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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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은행 강도, 아파트 오픈하우스,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을 기다려왔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하고 읽어 나갔다.

그러나.

무슨 말장난 같은 말투와 반복되는 이야기의 설정이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배크만의 이야기 스타일이 바뀌었나?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하나같이 답답하고 멍청하고 고집스러운 모습들은 상식적인 세상에서 아웃된 사람들의 공동체 같다.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서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의 짜증 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언가 번득거리는 걸 느끼게 된다.

아! 이게 다가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

딱 하나의 지독하게 한심한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 바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지독하게 한심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이 모든 사건들은 과거로부터 시작되었고, 털끝만 한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서, 한심한 발상에 투여된 상황이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두는 착하고, 따뜻하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인질극에 대한 답변을 할 때는 한심하고, 짜증 나고,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은 따뜻하고, 감동스럽고, 용기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된다.

정말

보통의 선한 사람들이

한순간 잘 못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우왕좌왕하고, 어이없는 실수들을 하는 모습 그대로가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와, 타인의 실수마저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희한한 위로를 받게 된다.

이 성가신 인질들은 은행강도를 다그치고, 훈계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어떻냐고, 은행 강도답지 않다고 지적질 한다.

생전 처음 은행 강도를 계획했지만 하필 털려던 은행은 현금이 전혀 없는 은행이었다.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은행인 걸까?

간신히 도망쳐서 얼결에 들어간 곳이 오픈하우스 아파트였고, 그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졸지에 인질이 되었다.

이 어설픈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조마조마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프레드릭 배크만은 자신의 이름값을 지켰다.

작은 도시의 사람들은

티끌만 한 인연으로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은행강도로 시작해서 인질극으로 변질됐지만 결국 다리에 관한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낯선 존재들이지만

결국 자신도 모르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바보 같은 사람들이 바보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새해 전야제에서 터뜨리는 불꽃놀이 같다.

세상 어딘가엔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불행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짜증 나는 사람을 참아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사랑을 잊은 사람에게 사랑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뒤에 가서야 이 이야기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자신의 각박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였다.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던 나 자신을 반성해 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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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 숲속의 삶 웅진 세계그림책 215
필리프 잘베르 지음, 이세진 옮김, 펠릭스 잘텐 원작 / 웅진주니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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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아도 돼, 밤비. 엄마는 너를 믿는단다.

 

 

디즈니판 밤비의 귀여운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나에겐 이 그림체가 조금 낯설었습니다.

귀엽고 밝은 동화적 이미지가 아닌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의 그림체는 훨씬 우아하고 깊이 있게 느껴졌죠.

한 번의 가을, 겨울과 두 번의 봄, 여름의 삶.

 

 

갓 태어난 밤비의 비틀거리는 모습들

엄마를 따라 세상으로 한발 내딛는 밤비의 이야기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게 만듭니다.

 

 


 

 

온전히 엄마의 품 안에서 자라던 밤비는 여름을 맞습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곳을 향해 새로운 감각을 느끼며 나아가다 플린을 만나게 됩니다.

또래의 친구를 만나게 된 밤비와 플린은 티티새를 쫓아다니며 즐겁게 노닐죠.

 

 

 

여기는 산기슭이란다.

여기서 더 가면 우리를 보호해 주는 나무들이 없어. 그러니 조심해야 해.

엄마가 앞장설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숲속 깊은 곳으로 앞만 보고 달려. 뒤도 돌아 보면 안 돼.

우리가 떨어져도 엄마가 나중에 너를 찾아갈 테니까 말이야. 알았지?

 

 


 

 

아름답기만 한 숲 가장자리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충고는 아직 어린 밤비에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비는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그런 건 난생처음 봤어요. 그들은 두 발로만 우뚝 서 있었어요. 위풍당당하게.

밤비와 플린을 바라보던 그들은 천천히 기다란 나뭇가지 같은 것을 들어 올리고는 잠시 멈추었어요.

그 모습은 정말 기이했어요.

 

 

탕!

 

 

첫 총소리를 들은 밤비와 플린은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잊지 못할 소리였죠.

무사히 피한 밤비는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동안 엄마와 숲속 깊숙한 바위틈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밤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밤입니다...

