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계는 살아 있다
민영기 지음 / 겸지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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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행성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가도 확신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더욱 넓게 이 우주의 끝이 어디인지 우리가 우주의 어디쯤에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 너무 광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무리인 질문이다.

<태양계는 살아있다>는 천문학적 숫자들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에 비해 명왕성의 거리는 얼마만큼인가 하는 것이 비교를 통해, 또 행성의 특징을 알게 됨으로 해서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닌 듯 했다. 화성 표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림잡아 볼 수 있게 되니 화성이 그저 우주에 떠있는 별이 아니라 내 이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 것이다.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놀라움,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과학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도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하늘을 관찰하며 어떤 현상들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려 했다는 사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아덴에 학교를 세워 우주에 대한 학문을 가르쳤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로써, 고대부터 인간이란 존재는 상상하고 가정하며,‘존재’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케플러 법칙 등의 태양계를 밝혀내는 천문학자들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호기심에 사로잡혀 이 거대한 우주의 신비를 한꺼풀 벗겨낼 수 있었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우주,그중 가깝게 인간이 인지하고 있는 태양계는 경이롭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땅만이 전부가 아님을 그저 인간이 지구라는 환경에 길들여진 생물일 뿐임을 실감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지구가 한 바퀴 돌면 생기는 낮과 밤이 금성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온도나 기압이 낮아서 물이 흐를 수 없는 행성들, 지구와 같이 딱딱한 표면이 없는 목성, 자극이 뒤집힌 천왕성 등 각각의 행성은 지구에 살며 당연하다고 여겼던 자연현상이 지구라는 행성에만 벌어지는 일이며 다른 행성에 내가 만일 혼자 떨어진다면 살아남을 수도 없겠지만 간혹 살아남는다고 가정해도 너무도 아득한 일이었다. 그래서 과학적 진실이 간명하게 쓰여진이 책이 내게는 매우 詩的인 지점과 더불어 다가왔다.

또한 태양계뿐만이 아니라, 혜성이나 우주에 살고 있을지 모를 다른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롭게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색다른 자극이었다. 이제껏 한 번도 혜성을 보지 못했기에 혜성은 다른 장소에 사는 대단한 사람들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햐쿠타케 혜성을 1996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책을 읽다 알게 되면서 내가 왜 일찍 천문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나 아쉬웠다. 그것은 일생에 단 한 번 뿐일지도 모를, 아주 특별한 우주의 선물일 텐데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우주 어딘가 있을 생명체에 대한 내용이었다. 고등생물체가 알아들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신호를 보내는 전파 시스템이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며 그 신호를 알아듣고 외계인이 반응하기를 기다리는 천문학적 노력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것은 인간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로 내게 비쳤다. 물론 인간들이 노력을 하는 것은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는 것 역시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신비감, 인간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신뢰의 한 부분을 과학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든든한 기분이었다.

책을 한 마디로 떠올린다면 앎에의 열정이라는 두 어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존재 속에 내재된 앎에의 열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그것이 이 광대무변의우주의 어둠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열정이랄까 그리도 쑥스러운 단어를 떠올리도록 했다. 쉽게 포기하고 마는, 왜소한 인간인 내게 그 우주의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 기다리고 애쓴후의 결과들, 별들 사이처럼 머나먼 간격을 좁히는 이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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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희망에게
김혜정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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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투병기의 책들을 보게 되면 자주 눈물을 짓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눈물이 동정 이외의 무엇을 더 이끌어내기는 힘들 때가 많다. 그저 힘겹구나, 이 힘겨운 사람들이 참 슬프겠구나 정도의... 그러나 <슬픔이 희망에게>는 체류성 눈물이 없다. 이 책을 보는 동안 나는 한번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고 가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도 이렇게 보면 참 살만한 괜찮은 세상이구나 생각했을 뿐... 어떤 아픔이나 슬픔은 중독성이 강해서 거기에 머물러 눈물이나 흘리며 망연자실 앉아있기가 쉽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

그에 대항해 이 아픔의 상황을 뚫고 갈 길을 발견하고 인식의 힘을 확장시켜 어두운 터널에 빛을 밝혀야 한다는 것. '슬픔이 희망에게' 어찌보면 너무도 상투적인 제목이지만 배고픈 사람이라야 노력할 수 있다는 속담처럼 슬픔이 생기자 그것을 극복하려 희망을 발견하려 노력한다는 이 책은 결코 단순한 아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의 병에 대응해 나가기 위해 도서관에 다니며 뇌종양 서적을 읽는 씩씩한 엄마는 수술 이후 우울증에 걸린 아들 휘를 통해 우울증이 감상적인 경향이 아니라 병이라고 선언하며 일인 시위를 하는 것이다 우울증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한국사회, 약값이 없으면 환자가 그대로 죽어야 하는 이 나람의 시스템에 투철한 반항의 기를 든 것이다 캐나다라는 이국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정교하게 이건 저렇고 저건 저래, 이것이 모순이고 이게 장점이야 라고 냉철하게 강타를 가하는 모습은 내게 성찰의 기회를 자주 제공했다 쓸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 나도 좀 발걸음을 분주히 해야겠구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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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소녀 카트린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이세욱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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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트릭 모디아노라는 내게는 생소한 작가보다는 장 자끄 상빼라는 익히 들어본 이름의 삽화가이야기...

