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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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통역은 '들리지 않는 사람'만을 위함이 아닌 '들리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들리는 사람'중에는 이런 의식이 없는 사람이 이따금 있다.

 

 

책을 읽는 동안 6년의 시간이 흐른다.

아라이는 미유키와 결혼하고 딸 히토미를 낳는다.

그리고 히토미는 아라이가 우려했었던 상황이 된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 히토미.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사건에 치중하지 않고 별개의 이야기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어진다.

이야기들 사이로 시간이 흐르고 인물들은 나이 들어가고, 그들의 상황은 바뀌어 간다.

 

 

아라이의 조카 스카사의 방황,

미와의 사춘기.

히토미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

이런 개인사들 사이사이 통역 의뢰를 맡게 되면서 부딪히는 현실의 벽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농인 부부의 산부인과 방문기에서 아라이는 여성 통역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땅찮아 하는 부부의 심정을 이해하고 병원 수속만 도와주지만 그들이 의사와 필담으로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긴급상황이 발생하고 아라이가 그들에게 달려가지만...

 

 

병에 대해서는 의사와 환자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데 의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환자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를 확인하지 않는다.

쫓기는 시간에 많은 환자를 만나야 하는 의사의 고충도 있겠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촉'을 동원해 의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게다가 힘든 병일 때에는 의료용어나 그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통역이 필요하지만 의료지식을 가진 통역인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다.

 

 

들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 수화 통역은 그래서 청인들이 많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평생 소리라는 개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아는 사람들이 하는 설명은 도대체 얼마나 와닿을까?

게다가 수화는 하나의 사인이다.

모든 말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짧은 에피소드에 담긴 답답한 현실이 마음을 짓누르는 기분이다.

 

 





장애인 고용 부문으로 회사에 입사한 야요이.

처음 입사시엔 수화 통역사를 붙여주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갈수록 그녀의 주위는 냉랭해지고, 승진에서도 누락되고, 사람들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야요이는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약자를 위한 지원'이 아니다.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바라고 있다.

 

 

회사에서 제공한 통역사는 같은 회사원으로 수화 모임에서 수화를 배운 경험이 있는 사람이지만

야요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화를 한다.

각종 회의나 전달사항들도 야요이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녀가 발성도 하고 입모양을 읽는다는 걸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신경함을 덮는다.

소외되고, 방치된 야요이의 외침이 가슴에 점점이 남는다...

 

 

저는 있는 힘껏 들리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민폐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입 모양을 읽어 내려고,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어 전하도록. 저는 그렇게 해서 열심히 함께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사람들은, 당신들은 조금도 옆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다수의 의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소수의 의견은 묻히기 쉽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HAL의 이야기는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포장하고, 광고하고, 이용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았던 HAL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를 읽는 동안 아주 조금 들리 않는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은 거의 모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가 좋은 이유는 나의 무신경을 건드려주었기 때문이다.

사회, 의료, 법 모든 분야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장애는 타고나는 것보다는 후천적으로 얻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각종 사건 사고는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요인이다.

그들이 함께 같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추구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복지는 나라에서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이 시리즈가 계속해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시리즈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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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귀를 너에게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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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단다. 용에게는 뿔은 있지만 귀는 없지. 용은 뿔로 소리를 감지하니까 귀가 필요 없어서 퇴화해 버렸어. 쓰지 않는 귀는 결국 바다에 떨어져 해마가 되었단다. 그래서 용에게는 귀가 없어. 농이라는 글자는 그래서 '용의 귀'라고 쓰지.

 

 

聾 = 龍 + 耳 즉 용의 귀는 '농(聾)'이라는 뜻이다.

미와와 미와의 학교 친구 에이치에게 마스오카 노인이 농자를 설명하는 장면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라이는 통역일을 시작한지 2년째되었고, 그 사이 미유키와 살림을 합쳐서 아라이, 미유키, 미와는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간간이 들어오는 통역일로 살림은 아라이가 맡고 미유키는 교통과에서 형사과로 가기를 희망한다.

미와는 아라이에게 말을 하지 않는 학교 친구 에이치에게 수화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고, 아라이는 이를 받아들여 에이치에게 수화를 가르친다.

