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은 존재자들을 분별하고 그것들 사이에 올바른 질서를 부여하려 시도한다. 예를 들면 우주에는 자연 사물, 인공 사물, 관계들, 사건들, 속성들 등등이 존재한다. 아마 존재론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이 '등등'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방 안에 3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실에 대한 기술은 '이 방 안에는 ㄱ이 있고, ㄴ이 있고, ㄷ이 있다'로 완료되지 않는다. '그 밖에는 아무도 없다'가 첨가되어야 한다. 이 첨가는 철학적으로 곤란한 문제를 낳는다. 예컨대, 이 '그 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우주의 모든 사람들 하나 하나에 대해 그들이 이 방 안에 없음을 주장으로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가 럿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갈라짐의 단초이기도 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아궁이에 불을 때는 사건 ㄱ이 있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사건 ㄴ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사건 사이의 관계로 인과론이 거론되고, 이 인과론의 성격이 문제가 된다. 흄은 이 인과적 관계가 일종의 습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아궁이에 불을 때는 사건과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사건에 객관적으로 엄밀한 조건을 부여하여 이 두 사건 사이에 엄밀한 인과적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를 주관적 인과 관계, 후자를 객관적 인과 관계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둘 다 세계의 객관적 구조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예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연성의 기묘한 구조이다. 열 명의 존재론자에 대해 열 한 개의 존재론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자의성을 피하기 위해 근원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 근원적 고찰을 위해 사고 실험을 해보자. 흔하게는 형이상학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 예컨대, 우주에 주관성subjectivity가 없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우주가 우리의 우주와 같은 시공의 차원을 갖는지조차 결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그' 우주라는 특정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우주에는 수많은 주관성들이 있다. 그러면 만약 인간에게 눈이라는 시각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이 지금과 같이 두 개의 눈을 갖게 된 것은 우연성에 속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나에게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주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것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예컨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역시 또다른 차원의 우연성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우주에 존재한다는 이 우연한 사건은, 어떤 필연적 사실을 동반한다. 그것은 내가 만약 존재한다면, 이 우주는 내가 보는 대로, 그렇게 결정되고, 구획되고, 그러한 객관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서 나에게 드러나는 우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존재는 잠재성으로서의 우주를 현실성으로 고착시킨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나의 존재라는 우연성은 우주라는 우연성을 하나의 세계로 구획 짓는다. 이것을 사실적 필연성이라고 부르자. 최초의 필연성은 이렇게 등장한다. 그런데 나의 존재라는 말이 애매하다.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예컨대, 데카르트의 코기토인가?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유하는 코기토는 우연성으로서의 우주를 구획된 세계로 결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우연성으로서의 우주에 구획을 주는 것, 우연성으로서의 우주에 좌표를 주는 것, 그것을 우리는 몸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몸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나의 몸은 하나의 생물학적 사물로 존재론적 창고 안에서 분류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몸의 사실적 면모이다. 즉, 사실성으로서의 몸. 그러나 방금 본 것처럼 몸은 또 다른 면모, 말하자면 초월성으로서의 면모 역시 갖는다. 이 초월성으로서의 몸은 존재론적 창고 안에서 다른 어떤 사물 옆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의 좌표, 구획 등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초월성과 사실성이 우리 존재의 양의성을 구성한다. 주관성, 혹은 초월성은 존재론의 품목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품목의 열거를 가능하게 해준다. 혹은 "이 방에 세 명만 있다"라는 말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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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은 실재, 가능성, 시간 등등의 어휘에 정의를 제공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물리학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또 일상 언어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그리하여 이 체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예컨대, 체계 안의 한 점은 그 체계에 의해서만 위치를 지정받는다. 그렇다면 두 체계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 또는, 한 체계를 다른 체계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한 체계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체계를 다룰 때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요컨대, 언어는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 안에 있는 것으로서 나에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인이 어떤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한,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 예컨대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거기엔 우연성이 개입한다. 만약 인간이 천년을 살 수 있다면? 혹은 전세계의 문화권을 유목하듯 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한 체계 안에 놓인다는 말은, 역으로 인간이 그 체계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의 기술로서 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 역시 그러한 도구 집단의 하나이고, 그것이 도구인 한에서 그것의 의미는 자신 밖에서 받게 된다. 물론 언어라든지, 문화라든지 하는 것의 밖에 어떤 초월적 주체성, 예컨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것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피하려면 그것들의 발생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그 요소로서 인간 조건과 그 밖의 우연성 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한 기술에서 가치는 드러나지 않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들이받는 행위와 같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러한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기술할 수 없고,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러한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의 구조에 대해 사유해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즉, 가치는 인간 행위의 한 요소가 아닌가,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인간 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답하고자 하는 노력은, 말하자면 인류학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은, 예컨대 정의로움에 대한 다채로운 정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의들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인류학은 일종의 비판 철학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명증성의 기준을 설정하는데 실패한다면. 