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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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도시와 같아서 마음에 덜 드는 부분이 몇 개 있다고 해서 전체를 거부할 순 없다. 위험해 보이는 골목길이나 교외 등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다른 장점이 그 도시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미련스럽다.

 

그때 그랬더라면 지금은 이렇지 않았을 텐데...

그때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거야.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후회를 안고 사는 삶은 만족스럽지 않다.

노라의 선택지는 돌이킬 수 없었고, 많은 관계들을 잘라냈다. 인생에서.

결혼 이틀 전 결혼을 취소했고, 음반회사와 계약을 앞두고 밴드를 탈퇴했다.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고양이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길에서 죽게 만들었다.

게다가 직장에서 해고되고,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 하는 피아노 레슨에서도 짤렸다.

하나뿐인 오빠는 그녀와 단절했고, 친구들과도 모두 사이가 멀어졌다.

 

어디 하나 마음 붙일 곳이 없는 노라는 죽기로 결심한다.

 

갖가지 초록색 책들이 즐비한 도서관에 발을 들인 노라.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자신을 삶을 '맛' 보게 된다.

노라는 그 여정에서 만족할만한 삶을 발견했을까?

 

노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 역시 내가 후회하는 선택들을 생각했다.

그때 그랬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텐데... 하던 후회들.

 

 

"여기 있는 책들,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전부 너의 다른 삶이야. 이 책만 제외하고. 이 도서관은 네 도서관이거든. 널 위해 존재하지. 사람의 삶에는 무수히 많은 결말이 있어. 이 서가에 있는 책들은 모두 네 삶이고, 같은 시간에 시작해. 바로 지금. 4월 28일 화요일 자정에. 하지만 이 자정의 가능성이 모두 똑같지는 않아. 비슷한 삶들도 있지만 아주 다르기도 해."

 

 

후회하는 모든 삶을 나도 살아 볼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삶에서 만족하게 될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내 삶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후회들과 선택들은 결국 지금의 나니까.

지금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바로 내 잘못이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니까.

 

언제든 사람은 그 순간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을 하게 마련이다.

포기하고,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결정들 역시 그 당시에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다.

그걸 시간이 지나서 후회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좋은 작품이다.

내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꿔주었으니.

노라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도 후회되는 삶들을 다시 살아봤다.

지금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가 고치지 못하는 나의 습관들이다.

그것들을 고칠 수 있는 건 바로 나뿐이라는 걸 또다시 각인하게 된 작품이었다.

 

 

지금 당신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나요?

지난 과거에 선택하지 못한 결정들을 후회하고 있나요?

그럼 노라와 함께 그 후회의 책을 펼쳐 보세요.

당신이 후회의 책을 읽게 되면 지금 당신의 모습이 훨씬 괜찮게 느껴질 겁니다.

 

이 책은 삶의 비밀을 알려준다.

내가 깨달은 비밀은 비밀도 아닌 비밀이다.

모든 건 바로 내 마음에 있고,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불만이 쌓인다는 것.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이다.

그러니 삶이 힘들어서 죽음이 생각난다면, 그 죽을힘으로 나를 바꾸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하루에 한 가지

내가 평소에 선택하지 않았던 선택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그렇게 하나씩 나를 바꿔 나가다 보면 나는 지금보다는 좀 더 내가 원하는 나로 살게 될 것이다.

노라가 내게 그걸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고생스러운 여행을 한 거 같다.

 

나의 자정의 도서관에 있는 후회의 책이 얇아지도록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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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와의 정원
오가와 이토 지음, 박우주 옮김 / 달로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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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와 이렇게 연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리라곤 나무늘보 시절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사실을, 나는 지금 내 삶을 통해 실제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동화처럼 생각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토와의 정원은 우리가 아는 모든 장르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동화처럼 시작해서 스릴러처럼 흘러가다 공포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막막함을 던져준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 속의 범죄를 마주할 때의 경악스러움은 웬만한 범죄소설에 버금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무리는 지극히 평온하다.

마치 오만가지 '맛'이 나는 해리 포터의 젤리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눈먼 소녀 토와에겐 엄마가 세상의 전부다.

집 밖에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토와에겐 엄마와 살고 있는 집이 세상의 전부였다.

열 살 생일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기 위해 딱 한 번 외출했을 때가 토와 인생에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다.

 

 

매주 수요일에 '아빠'가 식료품을 집 앞에 두고 간다.

그 아빠는 한 번도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토와는 아빠가 오는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가늠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토와는 소리와 냄새로 세상을 느낀다.

 

 

나는 왜 엄마가 아이를 집안에서만 가둬 키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멋대로 상상해본다.

토와는 분명 혼외자이거나 장애가 있어서 아빠에게 내쳐진 아이라고..

그러나 이 책은 끝까지 다 읽지 않으면 그 진위를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 토와의 정원.

 

 

 

나는 "엄마"를 봉인했다.

 

 

질서가 있었던 집은 어느새 질서 없이 쓰레기가 나도는 집이 되었다.

엄마가 일하러 가는 사이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던 토와는 잠에서 깨었지만 더 이상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미뤄왔다.