'함묵증' 들리지만 소리를 내지 못하는 병을 가진 에이치는 집중력과 기억력이 좋아 수화를 빠르게 배워간다.

그러던 중 맞은편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한 이야기를 수화로 전한다.

 

한편 2년 전 문제가 되었던 '해마의 집' 폐쇄가 결정되고, 방송과 학회에서는 '정육학'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방침을 장려하는 분위기다.

부모 양쪽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정상적인 가족만이 제대로된 육아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교육학이다.

아라이는 농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신카이를 위해 통역을 하게 되는데 중도실청자인 신카이의 생각을 마주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용의 귀를 너에게.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농인을 비롯 발달장애를 가진 에이치를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병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취조시 수화 통역의 준비도 마찬가지다. 어느 지자체든 청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사고나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피해자. 가해자를 따지지 않고 수화 통역사 파견을 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고 하지만, 수사관이 알지 못하거나 혹은 필담으로 충분하고 보청기를 하면 들릴 것이라는 '현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취조시에 통역을 맡으면서 아라이는 부당함을 몸소 체험했기에 그가 겪는 마음의 고통은 읽는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야기 속의 상황인데도 답답하고, 화가나는 상황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무지함으로 그들을 대하는지 나 스스로를 반성해보는 시간이었다.

 

음성일본어의 발성을 강요받는 일, 그건 저에게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굴욕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그것은 저에게 '언어'가 아닙니다. 제가 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알 수 없으니까. 그것은 제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소리 자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발성을 하도록 강요 하는 것은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일까?

 

수화 통역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통역사일까?

수화 통역사 대부분이 청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수화 통역사의 수화를 대부분의 농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 이야기를 읽으면 무수한 물음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전혀 상관없을 거 같은 살인사건은 에이치 주변과 연결되어 있고, 정육학의 본질을 파헤치게 되는 사건은 '교육'이라는 것에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 이야기에 쓰인 에피소드에는 이길보라작가의 에피소드도 담겼는데 이길보라 감독의 독립영화를 보고 작가 마루야마 마사키가 직접 찾아와 이길보라 감독을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아라이의 이야기를 통해 담아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하게 감정선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여러번 했는데

작가의 환경과 작가의 노력이 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읽었다.

감정적이지 않게 양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아라이의 생각이나 입장을 통해서 현실의 모순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필력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어느 한쪽의 이야기로 치우쳤더라면 이렇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을 거 같다.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작품은 아주 많다.

하지만 계속 생각하게 하고, 계속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데프 보이스 시리즈,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는 읽는 이에게 적절하게 스며와 적절하게 적셔준다.

 

그 적절함의 수위를 잘 조절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은 작품들이 나와주길 바란다.

에이치를 통해서 에이치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을 수 있게 이해하고 도와준 미와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를 깊이 이해하고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걸 감내하는 엄마의 마음.

에이치의 상황을 알고 사랑과 이해로 에이치를 지도했던 선생님과 대조적으로 에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눈총을 주었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교육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서 들리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의료계나 범죄를 다루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들리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이제부터라도 배워간다면 앞으로 생길 상처들이 전보다는 많이 줄어들테니..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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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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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 이런 환경 안에서 자라 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자신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으로, '들리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들리는 세상'과 '들리지 않는 세상' 두 세계에 한 발씩 걸쳐 있는 코다.

아라이는 코다다.

가족 모두가 농인이고, 자신만 청인이다.

 

경찰 사무직을 그만두고 야간 경비직을 하다가 자신만이 가진 '기술'인 수화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 책을 읽으며 수화통역을 하는 사람들이 청인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문화권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그저 언어 자체만 번역하는 번역가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천적 농인은 '소리' 자체를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통역해 주는 청인들의 이야기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라이는 그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청인 세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족과는 소원해진 아라이지만 수화 통역을 하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과의 기억이 새록새록해진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 세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들리는' 자신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도 '들리지 않는' 부모님과 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추리소설의 긴박감과 몰랐던 세계에 대한 탐구와 17년의 세월이 흘러 돌아온 과거의 찜찜함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건.

담백하면서도 복잡한 두 세계의 교집합.

그 안에서 고민하고, 외로워하고,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사람들이 보인다.

