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펑크를 내어 대타로 마라케시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덕분에 그 스케쥴에 따라 꽤 좋은 호텔에도 묵어보고, 가이드를 따라 모로코의 원주민이랄 수 있는 베르베르 사람들이 사는 아틀라스 산 마을에도 가보고, 낙타도 타보았다.

모로코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 공항에서 잡아 탄 택시에서부터 바가지를 당했기 때문에 시작부터 조금 긴장을 해야 했다. 아닌게 아니라 숙소 근처 제마 엘 프나 광장이나 광장 북부의 유서 깊은 염색 공장 지대 가는 길의 그 혼란스러움은 외지인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해 보였다. -좁고 포장이 잘 안된 골목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걷고, 외치고, 가게에서 빵을 사고, 그 틈을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와 노새 달구지가 비집고 지나가고, 길 가장자리에서는 퀭한 눈의 사람들이 손을 내밀며 동냥을 한다. 난생 처음 보는 북새통이었지만 곧 익숙해지기는 했다.

모로코에 조금 익숙해지려하자 떠날 때가 되어 아쉬웠고, 사원에 들어가 절을 하고 싶었는데 외지인은 사원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쉬웠고, 제마 엘 프나 광장의 노천 음식점이나 일반 음식점에서 파는 기름에 튀긴 물고기 요리를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내년에 다시 가서 사막 여행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제마 엘 프나 광장. 악기 연주도 하고 재담도 한다. 그러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웃고 하다가 동전을 던져 준다. 또 이렇게 사진을 찍고 있으면 바로 돈 달라고 한다. 우리에게 불어 아냐, 아랍말 아냐, 하고 묻기에 모른다고 했는데도 굳이 끌어다 앉혀 놓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재담을 끊임없이 늘어 놓는다. 모로코 사람들이 즐기는 모양을 감상하다고 동전 던져 놓고 몰래 도망 나왔다.


아랍 사람들이 모로코에 들어와 이슬람화시켰기 때문에 모로코에는 거대한 이슬람 문화 유적들이 많다. 위의 유적 이름을 까먹었다.


베르베르 사람들 집에 가서 먹은 타진이라는 요리. 닭고기에 감자, 올리브 등을 넣어 찜을 한 것 같았다. 기대보다는 썩 독특한 맛은 아니었다. 나는 튀긴 생선 요리를 더 좋아했다.


베르베르 사람들 동네. 자신들의 언어가 있으며 산악 지대에서 주로 산다. 관광 관련 사업, 양치기, 농작 등을 해서 먹고 산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다들 착하고 부지런해 보였다.


목요일마다 열린다는 베르베르 사람들의 장. 한국의 시골 장과 전혀 괴리감이 없다. 염소 파는 구역도 있고 닭을 파는 구역도 있다. 우리는 녹차를 샀다. 차주전자도 살 걸 그랬다.


아마도 유태인 거주 지역 사진일 것이다. 아주 옛날 스페인의 박해를 피해 유태인들이 모로코로 이민 왔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많이들 빠져 나갔다고 하더라.


이슬람 코란 학교 하나를 찾아 갔었는데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근처 골동품 가게에 가서 작은 병 하나를 사고 주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고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홀로 천막을 치고 살았다던 흰 수염 휘날리는 도인들에 관심이 많다고 하자 주인 양반이 이메일로 이슬람 철학에 대해 차근 차근 설명해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먼저 메일을 보내 봤지만 아직 답이 없다...-.-


모로코 마라케시 사람들은 정말 가난해 보였다. 중년대에 치아가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길을 물으면 앞장 서서 가이드하고 나중에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싫다는 데도 악착같이 따라 붙으며 흥정을 하거나 호객을 하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은 자아가 없거나 아주 작은 자아를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아란 생존하는데 아주 거추장스러운 도구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현대의 어떤 사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투쟁.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의 최종적인 승리. 그 현대 사상은 마르크스를 이렇게 비트는 것 같았다. 인간의 역사는 자아에 고착하는 사람과 자아에서 탈주선을 긋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그리고 자아에서 탈피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마라케시에서 나는 이런 관념론의 관념성을 본 것 같았다. 편집과 분열의 이항 논리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예컨대, 최소한 마라케시 사람들의 비자아와 고타마의 비자아를 구분해 줄 장치가 필요하다, 등등.


