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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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면 공식처럼 새겨지는 이름들이 있다.

히틀러, 유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2차 세계대전은 아주 많은 희생자들을 내고 많은 나라들을 고난 속에 묻었지만

최고의 희생을 대표하는 이름은 유대인이었다.

 

 

피에 젖은 땅을 읽고 난 지금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히틀러는 다른 민족을 처단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의 동족을 멸했다.

정치적 이념을 들이대며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을 굶어죽게 만들고,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총살시켰다.

그들의 땅을 블러드랜드로 만들었다. 피에 젖은 땅으로...

 

 

히틀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스탈린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시기가 왔다.

이 책 피에 젖은 땅을 통해서.

수많은 기록들을 토대로 스탈린의 행적을 짚어낸 피에 젖은 땅.

 

 

블러드랜드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나치(독일)와 스탈린(소련)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곳으로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해 3국. 이곳에 바로 피에 젖은 땅이다.

수많은 인명이 소멸된 땅이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원혼들의 땅이다.

 

 

솔롭키는 북극해의 섬 위에 세워진 포로수용소였다. 우크라이나 농민의 마음속에 솔롭키란 고향에서 추방당하면서 느끼는 모든 고립과 억압,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게 솔롭키란 추방자의 노동력이 국가의 이익으로 바뀌는 최초의 성과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이념을 내세워 농촌에 집단 농장을 만든다는 구실로 부농을 해체했고, 농민들의 식량을 수탈해서 수출했다.

다음 해 심을 곡식조차도 남겨두지 않고 차출했기에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고, 그런 상황을 알리지 않으려고 도시를 폐쇄했다.

어디로도 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굶어 죽었다.

길을 떠난 사람도, 떠나지 않고 남았던 사람도 모두 굶어 죽었다.

죽지 못한 사람들은 시체를 뜯어 먹으며 살아야 했다.

그곳은 죽음의 땅이었고, 그곳의 참상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전하고 싶어도 전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던 피에 젖은 땅.

 

 

수많은 기록을 참고로 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얼굴을 파헤친 기록. 피에 젖은 땅.

작가의 서문부터 미친 듯이 인덱스를 붙였다.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전쟁의 기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감상적인 문체로 이 끔찍한 참상을 전하고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이 2차대전의 가해자로 악명을 떨치는 사이 소련과 스탈린은 그 뒤에 숨었다.

어쩜 그 악랄하고 끔찍한 참상을 말해 줄 사람들이 모두 죽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쩜 그 참상을 말하고 싶어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21세기에 와서야 나는 겨우 이 책을 통해 아주 가까운 곳에 히틀러 버금가는 이가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라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걸까?

아니면 유대인의 희생에만 초점을 맞춰서 상대적으로 이 피에 젖은 땅에서의 살육은 잊힌 걸까?

아니면 인종차별이 아니라서 관심을 덜 받은 걸까?

 

 

피에 젖은 땅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살육의 현장도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틀러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스탈린이 자신의 조국에서 동포를 살육하는 동안

일본이 동아시아 일대에서 벌인 살육의 현장에 대한 기록도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45년 이후로 76년의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가 지나고 1세기가 가까운 시점에서야 스탈린의 만행이 만 천하에 공표되었다.

일본의 만행은 어디에서 시작 중일까?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다.

피에 젖은 땅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그 많은 죽음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식민화에서, 이데올로기는 경제와 서로 얽혀들었다. 행정에서, 그것은 기회주의 및 공포와 연결되었다. 나치와 소련의 경우 모두, 대량학살의 시기는 또한 열정적인, 아니면 최소한 일사불란한 행정 처리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 체제의 리더가

한 나라의 리더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눈 감은 덕에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우리가 이 전쟁을 계속 알아내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 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역사란 각 개인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통계라는 숫자라도 있어서 이 책을 내가 읽을 수 있었다.

피에 젖은 땅에서 이유 없이 사라져간 그들은 숫자로, 통계로 남았다.

그 숫자가.

그 통계가

바로 그들의 역사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라도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개개인의 역사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희생된 이유가 저 가당찮은 자들의 자기만족이었고

그 작자들 밑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입 막은 동조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걸 숫자로만 남은 통계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왜 우리가 2차 세계대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안목을 길러준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역사, 시험에 나오는 역사만 중요했기 때문이다.

 

 

피에 젖은 땅이 스탈린과 소련의 만행을 알리고 피에 젖은 땅에서 희생된 이들을 이야기했다.

이후에 또 다른 2차대전의 피해자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기를 소망해본다.