이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탐구이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 우선적으로 옳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이 담론의 닫힘에 대한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을 우리는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존재론은 너무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체성이라는 극 없이 실재라든지, 가능성이라든지 하는 개념을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철학자들에 따라서는 실재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없이 전자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이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간섭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체계들은 옆으로 나란히 있거나, 또는 위로 나란히 쌓여 있거나(환원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허물어진 경계 너머로 침범하고 섞이고, 병행하고, 진동하고, 먹히고, 모사하고, 등등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우연성에 지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원대한 의미에서 존재론은 역사의 가능 조건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론은 여타의 모든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질서 있게 정리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타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한계 영역에 부딪힌다. 예컨대, 연구실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우주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물리학자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물리학자는 한계 영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그 한계 영역을 우리는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은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공상과 비슷하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자가 자신의 연구 활동과 형이상학을 구분하듯이 존재론도 형이상학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명증성의 기준. 존재론은 이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존재론이 데카르트적인 족보에서 영원히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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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혹은 더 정확하게는 그렇기 때문에 출발점이 필요하다. 이 출발점이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단지 좀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이런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이는 요구에도 우연성이 개입한다. 나는 노자나 붓다나 콰인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의 취향과 관심, 교육 이력 등등에 따라서. 그러나 어느 출발점이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해 줄 거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다른 한편 내가 채택할 출발점은 이미 어느 정도 나의 초보적인 전망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전망 하에서 나는 나의 선택에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미국의 어느 대법원 판사의 말은 언제나 옳다. 


나는 아직 존재론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물론 푸코가 조롱한 것처럼 존재론에 개재해 있는 우연성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실증 과학들을 기초할 제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데카르트-후설적인 기획은 폐기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혹은 이론적 활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놓이는 평면을 찾아 확정해 놓는 작업은,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차원들의 혼란에서 빚어지는 사유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즉, 사유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 줄 철학자들로 하이데거라든지, 비트겐슈타인, 무어 등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사르트르를 선택한다. 나는 철학이 항상 구체적인 현실을 비춰 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폭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해보자. 예컨대, 철학자 중에는 감각 자료에서 실재를 구축하려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그리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안으로 사르트르의 경우를 보자.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흰 종이를 쳐다본다. 나는 그것의 형태, 색깔, 위치를 지각한다. 이 다양한 성질들은 공통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즉, 그것들은 그것의 존재가 나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들을 나에게 드러낸다. 그것들은 나에 대하여 있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사르트르의 "상상력"의 서론) 다시 말하면 여기 있는 이 흰 종이가 실재라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임의적이지 않은 채로(불투명한 채로) 거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결국은 같은 말이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실재에 대한 경험에는 그런 불투명성, 혹은 관성이라 불리는 요소와 부정성(내가 아님)이라는 요소가 함께 섞여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론적으로 전자를 즉자, 후자를 대자 혹은 넓은 의미에서 subjectivity라고 부른다. 이 subjectivity는 데카르트류의 사유하고 의지하는 코기토와는 다르다. 차라리 먹이를 향해 접근하는 지네에서도 이 subjectivity가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자. 이 경우에는 자신과 환경, 먹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subjectivity가 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존재론이 앞서 말한 구성론자의 것보다, 혹은 무어-비트겐슈타인류의 상식-기반 명제들보다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자의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출발점일 뿐이다. 사르트르 이후, 적어도 프랑스 철학계 내에서 철학적 흐름은 바뀐 것 같다. 예컨대 푸코나 데리다의 경우, 후기의 그 윤리적 전회를 차치하고 말한다면, 굳이 사르트르와의 연결점 하에서 이들 철학자들의 사고를 고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는 다른 것 같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자아, 타자, 상상력, 그리고 앙상블(말하자면 인간들의 집합체) 등의 주제에서 사르트르와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관찰이 들뢰즈가 사르트르의 영향 하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사르트르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비판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 뿐이다. 사실 나는 상상력에 대한 사르트르의 경직된 이분법보다는 들뢰즈식의 유연함이 더 유망하다고 느끼고 있다. 사르트르가 워낙 경직된 구분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논리가 그의 철학 전반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당연히 한다.