베르베르 사람들의 장터에서 가이드가 우리에게 귤을 주었었다. 그것을 맛있게 먹고 난 후 나는 내내 귤 껍데기를 손을 들고 다녔다. 길 바닥에는 더러 더러 귤껍데기가 뒹굴고 있었지만 차마 내 가 먹은 귤의 껍데기를 땅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강한 자아를 갖고 있구나...   확실히 자아가 문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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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메모에서 시간 간격이 꽤 있다. 집 공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 이 주제가 너무 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관성의 실질이 무엇인가? 자아인가? (물론 오늘날 누구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사적으로는 칸트-흄, 더 아래로 내려오면 후설-사르트르의 논쟁이 이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것들을 다시 차분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 지루하다. 비슷한 길을 좀 더 재미있게 걸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자아에 대한 사르트르의 착상의 근원에는 흄이 있다. 들뢰즈의 경우는, 사르트르의 자아 이론에서 시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흄까지 소급하여 들어가서 흄에서 다시 시작한다. 두 개의 계열을 그릴 수 있겠다. 흄-사르트르, 흄-(니체)-들뢰즈. 그리하여 문제를 이렇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들뢰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마 대단히 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요 몇 칠 집중적으로는 아니어도 조금 조금씩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시원한 철학책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아주 옛날에 읽었던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를 제외하면?).

 

들뢰즈 가타리의 책은 종합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하려 하고 있으므로. 또, 분열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의 그 유명한 귀절에서 알 수 있듯이 분열증적인, 분열자의 긍정적 관점 하에서 전체 기획이 수행되고 있으므로. 그리고 서문에서 푸코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인, 실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열자의 긍정적 관점을 실천 요강으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 실천적 부분과 존재론 사이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에게는 몸이 근원적 우연성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실재의 기획의 대상은, 이러 저러한 사물 대상이 아니라 인간실재의 존재 그 자체가 된다. 다시 말하면 사르트르는 자아 이전의 비인격적 장에서 출발하면서도 개체성, 총체성의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이다(사르트르적 관점에 따르자면 개체성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 즉 주어진 것이고, 총체성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즉 사실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훨씬 더 급진적이다. 기계라는 개념은 우주의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기계이다. 나의 손도, 저 태양도. 흐름이 있고, 흐름을 이어 주는, 흐름을 발생시키는, 흐름을 끊는 기계들, 그 기계들의 단속적 연결들만이 있을 뿐이다. 개체성도 총체성도 없다. 아니, 그러한 것들은 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엄격히는 환상 역시 실재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흥미있는 모델지만 즉각 드는 생각은, 그것은 마치 튜링 머신처럼 매우 추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각 층위에서의 자율성을 믿는다. 예를 들면 물리적 층위와 생물학적 층위에서는 다른 법칙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환원불가능하다고 믿는다(원자단을 들여다 보는 물리학자들이 진화론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의 책은 논증적이라기보다는 선언적으로 읽힌다(혹, 푸코가 서문에서 이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니었는지?). 논리적 간격은 선언으로 밖에 매울 수 없으므로.

 

정리하자면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비인격적 장의 환원 불가능한 부분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러한 존재론적 단위가 실천적 차원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면, 예컨대, 원시 사회가 고대 국가로 접어들 때, 혹은 현대의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사회는 끊임없이 위계화, 관료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 데, 이러한 현상을 사유하는 기본 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힘인가, 욕망인가, 혹은 희소성인가? 그리고 이러한 항들은 주관성을 어떤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가?

 

당분간 들뢰즈 가타리를 읽게 될 것 같고, 덕분에 존재론-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사회 존재론적 차원으로 관점이 순식간에 이동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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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과의 대화.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나. 건강과 지력 등이 유지된다고 한다면 나쁠 것 없을 것 같다. 그. 정말? 난 정말 끔찍할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몸서리를 치면서 혐오를 표하는 것을 보고, 그가 지금 과장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현재 삶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리하여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실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이는 반응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연기하게 된다. 죽음도 꼭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죽음은 우리가 삶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대부분 무효화시킨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나의 모든 행위들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곧 무효화될 것이므로.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계속 삶을 살아간다. 어떤 철학자는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은폐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란 실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사르트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매우 참신한 생각을 해냈다. 만일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일에는 우선순위가 없을 것이며, 이 일은 해도, 안해도 그만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의 독자성, 고유성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유한성 속에서 선택된 것만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우연성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그러한 것은 인간에게 실감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교사라면 내가 교사의 역을 연기하는 것은 실천적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학생들에게 숙제를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거의 아무런 실천적 의의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공자님이, 군자는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진리에 적중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마지막 페이지들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90이 넘은 중국 노인들이 구약 성경을 읽기 위해 히브리 언어를 붓으로 그리며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보통 놀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연세에, 차라리 다른 걸 하시는 게...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그리고 왜 하필 그것을? 이 중국 노인들의 위대한 점은 죽음이 실감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들은 90 노인 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에 대한 동양적 사고에 대해 그 분에게 이야기했지만, 뜻밖에도 그 분은 죽음의 현전, 유일신 개념 등이 심오한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양적 사고가 실제적인 의의를 갖고 있을 수는 있지만 또한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서구 중심주의라는 푯말을 붙여놓기 좋은 주장임에는 분명하다(터키 출신이다). --어쨌든 이제는 동양 중심주의라는 말도 나올 때가 되었으므로.