일본과 우리나라가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보니 그들을 지칭하는 말부터 수정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7년 전 자신이 수화 통역을 했던 피의자 몬나 데쓰로.

경찰이 마음대로 꾸민 조서를 몬나에게 설명해 주고 이해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부당해 보이는 그 조서와 체념해 버린듯한 몬나의 모습을 보고도 윗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아라이는 그날의 일을 두고두고 마음에 짐으로 삼고 있었다.

 

17년 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노미 가즈히코의 용의자로 경찰이 몬나를 찾고 있는 걸 알게 된 아라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펠로십'의 기숙사에 몬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17년 전 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지만 지금은 원래부터 한 명인 것처럼 가족 구성원이 3명뿐이다.

호적에도 둘째 딸은 올라있지 않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

 

17년 전 아라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던 그 소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무도 몬나의 둘째 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 없었던 아이처럼.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살인사건의 중심에 있는 <해마의 집>에서 벌어지는 농인 학대에 대한 것도 다루지 않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와 소리로 이루어진 세계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다룬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무례한 일들을 다룬다.

농인 사이에서도 선천적 농인과 후천적 농인들의 간극을 다룬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을 다룬다.

다른 삶을 살아도 버릴 수 없는 가족애를 다룬다.

 

추리소설에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들이 이 이야기에서는 뒤로 물러나 있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해결법이 있다.

장애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운 자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지만

그들에겐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두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비극이 아닌 행복한 결말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느낌인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예리하지만 부드럽게 두 세계의 접점을 말해주는 작가의 필력이 매력적이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야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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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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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의 책태기를 한 방에 끝내버린 책.

 

4825일 전에 내 딸 레나가 실종되었다. 햇수로 벌써 14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14년 동안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도록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세무사 마티아스는 14년 전에 딸 레나를 잃어버렸다.

경찰 친구가 호언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나는 14년 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언론은 레나를 파티 걸로 치부하고 갈수록 선정적인 기사로 레나의 모든 것을 까발렸다. 마티아스는 항의하고, 호소도 해봤지만 언론의 관심에서 레나가 멀어질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4년 후 레나와 비슷한 여자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는다.

마티아스는 병원을 찾아갔지만 그 여자는 레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딸 한나라는 아이는 마티아스의 딸 레나와 똑같이 닮았다.

마티아스는 레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가 나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그래야만 그 일을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납치범에게 납치되어 졸지에 아내와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을 떠맡아야 했던 야스민.

야스민은 자신이 아닌 레나가 되어야 했다.

그 숲속 오두막에서.

창문 하나 없고, 문이란 문은 모두 잠겨 있는 그곳.

공기순환기가 없으면 숨도 쉴 수 없는 그곳에서 야스민은 레나가 되어 똑똑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한나와 그녀의 남동생 요나단의 엄마가 되어야 했다.

아이들은 야스민을 엄마라 부르며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폭행과 강간으로 그녀의 의지를 꺾어 놓은 납치범은 그녀에게 세 번째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완벽한 가족이 될 거라고.





레나, 당신과 나는 같은 배를 탄 거야. 나를 마음 깊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밖에 없어.

 

 

마티아스, 야스민, 한나의 시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이렇게 흡인력 있는 스릴러는 오랜만이다.

독일 스릴러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감정 밑바닥까지를 아주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이는 납치와 감금, 폭행과 강간, 그리고 세뇌에 노출된 인간이 그곳을 탈출해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한 트라우마에 대해서 야스민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과사전을 통해 세상을 배운 한나는 모든 것을 백과사전 속 설명으로 이해한다.

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마티아스는 오로지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행동한다.

그 모든 것이 전부 절박하게 다가와서 읽는 내내 심장을 조여 온다.

 

두께를 자랑하는 책도 아니고

요란한 광고도 없는 책이지만 왠지 끌려서 읽었는데 간만에 몰입해서 읽은 작품이다.

 

당신은 우리를 가둘 수 없다. 소유할 수 없다.

이 오두막은 당신의 감옥이다. 결코 우리의 감옥이 아니다.

 

 

한치의 예상도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다.

