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다시 로저 워터스의 음악을 듣는다. 계기는 물론 이스라엘-하마스 사태이다. 들으면서 생각한다. 음악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사상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모던이란 무엇인가? 모던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우리는 아직 전사pre-history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마스는 분리 장벽을 넘어 이스라엘 마을에 침투해 살육을 벌였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하마스가 조잡한 로켓포로 죽일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스라엘 폭격기에 수십배, 백배 보복을 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하마스는 이스라엘 땅에 직접 침투해 가능한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옥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장벽은 거기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번 사태가 그것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911만큼이나 충격적이라고 말한다. 나의 평화로운 일상이 이토록 쉽게 야만적 행위들에 처참하게 유린될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의 충격? 아니다. 그것은 나의 문명적인 일상이 어마어마한 폭력(야만적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그 폭력에 있어 수혜자였을 뿐... 그 적나라한 폭력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장벽을 치고, 화장을 하고, 재즈를 듣고, 고결한 철학 책을 읽는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근원적 폭력에 기초해 있는 삶의 양태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뭐라 부르건 상관은 없다. 우리의 시대가 이전 시대와 다름없이 폭력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은 쉽게 긍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근원적 폭력에 기초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시대가 희소성의 원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나는 갑자기, 십 몇년 전에 읽은, 우리가 근대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라는 어떤 책의 테제에 찬동하게 된다. 나는 갑자기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아니라 모던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천 명의 이스라엘 사망자에 대해 십 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숨을 요구할 것이다. 21세기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다는 테제를 21세기의 문명 국가들이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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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nki in New York : 김환기의 뉴욕일기 - 김환기 뉴욕일기를 통해 본 삶과 예술
김환기 지음 / (재)환기재단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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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10년 여를 뉴욕에서 화가로서 고투하다 타계한 김환기의 일기. 생각보다 일기가 두툼하지는 않다. 생전에 그가 세계 미술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일기는 안스러움, 혹은 안타까움 속에서 읽힌다. 화가는 무엇보다도 육체 노동자라는 말도 실감하게 된다. 미국에 건너간 시점에서 이미 그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갖고 있는 베테랑 화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미국의 시장이나 평단을 뚫어내기에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어떤 것이 더 필요한가? 이런 모색과 고민, 고투가 일기 전체의 기조를 구성한다. 그리고 김환기가 내린 결론은 당대성에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합류시키자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이는 올바른 결정이었다. 여기서 이 당대성이라는 말은 참 애매하다. 당대성을 (미국이나 서구의) 시대가 포착하고자 하는 어떤 사상을 둘러싼 지성적 논쟁점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그 대척점에는, 김환기 자신의 지역성(로컬리티, 즉 한국적인 것)이 있게 된다. 즉, 당대성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지역성은 최소한으로, 배경으로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이 그 당대의 주류의 언어와 사고, 논리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그런 언어, 사고, 논리를 창안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철저하게 반박하고 싶다. 세계적 고민 속에서 운동하는 것만이 세계적이다. 만일 한국적인 어떤 것이 그러한 고민을 형상화하고, 거기에 일정한 빛을 던져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그런 한에서만 그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에 속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 김환기는 이러한 점을 천천히 깨달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근방 어느 시점에서 그의 육체는 그의 고투를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예술이든 삶이든 무엇이든 무엇을 완결짓는다는 것에는 형식적인 의미 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이 그의 예술적 고투의 최종적 형상화를 방해했다는, 그런 아쉬움을 들게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는,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죽는 것과 같은 이상적 죽음을 취한 또 한 명의 예술가로, 즉 진정한 예술가로 내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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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04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환기가 내린 결론은 당대성에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합류시키자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이는 올바른 결정이었다. 여기서 이 당대성이라는 말은 참 애매하다. 당대성을 (미국이나 서구의) 시대가 포착하고자 하는 어떤 사상을 둘러싼 지성적 논쟁점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그 대척점에는, 김환기 자신의 지역성(로컬리티, 즉 한국적인 것)이 있게 된다. 즉, 당대성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지역성은 최소한으로, 배경으로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이 그 당대의 주류의 언어와 사고, 논리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그런 언어, 사고, 논리를 창안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철저하게 반박하고 싶다. 세계적 고민 속에서 운동하는 것만이 세계적이다. 만일 한국적인 어떤 것이 그러한 고민을 형상화하고, 거기에 일정한 빛을 던져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그런 한에서만 그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이 매우 인상깊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는 말이 요즘 회자되고 이는 한국 드라마와 BTS때문인듯하지만...저두 위클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저도 시대성이라는 화두 같아요. 이걸 어떻게 그림으로 형상화시키느냐가 그 작가의 퀄러티를 결정짓는 척도 같다고 요즘 느낍니다. 그럴려면 미학 이전에 현대철학의 논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추상은 그렇다고 봐요. 당대가 포착하고자 하는 어떤 사상을 둘러싼 지성적 논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할 듯해요. 이 당대성을 자신의 언어로 간파할 줄 알아야 하는데 무척 힘든 지점이긴 합니다.