철학이 대단한 무언가를 전해 줄 수는 없다. 철학은 단지 정돈할 뿐이다. 우리는, 그래 그것이 맞다, 라고 느낄 수 있다. 그때 철학은 지혜에 속해 있던 것을 다시 진술한 것의 모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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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집공사를 하고 있다. 빌더들 일은 내일로 끝날 예정이고, 페인트 등 남은 부분은 우리가 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늦어도 새해가 오기 전까지 끝내는 게 목표다. 


(돈이 모자라므로 벽지 뜯는 작업같은 것은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내가 아니다.)


(업자들의 작업 종료 예정일 하루 전 상태. 그러니까 오늘 우리 집 상태.)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엌 유닛이 컨트리하다. 다른 한국 분들 집에 초대받아 가서, 그분들 부엌 해놓은 것을 보면 대부분 '모던'하던데, 우리는 그냥 컨트리하게 살기로 했다. 집의 형태 자체가 올드 패션이기 때문에 그에 맞추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모던을 섞으면 이상할 것 같으니까.  


그래 놓고 보니 신포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 모던이란 무엇인가? 가능한 한 곡선을 지우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배제해서 사물을 순전히 그 기능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파트는 모던의 대표적인 예이다. 더 크게 말하자면 모던이란 현대적 삶, 현대적 인간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예를 들면, 현대적 공산품이 그러하듯, 우리들 자신도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즉 잠재적 잉여라는 저변의 의식, 의미는 항상 기능 너머에서 찾아지므로, 현대적 삶에서 삶의 의미는 항상 삶 그 밖에서 찾아진다는 것 등등... 비극은 아니지만 종종 코메디로 느껴지는 것들... (예를 들면 다음 일화. 어느 금융인이 은퇴하여 휴양지 해변에서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 옆에 어떤 꾀죄죄한 남자가 누워 똑같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은퇴한 금융인이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요? 젊었을 때 열심히 벌어야 나처럼 일찍 은퇴하여 늙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러자 그 남자가 대꾸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걸로 보이요?" 아무렴, 스피노자처럼 영원의 상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우리의 삶이란 그저 인간 희극일 뿐...)


집 컨셉에 맞는 물건들을 찾아보자 해서 안틱 마켓에 갔다. 어마 어마하게 많은 물건에 어마 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거기에 우리에겐 너무 비싼 가격. 스탠드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하단이 무겁게 되어 있어서 안정감이 있고 디자인도 심플하고... 그러나 너무 비싸서 포기해야 했다. 수십년 전 공산품의 품질과 센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의 기획의 근본적인 성격은 소유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의 윤리적 전망은 크게 봐서 2500년 전 고타마와  다를 바가 없다. 고타마는 출가 후 아마 평생 한 벌의 옷만 지녔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기 작가답게 많은 돈을 벌었지만 번 돈을 주변 사람들에게 후하게 나눠줬다고 한다.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개인 소유물은 거의 없이, 책도 읽고 나면 다 나눠 줬다고... 모던에 대처하는 사르트르의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고타마가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유마 대사가 되어야 했을까? 아마 이들의 공통점으로, 이들은 소진되지 않는 뭔가, 말하자면 자기 중심이라든지 하는 것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한에서 물질은, 혹은 외부적인 것은, 혹은 우연성에 속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 그러나 공평하게 말하면 이러한 '경계 없음'은 경계 없음, 즉 어떤 뛰어넘음, 혹은 성취라기보다는 성격일 수도 있으려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아마 실존주의자들의 실책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사물로 보았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물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 앞의 꽃에, 아름다움, 연약함, 평화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정 나인가? 그러한 의미는 꽃이 나에게 강제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집은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물질적 실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혹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반영된, 나의 한 연장도 아니다. 아마 그것은 성장하고 쇠약해지기도 하는, 요구하기도 하고 야단하기도 하는,  말하자면 숨을 쉬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옛날 사람들이 물건에도 귀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사물에 어떤 생명성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마 그것은 하나의 태도일 것이며, 세계관일 것이다. 물론 세계관은 우연성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금 실존주의자들의 실책을 되풀이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그러나 문제는, 적어도 내게는 이 우연성 너머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 어쨌든, 가든의 부름에 내가 응한다는 것과 가든과 나의 관계가 '그것은 나의 것'이라는 관계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것이다. --이는 자아에 대한 문제이고, 동양 종교들의 주된 주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아란 존재치 않는다는 진실을 살 수 있는가?)