방치된 눈먼 아이는 홀로 몇 번의 계절을 견디어 낸다.

토와의 정원에서 나던 나무와 꽃의 향기는 집안팎에 쌓인 쓰레기의 악취로 사라졌다.

그리고 수요일의 아빠도 더 이상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던 토와는 스스로 밖을 향한다.

그것만이 살길이기에...

 

 

 

공포는 자꾸자꾸 뒤따라와 내 피부밑으로 슬며시 잠긴 뒤 팽창해, 나를 뒤에서 그러안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옥죈다.

 

 

아동학대, 방치, 살인 이 모든 이야기가 뉴스처럼 지나가고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토와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세상을 배워간다.

안내견 조이와 함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삶을 다시 시작하는 토와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잔잔한 문체로 이어진다.

 

 

눈이 안 보인다는 상황에 대한 절묘한 표현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토와의 정원.

토와의 새로운 삶이 눈부시게 찬란하게 느껴진다.

 

 

"우리,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아는 사이였네요."

 

 

토와의 안식처 다락방 살창을 열면 어디선가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는 토와에게 위안은 주었다.

그리고 그 피아노의 주인을 만나게 된 날 토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생전 처음으로 초대를 받고, 진심 어린 차 한 잔을 대접받고 태어나서 가장 맛있는 튀김을 먹은 날은 마녀 마리 씨를 만난 날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세상에서

냄새와 소리로 색을 떠올리고 세상을 그리는 토와.

모진 시련 앞에서도 담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토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알 수 없는 경건함을 갖게 된다.

 

 

이토록 꿋꿋하게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한테 이야기는, 생명의 은인이야."

 

 

어릴 때 엄마가 읽어준 책들이 토와의 양식이 되었다.

그것은 엄마의 사랑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토와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나마의 진심이 있었다는 것이 토와를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 위로가 된다.

 

 

토와와 함께 한 시간은 내내 빛 속에 있었다.

눈먼 소녀의 이야기는 어둠이 아니었다.

방치되고 버려진 토와마저도 어둠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가와 이토의 글은 처음이다.

이렇게 차분하게 모든 이야기를 다정히 얘기하는 작가는 처음이다.

살인도, 학대도, 버려지는 상황마저도 읽는 이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 작가의 전작들을 모두 읽어봐야겠다.

따스함의 온기로 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잔잔한 수면에 떠있는 백조의 우아함을 보면서 그 아래에서 발버둥 치는 백조의 발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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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와 별에서 온 말
메리 스튜어트 지음, 정기현 그림, 김영선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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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물론, 아멜리 너는 너 스스로 판단해야겠지.

 

마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거 같은 루도와 별에서 온 말.

이야기 내내 아멜리에게 확인하는 듯한 글투 때문에 누가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루도는 착하고 성실하고 다정한 아이다.

솜씨 좋은 아버지는 목수였다. 루도는 나름 열심히 조각을 해보지만 아버지에게 핀잔만 듣는다.

스스로 솜씨도 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느 겨울밤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데 외양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외양간에 가보니 늙은 말 렌티가 사라지고 없었다.

 

렌티를 찾아 나선 루도는 하늘에게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곳에 렌티가 있을 거라 확신하고 렌티를 찾아 나서지만

눈 구덩이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렌티와 루도의 여행이 시작된다.

 





별자리 12궁.

루도와 렌티가 여행하는 곳은 별자리의 나라다.

12개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동물들을 만나는 루도와 렌티의 모험.

별나라 태생인 렌티의 마지막을 함께 여행하면서 루도는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게 된다.



루도는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물 한 잔을 건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말을 안전하게 데려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니?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단다, 루도.

 

이걸 명심해, 얘야.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어.

가치 있는 일 중에 쉬운 일이란 없어.

 

 

루도와 렌티는 12궁을 여행하면서 많은 고비들을 넘기지만 가장 넘기기 힘든 고비는 마지막 전갈자리에 있었다.

전갈은 곧 죽음을 뜻했다.

루도는 자신과 렌티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을까?

 

메리 스튜어트는 로맨틱 서스펜스와 역사 장르에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어린이 독자를 위해서도 동화를 썼다.

루도와 별에서 온 말 역시 메리 스튜어트가 쓴 동화 중에 하나다.

12궁을 여행하는 소년 루도와 별나라 말 렌티의 모험은 루도가 자신을 시험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계의 순간에 맞설 때마다 루도의 선택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의리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소년의 배려와 용기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져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을 살아간다.

아주 사소한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나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그것이 동물이라도) 선택을 대신해야 한다면

어디에 무게를 두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천칭자리에서 루도의 무게를 달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내가 천징의 무게 추에 올라가게 된다면 나와 평행을 이룰 천상의 물건은 어떤 것일까?

 

동화를 읽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포근해진다.

루도와 렌티와 함께 12궁의 별자리를 여행한 기분이 묘하다.

더불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착하게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은 기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하다의 개념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손해 보는 것으로 느껴질 때마다 루도를 떠올려야겠다.