 

 

전쟁사를 이야기한 책이고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희생을 이야기한 책이지만

내겐 아직도 묻혀있는 내 나라의 과거를 더욱 생각나게 해주는 책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이전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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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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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란, 인간 표현 행위에서 가장 강렬한 것이다. 저쪽에서 나를, 혹은 이곳을 주시한다는 무언의 액션. 중요한 건 그 강렬함을 당사자가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일 테다. 기현도 그랬다. 그녀를 향하던 눈빛이 볼록렌즈에 모아진 햇빛처럼 집요했다고. 결국 그 집요함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태워버린 것일지도.

 

 

 

변사체.

실종자.

지적장애인.

외딴 작은 마을.

그 마을의 중심에 있는 자.

 

어디서 많이 보았던 공식이다.

추리소설 기법을 가진 이 지문이라는 소설은 섬뜩한 반전을 지니고 있다.

그 반전에 동의하는 나는 온전한 걸까?

 

가평 경찰서로 좌천된 규민에게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변사체가 맡겨졌다.

단순 자살 건으로 처리될 일인데 왠지 그의 '촉'을 건드는 것이 있다.

실종자 명단에서 사체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고, 실종 신고를 한 자매를 만나게 된 규민은 이 사건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간주한다.

 

기현의 실종 신고를 한 의현은 '성' 이 다른 자매다.

어릴 때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고 동생을 데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해서 그 호적에 오른 동생 기현은 그늘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엄마가 병으로 죽고 의부의 손에 남겨진 기현의 인생은 남들 눈엔 부잣집 딸로 호강하는 듯 보였지만 성폭행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런 일엔 보통 두 가지 반응이 있다.

멀리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의 가십거리가 되고

아주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의 침묵이 된다.

 

꽃새미 마을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 장애인 착취는 그 마을 유지에게서 비롯되었다.

먹고사는 입들은 모두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었다.

경찰마저도.

 

그곳에서 성을 짓고 외부인을 차단한 채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었던 자.

자기 외엔 모두 다 아래로 보던 자.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자만하던 자.

오창기는 음지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놓고 군림했지만

 

이민흠은 소설가라는 타이틀과 교수라는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을 유린했다.

 

"그 기집애, 누군지 좀 알 수 없을까요? 방송에 인터뷰한 애 말이에요. 윤 선생, 정말 짚이는 애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 내가 알아보긴 그렇잖아요. 윤 선생이 좀 알아봐줄래요?"

"그 여학생 찾아내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찾아서 요절을 낼 거예요. 저까짓 게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냐고!"

 

그럼.

너 까짓 건 뭔데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어린 여자의 인생을 망가뜨렸니?

 

뉴스에서

소설에서

누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야기로

들어봤던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되어 지울 수 없는 지문이 되었다.

 

단순한 재미로의 추리소설이 아닌

추리소설을 가장한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 이야기였다.

 

지금도 음지에서 오기현과 김예나, 혹은 신명호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작은 용기가 되길 바란. 세상과 사회가,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차츰 당신들 편에 서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말처럼

이제 음지에 있던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무관심과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했던 이들과

알고도 모른 척했던 이들과

소리 없이 분노하던 이들에게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소리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

피해가 올까 봐, 귀찮아서, 내 일이 아니니까 외면했던 일

 

이 모든 일은

바로 내 일이 될 것이다.

 

6단계만 거치면 모두 아는 이 좁은 세상에서

폭력의 가해자를 나만 무사히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설사 내가 무사히 피해 온 일이라 하더라도

건너건너 알아보면 우린 모두 피해자이고

우린 모두 누군가에게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한숨에 호로록 커피처럼 마셔버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타르처럼 내 안에서 굳어져 가는 커피처럼

선명한 지문을 남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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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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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번 고속도로 확장 공사가 결정되었다.

누구의 편의도 아닌 정부 예산을 맞추기 위한 낭비는 도시에서 사람들을 비워나갔다.

도로가 깔리는 그 길에 20여 년간 다니던 직장과 그가 처음 마련한 집을 가지고 있는 바튼이 있다.

 

그렇죠. 한 집에서 20년 동안 살아온 사람에게 '토지 수용권'을 내세우면 어쩌자는 걸까요?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키우고 여행을 갖다가도 언제든 돌아오던 집인데 말입니다.

법을 만들어 시민의 등을 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죠

 

그럼에도 다들 보상금을 받고 떠났다.

그리고 바튼만 남았다.

 

프레디와 조지

찰리와 바튼

아들과 아버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찰리를 바튼은 품고 살았다.

슬픔을 울음으로 비워낸 매리는 산 사람의 품위를 지켜냈고, 그러지 못한 바튼은 아들의 망령을 끌어안고 안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직장과 집을 잃게 된 바튼

그것은 바튼의 지난 20년을 잃어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우린 묘지에서 살고 있어. 라고 그는 생각했다. 매리와 나는 지금 묘지에 있는 거야. 영화 [나는 산 자들을 묻었다]의 주인공 리처드 분처럼. 알린 씨네 집에 불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그집도 12월 5일에 이사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호버트 가족은 지난 주말에 이사를 나갔다. 나머지는 텅 빈 집들이었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들이 내어 준 길에 깔리는 아스팔트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다음 해 받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남는 예산을 쏟아붓기 위한 거라는 걸 알았다면 그들도 떠났을까?

