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밀란 쿤데라 지음, 김재혁 옮김 / 예문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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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ěšn Lsky/ Milan KUNDERA


내가 어떤 사람한테 “야 이 돼지 같은 새끼야”라고 했다고 치자.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속한 세계에서 쓰는 농담 비슷한 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다른 세계에 속해있으므로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계는 틀어진다. 내가 어떤 변명을 한다 해도 그 말의 위력은 그에게 이미 힘을 발휘해 버렸고 그러므로 다른 어떤 말도 그만큼의 힘을 획득하지 못한다. 이미 바람은 불어버린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간단히 말해 이런 상황을 그리고 있다. 물론 세상이 둘만 살고 있는 게 아니므로 사회적인 요인은 훨씬 복잡하게 작용하고 게다가 제 3자가 개입하며 문제는 더욱 길을 잃고 처음이 어디였는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다.
특히 첫 소설, 「아무도 웃지 않으리」는 이런 상황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어떻게 한 개인을 몰락키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문제는 진실이다. 나는 진실이 아니지만 상대방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문제가 커진다. 나는 그 문제가 불어나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는 진실이 아니므로. 그러나 주변은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농담인가 이런 문제를 따지지 않는다. 말의 표면이 사회의 규칙에 어긋나는가만 따진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다. 거짓이라도 진심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이다. 진실의 반대말은 아무런 의지 없이 한 번 지껄여본 농담이다.
번역자도 인용했듯 마지막 단편 「에두아르트와 신」에서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진지하지 않게 되는 걸 뜻하지요’ 라는 에두아르트의 말은 이 소설 전체의 테마와 맞닿아있다. 광적인 믿음, 이미 이성의 세계를 벗어난 어떤 논리에 대해 이성적으로 반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상황은 종종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간다. 이성을 벗어나 광신적인 상황 속으로 밀어넣고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농담인지도 모른다. 그와 동일시되지 않기 위한 최선은.
나는 한때 모든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또한 한동안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항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 세상 또한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당분간 반항하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우스운 짓이었다. 때로는 우스운 짓이 필요하므로 그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세상이 달라 보였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속하지 않는 걸 보면 그것도 곧 질렸나보다. 결국 어떤 것에든 질릴 수 있다. 진실이 아주 대단한 힘을 갖는 건 아니다.
세상은 우리의 의도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지킬 수 있는 건 사실, 너무도 적다. 많으면 한두 가지 정도이다. 쿤데라의 소설은 규격화의 우스움, 지킬 수 있는 게 적은 세상에서 모든 걸 지키려드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에 대한 항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사회가 강요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얼마나 우습게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의 농담은 때로 독이 되어 급소를 찌르는가. 이것은 인간의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으므로. 영원히.

 


“형, 형이 솔직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고, 또 그게 자랑스럽기도 해요. 그렇지만 도대체 왜 진실을 말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래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건가요? 그리고 도대체 왜 진실에 대한 사랑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거죠? 자기가 물고기이며 우리 모두 물고기라고 주장하는 미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형은 그 사람과 논쟁을 벌일 거예요? 그 사람 앞에서 옷을 벗고 형 몸에 지느러미가 없다는 걸 보여 줄 거예요? 그사람 면전에 대고 형이 생각하는 걸 말해 줄 거예요? 말할 테면 한 번 말해봐요!”
형은 침묵했고 에두아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형이 그 미친 사람한테 순수한 진실만을, 형이 그 사람을 보고 느낀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형은 결국 미친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하는 꼴이 되고 말고 결국에는 형도 미칠 거예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다 마찬가지예요. 내가 그녀의 면전에 대고 옹고집쟁이처럼 진실을 말했다며, 그건 내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꼴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그처럼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진지하지 않게 되는 걸 뜻하지요. 형, 나는 이 모든 미치광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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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 전집 4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덕애 엮음 / 솔출판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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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하다. 아니, 나는 바보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은 지 한 이주일쯤 됐나, 버스 좌석에 앉아 숱한 감탄사를 내뱉으며-이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유명하구나 식의- 읽었던 이 책의 어느 부분에 내가 감동 받고, 놀라워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적어놓은 문장들을 읽어보니, 그 느낌이 희미하게 다가올 뿐이다. 그때의 그 선명한 일렁임은 다 잊고 기억나는 건 752번 버스의 조명등과 삼각지 주변 거리의 탁 트인 밤거리 뿐이다. 책을 읽다 밖을 보니, 거리가 참 시원스러웠다, 이런 식의 쓰잘 데 없는, 기억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서, 책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으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새 위기를 느낀다. 이전엔 왜 책을 두 번 읽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지만, 일반 독자에서 머무르고 싶지 않다면, 책은 다시, 다시 또 음미할 필요가 있다. 1차적인, 내러티브의 재미, 발견의 재미를 넘어선, 다른 재미를 찾아야 한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독서의 행위와 같이.

