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 

철학의 고전들은 대체로 비슷한 외양을 하고 있다(물론 예외는 많다). 긴 문장에, 긴 문단에, 두터운 페이지. 그리하여 철학의 고전들을 읽는 방법도 대체로 정립되어 있는 것 같다. 가능하면 아침 시간에 2시간 정도를 들여 매일 매일 읽으라. 그리고 반복적으로 읽으라. 칸트를 번역한 최재희 교수의 말에 따르면, 칸트는 10번 정도 읽어야 감이 온다는 것이다. 결국은 시간을 아낌없이 채워넣으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퍼스도 칸트를 그렇게 2년 동안 읽었고, 하이데거도 후설의 <논리 탐구>를 읽고 또 읽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그러한 조언을 따라 철학의 고전들을 읽는다. (요즘은 후설과 씨름하고 있다.) 처음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읽었는데 몸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아서 5시로 늦췄다. 그리고 요즘은 서머타임에 적응하지 못하여 5시 30분으로 또 늦췄다. 


반복적으로 읽고, 또 많이 쓴다. 그러면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 이해라는 것이 어떤 심오한 통찰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원래 거기에 글자 그대로 적혀 있었던 것을, 이전에는 어떤 신비한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는, 거기 그렇게 적혀 있으니 적혀 있는 대로 읽는 것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경험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그 말을 특정하게 정의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자는 일반적 의미의 경험이라는 말의 사용을 아예 피할 수는 없다. 저자는 혼용하여 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로서는 그 둘을 잘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구별을 못하면 경험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는 문장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둘을 잘 구별할 수 있게된다고 해도 대수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칸트 책의 한 문장에 대해 삼 십분 동안 해설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철학적으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책을 꼼꼼히 읽다보면 오탈자를 많이 찾아내게 된다. --- 그런데 그것이 과연 대수인가? 그와 같다.   


2. 코로나 바이러스.

영국은 이제 하루 사망자가 600명에 육박하고 있다. 1000명을 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국가적 재난 사태에 정부를 비판하는데 신중하던 언론들도 이제는 폭발하고 만다.  


영국은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다. 다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의료진에 대한 보호일 것인데, 보호 장비의 보급도 늦고, 의료진에 대한 코로나 검사도 지지부진하다. 장차 의료진에 대한 집단 감염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의료진이 여럿 사망한 상태이기도 하다. ---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지만 어찌 어찌 운이 좋아서 최소한의 피해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으면 했지만 현실의 매서움 앞에 그런 희망은 너무도 갸냘픈 것임을 깨닫는 중이다. 


이제 영국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하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일 사망자 1000명이 넘어서면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 옆 나라 프랑스는 중국에서 마스크 몇 억장을 수입하고,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마스크 공장에 가서 마스크 생산량을 몇 배로 늘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데 영국에서는 마스크가 효용이 있는지 어떤지 과학적 분석을 하고 앉아 있다. 오늘 마스크에 대해 보도한 비비씨 방송의 마무리 말은 이랬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마스크를 쓰려 한다면 의료진에 갈 마스크가 바낙나지 않을까요?" --- 이걸 왜 국민들에게 말하는지? 정부에 대고 해야 할 이야기 아닌가?  


이미 봉쇄가 내려진 상태이긴 하지만 운동, 산책 등을 이유로 한 외출은 허가된다. 우리도 매일 산책을 나간다.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지킨다. 길을 가다 맞은편에 사람이 오면 최대한 길 한 쪽으로 비켜선다. 그런데 그런 거리두기가 마트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트에서 장보는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가능한 마트에 가지 않기로 하고 있다.   


3. 로저 워터스.

로저 워터스는 올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를 돌며 30회 이상의 공연을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도 8월달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공연 티켓을 사놓은 상태였다. (공연 하나를 보려고 비행기 타고 뉴욕까지 날아간다는 것은 고전적으로 생각해서 미친 짓이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의 미친 짓을 막으려 하기 보다는 조장하는 스타일인지라 매번 미친 짓을 벌이고 만다...) 그런데 몇 칠 전에 코로나 사태 때문에 공연을 내년으로 연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양반이 70대 후반의 나이를 향해 가는지라(43년 생이더라) 내년 일은 내년 가봐야 알 것 같다. 