착함의 대가로 받은 손해는 나에게 가장 귀중한 '무엇'으로 되돌아 올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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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제정신입니다 - 마메의 정신없는 날들
마메 지음, 권남희 옮김 / 사계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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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고 하면 왠지 멋진 그림체가 생각나는데 마메씨의 그림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

단순하고 담백한 그림에 최소한의 배경만 가진 이 만화는 생활 밀착형이라서 꽤 많은 공감을 갖게 만든다.

읽다 보면 마메씨 얘기인지 내 얘기인지, 일본 사람 얘기인지 우리 얘기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많은 에피소드에서 나에게도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 속이 뜨끔뜨끔하다.

완죤~ 내 얘기네~





딸과 아들을 키우는 싱글 맘

BTS에 입문해 SNS를 시작하고

그래서 만화가까지 된 마메 아줌마의 일상이 그려진 만화를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국제적으로 그런 거라는 묘한 위안을 받는다.

 

 

꽃집, 도시락 공장, 도시락 배달 등 여러 가지 일을 파트타임으로 뛰며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는 마메씨의 일상은

성별을 알기 힘든 그림체가 주는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서 에피소드가 더 돋보이는 효과를 주는 아직 제정신입니다.

 

내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무수한 건망증과 그로 인해 저절로 생기는 웃픈 상황들이 마메씨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니

그래서인지 묘한 동질감이 더해져서 살맛이 난다.

제목처럼 아직 제정신이라는 걸 확인하는 거 같아서.

 

40대. 세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이 단어들이 주는 막연한 걱정들은 만화를 보고 있으면 사라져 버린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깨알 같은 상황들을 단순한 그림으로 재현해낸 마메의 그림일기.

 

뭔가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고

내가 참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은 괜찮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다들 그러고 사니까.

 

나도 BTS 때문에 밤을 새우고

그들의 공연 동영상을 보다 보면 현실의 걱정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 좋은 에너지를 사장 시키지 않고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 보낸 마메씨.

좋은 영향력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마메씨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내 일상이 별 볼일 없어 보이고

정신머리 없음에 자괴감이 들 때

마메씨를 만나면 다들 그러고 사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사라집니다.

ㅋㅋㅋ 키득거리게 되면 내 삶도 좋아 보입니다.

덤으로 내 일상에서도 뭔가 길어 올릴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생깁니다.

마메씨처럼 잘 엮어 보세요.

혹시 아나요?

당신도 당신의 이야기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지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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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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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모인 티셔츠 얘기로 책까지 내고 대단하다. 흔히 '계속하는 게 힘'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군. 뭔가 나 자신이 계속성에만 의지하여 사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누구에게나 딱히 모으려고 한 게 아니데 모아지는 물건들이 있다.

내가 산 것도 있고, 누군가가 선물한 것도 있고, 기념품으로 받은 것도 있고.

하루키에겐 티셔츠가 그런 물건이다.

모으려고 한 게 아닌데 모아진 것.




다양한 티셔츠의 사진과 함께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하루키의 티셔츠 에세이.

 

마라톤에 참여해서 받은 티셔츠

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산 티셔츠

여행지에서 눈에 띄어서 산 티셔츠

자신의 책 홍보로 찍은 티셔츠

여행지마다 찾아가는 서점, 레코드 가게에서 사거나 받은 티셔츠

어떤 것은 늘 애용하고, 어떤 것은 고이 접어 보관용으로 둔다.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전반에 걸쳐 살다 간 소설가 한 명이 일상에서 이런 간편한 옷을 입고 속 편하게 생활했구나 하는 것을 알리는, 후세를 위한 풍속 자료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입는 티셔츠 보다 보관하고 있는 티셔츠가 더 많은 거 같은 하루키 컬렉션(?)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루키는 LP도 상당량 수집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책, 레코드, 티셔츠 중에 어떤 걸 제일 많이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책은 내가 몰랐던 하루키의 모습을 알 수 있어서 좋다.

나는 하루키의 열성팬은 아니다.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설레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루키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름있는 작가 정도로만 담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달리기를 좋아하고(매년 마라톤 대회를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철인 3종 경기도 해봤고

서점이나 레코드 가게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디를 가나 희귀 음반을 구하기 위해 오래된 레코드점을 뒤지고, 서점엔 꼭 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그의 작품 속에 그의 일상들이 녹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금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들여다보고 말 물건들이지만

왠지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에게 하루키처럼 어떤 서사도 부여하지 못할 거 같다.

그 물건들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지, 어떤 이유로 지니고 있는지 하루키처럼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에.

 

뒤쪽에 하루키의 인터뷰가 담긴 부록이 있다.

책에서 못다 한 티셔츠들의 사진도 담겨 있다.

피곤한 날은 짐빔 하이볼을 마신다니 왠지 해리 홀레가 생각난다.

 

하루키가 가장 애정 하는 티셔츠는 1달러에 샀지만 가장 가성비 좋은 투자였다.

그 티셔츠에 영감을 받아 소설도 쓰고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이 일화를 읽으니 소설가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영감은 바로 호기심인 거 같다.

 

작정을 하고 글은 이렇게 쓰는 거라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그저 짤막하게 신변잡기의 글을 소재와 함께 적어 둔 이 책이 바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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