일반을 넘어서, 흥미를 넘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방식을 내 글로 쓸 줄 알 때까지 글을 읽어야 한다. 그 어떤 방식으로 세상으로 뛰어들었는가, 헤엄쳤는가 등등.

버지니아 울프의 이 책은 정말 흥미롭다. 일반독자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 중 몇 개를 뽑아 번역해낸 이 책은 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문학사에 존재하는 여러 작가들에게 슬며시 다가가고, 그들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분석이 아닌,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상을 울프 방식으로 그려내고, 그 그림은 추상화 보다 훨씬 명확하고, 직선적이고, 쉽지만, 단순하지는 않다. 그것은 울프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마음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사람이 쓰는 글이다. 아래 인용한 ‘현대 소설’의 일부분이 있기에 이러한 산문이 나온다고 하면, 누가 과연 내 말을 이해해줄까.

초반 고전 부분은 워낙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글이고, 문학이 덜 발전한 시대에 대한 고찰이므로 어느 정도 괴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전에 대한 글인 「뉴카슬 공작부인」이나 「스위프트의 『스텔라에게 보내는 일기장』」은 그들의 문학성에 대한 비평보다는 그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뉴카슬 공작부인이 얼마나 독특한 여성이었던가, 그녀는 그 시대 여성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들을 마음껏 글로 써낸 인물이었음을, 『걸리버 여행기』의 스위프트 이야기는 그의 벗이자 연인이었던 스텔라와의 관계를 이야기함으로써, 글은 지루하지 않다. 누군가의 스캔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에.

그리고도 내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더 이상 사생활이 아닌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그 작품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음에도 울프의 글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울프는 문학적인 언어로 문학을 이야기한다. -기억의 동물인 까닭에 나는, 내가 울프의 「선녀여왕」이라는 글을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지 잊었다. 그러나 책을 펼쳐보니 목차에 ‘최고’라는 다소 유치한 말을 그 단락에 써놓은 게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며 나는 이 글을 쓰던 중 다시 그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최고’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울프는 인간적인 언어로 문학을 이야기한다. 어려운 비평적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한다.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분석의 과정을 서술한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즐겁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현재 살아있는 시인 중에서 어떤 유형에 들어맞는 인물을 묘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각자 인간의 거주지 중 하나의 방에만 국한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스펜서와 함께라면 우리는 여기 오늘날 우리 존재의 한 부문에서나마 잠깐 문을 열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

그리고 「현대소설」부터 「기울어가는 탑」까지 다섯 개의 글은 울프가 살던 시대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뭐,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문학적 조건이 아닐까 싶다. 우리 역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글을 쓰는 게 몇몇 계층의 인간을 위해서는 아니므로, 우리는 이제 숱한 무정형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므로, 울프의 이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막 계급 구조가 사라진 시대, 그러나 아직 계급구조의 희미한 옛 그림자가 남아있던 시대의 변화상과 그에 따른 문학의 변화에 대해 울프는 이야기한다.

뿐만이 아니다. 소설에서 인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인물이란 이런 것이다 정도의 말이 아니다. 자신이 인물을 묘사할 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당위성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 현대소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울프의 고민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을 더 접해보고 싶다고 느꼈다. 내가 글을 쓸 거라면, 나의 감상문도 이 층위는 아니지 않나, 이런 고민이 든다, 문득





만약 다른 모든 것이 멸망해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하기를 계속할 거예요. 그리고 만약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고 그는 무로 돌아간다면 우주는 막강한 이방인으로 변하겠죠. 내가 그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지 않겠죠.’

-에밀리 브론테,『폭풍의 언덕』中



하지만 시를 읽는 것은 복합 예술이다. 마음은 여러 층을 갖고 있고, 그리고 시가 위대할수록 더 많은 층이 일깨워지고 행동으로 유도된다. 또한 그 층들은 질서 있게 존재하는 것 같다.

-「선녀 여왕」中



모든 서두와 논의를 다 파괴해버리고 그는 가장 짧은 길로 시 안에 바로 뛰어든다. 시구 하나가 모든 준비를 다 소모해버린다.