 

 

여름비가 그치고 다시 햇살을 즐기려는 동물들 사이로 또다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밤비가 첫 번째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비가 내리던 밤에 치던 천둥소리와 지금 들린 천둥소리는 다른 것임을 밤비가 깨닫게 되었을까요?

 

 


 

밤비가 눈치채기 전에 가을이 왔네요.

숲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습니다.

 

 

"저 노루가 누구인지 알아? 플린이 밤비에게 물었어요

"우리의 아버지들 중 하나잖아."

"아니, 정확하게는 네 아버지야. 숲에서 가장 오래 산 노루. 여러 해 동안 많은 노루가 저 왕자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다들 무릎을 꿇고 말았지. 그렇게 숲의 왕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왕자, 너의 아버지야."

 

 

아빠 노루의 늠름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밤비는 가을날 알록달록한 숲에서 숲의 왕자 아빠 노루를 만났습니다.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춥고, 먹을 것도 없었죠.

 

 

그리고...

그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탕!

 

 

밤비는 열심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독했던 겨울은 가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밤비의 뿔도 자라고 있었죠.

밤비는 몸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탕! 탕! 탕!

 

 

이번에는 그 천둥소리가 밤비의 다리에 닿았습니다...

 

 

아픔을 참고 무작정 달리는 밤비는 문득 자신의 옆에서 누가 달리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바로 숲속의 왕자.

밤비의 아빠 노루가 밤비와 함께 달리고 있었죠.

밤비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려는 듯.

 

 

밤비는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까요?

밤비의 상처는 잘 아물었을까요?

엄마도 없는 밤비는 어떻게 숲속에서 살아남을까요?

 

 


 

아름다운 그림은 귀엽고 말랑말랑했던 디즈니의 밤비를 잊게 만든다.

원작 밤비는 인간에 의해 위협을 받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앞선 생태문학으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우리는 디즈니 때문에 아기사슴 밤비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밤비가 사슴이 아닌 노루였다는 사실!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필리프 잘베르는 연필과 목탄으로 그린 그림에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밤비를 탄생시켰다.

멋진 숲의 풍경과 노루들의 모습이 그래서인지 훨씬 애잔하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밤비.

 

 

50X60의 큰 판형에 가득 채워진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을 받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서 밤비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던 그 그림은 이제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밤비보다 더 성숙하고, 강단 있고, 숲속의 왕자처럼 늠름한 밤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밤비를 마주하고 나니

필리프 잘베르가 "빨간 모자"를 각색한 "너의 눈 속에" 가 궁금해졌다.

 

 

21세기에 새롭게 재해석된 밤비.

다 채우지 않은 글의 여백이 남긴 깊은 사색은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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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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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땅에 묻으면서 자식 없는 딸의 유년도 막을 내렸다. 죽어가던 그 도시에서, 우리는 전부 잃어버렸다. 현재 시제의 단어들까지도.

 

무법지대가 되어 버린 카라카스.

혁명의 아이들은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아무 곳이나 침범하고, 아무에게나 자신들의 법을 들이댄다.

 

엄마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델라이다 팔콘.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혁명의 아이들에게 집을 빼앗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옆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 문은 잠기지 않았다.

아델라이다는 그곳에서 아우로라 페랄타의 주검을 본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살았다. 아우로라 페랄타는 주검이었고, 나, 아델라이다 팔콘은 생존자였다. 보이지 않는 실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이어주는 뜻밖의 탯줄.

.....

사후 경직이 그녀를 슬픈 곡예사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를 밀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힘껏 밀었다. 시체 처리가 아니라 출산 중이기라도 한 듯.

 

 

매 페이지마다 폭력이 숨을 쉰다.

매 페이지마다 부당함이 소리친다

매 페이지마다 죽음이 자장가를 부른다.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가 되기로 한다.

시체를 처리하고 아우로라의 모든 것을 배운다.

그녀는 이 지옥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뼛속까지 아우로라가 될 것이니까.

 

베네수엘라는 혼란스러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과 폭력, 그 둘이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신들 고유의 모순이 만들어낸 균열과 당장이라도 국민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태세를 갖춘 풍경의 구조적 결함 위에 형성된 국가였다.