범인이 밝혀지기까지 범인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게 이 이야기의 묘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고통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납치당해 자신의 자유와 의지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의 고통

야스민의 전 생애는 고작 4개월의 감금으로 인해 전부 사라졌다.

끝없이 들려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야스민을 지배하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이제 빛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 레나. 그녀만이 야스민의 고통을 알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통을 이용하려는 언론이 있을 뿐이다.

 

이런 유의 이야기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건 범인이 아니라 바로 언론이다.

카더라 통신이 내뿜는 기사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더하고, 사람들에게 잘못된 이야기를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 속을 다 알 수 없듯

부모 역시 자식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수 없다.

이야기 한 편에서 우리가 가진 온갖 문제점을 발견한다.

 

마티아스도, 야스민도, 범인도, 레나도 모두 잘못이 있었다.

그 잘못으로 인한 희생양은 누구일까?

 

마지막까지도 범인을 알지 못해서 애태웠고

멀쩡한 사람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것에 경각심이 일었고

정의란 어디까지로 선을 그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끝머리 레나의 이야기가 마지막 뒤통수를 친다.

 

 

내 아이들이 언젠가 내 눈을 통해, 내 설명을 통해 접한 것들을 실제로 대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리란 걸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 아이들이 오두막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리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 희망이다. 내 희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내가 가진 힘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한 여성의 위대함도 동시에 '맛' 볼 수 있는 올여름 가장 훌륭한 스릴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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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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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기기에 몰두한 모두가 오직 네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다. 고삐 풀린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라지만 네트 밖에서는 그조차 고요했다. 네트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세상.

마지막 일주일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최상의 것을 선사하기로 한 나.

그 곁은 지키는 안드로이드 조이.

 

1세대 안드로이드 조이.

무수한 삭제의 기억 그 어디쯤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라는 걸 생성해 주는 밑거름이 되었을까?

자신이 보호했던 인간의 죽음을 지켜야 하는 안드로이의 마음에 어떤 것이 깃들여졌을까?

안드로이드를 기계로만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올 테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계 어딘가에도 인간은 자신을 증명할 무언가를 남길 테니.

 

많은 것들이 유의미하게 변할 때, 또 어떤 것들은 고집스럽게 살아남는 법이다.

 

 

화성으로 이주했음에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비싼 통신료를 지불해가며 디지털 제사를 지내는 심정들은 무엇일까.

4분 30초의 시간 간격 사이로 서로의 등과 엉덩이만을 보여주며 절을 주고받는 지구인과 화성인.

 

전화기에 대고 조상 귀신에게 절하는 상황에 어이가 어디 있다는 건지 말 좀 해주세요, 기자님.

게다가, 이 멀리까지 찾아오는 집념 어린 귀신이라니 정말 무섭다고요.

 

 

여기와서 제일 황당할 때가, '우린 화성인이라 그런 거 안 따져'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한국인인데 이건 챙겨야지'할 때예요.

 

 

 

단어가 내려온다. 이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화성에 산다.

그러니 화성인이다.

화성인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고수해야 하는 화성인.

제사와 육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자들.

경력단절과 독박 육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안타까워하지 않는 그녀들의 시간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미주는 화성에서 지구로 이직을 준비한다.

하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서류를 접수 시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녀는 지구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

 

지구와 똑같은 쌍둥이 행성이 있다면?

그 행성으로 행성 사파리를 떠날 수 있다면?

지구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행성으로 사파리 여행을 하는 기분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인간의 조상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나기 이전의 호모 속들이 즐긴 고유의 습성은?

호모 리터스들의 서핑을 구경하는 인간 중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는 행성사파리.

하지만 미아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행성사파리가 더 특별해진다.

 

 

"생물의 진화가 완벽하게 무계획적인 것처럼, 행성의 일생 역시 아무리 주어진 조건이 기적처럼 동일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역시 지구의 과거가 아니죠."

 

 

단어가 내려온다.

제목을 듣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떨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SF를 빙자한 현실의 이야기들 속에 언제일지 모를 미래가 스며있다.

 

이 책을 읽어 가면서 화성인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행성사파리가 언젠가는 가능해질 거 같고

안드로이드가 더 이상 기계처럼 느껴지지 않고

내게도 어느 날 나만의 단어가 내려올 거 같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SF 단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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