서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치 있는 글담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 정치를 체험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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