 

 

더 이상 국가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숨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가족인 엄마를 잃고 집까지 빼앗긴 아델라이다.

그녀는 옆집에 살던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 역시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이미 죽은 죽음이지만

시체를 감쪽같이 처리해야 해야 신분 세탁을 할 수 있는 아델라이다.

밤마다 총성이 울리고 시위대와 정부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아델라이다는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조마조마하다.

금방이라도 들통날 거 같고

금방이라도 옆집까지 밀고 들어올 거 같은 혁명의 아이들이 자기 집에서 내는 소리들을 들으며 숨죽이고 있는 아델라이다의 팽팽한 긴장감이 모든 문장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나는 베네수엘라를 미인들을 많이 배출하는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사정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닌 자국민끼리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비정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수상한 사람, 경계하는 사람이 되었고, 연대를 약탈로 둔갑시켰다.

 

 

 

첫 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는 기자 출신답게 서슬 퍼렇고 생생한 문장들이 긴박한 상황을 전달한다.

나는 그녀가 스페인 땅을 밟을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다.

아니, 그 스페인 땅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지 알지 못해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

 

거짓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이름에서부터? 몸짓에서부터? 기억에서부터? 어쩌면 말에서부터?

 

 

거짓으로 시작해야 하는 새로운 삶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자기보다 열 살 많은 삶을 연기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종이와 펜을 놓고 요리사가 되어야 하는 삶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 여자가 아니었고 완전하게 그 여자가 될 일도 결코 없을 터였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베네수엘라

가보지 않고 알지 못했던 곳에 대한 무지는 이 책 한 권에 의해 그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암울한 시대를 건너 온 우리의 현대사가 오버랩 되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순간을 그들도 언젠간 누리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현실 아닌 현실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고전이 될 지금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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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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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은 유리가 깨지는 광경을 자주 보았지만, 그렇게 크고 깨끗하고 단단한 유리창이 깨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의 침범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은 세계 각지에서 이민자들의 발길을 모았다.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피부색과 서로 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허황된 바람을 안고 온 그들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 외에는 가족을 돌볼 시간도 없었다.

 

낯선 문화와 낯선 사람들

그들 보다 월등한 체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과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실제로 마주한 미국 생활에서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더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듯 동양인도 서양인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열여섯 에이바는 165센티에 60킬로였다.

자신을 도둑 취급하듯 쏘아 보는 편의점 여주인의 모습이 내내 신경에 거슬렸다.

그냥 잠시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당신이 나를 보는 눈빛 그대로 행동해 주겠어!'

아이에게 지기 싫었던 여자는 아이의 멱살을 잡았고, 자존심이 상한 아이는 그 여자에게 주먹질을 했다.

그리고 겁에 질렸든, 치솟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했든 여자는 아이의 뒤통수에 방아쇠를 당겼다.

 

28년 전 그 자리에 있었던 숀은 누나의 죽음을 매일 떠올린다.

누나를 쏜 한정자는 사라졌다.

아무런 죗값도 치르지 않고.

한동안 방황하면서 분노를 터뜨리던 숀은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가진 행복을 지키려 노력하며 산다.

 

부모를 떠난 언니 대신 아버지와 같이 약국을 경영하는 그레이스는 어느 날 퇴근길에 주차장에서 엄마가 총에 맞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아빠를 따라 미국에 건너와 두 딸을 낳아 보살피고 열심히 일만 해온 분이었다.

누구에게 해끼칠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어느 날 그냥 총에 맞았다.

그런 줄 알았다.

엄마의 과거가 까발려지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총에 맞았다. 소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느낌이 뼛속에 사무쳤다.

 

그 여자는 그 어떤 자격도 없었다. 에이바는 열여섯 살에 죽었다. 에이바가 누려야 할 세월, 경험, 행복 그 모든 것이 총 한발에 사라졌다. 한정자가 그 이상을 누린다면 부당한 일이었다.

 

 

두순자 사건이 모티브가 된 이 이야기는 숀의 누나 에이바가 총에 맞아 죽은 28년 후에 두 가족은 또다시 상처를 주는 과정에서 재회하게 된다.

