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블루스 창비시선 149
신현림 지음 / 창비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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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세기말 블루스>

신현림의 시는 당차다. 신현림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돌려서 어렵게 포장하지 않는다. 또한 위악이나 위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하지도 않는다. 신현림은 분명한 여성이고 시인이지만 자신이 그 틀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단지 그녀는 시인으로 있고자 한다. 그밖에도 신현림은 이 세상에서 싸워나가야 할 많은 것들을 노려보고자 한다. 그것들과 거짓 화해하거나 굽히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으로써 가장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나가고자 하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나의 싸움」은 신현림 시집 전체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삶을 고통으로 느끼는 순간에 대해 신현림은 그 순간을 은폐하지 않는다. 그 순간을 까발리고 그 슬픔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를 담대하게 고민한다. 신현림의 이와 같은 대담함은 그녀의 시와 제목에 자주 노출되는 직설화법을 통해서 표출된다.

남자, 여자 여자는 도대체 뭐지?
여자에겐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안전한 곳이란 없는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한접시 여자의 불안한 생수가 아니되고는
짓밟혀보지 않고는 모른다
-「안나 이야기」 中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나의 시」 中

이처럼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시에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오백원 대학생」, 「나의 이십대」에서 보이는 그녀의 과거 회상 역시 그 솔직함을 담보로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솔직함을 통해 그녀가 시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나의 시」中

그녀의 인간적인 포부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이 춥고 무섭고 사랑이라는 것 역시 '조만간 망가지'게 될 무엇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그렇게 놓아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신현림의 시를 쓰게 하는 힘이며 그녀의 시를 살아있게 하는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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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눈
장석남 / 솔출판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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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의 시는 우리가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에 기울어져 있다. 아주 작고 여린 것들을 그는 결코 놓치지 않고 있으며 이와 같은 여린 것들을 대하는 그의 언어 역시 조심스럽다.

시집을 처음 열면 보이는 시, 「봉숭아를 심고」에서 그는 봉숭아를 심고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린'다. 또한 그의 귀에는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가 들린다.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장석남은 그 중에서도 작은 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를 본다. 코스모스를 통해서 그는 '이제 더 오래 못 서 있을 빛'을 보는 것이다.
또한 그 빛이 완전히 사라져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곳을 떠돌고 흐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가볼 만한 곳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 아닌, '목련 꽃잎 속의, 벅찬 기쁨이랄까 허무랄까 하는 그 곳'이며 '그 희디흰 생의 부끄러움이랄까 아쉬움이랄까 하는 그곳'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식물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얼핏 보이는 것들을 장석남은 시에서 오래도록 살아있게 만들고 있으며. 날아갔으나 아직 그의 눈에는 남아있는 여린 것들의 작은 숨결과 함께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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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세계사 시인선 15
이연주 지음 / 세계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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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의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은 자아와 자아가 뿌리내린 세계를 거부하는 몸짓의 극명한 표현이다. 시 「인큐베이터에서의 휴일」중 '왜 나는 부정하는 것만이 아름다울까'라는 구절은 이와 같은 시인의 인식을 집약하고 있다. 시인에게 현존하는 삶이란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시어 역시 부정적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시의 형식 역시 마지막 구절의 부정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이 있었던가? 절벽길/ 또 가야 한다면/ 삶의, 어디/ 사람이 별처럼 모여 반짝이는/ 마을 앞에 서게 될지, 글쎄/ 아니라 해도……', 「길」中

'멍든 곳을 훤히 드러낸 나무들 몸통은/ 어떤 힘으로 겨울을 버티는 걸까./ 어머니 이 손톱 끝을 좀 보세요, 아직도 가시에 찔린 자죽이 시퍼런걸요.', 「지리한 대화」中

시집에는 '삶'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삶은 생동감 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삶의 반대편인 죽음의 어둡고 축축한 이미지는 오히려 삶을 뒤덮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삶에 대한 부정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와 같은 징조를 시인의 곁에서 자주 발견한다.(어차피 시선의 주목은 생각을 따라가기 마련이므로)'검푸레한 곰팡이 냄새', '때 절은 벽지', '박쥐의 검은 옷' 등으로 대변되는 '삼촌'의 삶(「삼촌 편지」), 가는 곳곳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맡는 '오인환씨'(「외로운 한 증상」), '소주', '습관성 약물', '니켈에 도금된 육신' 등의 이미지로 제시되는 '윤씨'(「윤씨」등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시인의 부정성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신생아실 노트」, 「구덩이 속 아이들의 희미한 느낌」을 통해서 시인은 아이들에게 삶이란 혹은 사랑이란 쓸모없는 것이며 죽음을 위한 과정이며 전쟁과 같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은 지독한 부정은 어차피 시집 제목에서도 이미 예고된 바이지만 실제로 접하게 되면 읽는 이는 곤혹스럽다. 시인의 을씨년스러운 은유는 매력적이지만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 독자는 점차 몸 속에 약물을 투약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자신마저 축처지게 되고 이 삶의 어려운 부분들이 속속들이 일어서서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들이 세계를 부정할망정 자신의 의식은 명료한 곳에 놓아두는 반면, 이연주는 자신에 대한 부정이 세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원동력인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네거티브」와 같은 시들은 충격적인 양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시인 이연주는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출간한 바로 일 년 후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한 번쯤은 부정해본다. 그러나 쉽게 죽을 힘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은 이처럼 삶의 반대양상에 놓여서 우리를 괴롭힌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래서 영원한 매력을 품고 있지만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주는 곳. 사실 죽음은 삶이 있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연주의 시집에서의 삶은 철저히 유린당한 것이기에 죽음의 언어가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구사될 수 있는 것 같다. 왜 그 삶이 유린당했는가, 왜 희망의 조각은 발견되지 않고 추억조차 더럽게만 느껴지는가, 아니 어떤 힘으로 그와 같은 부정을 지속해나가는가를 안다는 것은 사실 겁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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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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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마다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겠지만, 김기택의 시집은 유난히도 그 개성이 돋보인다. 김기택의 시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시들과는 다르게 차갑고 무뚝뚝하다. 또한 여리다. 이와 같은 상충되는 표현은 김기택의 시가 아니면 쉽게 어울릴 수 없는 개성이 된다. 김기택 시의 정밀묘사와 같은 세부에 대한 언어를 통한 접근은 그의 시를 차갑게 한다. 메스를 드리댄 듯한, 감정이 절제된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세부에 대한 묘사는 또한 시인의 귀가 작은 것을 향해 열려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시집 속에서는 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한 시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인의 예민한 감각을 동원한 것이다.