(얼마 전 멕시코의 유대인 단체가 로저 워터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고, 미국 프로야구 협회에서는 로저 워터스의 반-유대주의 의혹에 따라 로저 워터스 공연 광고를 다 치워버렸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스폰서가 여럿 취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억압 정책을 비판하기만 해도 반-유대주의 의혹을 받는다. 그리고 반-유대주의라는 표딱지를 받는 것으로 공인(정치인, 예능인 등)의 경력이 끝날 수 있다. 나는 대학때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관련 강의를 들었었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산 무화과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나온 로저 워터스 신보의 마지막 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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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eoee 2020-04-1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weekly 님, 유럽에서도 그런 걸 강조하는 공부 문화가 있나요? 10번 읽기, 100번 읽기, 몇 년 붙들고 있기 등등... 타력을 강조하는 종교적 태도가 세속화된 건가, 싶기도 하고, 궁금하네요...!

weekly 2020-04-13 18: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제가 글을 좀 오해받게끔 쓴 것 같네요.:) 제가 알기로 서양에 그런 문화는 없구요. 근대 이전엔 서양에서도 인문학 = 주석학이었으니 확립된 고전을 거듭 읽는 것이 연구 활동의 거의 유일한 내용이었겠지만요... 제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퍼스(칸트), 하이데거(후설), 데리다(후설) 등에서처럼 고전에 대한 철두철미한 이해에 기반해서야 그만한 깊이의 후속 철학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논문들을 읽다보면, 이 저자는, 예컨대, 자신이 다루고 있는 후설의 그 저작을 거의 읽지 않았구나, 혹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제 나름으로 내린 결론이, 기본으로 돌아가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동네 마트. 이제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마트 직원 한 명이 마스크를 쓴 채 한번에 서너 명씩만 마트에 입장시킨다. 그리고 보다시피 사람들이 2, 3미터 간격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 그러나 계산원들은 아무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다. 어제는 나도 휴지와 계란을 살 수 있었다.)


현재 영국의 분위기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들기 직전의 긴장된 상태이다. 이미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아직은 이탈리아 수준으로 재앙적이지는 않다. 엊그제 어떤 뉴스에서 전문가들에게, 영국이 이탈리아의 운명을 따라갈 것인가에 대해 물었는데, 불행하게도 전문가들은 그렇게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영국은 이번 주부터 모든 국민들이 가택 연금 상태다. 정부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집에 붙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 그리고 나는 한국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국민들에 대한 가택 연금 없이 코로나 사태를 이겨내고 있는지가 궁금하여 유튭을 뒤지기 시작한다.


내 생각에도 영국은 이탈리아의 전철을 따를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전면적인 가택 연금이 시작되었는데, 꼭 필요한 일, 이를테면 출근같은 경우는 예외였다. 그런데 월요일, 화요일(지금은 어떤지 확인해 보지 않았다) 런던 지하철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찬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 마스크를 한 사람도 거의 없다. 영국 확진자의 1/3이 런던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상황인가?


한국 관련 유튭 동영상을 본다.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다.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하철 내부, 개찰구, 에스컬레이터 등을 일일이 방역하고 있다. 지하철 곳곳에 손세정제가 놓여 있다. --- 이러니 서울같은 대도시에서 소규모 집단 감염이 발생하고 감염자들이 지하철을 타고 다녀도 대규모 감염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씨에서 방영한, 마스크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동영상을 본다.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댓글들은 일치단결해 있었다. 만일 마스크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의료진들은 왜 마스크를 하는 것일까? 마스크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싶어도 마스크를 구할 수 없으니 포기하고 살라는 얘기겠지? --- 그리고 이탈리아, 스페인 상황 뉴스를 본다. 그곳 사람들도 이제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다. 우주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방역하는 장면도 보인다. --- 이 모든 상황을 그동안 죽 지켜보았을 것이면서도 영국 정부는 그냥 손을 놓고 있다. 국민들에게 개인 보건을 철저히 하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현재 영국에서 가장 기가 막히는 뉴스는 의료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진에게 보호 장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잘 준비되어 있고 잘 보급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보호 장비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오늘 비비씨 뉴스 사이트에 중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한국 의료진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 장비를 갖추고 있는가를 보도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 반면 영국 의료진들은 보호 장비가 부족하여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두 발을 감싼 사진들이 올라오고 있다. 


