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름들 - 세계현대작가선 11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문학세계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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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나의 중학교 친구들은 나를 지금의 친구들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도 그게 나의 이름이고 자연스러운 나이다 그러나 중3 이름을 바꾸고 만난 사람들에게 이전의 나의 이름을 얘기해주면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색하다고 말할 뿐이다

게다가 나의 주민등록번호와 나의 진짜 생일 사이에는 2달 정도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1년이란 숫자상의 시간이 바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81년 생인가 82년 생인가 곤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이렇게 보면 아무래도 문서상의 내 존재란 너무나도 불확실하다 진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니 그런 생각이 다시 들었다 한 등기소 직원이 전혀 알 수 없는 타인 여자를 찾아나서는 과정 처음에는 영화 아멜리에처럼 즐겁던 과정이 점차로 집요해지며 주제씨는 평소의 자신의 평범한 생활양상을 벗어나게 된다 등기소라는 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보관된 곳, 그러나 그들의 존재의 어떠한 양태도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이물감을 이 소설은 맛보게 해준다

또한 죽음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테마로 제시되는데, 자신이 쫓던 여자의 죽음을 접하고 공동묘지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자살한 자들의 공동묘지 번호판을 바꿔놓는 양치기를 통해 (이것은 환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주제씨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장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에 평생 동안 따라붙는 한 개인의 이름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가진 듯 하면서도 사실 그들 사이의 진실에는 엄청난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오묘한 맛을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런 친척도 가족도 없는 주제씨처럼 많은 이들이 자신이 외로운줄도 모르고 외롭게 타인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진다 자신의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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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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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멋있는 책이다. 제목이 멋있다는 건 여러모로 보나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을 본 사람들도 우와 제목 좋네 하면서 한 번씩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책이 제목만 좋아서는 안 된다. 루이스 세폴베다라는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란 꽤 많이 들어본 작품이 이 작가의 책인 줄도 몰랐다. 역시 그 책도 제목이 좋다.
영화 타락천사를 보면 킬러의 얘기가 나온다. 여명이 킬러로 등장하는데 꽤 감상적인 녀석이다. 그리고 킬러들의 수다라는 영화도 기억이 난다. 그 영화의 킬러들은 꽤 귀여워서 한 번쯤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참 즐겁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킬러는 만나도 재미는 없을 것 같다. 누아르 영화 같은 두 편의 중편 정도로 생각된다. 빨리 읽히고 영화같다. 모두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제목이 내용보다 더 멋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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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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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인간은 어쩌고... 아우슈비츠가 유태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곳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여파를 미쳤는지 알 수 없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영화는 부성애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지금 기억나는 건 단지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동.

'쥐'는 아우슈비츠가 주요 테마다. 아니 아우슈비츠와 인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 인간의 잔인성, 말로는 많이 듣게 된다. 인간에게는 폭력적 본성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 뭐, 이런 식의 말들... 그러나 '쥐'는 그 폭력 앞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아티의 아버지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이유없는 폭력(그의 인종은 타당한 논리적 이유가 아니다)의 희생자이며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한없는 거리감이 이 만화이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속수무책의 상황 앞에서 얼마나 한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그리고 그 몸부림은 한계상황 이후 그것의 극복 이후에도 자신의 몸에 각인되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가스실이라던가, 그 안에서의 몇몇 상세한 묘사들은 아티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결국 아티까지도 그 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간의 무서움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인간이 선하다고만 속고 살 수는 없다는 것. 사실 그렇게 순진하게 살기엔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하고 두려운 동물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와 같은 역사를 마지막까지 덮어보려 포로들을 죽이는 독일군들의 모습 또한 대단히 인상깊었다.

만화라는 것은 확실히 이 작품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매우 어둡고 암울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을 매체가 어느정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처음에 책을 펼쳐보면 우와 너무 글씨가 빽빽하네 싶지만 매우 쉬운 대화체이므로 읽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거친 그림체에 적응하지 못해 그림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는 것. 아트 슈피겔만이란 작가의 특성을 조금 먼저 알고 읽었더라면 훨씬 더 만화의 특성을 살려 이 책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당신은 그림도 꼭 눈여겨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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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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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것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내부에 은폐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알 수도 있으며 모를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룰이 있으며 그 룰을 정확히 설명해낼 수는 없어도 인간은 그 룰을 따르며 살아간다. 주인공 조나단은 룰이 확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타인에게도 타인 기준의 각자의 룰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누구나 각자 나름대로 창피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다르고 이루고자 하는 게 다르다는 사실을 조나단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나단은 혼자가 편하다. 물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룰에 충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그 룰을 어겨야 할 수도 있으며 충돌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조나단은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인물이다.

사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조나단과 같이 자신의 룰을 지키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룰이 침해받았을 때 안절부절 못하고 어긋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또한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 화를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꼭 자폐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거지에게는 거지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룰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방침들이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눈치를 채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이 수없는 많은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니, 이 얼마나 진귀한 일인가. 가끔 그들의 방식에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싶지 않은가. 내게 비둘기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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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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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었던 것 같다. <깊이에의 강요>는 확실히 읽었고 다른 단편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은 아무래도 이 책을 이전에 읽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모르고 다시 읽었다. 마치 쥐스킨트의 마지막 글, <문학적 건망증>처럼. 내 자신이 재밌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이전에 <향수>를 읽고 받았던 감동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나도 많이 무뎌졌내 싶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처럼 점차로 자신의 삶에 황폐해지고 또한 그 황폐함을 깨닫는 순간조차 그 사실을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가속화가 되가는 상태라고 할까. 쥐스킨트의 글에는 공감의 여지가 많다. 누구나 한번쯤 고민할 수 있는 문제를 쉽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지루하지 않다. 다른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우선 재미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가 많은 것 같다. 어렵지 않지만 가볍지 않다는 것 때문에.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예전에 받았던 충격을 한 번 생각해본다. 물론 그래봤자 그때만큼 뚜렷한 감각은 살아나지 않는다. 그저 현재 나 자신도 강요받고 그 강요에 얽매이고 있다는 사실과 어울러,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는 결코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이 생각이 난다. 참 여러모로 재밌고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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