근데 이건 예술계에서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이죠. 요즘 미술작가 중에 책 안 읽는 작가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합니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당대성을 논하기에는 너무 먼 나라 얘기 같아요. 당대성을 담아보기 위해 노력해도우리나라 미술계에선 현재까지 형상을 너무도 중하게 여겨서뤼...

김환기의 고뇌가 무엇이었는가는...지금도 진행형인듯해요. 저도 이 책을 구매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weekly 2023-10-04 19:15   좋아요 1 | URL
김환기의 작품들을 인터넷으로 죽 찾아보면서 아내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나네요. 아내는, 김환기의 달 항아리 그림들이 좋다고 했고, 저는 그런 그림들은 우리같은 한국 사람들에게나 정서적 울임이 있지, 저쪽 사람들에게는, 이게 뭐지? 둥근 선에 대한, 혹은 하얀 색면에 대한 연구인가, 하는 반응 밖에 이끌어낼 수 없다고 말했었죠.
그러나 어쨌든 현실은 개념의 운동사가 아니기 때문에, 현상들은 수 많은 외부 효과, 우발성 등에 의해 주조될 테지요. 그 작가가 왜 떴지? 그러면 우리는 사후적으로 근사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겠지만, 내러티브는 그저 내러티브일 뿐일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 잭슨 폴락을 감명 깊게 본 기억이 납니다. 혹 보지 않으셨다면 꼭 보세요.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yamoo 2023-10-05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위클리님의 추천작 꼭 보겠습니다. 저도 달항아리 그림을 부정적으로 보는데....김환기 이후 달항아리 그리는 작가 엄청 많습니다. 저는 도대체 왜 그리는지 이해가 안되는데...달항아리가 한국적 정서를 잘 나태낸다고 생각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저는 전혀 아닌 거 같은데...뭐 수요가 있으니까 줄창 그리겠죠. 우리나라에서 지명도 있는 작가 치고 달항아리 안그리는 작가가 없는 듯합니다. 잘팔린다는군요..^^;;
 



1970년대에 명반을 쏟아내었던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Yes의 가수였던 존 앤더슨의 공연을 보았다.

공연 당일에 백밴드가 미국의 음악 학원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어쩐지 티켓값이 싸더라... 연주는, 그러므로 크게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존 앤더슨의 목소리는 78세라는 나이를 잊게 했다. 경이로웠고 고음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Yes의 음악을 Yes 멤버(단 한 명이었지만)의 연주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존 앤더슨의 목소리가 너무 짱짱했던 지라 그가 은퇴할 때까지 계속 쫒아다닐지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도 아내도 Yes의 음악만 듣는다.  



