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일기 세계사 시인선 50
유하 지음 / 세계사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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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는 시란 무엇인가, 란 물음을 자주 갖는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이 하나로 존재한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질문하게 되고, 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함에 절망하는 것도 태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를 생각해볼 뿐이다. 유하의 시는 나의 이러한 태도에 힌트 혹은 실마리가 되어준다. 시는 신성한 것이다, 라고 나에게 다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내게 틀을 제공했는데, 이 틀은 어디까지나 수정 가능한 것이었다. 신성하다는 것은 결국 자기 나름의 기준에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하의 시에서 보여지는 문화와 시의 공존 가능성이 시의 신성함을 해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렇지는 않다. 결국 시라는 것 역시 일종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둔 공간이라 할 때, 유하는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인이다.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 속에서 시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유하는 『무림일기』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해답을 시의 양태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유하에게 시는 비판의 장소이기도 하다. 자신조차 쉽게 흡수하고 있는 문화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의미를 유하는 시에서 밝혀내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시집 중 무림일기와 영화 사회학이라는 제목 하에 쓰여진 시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무협지를 통해 유하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잘못된 문화를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칼날이 꼭 바깥으로만 드리워지는 것은 아니다. 유하는 이와 같은 비판을 서슴없이 시를 쓰는 자신에게까지 적용한다.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세상아, 놀자」, 「돌아온 외팔이」와 같은 시들에서 보여지는 자신의 시쓰기에 대한 질문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지적이 외부 세계로만 뻗어나가는 것은 아님을 알게 한다.

그러나 나는 시가 인생의 잠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잠언의 형태를 띠지 않은 잠언으로 시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유하의 시는 하나의 실마리는 될 수 있을망정, 거기에서 머물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시는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 키위 울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나는 그 문 앞에도 당도하지 못했기에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일종의 무책임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의 가능성의 모색이 한편으로는 방법론에 좌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여러 편의 시에서 드러나는 그의 비판적 문화 읽기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재밌는 중얼거림으로 그치고 만다. 중도를 지키는 어려움에 대한 철학자의 말은 시에도 적용되는 진리라는 것을 유하의 시는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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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수상록 범우문고 52
몽테뉴 지음, 손석린 옮김 / 범우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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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꿈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 부터 자주 이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이런 식으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며 다시 이 말을 떠올리게 됐다. 몽테뉴는 확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며, 이전에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지만 그의 그러한 글들이 그의 신념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몽테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이 가끔은 너무 확고해 거부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되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있어 솔직함으로 해서 면죄부를 받는다. 즉, 자신에 대해 솔직할 것을 그는 신념으로 삼는다.

또한 자신을 측정해보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의 약함을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세계에도 지배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인간들은 약자보다는 강자가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하려 한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이와 같은 내면의 진실을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

공자는 70이 되면 마음의 뜻에 따라도 거스르는 바가 없다고 했는데,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며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물론 공자의 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몽테뉴는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몽테뉴 스스로도 이 수상록이 자기모순의 결함을 안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은 잡다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건들과 미확정의 상상들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반되는 상상의 기록부이다’)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이 중 많은 말들에 귀 기울이게 되고 책을 읽는 중간중간 연필로 줄을 긋게 되기도 했다.

그의 글은 마치 산책을 하는 자의 느린 보폭 같다. 천천히 자신을 돌보기 위한 명상에 잠기는 자의 발걸음 같은 맛이 있다. 여유로운 정신은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 물론 여유로운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나름의 상황이 주어져야 하겠지만, 그의 수상록을 통해 여유롭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여유로운 정신을 갖고 싶어지게 한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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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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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성복 시집을 펴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가 아름다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그의 언어에 있다. 그의 언어를 따르는 상상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혀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언어들이 그의 시를 따르다 보면 긴밀한 심리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과 그의 기억 속에 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자연적인 것들의 대응은 그의 시에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속도를 따르다 보면 모순된 인간 조건 속에서의 아픔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집 뒷면에 적힌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시적 화두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아픔은 일상 속에서 무뎌지고 시인은 그 무뎌짐 속에 존재하는 망각의 징조를 통해 오히려 일상성을 뭉갠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여러 공간 속의 일상이 과격한 어조로 그려진다. 그와 같은 견디지 못할 일상 속에서 시인 자신조차 망각의 한 지점에 서있다는 것이 또한 그를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살아있음은 재생임과 동시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아픔이 된다(' 그해 가늘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이와 같은 자기 부정과 긍정 사이에 이성복의 시는 힘겹게 버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이성복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그의 가족 이야기이다. 여러 편의 시에서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주요 화두가 된다.('금촌 가는 길', '꽃 피는 아버지', '어떤 싸움의 기록', '家族風景' 등)

