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결함 1
이치은 지음 / 픽션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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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은 작가의 글은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지척에 있는 거 같으면서도 아득하다.

이 로봇의 결함도 그렇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로봇과 함께 생활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지만 책을 덮고 나면 현실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근 미래.

로봇의 결함에 대해 신고가 들어오면 그것을 기록하는 직업을 가진 '나'

아무도 없을 때 '욕'을 하는 인명 구조 로봇 조라

살벌한 동화를 얘기하는 동화 구연 로봇 바셀미

꽃을 따는 로봇 롱공

이름 짓는 로봇 옵스트

물류 센터 로봇 양생

그리고 '나'의 꿈.

1편에 담긴 이야기들은 짧은 단편들이다.

결함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조사를 하러 현장을 방문하는 나.

그곳에서 발견되는 로봇들의 결함은 점점이 우리와 닮아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욕을 하는 로봇 조라. 무엇이 조라를 그리도 힘들게 했을까?

발가락에 마비가 와서 꽃을 따는 속도가 느려진 롱공

아이에게 살벌한 동화를 들려주는 바셀미

동물원에서 태어나는 새끼에게 과일 이름을 지어주는 옵스트

꿈을 꾸는 양생

이들은 모두 로봇이지만 로봇화된 인간을 상징한다.

아니면 로봇 취급을 받는 인간이거나.

욕을 해서도 안되고, 꿈을 꾸어도 안되고, 몸에 마비를 느껴도 안되고, 창의적인 이름을 지어서도 안되는 로봇.

하지만 그 로봇들은 인간이 모르게 무언가를 느낀다. 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이 시집같이 짧고 간결한 단편을 읽으며 나는 이유 모를 슬픔을 느꼈다.

아프고, 아리고,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 로봇에게서 느껴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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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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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아름답고 재능 있는 젊은 화가에게 평론가는 그녀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한 마디 사족을 덧붙였다.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칭찬을 하고 나서 평론가로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었겠지.

뭔가 있어 보이고 싶었던 그 한마디. 깊이가 없다.는 화가의 가슴에 내리 꽂혔다.

깊이를 찾기 위해, 깊이의 바닥을 보기 위해, 깊이를 알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피폐해져가는 그녀.

깊이란 늪과 같아서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그녀를 점점 삼켜 버렸다.

평론가의 말에 휘둘려 버린 재능 있는 화가는 죽은 뒤에도 평론가의 평을 받아야 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파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르면서 떠벌리는 그 입.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입. 다물라!!!"

그녀 안에 기준이 있었다면 평론가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안에 배려가 있었다면 자신의 말을 멋스럽게 보이게 할 사족은 달지 않았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속 쓰리는 깊이에의 강요다.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비주얼로는 천재에 맞먹는 매력적인 젊은이가 상대적으로 후줄근하고 별 볼일 없는 체스 장인에게 도전한다.

그 모습 자체가 젊음과 노년의 대결처럼 보였다.

읽는 내내 패기롭게 수를 두는 청년과 그 앞에서 쩔쩔매는 고수의 모습에 통쾌해 하는 구경꾼들을 보며

젊음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틀려도, 실수를 해도, 엉뚱해도,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해도 이해받고, 응원받고, 격려 받는다고 생각했다.

체스 장인도, 구경꾼들도 화려한 겉 멋에 굴복하고 말았다.

천재도 아니고, 체스를 잘 두는 사람도 아니고, 기본을 아는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체스 장인까지 겉모습에 속아서 스스로 쫄았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겉모습에 속아서 스스로 비굴해지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그와 대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릴 뿐이지.

고수가 하수도 아닌 사람 앞에서 정성껏 수를 두는 모습도

둘러서서 자신이 갖지 못한 과감함을 응원하며 그를 영웅 취급하던 구경꾼들도

읽으면서 조마조마했던 나조차도 다 웃음거리가 되는 이야기 승부.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독서쟁이들이라면 이 단편 앞에서 무릎을 칠 테지.

