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튭으로 한국 뉴스를 검색하다가 지역 축제나 전통 시장 등에서 상인들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문제라는 기사들이 연이어 올라온 것을 보았다. 아직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얼마 전에 다녀 온 스페인 말라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철학이 주관심사 중 하나인 나에게 스페인은 그렇게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이번에 처음 스페인에 가면서도 단순히 관광을 간 셈 치고 아무 준비없이 몸만 비행기에 실어보냈었다. 그러나 다녀오고 나서는 계속 스페인 관련 정보를 찾아본다. 아내는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하고, 나는 지금 중세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철학자 마이모니데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다시 가보고 싶고, 심지어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나라이다. 유튭을 찾아보면 스페인을 방문했다가 스페인에 반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짧게 다녀온 나도 스페인의 매력에 대해 말을 하라면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러나 다 치우고 딱 한 사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첫 날, 말라가의 유명하다는 한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줄이 너무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날은 그냥 포기했다. 말라가를 떠나기 전날 밤에 다시 갔는데, 여전히 줄이 늘어서 있었다. 좀 기다렸고, 차례가 되어, 한국 식당처럼 활기차게 시끄러운 식당에서 해산물 등과 맥주 등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치워가게 하고 나서 계산서를 기다리며 우리는 텅 빈 식탁 앞에서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밖에는 여전히 사람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테이블을 빨리 돌리면 그것이 다 돈일 터인데, 식당 안을 분주하게 오고가는 종원원들, 매니저 누구도 텅빈 식탁을 사이에 두고 수다를 떠는 우리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식기를 치우게 하면 당연히 계산서를 가지고 오겠지 했는데, 스페인에서 둘은 별개의 사건인가보다. 계산하시겠냐고 묻지도 않는다. 식기들을 치우고 말끔한 식탁 상태에서 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걸 고려하는 것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계산을 하고 나서도 뒷맛이 깔끔했다. 가격이 무척 저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한정 체감 물가는, 말라가 관광 중심부에서조차 한국보다 낮았다. 


스페인은 세계 최대의 관광국이기 때문에, 역으로 보면 그에 걸맞는 시스템이나 소양이 갖추어져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시스템이 구축되었을까? 물론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원리에 의해 그러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철저한 존중이다. 내가 손님으로서 식당에 들어갔으면,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는 그 줄을 서고 있는 사람이나 식당 사장의 사정이지 손님인 나의 사정이 아니다. 나는 손님으로서 그 식당의 서비스를 최대한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내가 관광객이든 지역 사람이든 그런 것 또한 식당 직원이나 사장, 식당의 다른 손님들의 관심사일 필요가 전혀 없다. 손님으로서 나는 그 식당의 서비스를 최대한으로 즐길 권리가 있고, 내가 손님으로서 철저하게 존중받는 것과 똑같은 원리에서 식당의 직원들을 철저하게 존중해주면 된다. 아마 이러한 원칙이, 적어도 말라가의 식당 주인과 직원들에게 철저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한국의 지역 축제 등의 상인들에게 이러한 원리는 말도 안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나 기호에 대한 철저한 존중은, 한국에서는 드문, 서구 문화의 주요한 특질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적 특질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러므로 평면적으로 그것을 좋다, 나쁘다, 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경우 식당을 방문한 손님에게 그 식당이나, 그 식당이 속한 지역, 문화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는 데에는 이 원리가 아주 효과적인, 그러니까 실용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만일 문제를 이처럼 개인적 선택에 대한 존중과 같은 원리로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이 지나친 억지가 아니라면, 지역 축제 등에서 외지인이나 어수룩해보이는 사람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려 드는 행위를 꼭이 이러 저러한 상인들의 일탈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숙명여대 학생들이, 성전환하여 법적으로 여성인 학생의 입학을 반대하여 그 학생이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만 일이 있었다. 숙명여대 학생들은 그 학생의 선택을 전혀 존중하지 않은 셈이다. 아마 그 반대한 학생들의 상당수는 한국 사회가 개인적 선택이나 취향에 대해 억압적이라는 점에 공감할 것이다. 아마 기성세대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손님이고 커피 한 잔을 주문했으므로 10시간이든 그 이상이든 이 카페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것들이 한국의 현재를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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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한 귀퉁이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는데 열무고 깻잎이고 등등 잘 자란다. 