 

무모하고, 답답하고,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바튼을 처음엔 이해하기 싫었다.

답은 정해져 있고, 절대 바뀌지 않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하지만 책장이 넘어가면서 그의 분노와 절망과 외로움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누구나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바튼 역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삶. 그 자체였다.

 

고속도로가 비집고 들어올 그곳은 바튼 같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지르는 곳이 되어 버릴 곳.

784번 고속도로.

 

바튼은 최후의 일인이 되어 그곳에 남았다.

모두는 알게 될 것이다.

바튼이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떠났다면 묻혔을 정부의 비리를.

 

재개발과 각종 도시 발전을 위한 것들이 그곳에 뿌리박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 가는 걸 로드워크가 보여준다.

내가 살면서 보아왔던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바튼의 외로운 싸움을 맥없이 바라보게 된다.

 

784번 고속도로는 예정보다 일찍 완공되었다.

바튼의 다큐를 찍은 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바튼은

어디로 갔을까...

 

784번 고속도로

그 길에 깔려 있는 건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추억을 아스팔트로 덮어 버린 곳이었다.

수많은 차들이 그들의 추억을 짓밟고 사라지도록...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란 필명으로 서슬 퍼렇게 써 내려간 로드워크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했던 사람을 잃은 심정이, 수많은 추억이 사라지는 외로움이 절절하게 그려지는 이야기 로드워크.

우리의 어딘가에서 현재진행형이 되고 있을 로드워크.

무엇이 지켜져야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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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법정
조광희 지음 / 솔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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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생명체입니다. 안드로이드가 자연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읽은 웹툰 [데이빗]을 읽은 탓에 이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새삼 더 각인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 주변엔 무인 가게가 점점 늘어나고, 로봇이 서빙을 하는 음식점도 생기고 있다.

이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윤리의 잣대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볼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DNA를 복제해서 만든 안드로이드 아오.

그 아오에게 묘한 동질감과 함께 질투와 시기와 경이로움을 같이 느끼는 한시로.

애인과 아로에게 애정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꼈던 한시로는 그 안드로이드에게 살해당한다.

 

한시로가 불법으로 장착한 의식생성기를 단 이후 아로는 몰랐던 감정이 생기고 자신의 처지를 답답해한다.

시로가 없을 때는 수면모드로 있어야 하지만 아로는 깨어나 한시로 몰래 외출도 하면서 인간 세상에 대한 학습을 한다.

그러면서 한순간 자신이 한시로라고 착각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이 일은 누구의 잘못인 걸까?

 

 

인간 세상을 스스로 학습하고

인간의 DNA로 탄생한 안드로이드.

비록 생식기는 없지만 인간의 애정행위까지도 학습하게 된 아오는 어느 날 시로와 미나의 모습을 보고 한순간 분노한다.

자신을 어느덧 한시로와 동일시하게 된 안드로이드 아오는 폐기될 처지에 맞서 변호사 윤표의 도움으로 재판을 신청한다.

 

 

이런 세상이 내 생에 온다면

그래서 내가 이 재판을 직접 보게 된다면

나는 어느 편에 서게 될까?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죽였으니 즉시 폐기처분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안드로이드지만 의식을 가졌고 인간의 DNA로 만들어졌으니 정당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까?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알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고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했던 돼지 데이빗과 아로는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이건 제 일일뿐만 아니라 동물들, 마음을 가진 안드로이드,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 변호사님의 동물과 안드로이드의 해방에 대한 입장에도 공감합니다."

 

 

안드로이들과 동물들을 대변하는 해방전선이 등장하고 그들의 세력에 점점 커가는 상황에서

아로의 재판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재판이 되어가고, 그 결과에 따른 파장이 인간계와 그 외 생물계에 미칠 영향이 클 것을 우려한 목소리들이 있다.

과연 재판은 어떤 판결로 귀결될까?

 

 

미래의 일을 뭐 벌써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다.

어쩜 우리 생애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비단 안드로이드에 대한 SF 소설이 아니다.

인간의 법정은 말 그대로 그저 인간의 법정일 뿐이다.

 

 

인간의 법정에선

인한 대 그 어떤 생물이라도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거 같다.

인간이 만든 법은 언제나 인간이 우선이니까.

AI가 판사가 된 세상에서도 말이다.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참사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인간은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는 걸 그들은 알까?

 

 

지금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것이

그저 반가웠다.