특히 '아버지'는 그의 시에서 쓰러지는 존재, 가장이지만 유약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인물이다.('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그밖에도 엄마나 누이, 형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 가족구조는 어딘가 어긋나있고 비틀려있으며 시인은 그와 같은 부패된 가족구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성복 시는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여기 있으면서 거기 안 가기'라는 그의 시 구절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와 같은 상상력의 발걸음인 동시에 부정의 발걸음이다.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를 꿈꾸는 것과 동시에 그는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가기를 꿈꾼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 쓰기이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이와 같은 구절은 그의 시 쓰기가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그에게 시는 단 하나의 희망이요 살아있음의 경보이다. 아름다움을 꿈꿀 수 있는 자유이고 아픈 것들을 포용하려는 손짓이다. 그래서 이성복의 시는 아름답다. 그의 시는 추한 것들을 아름답게 덮어준다. 추한 것들, 아픈 것들이 꾸는 꿈을 이성복의 시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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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세계문학총서 6
밀란 쿤데라 지음, 김규진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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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와는 또 다르게 이 책을 봤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베스트극장에서 심혜진(외로움에 치를 떠는 여인으로 나옴)이 보던 책이라는 인상이 내겐 가장 강했던 그때, 지금도 그 인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그보다는 훨씬 정치적이다. 밀란 쿤데라는 사회라는 틀과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는 작가이다. 물론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그의 환경(체코라는 독특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추방당한 지식인)은 결코 그의 글을 가만 놔두지 못 한다.

쿤데라가 스스로 자신은 아마 이런 종류의 글밖에 쓸 수 없으리라 말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겪어온 사회주의의 씁쓸한 실패 앞에서의 자신의 강한 인상과 그의 지식을 동원해 글을 쓴다. 따라서 책은 니체의 철학(영원반복)이라던가 파르메니데스(가벼움과 무거움)의 철학을 동원해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다. 그 이외에도 스탈린 아들의 죽음(권력과 똥의 우스운 은유들)등과 같은 그의 지식은 이 책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매력.

또한 프란츠, 테레사, 사비나 등의 시선에서 각각의 장마다 중심이 다르게 진술됨에 따라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오해의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비화를 체험하게 된다.

모든 반대되는 개념들, 강함과 약함 사이,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 등 우리는 그 어떤 것을 긍정하고 부정할 수 있을까 그 사이를 오가는 작가의 끊임없는 질문 앞에 무장해제 당하며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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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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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우리 옛 속담이 얼마나 맞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타인과의 소통이라는 것은 어느정도는 거짓이다. 어차피 자신조차도 자신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일테지만, 인간들의 만남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통해 우리는 서로 절충하고 상호보완한다. 맞는 부분까지 이야기하고 교감하고 다른 부분들은 자신의 것으로 하거나 갈등을 겪거나 한다.

갈등 뒤에 화해가 있다는 것은 그러나 오해일 수 있다. 교과서에서 배워온대로 아니 그보다 더 훨씬 단순하게 보면 아픔 뒤에는 성숙이 있고 갈등 뒤에는 화해가 있다고 믿고 싶지만, 결코 인생은 그리 순순하지 않다. 우리는 가끔 그 갈등 뒤에 남게 되는 앙금들을 제 속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타인과의 경계를 긋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통에 전제되는 웃음은 망각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다. 만일 한 인간이 어떤 타인과 갈등을 겪고 혹은 한 개인이 전체와, 사상과 갈등을 겪었을 때 그 데미지를 자신의 내부에 고스란히 기억한다면 그의 인생은 그대로 끝이난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물질적 개체 변환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에서 찾을 것이라고는 그에게는 없다. 이제 그는 그 데미지에서 헤어나올 수 없으며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환영을 보게 된다. 혹은 아무것도 보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망각은 거의 웃음이 전제조건이다. 어차피 인간은 상처 받지 않고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에는 그 흔하디 흔할 말로 알 수 없는 경계가 있으며 그 경계는 오직 자신의 눈에만 가끔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과 타인의 접촉 속에서 경계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확인할 수 없고 단지 잠정적으로 가늠할 뿐이다. 그 가늠이 낳는 숱한 오해들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굴러가고 있다.

만일 내가 이제부터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살 수가 없다. 그냥 죽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다.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한다면 말이다. 우리가 유쾌한 듯 웃는 웃음 속에 들어있는 그 숱한 비화의 의미들은 매우 슬프지만 그것 또한 어느정도는 망각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존재의 한계라니, 참으로 인생은 서글프다는 것을 그러면서 우습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이 변주곡 형식을 취했다는 것 역시 이토록 단순치 않은 생을 어찌 주욱 하나로 풀어내려 갈 수 있겠는가 하면 이해가 된다. 자꾸만 우리는 하나를 잊고 다른 곳으로 나가며 그 발전은 다시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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