인공 호흡기라든지, 자가 진단 키트라든지 영국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쓰나미를 이겨내기 위한 방책으로 잘 준비되고 있다고 장담한 것들이 있다. 그런데 오늘 뉴스를 보니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준비되고 있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정부에서는 자가 진단 키트를 곧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제조사에서는 정부에서 아무런 제조 오더도 받지 못했다는 식이다. 영국은 그냥 쓰나미를 쓰나미로 맞기로 했나 보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엊그제 영국 정부는 의료적 약자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등의 자원 봉사를 할 사람을 25만명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나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튼 24시간만에 40만명이 자원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시민들이 연대감으로 똘똘 뭉치는 것은 어느 사회나 비슷한 것 같다. --- 특히 이탈리아에서, 보호 장비도 제대로 없어서, 자신도 감염될 것이 뻔히 보임에도 환자들을 버리지 않고 진료하다 쓰러져간 의료진들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특히 영국과 미국(그리고 아마도 일본)의 경우, 정치 지도자들이 사태를 얼마나 빨리 파악하고, 사태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리하여 얼마나 빨리 대책을 수립하느냐에 따라 피해의 규모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영국의 경우에는 준비할 시간이 꽤 있었는데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비판이 외신을 통해 틈틈이 전해진다.(DW 뉴스같은) 


(여튼 이렇다... 우리도 집에 콕 박혀 있고, 어제는 올 들어 처음 잔디를 잘랐고, 마스크는 없지만 마트에 다녀와서는 꼬박꼬박 손을 씻고 그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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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 yeo 2020-03-27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에서는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소상공인 대출이니 착한 임대인이니 하는 정책으로 시간을 끄는 실정에, ˝살려는 드릴게˝냐며, 그 다음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 같습니다. 여하간 평소에 좋다고/나쁘다고 여겼던 특성들이, 현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기능을 하고 있어서 얼떨떨한 기분도 들어요. 지나치게 사소한 증상으로 과도하게 병원을 찾는다던 지적, 건강에 대한 집착이, 어느 순간 자발적인 예방을 하게 만든 것 같고요 (타인을 감염시켜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이유로 이뤄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의료인들의 순전히 기술적인 연대를 보면서, 도덕이라는 범주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좁은 땅에서 집약해서 살면서 유통인력을 갈아 넣은 만든 유통망 덕분에 사재기도 나오지 않은 것 같고요. 반대로 비말 감염이 아니기에 굳이 KF 인증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건강하면 빨아쓰는 일반 면마스크를 껴도 된다고 하지만 강박적으로 일회용 KF94 마스크를 사려고 매일 약국 앞에 줄을 서고 힘들어 하는 풍경에 대한 지적도 있었고... 여하간 유럽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네요..