'문고리는 다시 즐거운 소리를 내며 녹이 슬기 시작하고 깎아내버린 사과 껍질에서는 당분이 썩는 소리가 야금야금 들리기 시작한다.'(「먼지의 음악」중)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고요하다는 것」중)

이처럼 김기택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운동을 멈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운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고요하다는 것」을 조금 더 인용해보자면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라고 시인은 말한다.

김기택의 눈은 마치 현미경처럼 사물을 꿰뚫으려 한다. 이와 같은 사물에 대한 치밀한 접근 역시 눈여겨볼 사항이다. 대부분의 서정시들이 인간의 정신에 더 깊이 있게 천착하려 하는데 반해 김기택은 사물, 육체를 통해 인간과 현상을 관찰한다. 이와 같은 관찰이 겉핥기 식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Ⅰ」에서 아이는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이다. 아이는 마른 몸으로 자신의 머리통과 같은 '텅 빈 그릇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김기택은 그 안타까운 풍경 속으로 접근해가는 언어조차 사물을 택함으로 해서 차갑고 무뚝뚝하게 자신의 감각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이와 같은 특징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의 절제된 감정이 이러한 표현과 어우러져 이룩하는 표정 때문이다. 버스에서 졸고 있는 사람을 묘사한 「졸음」에서 마지막 행을 주목해보자.

'버스 바닥에 굴러가는 슬픈 무게 한 덩어리'

무게가 되었다 머리가 되는 졸고있는 사람의 동작에서 시인은 조심스럽게 '슬프다'는 시인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지금까지의 무뚝뚝하던 그의 시는 이 순간 묵직한 언어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감정적 표출은 「병」에서 조금 더 나타나는데 시에서 '마음'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이다. 실재하는 것을 통해 시적 발화를 하는 시인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 역시 몸, 육체에 병이 난 상태에서(약해진) 이다. 이처럼 약하고 여린 것을 시인은 자꾸만 주목한다. 작은 것들이 얼마나 묵직한가를 시인은 끊임없이 주목하고 그것을 더 작게 축소함으로 해서 시인은 어지러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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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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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은 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시도하는가, 는 장정일의 시를 이해하는데 좋은 질문이 된다. 시의 서두에서 그는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햄버거를 만드는 방법이 소개된다. 물론 중간중간 작가의 위트가 넘치는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은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 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이다.

이 마지막 연을 통해 우리는 장정일이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하게 된 까닭을 알 수 있다. 장정일 시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문학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그 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특히 장정일 시의 문법은 꽤나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현 문화를 비판한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의 서두의 ‘물렁물렁한 것들’이란 이러한 문화적 코드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특정 상표라던가 특정 인물을 지칭해 그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데 ‘엘비스, 리바이스, 캔트, 셀렘, 맥도날드’ 등등을 들 수 있다.(「,공기 가운에 들려 올려진 남자」, 「엘비스를 듣는 미국인」, 「낙인」, 「하숙」, 「신식 키친」, 「아빠」) 미국 문화에 종속된 우리의 문화와 그곳에서 노출되는 성적인 코드를 장정일은 그 특유의 재치로 이야기한다. 그의 어법은 다소 과격하고(‘영어를 못하는 무식한 제 3세계/ 젊은이들이여’, ‘양키들은 잔인하구나!’, ‘아빠 아빠 아무에게나 펠라티오를 시키는 버릇 없고 건방진 후레자식!’) 전면적으로 대상을 공격한다. 굳이 미국 문화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는 장정일의 시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대상이다.(「백화점 왕국」, 「전파 나무 나무전파」, 「구매자」)

결국 각 개인에게 시적인 것은 모두 다른 것이 된다.(그렇기에 이 세상엔 그리도 많은 시인과 그리도 많은 시가 존재하는 것일 테지만) 어떤 것에 대해 예리한 촉수를 갖는가는 결국 개인의 문제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의 앞부분 시들은 장정일의 촉수가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에 반응한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석유를 사러」와 같은 시들을 읽으면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인간의 ‘야윈 슬픔’에 주목하고 그 슬픔과 피로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존재하는 안식과 평화를 꿈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는 그의 시집의 주요 경향이 되지 않는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시가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촉수는 현실적인 것들에 발을 뻗는다.

현실적인 것, 바로 옆에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러한 현상의 부조리함. 「아파트 묘지」에서 화자는 한 여자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따라가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은 단절 현상은 옆집에 사는 여자와 나만의 것이 아니다. 「험프리 보가트에 빠진 남자」와 「실비아 플라스에 빠진 여자」 두 편의 시는 같이 살지만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문화에 빠져 인간과 인간으로 만나지 못 한다. 이러한 현상은 독자에게 쓰디쓴 웃음을 준다. 이 쓰디쓴 웃음은 장정일 시집을 읽는 동안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국립극장 초대권 하나 붙어있지 않’지만 어디서 이와 같은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만날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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