이번 공연의 하일라이트이자 Yes의 명곡 중 하나인 Close to the edge 라이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다. 연주자들의 거침, 열정, 자기 탐닉이 곡의 통일성과 주제(스피리추얼 저니)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영국에 처음 와서 어학원을 다닐 때였다. 20대 초반인 어학원 선생님에게 예스를 아느냐고 물었었다. 내게 영국은 예스의 나라라고. 그 분은 자기 핸드폰 음악 앱에서 케이 팝과 제이 팝 걸그룹 목록을 죽 보여주었다. 알아? 글쎄... 한 두 그룹은 알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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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Paperback)
Yasmina Reza / Faber & Faber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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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가 쓴 코메디. 입소문을 따라서 나도 읽어보았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상연되었고, 유튭에서 한국어판 연극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세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친구들 중 하나가 거금을 치르고 그림 하나를 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림이 거의 단색의 한 화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의 단초가 된다. 허영에 빠져 저런 쓰레기에 거금을 쓴 것인가? 


읽으면서 계속, 너무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히 규정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뉘앙스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말싸움을 벽 뒤에서 듣고 있어야 하는 상황. 그 지리멸렬을. 그런 애매한 뉘앙스들의 뒤에 무엇이 놓여 있을까? 나는, 살인이 벌어지는 것으로, 아니면 그림을 파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겠지 하며 작품을 읽었고, 작가는 많은 관객들이 이런 결말을 예상할 것을 짐작하고 결말을 살짝 비튼다. 물론 이런 비틈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연극은 현대 회화에 대한 것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의 힘의 관계---푸코를 불러오든 헤겔을 불러오든---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이 연극의 기술적 장치들에 불과하다. 현대 회화니 철학이니 하는 이런 요소들이 이 연극을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데 관심을 가진 나같은 사람을 낚기도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연극은 뉘앙스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뉘앙스가 실체적 힘을 갖고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가볍게, 음... 프랑스적 삶에 대한 자기 성찰 아닌가,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현대인들의 편집증적인 삶의 양태들에 대한 기술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나는 후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의 그 눈빛이 나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그의 그 눈빛은 무엇이었을까? 경멸이었을까? 그가 그때 지었던 그 눈빛이 경멸의 눈빛이었는지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혹 나의 피해망상의 결과는 아닐까? 그렇더라도 그런 눈빛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삶의 일부를 부정당할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런 눈빛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제도나 법이 필요하지 않는가? --- 아마 현대의 필연적 발명품 중 하나는 법적, 제도적으로 규율되기 힘든, 이런 무수한 뉘앙스의 공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다시금, 모던의 조건, 혹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일런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사건들은 곧잘 이념화된다. 아동인권조례의 폐기나 교사에 대한 일정한 면책 조항의 도입을 촉구하는 것 등은 그런 이념화의 시발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이 법이나 제도로 쉽게 규율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즉, 뉘앙스의 공간에서. 그것은 폭력이었을까? 그것은 낙인이었을까? 그것은 학대였을까? 그걸 가지고 규율을 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과연 진상 학부모였을까? 등등. 문제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일단 문제가 되면 그것은 결코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견고하고 완고한 실체가 되어 버린다. 물론 답은 없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조건짓는, 현대성의 한 양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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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워털루에서 공연장이 있는 그리니치까지 배를 타고 갔다. 그리니치 사시는 분이 공연 시간까지 그리니치 여기 저기를 안내해주셨다.

피터 가브리엘의 나이가 나이인만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연주도 좋았고, 피터 가브리엘의 보컬도 좋았다.

곡의 절반은 신곡이었다. 대중적인 곡들로 셋리스트를 가득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 피터 가브레엘은 세상에 뭔가 할 이야기가 있어 신보를 내고 공연을 재개한 것이리라. (그의 신보를 사지는 않았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고 누가 얘기했다 하던가? 이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다는데,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근년에 제프 벡이나 예스의 베이스 주자 크리스 스콰이어같은 사람들이 타계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어, 작년까지만 해도 연주를 했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오전까지 활동하다가 오후에 죽는 것, 이런 삶은 참으로 이상적인 삶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도, 심지어는 죽음도 누구에게, 이제 거기서 멈추세요, 라고 말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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