-「3세기 이후의 단」中



속을 들여다보면 인생은 ‘이렇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 평범한 날의 한 평범한 마음속을 한순간 조사해보라. 그 마음은 무수히 만은 인상들을 받아들인다-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 또는 강철의 날카로움으로 새긴 것. 모든 방향에서 인상들은 수없는 원자의 끊임없는 소나기로 내린다. 그것들이 내려올 때 그리고 스스로를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으로 구성할 때 예전과는 다른 곳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중요한 순간은 여기서가 아니라 저기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작가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면, 만약 그가 반드시 써야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쓰고자 선택한 것을 쓸 수 있다면, 만약 그가 전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작품을 기초할 수 있다면 줄거리도, 희극도, 비극도, 사랑의 관심이나 재앙도 없을 것이며 본드가의 양복장이들이 달듯이 가지런히 달려 있는 단추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생은 균형 있게 열을 맞추어 늘어선 일련의 마차등이 아니다. 인생은 희미한 광채요. 우리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의 봉투이다. 이 다양하고 알 수 없고 제어되지 않은 정신을 아무리 그것이 탈선이나 다양함을 보여준다 해도 이질적이거나 외적인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섞지 않은 채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단지 용기와 성실함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올바른 소재는 습관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끔 했던 것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깊은 그리고 마침내 원망스러운 절망감을 가득 안기는 희망 없는 의문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에도 인생은 계속 타진해보도록 남겨진 질문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든다.

-「현대 소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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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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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그짓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해봤자 별 소득이 없었고 엄마도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복통과 발작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가끔 배가 아프다. 그뒤 나는 주목을 끌기 위해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진열대 위의 토마토나 멜론 따위를 슬쩍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의 눈에 띄도록 일부러 기다렸다. 주인이 나와서 따귀를 한 대 갈기면 나는 아우성을 치며 울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었다.

한번은 식료품점 앞에서 진열대 위의 달걀을 하나 훔쳤다. 주인은 여자였는데, 그녀가 나를 보았다. 나는 가게 주인이 여자인 곳에서 훔치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내 엄마도 틀림없이 여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달걀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주인 여자가 나왔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잘 끌 수 있도록 그녀가 내 뺨을 한 대 올려붙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곁에 쭈그리고 앉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했다.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처음에 나는 그녀가 나를 잘 구슬러서 달걀을 도로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호주머니 깊숙이 든 달걀을 더 꼭 쥐었다. 그녀는 벌로 나를 한 대 갈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진열대로 가더니 달걀을 하나 더 집어서 내게 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한순간 나는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그때의 기분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니 굳이 설명하진 않겠다. 나는 그날 오전 내내 그 가게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따금 그 맘씨 좋은 주인 여자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손에 달걀을 쥔 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법적으로 어른이 되면 나는 아마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늙은 창녀들만 맡고 싶다.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 이상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 그들을 보살피고 평등하게 대해 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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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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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쓰고 싶다

첫번째 이야기보다 다음 것들이 더 좋다

문장이 달랑 남는 게 아니라 짙은 그림자가 남는다.

자신의 개별적인 정체성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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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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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요새 생각한다.

우리의 발화 행위란 얼마나 마음 속의 진실을 담보할 수 있을까.

지금 말한 것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해도 그 이유는 언젠가 내 마음 속에서 지워지고 남는 것은

타인에게 남게 되는 말밖에 없다.

그 순간 진실은 나의 말이다. 내가 그 말을 했던 이유와는 상관없이, 이미 내가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감정은 모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나의 진실은 말로 남을 뿐이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잔혹한 전쟁이 훝고 간 뒤 쌍둥이의 삶을 쫓는다.

원래 3권 연작을 기획하고 작가가 작품을 쓴 것이 아니므로

1권과 2권 3권은 각각 다른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게다가 제목부터 거짓말이란 함의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조금 머리가 아플 수도 있다.

책을 읽고 난 뒤 정리를 할 때에는.

하지만 읽는 동안은 머리 아플 필요가 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우선 간결한 문장은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고 1권의 두 쌍둥이의 엽기적인 행동들, 상황들은 재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허함이다.

우리의 상상은 얼마나 또 우리를 외롭게 하는가.

나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외로운 세상을,

두 사람이 서로를, 어딘가에 있는 서로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빈 틈을 인생에서 목도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끔찍하도록 생을 외롭고 바람 불게, 허하게 만들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발화 행위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이끌고

훗날 남는 것은 공허함, 거짓을 말한 것은 누구인지, 진실은 무엇인지,

진실이 어디 있기나 했던가 하는 공허함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책이 텅 비었다는 공허함이 아니라, 나의 생도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로 흘러가며

자꾸만 거짓을 되풀이하고 진실이 있는 곳을 잃었고 잃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어차피 진실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텀빔이다.

슬프지만 진실로 이것만은 진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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