어쨌든 출발점으로서 사르트르의 저작들을 차분히 다시 읽어나가려 한다. (다음 주부터 크리스마스 전까지 집 공사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메모를 여기 남길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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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사르트르적 구도는 지지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덜 확정적으로는 많은 보완이 필요하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예를 들면, 감정을 행동과 동일한 평면에 두는 이론은, 사르트르의 철학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정 현상의 다양성을 포괄하는데 커다란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뇌의 특정 영역에 생겨난 종양의 영향으로 사람의 인격(퍼스낼리티, 아이덴티티) 자체가 변한 사례가 수 없이 많은데, 사르트르적 이론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심리학자, 생리학자, 혹은 신경생리학자들이 의식에 관한 철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며, 이 영역에서만 보건대도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거나 다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철학이 언어 분석의 영역에서만 겨우 연명하고 있는 사정을 대강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측면을 보자. 사르트르적 구도에서는 수치심을 인식과 동일한 평면에 둔다. 그러나 사실 수치심은 사회적 감정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이것에 그토록 중대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한 것 아닐까? 수치심을 타자의 존재, 혹은 자신이 아닌 주관성에 대한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쨌든 좋다. 그러면 이 직관은 본유적인가? 예컨대, 아기가 그러한 직관을 갖고 태어나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수치심은 자아의 성장과 관련되는, 인간 아이의 발달의 한 계기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철학적 회의를 실행했을 때 그는 그러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한 성인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란 무엇인가? 인간 성장의 한 단계라는 우연성일 뿐이다. 동시에, 데카르트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성이라는 개념이었는데, 이 개념 역시 어떤 시대, 어떤 사회라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 수 백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더 정확히는 내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것에 속하는 사유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가장 흔한 대답은 우리가 데카르트가 속해 있던 그 우연성에 여전히 속해 있거나, 혹은 그것을 습관적으로 계속 고집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수 많은 우연성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우연성을 어떻게 사유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우연성의 사유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연성은 비질서를, 사유는 질서를 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겔은 우연성에 방향과 형식을 주기 위해 이성을 절대화시켰다. 이러한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나 개념의 자연사에 대한 탐구와 개념의 사회사에 대한 탐구가 헤겔적 아이디어, 혹은 스피노자적 아이디어와 전혀 별개인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발생사라는 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관점을 안고 사유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쉬운 방법에 정착하고 마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적, 자연주의적 관점에 머무는 경우. 또다시 난관에 봉착한 것 같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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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쓰 베네딕트는 수치심 기반 문화와 죄의식 기반 문화를 구분한다. 전자는 "rely on external sanctions for good behavior", 후자는 "rely on an internalized conviction of sin."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적인 관심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정도차의 문제일 것이다. 


위의 구분에서 수치심이니 죄의식이니 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 혹은 문화에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는 개념의 혼란, 혹은 차원의 혼란을 야기케 한다. 바로 말하자면 이러한 개념들이 놓이게 되는 심리학적 차원, 존재론적 차원, 사회학적 혹은 인류학적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수치심은 내가 다른 주관성(타자)에 의해 사물화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의 시선 이론이 그렇다. 이를 다시 말하면 수치심은 타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인식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식이 사물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수치심은 주관성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치심 등을 위한 용어가 따로 있어야 한다. 사르트르는 감정을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로 정리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행동과 같은 평면에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감정의 하나로 분류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호랑이 앞에서 공포에 떠는 것과, 공공 앞에서 나의 치부가 까발려져 수치심에 몸을 떠는 것은 다른 현상이다. 후자를 위한 적당한 용어로,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affect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때 사물화되는 그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단순한 코기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독자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차적인 것은 수치심 등일 것이고 죄의식 등은 이차적인 것에 속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네딕트의 분류를 평가해 볼 수 있다.


존재론을 심리학에 그대로 투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제시해 주는 길을 하나의 아이디어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통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의 문제일 수 있다. 인류학적 혹은 사회학적 차원에로의 확장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존재론에서 수치심이나 자부심을 근원적인 범주의 하나로 제시한다면 심리학에서는 이를 모델로 하나의 이론을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런 이론은 프로이트보다는 아들러 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근원적으로 다분히 스피노자적인 아이디어로 보인다. 예컨대, 수치/자부심 모델은 억압 가설 이상의 설명력을 보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예컨대 이 모델은 특정 시대의 특정 사회에 매우 종속적인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런 이론의 구축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인생 동안 책상 머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방향을 따라 탐구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만일 그 도정에 깔려 있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들을 충분히 의식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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