이 사람이 그린 그림이 들어간 책은 도시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면서도 (그림 또한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이다, 빌딩, 분주한 거리, 상점들 등) 그 일상이 물감으로 채색된 것처럼 잘 보인다고 할까 선명해진다고 할까 그러면서 가치가 생긴다.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본 안경을 벗고 보는 세상이 어딘가 조금은 다른 곳으로 변한다는 그 설정조차 이 사람의 그림과 함께하는 순간 그 일상은 전혀 다른 모습의 훈훈함, 정겨움을 안게 되는 것이다. 그리웠던 것들처럼, 아니면 오늘 아침 보니 어제와 다르게 창밖 풍경이 아름답다 식의 분석 이전에 마음이 꿈틀거리며 나 역시 그림을 따라 그린다는 것...

여담으로... 안경을 벗고 보면 나는 가로등이 불빛나무처럼 보인다. 거기서 열매를 하나 툭 따서 먹고 싶어진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트리가 갖고 싶으면 높은 데 올라가서 안경을 벗고 도심을 바라본다. 그러면 시력이 나쁜 것도 괜찮은 일이군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온 세상이 트리가 되는 상투적이지만 그 순간만은 점으로 찍어두고 싶어지는 마법이 벌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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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 강그리옹 - 해외현대소설선 1
조엘 에글로프 지음, 이재룡 옮김, 안규철 그림 / 현대문학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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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뭐, 뭐라고 강그리옹이 뭐야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위트넘치는 소설!! 현대적 매력라면 뭔가 전복시키는 것, 새로움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 이제까지 있었던 것 통념화된 것을 비웃어주고 다를 수도 있음을 당당하게 제시하는 것 아무래도 '장의사 강그리옹'은 현대적인 책이다

가볍고 빠르지만 신선하게 읽을 수 있는 재치있는 문장은 장의사도 카페주인도 성당 목사도 흘레붙는 동네 개조차도 가만두지 않는다. 시종일관 그들은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그 일탈은 젊은 프랑스 작가의 간결한 언어 속에서 대단하고 의미있는 행동이 아닌,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장의사 강그리옹'의 매력이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어딘가 꽈 막힌 어둠의 이미지를 듬뿍 함유한 이 소재는 더 이상 질척한 구덩이에서 구출되지 못 하는 미로나 보이지 않는 안개가 아니다. 죽어있는 사람은 죽는 게 당연하므로, 더 이상 헤매고 싶지 않기에 사람 하나쯤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풍자이며 재치가 되는 것이다.

자극과 폭력으로 무장한 영화나 예술에 대한 비판이며 삶의 반대편에 서있는 죽음에 대한 색다른 접근이며 무엇보다 보수적인 당신 속의 막을 깨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3인칭 소설에 '나'가 되어도 장의사 강그리옹에서는 그리 어색하지 않다.

-누가 선을 그었을까
-왜 그 선에 갇혔을까
-금을 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야

책은 많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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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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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재밌었다는 말을 해야겠다. 유쾌한 것을 좋아하는 나의 습성 때문일까. 처음 단 편 두 개는 특히 재밌었다. 라디오 기능이 있는 선풍기를 수집하는 사람의 외로운 구매 어쩌고도, 있지도 않은 롤러코스터(플라잉 롤러코스터)에 대해 쓴 것도 모두 즐겁게 읽었다. 또한 나의 글 쓰기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단순한 유쾌함이 아닌 나름의 철학이 있어서였겠지. 아마 레포트를 쓴다면 시대와 세대 어쩌고 과거의 유물과 90년대의 관계, 이데올로기의 지배 어쩌고 그런 소리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레포트가 아니니까.

'시간이 지나면 어떤 둥물들은 멸종하고 어떤 동물들은 자신을 보호하던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버리고 다른 시간 속으로 유영해간다.'
-오징어와 암모나이트가 같은 류의 동물이라는 얘기에서 이 말이 나왔다. 과연 나는 멸종할까, 이 껍질을 버릴까. 유영한다는 말도 좋았다. 시간 속으로 유영할 수밖에 없는 것들. 도저히 그 궤도를 이탈할 수 없는 것들.

'모든 것들은 가까이 다가가서 귀를 기울이면 더욱더 잘 들리는 법이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좀더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
-단편 '스무 살'에 나온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지도 않으면서 어른이 되야 한다는 부채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저 시간에 이끌려, 하지만 만일 그런 시간마저 없다면 아무도 어른이 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힘겨운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김연수의 소설은 변화해가는 시대와 스스로를 되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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