뒤돌아 서면 잊어버리고, 분명 읽었는데 까맣게 기억이 태워져 버리고,

내용은 생각나는데 제목이나 작가가 생각이 안 나고

제목과 작가가 생각나면 내용이 까마득하고.

읽은 거 같은데 들여다보면 첨 읽는 책 같고

그렇게 읽다 보면 언젠가 읽은 책이고

분명 읽었는데 뒤돌아 보면 뭔 얘긴지 오리무중인 이 사태!

문학의 건망증은 뭐랄까 나 자신과 더불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큭큭 거리며 읽은 단편이다.

의미만 뇌리에 남으면 되는 것이지. 암만!

4편의 단편이 담긴 깊이에의 강요.

그중 장인 뮈사르의 유언만 예나 지금이나 쉬이 해석되지 않는다.

아직 쥐스킨트화 되지 못해서 내공이 딸리는 까닭이다.

은둔 작가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

그의 단편들은 모두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읽다 보면 별거가 되어 버린다.

간단. 명료. 깊이.

내게 쥐스킨트는 이렇게 각인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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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 어떻게 인생의 중심을 지킬 것인가
이진우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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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삶을 성찰하고, 삶으로 철학을 살았던 고대 그리스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 철학에서 찾아낸 균형이라는 불멸의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 하면 괜히 어려운 느낌이 들고, 나랑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엔 철학이 필요하다.

그 철학을 잃었을 때, 그 철학을 무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문제는 그것을 잃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철학 없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중요한 것들을 방치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생을 살게 된다.

그러고 싶은가?

자기만의 "왜"가 있는가?

요즘 들어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왜? 질문이자 호기심이자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나만의 "왜" 가 있다면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휘둘리지 않으면 균형을 잡을 확률이 더 커진다.

삶의 목적을 가질 때만 매 순간 부딪치는 문제들을 목적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 목적이 있어야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기에 삶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균형의 예술'이다.

저자는 그리스 철학에서 균형을 찾는다.

균형은 곧 중용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인간종에겐 한가하게 철학을 논할 시간이 없다.

풍족하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지만 풍족해질수록 여유는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

목적을 잃은 바쁨은 사람을 사회를 세상을 병들게 했다.

요즘 들어서 나만의 기준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뭔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재단하고 싶었다.

양쪽의 이야기보다는 내 구미에 맞는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면서 뭔가 나도 한쪽으로 쏠리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취미인 독서도 편독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양하게 읽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이 책에서 나는 내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읽었다.

개인적 어른을 떠나 사회적 어른이 되어가면서 균형을 잃으면 모두에게 민폐가 되는 어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 삐딱하게 몰려가는 세상에서 나라도 균형점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처럼 길을 잃고 답답한 어른들이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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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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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산문 한 편

정갈한 시어가 마음을 보듬고 나면

구수한 글들이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

23살에 등단하여 1000여 편의 시를 쓴 시인 정호승.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한때 이 문장을 가슴에 적으며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이 문장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 담긴 싯구다.

정호승 시인의 산문과 시들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책이 나와서 참 다행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종을 묶어 놓은 이 시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홀로 있는 시간이 늘어가는 사람들에게

정호승 시인의 시와 산문은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버틸 수 있는 위로를 준다.

시인의 경험과 생각과 마음을 적은 글들 앞에서 나도 내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진 정호승 회고록 같은 느낌이 든다.

간간이 담긴 사진들이 그분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한다.

나도 자꾸 되뇌다 보니 알 수 없는 따스한 온기가 가슴에서 차오른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인 인생이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이 난대로 살면 된다.

Why Not?