 

 

복잡한 듯 보여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은 저 미래보다는 훨씬 단순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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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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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를 찾아왔지만, 코니는 내게 어머니 대신 자아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주길 바라며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걸 멈춰야 했다. 타인의 삶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걸 멈춰야 했다.

마침내 내 삶이 열리고 있었다.

 

 

엄마와 딸은 비슷한 운명을 가진다는 말을 들었다.

팔자가 같다는 말로 어른들은 걱정과 위로를 함께 말했다.

살면서 보니 엄마와 딸은 비슷한 삶의 궤적을 살아낸다 해도 엄마들 보다 딸들은 항상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세월의 힘일 것이다.

 

 

1980년에서 1982년

2017년에서 2018년

엄마 엘리스 모소와 딸 로즈의 이야기가 번갈아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코니가 있었다.

엘리스와 코니, 로즈와 코니.

 

 





엄마의 연인이자 유명한 소설가 콘스턴스 홀든.

로즈에게 엄마는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손에 자란 로즈는 우수한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 조에게 의지하며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

언젠간 조와 함께 시작할 사업을 위해 잠시 임시직을 거치는 중이었지만 조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만 들먹이며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그런 차에 30년이 넘도록 함구하던 아빠는 콘스턴스의 소설책과 함께 엄마의 비밀을 얘기해 준다.

 

 

 

삼십사 년 동안 나는 세상에 한 가지 모습만 보여주었다. 코니와 단 몇 분 함께 있고 나니 그것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코니가 간직한 엄마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코니의 비서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잠입한 로즈는 로라가 되어 코니의 손이 된다.

중증 골관절염으로 손을 쓰지 못하는 코니 대신 집안 일과 함께 은둔 작가였던 코니가 시작한 새 소설의 타이핑을 하는 것이 로라의 일이다.

로라는 그 새 작품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희망에 차있다.

 

 

코니의 단단함에 비해 엘리스와 로즈는 무른 맛이 난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이십대의 엘리스와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기억을 지닌 채 어디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던 로즈.

그들은 코니 앞에서 어른이 되어 갔다.

상처받은 이십대의 엘리스가 보기 좋게 사라졌다면 로즈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아냈다.

엘리스가 찾지 못한 것을 로즈는 찾아냈다.

 

 

이 이야기엔 기막힌 반전이 있다.

이십대의 흔적만 남기로 홀연히 사라진 엘리스에 대한 반전.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만나게 될 엘리스의 모습이 어떨지를.

엘리스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로 여행을 떠났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그 상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감행했던 "도망"은 또 다른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엘리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코니의 굳건함이었다.

사랑의 자존심은 가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있으면서도 반대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그런 해석.

그날 엘리스와 코니가 그랬다.

서로의 말을 모두 오해하고, 고깝게 듣고, 반대로 행동했다.

엘리스는 사라졌다.

남겨진 로즈는 엄마보다 더 완숙한 나이에 코니를 만났다.

코니는 엘리스에게 주지 못 했던 말들을 로즈에게 건넨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 수 있다 했다.

엘리스의 부재는 코니와 로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났다.

더 이상 존재를 알 수 없었기에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이야기.

 

 

로즈와 로라의 이중 삶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던 로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고, 엘리스가 감당하지 못했던 선택을 로즈는 과감히 인생에서 삭제했다.

그래서 제시 버튼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제시 버튼은 언제나 여자들의 진짜 이야기를 할 줄 안다.

 

 

"로즈, 당신이 정말 엘리스를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엄마를 찾고 있었어요."

코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개념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찾고 있었던 거죠."

 

평생 어머니에게 집착했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자가 된 느낌이었다. 내 곁에 있어준 적 없는 사람에게 너무 신경 쓰느라 곁에 있어준 사람에게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다.

 

 

엄마의 흔적을 찾으러 온 로즈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냈다.

오래전 엘리스가 두고 간 자아가 로즈와 함께 자랐다.

이제야 비로소 두 자아는 코니에 의해 완성되었다.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사라진 엘리스의 미완성인 인생이 로즈에 의해 완성되는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사랑이 영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코니와 엘리스의 사랑은 영글지 못한 채 서로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아니, 아니, 또 이럴 수는 없어."

 

 

로즈의 정체를 알게 된 코니의 말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떠난 자리가 채워지고, 지울 수 없을 거 같은 상처는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엘리스의 부재가 주었던 고통의 시간이 로즈와 코니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서로에게 치유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을까?

 

 

미스터리 소설도 아닌데

미스터리하게 읽힌다.

동성애, 불륜, 상실감, 자존심과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가 맛깔스러운 양념처럼 우리 삶에 버무려지는 느낌이다.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가의 필력에 매료된다.

 

 

읽는 순간 보다

읽고 난 후에 더 매료되는 이야기 컨페션.

제시 버튼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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