아마 이 모든 잡상의 근원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고 말해왔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딱 두 세대가 90년 가까이 살던, 크고 아름다운 가든이 딸린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나는 이 집의 이름을, 이 가든을 아름답게 가꾼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쉴라스 가든"이라고 부를 생각이다(아직 팻말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때 내 앞에 놓이게 되는 사상은 "연속성"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연속성 안에서 나를 파악해야 한다는 강제를 느낀다. 모든 종교는, 내게는 연속성에 대한 사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던은 비연속성의 삶의 태도라고 본다. 비연속성, 예컨대, 이전 사용자와 현재 사용자 사이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 이전 사용자의 사용 양태가 나의 사용 양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장치를 강구하는 것, 그것이 내가 보기에 모던적인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후기 이전의 푸코는 모던의 사상가이다. 무엇보다도 현대 철학자, 사상가들은 대부분 비연속성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모던의 삶에 편안해 할 것이다. 내 생각에, 흔히 말하는 포스트 모던이란, 모던의 극단으로 보인다. 모던에 대한 모던적 사고 = 포스트 모던. 그러나,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비연속성을 믿는 것 같지 않다. 아이가 있고 집이 있고, 부모님이 있다. 사상가들은 이런 요소들을 고려에 잘 넣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삶의 의미를 두려는 보통 사람들의 태도를, 철학자들은 자기기만의 일종으로 폄하하려 한다. 현대적 철학자들이 틀렸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 이상을 보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모던 이후를 사고한다는 것은 연속성에 대해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연속성에 대한 사고가 모던 이전과 같은 양상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양상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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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것은 모두 사르트르에게 배운 것들이다. 물론,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들은 많다. 예컨대 철학 학파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미국의 실용주의자들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는 앞의 메모에서 내가 난삽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몸의 존재론적 의의를 밝힌 것은 사르트르의 독창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물론 두 철학자들 사이에 완전한 일치란 있을 수 없고, 사르트르 혹은 사르트르적 관점에 서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러 저러한 사항에 관해서 간단히 코멘트해 보자.


1). 5.6, 그러니까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말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동의하기 어렵다. 전자. '나'의 언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후자. 비트겐슈타인 등은 인식론적 방법의 궁지를 깨닫고 이른바 언어적 전회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전회가 유일한 대안이었을까?


2). 5.64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관점에서 고찰된 유아론이 순수 실재론과 통한다고 말한다. 이때 주체는 외연이 없는 한 점이 될 것이다. 사르트르라면 이 말에 100% 동의할 것이다. 즉, 단적으로 사르트르의 기획은 순수 실재론을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순수 실재론이란, 예컨대 이 커피잔의 하양은 커피잔에 속하는 것이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뜻한다. 또 하나, 주관성이 외연이 없는 점이라는 것은 주관성이 내부 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주관성을 세계의 한계로 보는 한에서 주관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속한다는 것을, 그것은 스스로 드러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사르트르는 주관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것은 내부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사르트르는 주관성의 형식적 차원을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실질을 해명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근대 철학의 커다란 특질 중의 하나는, 칸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주관성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분명히 근대 철학의 연속성 안에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근대 철학의 붕괴가 일찌감치 선언된 지금, 사르트르 역시 그 잔해 밑에 깔려 있는 죽은 철학 아니겠는가 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을 주체의 철학이니 의식의 철학이니 하면서. 그러나 삶에서든 학에서든 똑같은 격언이 적용된다. 여기가 에덴이 아닌 한 이름이 실체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그 근대 철학이란 무엇인지? 당신이 말하는 그 주체의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러나 보통은 이렇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리 예의바른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숙고이고, 숙고는 항상 구체적인 것을 향해 흐른다고 믿는다.


다시 정리하자면 문제는 주관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때 주관성은 주관-대상 이원론에서의 그 주관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로서의 주관성이다. 이런 형식적 관점에 섰을 때 주관성의 실질에 대해, 그러므로 세계의 실질에 대해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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