특별히 위로의 글귀가 보이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글이 있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이 제목 자체가 위로가 된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예전처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없는 시대이고 이 시련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시련이 끝나고 나서도 예전처럼 많은 걸 누리고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40년 넘게 시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던 시인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마음을 다독이게 만든다.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면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새해에는 시로써 마음을 털어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짧지만 함축적인 시어로 마음을 전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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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 개정판 카프카 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한석종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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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카는 이를테면 요하나 브루머라는 서른다섯 살 먹은 하녀에게 유혹당했어요. 유혹당했다, 라는 말을 써서 조카의 감정을 해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달리 꼭 들어맞는 말을 찾지 못하겠군요.

보통은.

주인집 아들에게 유혹당한 하녀가 아이를 갖고 쫓겨나게 마련인데

카프카의 실종자는 35살 먹은 노련한(?) 하녀에게 유혹(?) 아닌 능욕 당해서 아이를 갖게 한 죄(?)로 부모에게 쫓겨나서 미국으로 추방당한 카알이 등장한다.

미국에 도착해서 트렁크를 들고 배에서 내리다가 우산을 놓고 온 걸 기억하고 트렁크를 모르는 남자에게 맞기고 우산을 찾으러 가다가 길을 잃는.

정말 답답하고 아무 생각 없어 보여서 짜증까지 유발하는 카알이라는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 이유로 카알은 우산 대신 화부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미국의 상원 의원인 외삼촌까지 만나게 되니 어찌 보면 카알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카알의 인생이 그리 순탄한 건 아니었다.

외삼촌 덕에 편안함 삶을 영위하려나 싶었지만

외삼촌이 반대하는 폴룬더씨댁에 방문한 카알에겐 외삼촌의 결별이 선언된다.

다시금 트렁크와 우산만 남게 된 카알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까?

그렇게 다시 쫓겨난 카알은 어느 여관에서 두 남자를 만난다.

똑똑한 척했지만 결국 카알은 두 남자에게 이용당하는 처지가 된다.

로빈슨과 들라마르쉬는 철저하게 카알을 이용한다.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카알.

다 아는 거 같고

옳은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현실에 묶어 놓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카알에게서 보인다.

한 발.

그 한 발만 다르게 내디디면 다른 삶을 향해 갈 수 있을 텐데.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이 작품은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지만 이후에 카프카의 일기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이 쓰였으므로 실종자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성, 소송, 실종자 이렇게 카프카 고독의 3부작이 탄생한다.

미완으로 끝난 실종자.

어쩜 카프카가 결말을 내지 않고 미완으로 남긴 것이 카알에게는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카알이 검사에 합격해서 아메리카에서 자리를 잡아 당당하게 뉴욕에 입성하여 외삼촌 앞에 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프카가 정해 놓은 결말을 아무도 알 수 없음으로 나는 희망스러운 결말로 실종자를 이야기하고 싶다.

카알은 어린 나이에 여러 곳에서 추방당한다.

가족에게 추방당해 낯선 땅에 오고

그곳에서 역시 가족에게 추방당해 떠돌게 된다.

그러다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로 잠시 안착하는 가 싶더니 잠깐의 근무 태만으로 인해 역시 추방당한다.

아마도 카알이 브루넬다 곁에 끝까지 남은 이유는 어떤 관계에 매듭을 짓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타의에 의해 추방 당했던 카알의 인생에 처음으로 일방적인 추방이 아닌 관계의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게 바로 브루넬다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비로소 카알에게는 하나의 단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카알의 다음 이야기가 지금처럼 어설프지 않을 거라 믿고 싶은 거다.

실종자.

어쩜 우리는 인생에서 어느 기간은 실종자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동안이 세상에서 실종자로 살아가는 시간이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게 되는 시간.

자신의 이름을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

사회로부터 어떠한 인정을 받게 되는 그 증명의 시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 실종자는 아마도 카알처럼 닿지 않는 곳을 그리며 어디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며 살아갈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제 이름을 말하여 기록하도록 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가 여기서 하찮은 일자리라도 얻어 만족스럽게 일을 수행한 후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알아서는 안 된다.

니그로가 카알 로스만으로 돌아오는 날이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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