내가 심고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이라 뭘 모르고 너무 빽빽하게 심었다. 덕분에 열무는 매일 뽑아다 먹고 있다.) 한 두 뺨 크기의 무화과 나무도 심었다. 언제부터 무화과가 달려서 따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엊그제 손님이 왔었는데, 그 분 왈, 자신은 미니멀리스트 삶을 추구한다고...:) 정원에 이것 저것 일을 벌려놓고 있는 모양을 보고 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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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우리집 정원이다. 5월의 꽃들이 망울을 한창 터뜨릴 때인데 영국은 요즘 계속 가물다. 물도 좀 뿌려주어야 하고 등등으로, 이것 저것 정원일이 끊이지 않는다. 작년에 꽃들이 조금 적게 피어서 걱정했는데, 올해는 풍성하게 피어주고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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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유튭에서 우연히 에코프로라는 기업을 알게 되었다. 유튭에 삼프로 채널의 해명 동영상이 떴고, 이게 뭔 얘기지 하며 검색해보다 밧떼리 아저씨, 2차 전지, 에코프로... 등등으로 이어지는 토끼굴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미래 한국의 먹거리가 되어 줄 중요한 산업 영역에서 한국의 기업들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흐뭇해졌고, 그런 기업이 아직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한 가지 판단하기 극히 어려운 미묘한 점이 있었다. 2차 전지 주식들이 저평가되었다고 주장하는 측(대표적으로는 밧데리 아저씨)은 한국 기업들에 대한 풍부한 기술적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공매도 세력(즉, 기관)에 대한 개인 투자자들의 분개와, 중국 기업과 경쟁하고 있는 한국 기업에 대한 일종의 애국심을 집중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한국 2차 전지 관련 주식을 살 것인가를 두고 아내와 상의하면서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해 전자만을 고려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둘이 깔끔하게 분리될 수 있는가? 비이성적인 측면에 호소하여 대중적 지지를 모아놓고는 곧장 수직 낙하한 허다한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우리는 관련 주식들을 사지 않았다. 사려고 했는데, 해외에서 한국 계좌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포기했다.)


그러다 어제 에코프로의 창업자이자 전회장인 이동채가 법정구속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새로운 토끼굴이었다. 이동채가 공시전에 중요 정보를 이용해 주식 거래를 하여 이득을 챙겼다는 것을 법원이 인정했다는 것이다. 공매도 세력의 불공정 게임에 분개하는 그 많은 유튭 채널들이 이동채의, 시장을 교란하는, 이런 적나라한 불법에 입을 닫고 있었다는 것에 의아했고, 이런 범죄에 대해 일심에서 집행유예가 났었다는 것에도 놀랐다. 이동채는 지주회사인 에코프로 산하에 오로지 이동채 가족의 지분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인 가족 회사를 만들어 두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에코프로 산하 기업들이 일반 주주의 이익에 반하여 이동채 가족 회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사례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에코프로 주가가 가파른 상승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이동채의 바로 그 가족 회사가 주식을 대량 매도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술 관련 회사인 에코프로가 난데없이 포항에서 골프장 사업을 하면서 기존 사업자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도 검색하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숨이 나왔다. 여기 작은 삼성이 있다. 기술력에 대해서는 ... 아마도 인정. 그러나 창업주 주변에, 창업주의 지분율 확보라든지, 가업 승계라든지 하는 이해 관계의 관철을 위해 온갖 불투명한 장치들이 다 동원되고 있는 것 같다. 남는 것은 불투명성이다. 그런 불투명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알 수 있는가? 당장 창업주 이동채는 내부 정보를 이용하여 주식거래를 하고 이득을 챙겨서 차명 계좌에 넣어둔 것 아닌가? 이런 불투명한 시장에 무엇을 믿고 투자를 할까? 한국의 주식 시장이 그 오랜 기간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시장의 불투명성이다. 물론, 이런 불투명성을 안고도 삼성과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있다. 현실은 현실이다. 에코프로의 실적만 제대로 나온다면이야 이동채가 가족 회사를 만들어 일반 주주의 이익을 아주 일부 빨아간들 대수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투명성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전체의 이익이 꼭이 나의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어쨌든 나는 이동채의 법정구속 관련 소식을 찾아보고는 도대체 한국의 기업들이 2023년을 살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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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 gpt가 내 컴퓨터에서는 잘 열리지 않는데, 어쨌든 겨우 겨우 등록하고 테스트를 해보았다. 기대한 바가 커서 그런지 조금 실망스러웠다. 대학원 과정 시험에 통과할 수준의 에세이를 써준다든지, 조던 피터슨이 무서우리만치 놀랍다고 했던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검색한 주제(주로 철학)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높게 잡아봐야 위키피디아를 읽기 쉽게 재작성해 준 정도인 것 같다. 피상적인, 아마 대학 과제 레포트 정도 수준? (물론 주제에 맞춰 문장을 작성하는 능력 자체는 놀라웠다. 의외인 것은 중언부언이 많더라는 것...)


