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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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이 참 멋있는 책이다. 제목이 멋있다는 건 여러모로 보나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을 본 사람들도 우와 제목 좋네 하면서 한 번씩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책이 제목만 좋아서는 안 된다. 루이스 세폴베다라는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란 꽤 많이 들어본 작품이 이 작가의 책인 줄도 몰랐다. 역시 그 책도 제목이 좋다.
영화 타락천사를 보면 킬러의 얘기가 나온다. 여명이 킬러로 등장하는데 꽤 감상적인 녀석이다. 그리고 킬러들의 수다라는 영화도 기억이 난다. 그 영화의 킬러들은 꽤 귀여워서 한 번쯤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참 즐겁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킬러는 만나도 재미는 없을 것 같다. 누아르 영화 같은 두 편의 중편 정도로 생각된다. 빨리 읽히고 영화같다. 모두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제목이 내용보다 더 멋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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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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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인간은 어쩌고... 아우슈비츠가 유태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곳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여파를 미쳤는지 알 수 없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영화는 부성애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지금 기억나는 건 단지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동.

'쥐'는 아우슈비츠가 주요 테마다. 아니 아우슈비츠와 인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 인간의 잔인성, 말로는 많이 듣게 된다. 인간에게는 폭력적 본성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 뭐, 이런 식의 말들... 그러나 '쥐'는 그 폭력 앞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아티의 아버지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이유없는 폭력(그의 인종은 타당한 논리적 이유가 아니다)의 희생자이며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한없는 거리감이 이 만화이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속수무책의 상황 앞에서 얼마나 한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그리고 그 몸부림은 한계상황 이후 그것의 극복 이후에도 자신의 몸에 각인되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가스실이라던가, 그 안에서의 몇몇 상세한 묘사들은 아티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결국 아티까지도 그 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간의 무서움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인간이 선하다고만 속고 살 수는 없다는 것. 사실 그렇게 순진하게 살기엔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하고 두려운 동물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와 같은 역사를 마지막까지 덮어보려 포로들을 죽이는 독일군들의 모습 또한 대단히 인상깊었다.

만화라는 것은 확실히 이 작품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매우 어둡고 암울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을 매체가 어느정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처음에 책을 펼쳐보면 우와 너무 글씨가 빽빽하네 싶지만 매우 쉬운 대화체이므로 읽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거친 그림체에 적응하지 못해 그림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는 것. 아트 슈피겔만이란 작가의 특성을 조금 먼저 알고 읽었더라면 훨씬 더 만화의 특성을 살려 이 책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당신은 그림도 꼭 눈여겨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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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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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것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내부에 은폐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알 수도 있으며 모를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룰이 있으며 그 룰을 정확히 설명해낼 수는 없어도 인간은 그 룰을 따르며 살아간다. 주인공 조나단은 룰이 확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타인에게도 타인 기준의 각자의 룰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누구나 각자 나름대로 창피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다르고 이루고자 하는 게 다르다는 사실을 조나단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나단은 혼자가 편하다. 물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룰에 충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그 룰을 어겨야 할 수도 있으며 충돌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조나단은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인물이다.

사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조나단과 같이 자신의 룰을 지키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룰이 침해받았을 때 안절부절 못하고 어긋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또한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 화를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꼭 자폐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거지에게는 거지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룰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방침들이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눈치를 채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이 수없는 많은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니, 이 얼마나 진귀한 일인가. 가끔 그들의 방식에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싶지 않은가. 내게 비둘기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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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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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었던 것 같다. <깊이에의 강요>는 확실히 읽었고 다른 단편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은 아무래도 이 책을 이전에 읽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모르고 다시 읽었다. 마치 쥐스킨트의 마지막 글, <문학적 건망증>처럼. 내 자신이 재밌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이전에 <향수>를 읽고 받았던 감동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나도 많이 무뎌졌내 싶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처럼 점차로 자신의 삶에 황폐해지고 또한 그 황폐함을 깨닫는 순간조차 그 사실을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가속화가 되가는 상태라고 할까. 쥐스킨트의 글에는 공감의 여지가 많다. 누구나 한번쯤 고민할 수 있는 문제를 쉽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지루하지 않다. 다른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우선 재미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가 많은 것 같다. 어렵지 않지만 가볍지 않다는 것 때문에.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예전에 받았던 충격을 한 번 생각해본다. 물론 그래봤자 그때만큼 뚜렷한 감각은 살아나지 않는다. 그저 현재 나 자신도 강요받고 그 강요에 얽매이고 있다는 사실과 어울러,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는 결코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이 생각이 난다. 참 여러모로 재밌고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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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무늬 민음의 시 88
이상희 지음 / 민음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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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몹시 얇고 시들도 모두 짧은 편이라 정말정말 빨리 읽었다. 단상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 시집 안에 시들은 단상들이구나 하는. 그런데 아파하는 사람의 단상이란 어디에도 자신의 그 아픔을 놓지 못하고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나 보다. 해설의 김혜순 시인의 말이 이 시집에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너는 언제까지 가늘게 앓기만 할꺼니?' 가늘게 앓는 소리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악몽을 꾸고 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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