그레이스와 숀.

엄마의 과거를 안 그레이스는 사과를 하러 숀을 찾아온다.

하지만 숀은 그들을 용서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이었으니까.

 

한정자는 숀의 구역에서 살아왔다.

신분을 바꾸고 코앞에서 아주 잘 살아왔다.

숀이 느꼈을 그 반감과 분노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가해자가 되었다.

몇 달 전 출소한 사촌 레이가 범인으로 체포되었으니까.

 

서로에 대한 이해 대신 불신을 갖고 시작한 관계는 언제나 불씨를 품고 있다.

한정자는 에이바를 불량한 흑인으로 봤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총을 쐈다.

에이바는 자신을 불량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싫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불행은 단지 그뿐이었다에서 시작되었다.

서로의 가족을 잃은 뒤에야 그들은 이해의 발판을 마련했다.

 

분노와 복수를 잠재울 방법은

용서다.

그리고 그 용서 이전에 진심으로 하는 사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두 가지가 빠지면 무질서가 된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결국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희생자가 된다.

속죄를 하고, 용서를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우리 모두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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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우주 3부작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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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죽어간다. 이건 사실이다. 나는 그 일에 얽혀 있다. 사람들과 함께 죽어갈 지구의 시민으로서만 얽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일에 적극적으로 얽혀 있다. 일종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우주 한곳에서 깨어난 남자가 있다.

자신과 같이 온 듯한 사람들은 이미 미이라가 되어 있다.

자신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이 왜 우주에 왔는지는 기억해 낸다.

태양이 죽어가고 있다.

덩달아 지구도 죽어가고 있다.

아스트로파지라고 이름 지어진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태양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이 아스트로파지가 유일하게 먹어 치우지 못한 행성이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별은.... 저 별은 우리 태양이 아니다.

나는 다른 태양계에 와 있다.

 

나는 자살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

나는 여기에서 죽는다.

혼자서 죽게 된다.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그에게 지구에서의 기억이 서서히 돌아온다.

단편적으로.

그는 기억에 의지해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다.

아스트로파지에게 정복 당하지 않는 또 다른 태양의 비밀을 알아내서 지구로 전송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가 두고 온 그의 아이들이 살 수 있다.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바로 그의 아이들이다.

 

 

앤디 위어의 글을 처음 읽는다.

우주 3부작인 마션,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헤일메리 중 마션을 영화로만 보았다.

기발한 소재라고 생각하면서 의외로 재밌게 봤던 영화여서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공간도 우주다.

홀로 남은 상황도 같다.

그러나 글을 처음 대하는 나로서는 정말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과학, 물리, 우주에 대해 1도 모르는 나였지만 그리고 꽤 과학적 근거에 의해 쓰여진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유머러스하고, 재밌는 글들 앞에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기회가 없었다!

 

 

인류는 우주에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우리의 이웃을 만났다.

"이런 씨발!"

 

 

그렇다.

그레이스박사는 우주에 홀로 남겨졌지만 그보다 먼저 와 있던 외계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힘을 합쳐 서로의 별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그 노력은 과연 성공할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우주적인 작가를 만났다.

그가 창조해낸 세상이 왠지 실제 하는 거 같다.

게다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한 조각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철벽녀 스트라트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을 능가하는 매력을 뿜어내고

댄 시먼스의 일리움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로키의 등장은 작품에 활기와 함께 희망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거의 끝부분에서 알게 되는 반전 때문에 그레이스 박사가 훨씬 인간적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가 희생해야 해요. 인류가 확실히 구원되도록 내가 온 세상의 죄를 뒤집어써야 한다면, 그게 내가 치러야 할 희생인 셈이죠."

 

세상에 타고난 영웅은 없다.

어쩌다 남들보다 책임을 더하다 보니 영웅이 되는 것이지...

 

 

나머지 책들이 덩달아 읽어 보고 싶다.

웃음과 감동과 함께 과학적 지식을 덤으로 얻게 되는 프로젝트 헤일메리.

읽고 나면 갑자기 지구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는 이야기 프로젝트 헤일메리.

 

 

우리는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주 저 어딘가에는 우리와 비슷한 누군가가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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