그래서 조던 피터슨이 이 챗봇에 던졌다는 질문을 가지고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피터슨에 의하면 몇 초 만에 몇 페이지 분량의 뛰어난 결과물을 토해내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테스트해 보니, 단 몇 줄의, 애초의 요구 사항인 성경의 스타일과 중국 고대 문헌의 스타일을 융합한 형태로 이러 저러한 질문에 답하라는 것에 대해, 응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출력될 뿐이었다. 음... 조던 피터슨과 언론이 난리를 떨어서 챗봇 회사가 몸을 사리고 있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 인공지능이 scary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humble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미래는 이미 다 와 있다는 것이리라. 인간이 알파고를 더 이상 이기지 못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을 것이다. 요컨대, 알파고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연결,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코플스턴이라는 신부님이 있다. 우리에게는 서양 철학사가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이 유명한 이유는 자신이 다루는 철학자들의 원전을 직접 읽고 그 기반 위에서 철학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만 해도 다시 반복되기 힘든  초인적인 업적이라고 칭송받는다. 그럼 이번에는, 인공지능이 예컨대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서를 쓴다고 해보자. 이 인공지능은 서양 철학 문헌 뿐 아니라, 아라비아 철학 문헌 뿐 아니라, 인간이 생산한 모든 문헌들을 학습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 대우주에 스피노자가 놓여진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스피노자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스피노자라는 존재는, 이 우주의 그 영향들을 자신의 필요에 맞춰 절단함으로써 일정하게 굴절되고 제한된 우주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우주, 둘째, 스피노자란 개체, 그 특이성. 이 두 요소 모두 자료의 방대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아예 접근 불능이거나, 아니면 매우 제한적인 접근만을 허락한다. 인류는, 종합적 역사라는 과제에 대해서도 포기하고 손을 놓은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상대적인 의미에서라도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 방대한 자료에서 연결을 볼 수 있다. 그 연결을 보는 것을 우리는, 인간적 규모에서는 창의성, 인간적 규모를 굳이 전제하지 않는다면, 창발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은 탁월한 스피노자 연구서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 사건 이후, 듣자하니 바둑계는, 거칠게 말하자면 기생적 연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기생적이라 함은, 모두가 절대 기풍인 알파고 기풍울 학습하며, 그 기풍대로 바둑을 두는 데, 이 기풍을 돌파할 어떠한 가능성의 희망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바둑계는 앞서 말한 스피노자 연구자보다는 상황이 나을 수 있다. 바둑은 스포츠임으로 실시간성이 영원히 미래(열려있음)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즉, 지금 바로 이 순간 두는 이 대국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고 유일한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 연구자의 경우, 인공지능이 쓴 12권 짜리 연구서의 빈 곳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붓을 드는 순간, 혹시나 하고 그에 대해 인공지능에 질의를 하는 순간, 그 빈 곳은 순식간에 메워질 것이다. 스피노자 연구자에게 미래는 원천적으로 봉쇄될 것이다. 스피노자 연구자는 기생적으로라도 연명할 수 없다. 이 연구자는 압사당할 것이다.


그러면 예술은 어떻게 될까? 예술 역시 그 일회성, 유일성으로, 다시 말하면 원칙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압사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이유는 그것의 생산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세잔의 작품이 수 천, 수 만 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양적 제한이 해소된다면, 아마 감상이나 비평이라는 행위는 압사를 당할 것이다. 작품들은 처박혀 있을 것이다. 남는 것은 창조의 순간에 있어 개인적 특이성의 감성 뿐이다. 그러나 이 환희의 순간은 무엇으로 측정되는가? 그것은 그것이 예술인 한, 즉 아이의 놀이같은 것이 아닌 한, 자신의 작품의 희소성, 독창성, 등등에 대한 착각이나 확신 등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감상의 압사와 함께, 창조의 순간에서의 숭고함의 감정도 사그러들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제 사무 노동자를 사무실에서 몰아낼, 혹은 사무 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으로 예측되는 인공 지능 기계의 등장이 인간 실재의 몇 측면들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나의 현재 생각이다. 실제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런지는 물론 두고 보아야 알 일일 것이다. 적어도 그에 대한 미래는 아직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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