weekly 2020-03-27 17:5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러모로 같은 생각입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영국 사람들은 대체로 낙관적으로 침착성을 유지하는 반면, 한국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것이 스테레오 타입이든 어떻든 간에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특성이 한국이 코로나 사태에 나름 잘 대처하고 있는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엘리트 계급의 멜더스주의(이번의 경우에는 집단 면역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를 논외로 한다면, 영국이 이번 사태에서 보이고 있는 혼란스러움의 상당 부분은, 영국의 국가 모델이, 한국이 개입주의적이라고 한다면, 방임주의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은 직전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 문제를 대처하는데 무능함을 보였기 때문에 탄핵되었다는 특수성, 영국은 10년간의 긴축 재정으로 국가 의료 체계가 극도로 쇠약해 있는 상태라는 특수성 등 온갖 사항들이 다 고려되어야 하겠습니디만...). 사회-국가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시민들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한국 사회에서는 특유의 개입주의(흔히들 오지랖이라 하는)로,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로 나타날 것입니다. --- 어제 미국 입국자 하나가 코로나 유증상 상태에서 제주도 여행을 했다고 온갖 비난을 받는 장면을 봤습니다. 확증자 동선 공개(개인정보 공개)가 인격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가장 나쁜 사례이기도 하지만, 이번 일로 차후 해외 입국자들이 지역 감염을 일으킬 가능성은 상당히 감소할 수 있겠지요. 이런 오지랖, 간혹은 전체주의적이라 비판당하기도 하고, ‘한국이 싫어서‘와 ‘헬조선‘에 있어 상당한 지분을 형성하는 이런 오지랖이 한국이 이번 사태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집 앞에 있는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8시에 문을 열지만, 아마도 7시 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을 것이다. 8개나 되는 계산대마다 카트들이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장바구니에 당장 필요한 것만을 담았다. 우리 앞 줄에 카트에 물건을 잔뜩 실은 영국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가 뒤에 서자 다른 물건을 더 사는 척 하며 뒤로 슬쩍 빠져주더라. 우리 바구니를 보고는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이었다. ---영국에서 이런 일은 흔하다. 자기는 계산할 물건이 많고 저 사람은 소량이면 흔히들 자리를 양보해 준다. 암튼 사려고 했던 달걀과 화장지는 사지 못했다. 영국 여기 저기서 패닉 바잉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한국과 영국 정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대처는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첨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법은 심각하게 형이상학적이다. --- 그 심오함에 나같은 범인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뜻이다. 한 열흘 전에 영국의 수상은 집단 면역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인구의 60%가 항체를 갖게 되면 바이러스는 더 이상 의학적 약자에게 침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인구의 60%가 감염되도록 하는 것이 영국 정부의 정책인가? 아니면, 과학적 숙명론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인구의 60%는 감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일까? 영국 정부의 정책 목표는 무엇일까? 한국의 경우는 조기 검진을 통해 감염자를 빨리 찾아내어 격리하고 치료하여, 추가 감염을 억제함과 동시에 치명률을 낮추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영국 수상이 강조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영국의 경우는 감염을 억제하거나 치명률을 낮추는 것이 정책 목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영국 방역 당국의 목표는 의료 체계의 붕괴를 막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므로 영국의 과학자들은 텔레비젼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리 위험한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네들은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과학적 증거를 살펴 보면,' '과학적 증거에 따라' 라는 말을 꼬박꼬박 덧붙이지만 이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 과학적 증거가 지금 도대체 얼마나 축적되어 있겠는가? 지금 치명률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1% 이상인데, 그렇게 되면 영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몇 만명이 죽어나가야 한다. 영국 수상이 매일 기자회견에 데리고 나오는 고문 과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언론에 이야기한다. (어느 뉴스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이 과학자에게 집단 면역이 되려면 인구의 몇 퍼센트가 감염되어야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까 이 사람이 60%라고 대답했다. 진행자가 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다시 묻는다. 16%? 아니, 60%. 진행자의 헛웃음. 세상에 이런 블랙 코메디가! 그래서 나는 이 고문 과학자를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라고 부른다.)    


그래도 이번 주부터 영국도 정책 방향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오늘(금요일)부터 학교를 닫을 것이며, 일일 검사 양을 확대할 것이며 등등의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글쎄... 정책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기존 정책의 타임 라인에 따른 대책들인 것인가? 바뀐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나로서는 영국의 정책이 철학적으로 하도 심오해서 잘 판단하지 못하겠다. 만약 정책이 바뀐 것이라면 영국은 어마어마한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될 것이다. 이삼 주 안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사태가 영국에 휘몰아칠 것이라 하면서도 영국 정부는 그것을 자연적(필연적, 피할 도리가 없는) 현상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상은 충분히 확보되었는가? 의료진을 보호할 마스크 등의 수급은? 은퇴한 의료인이나 의과대 학생들을 동원할 필요는 없는가? 등등은 영국에서는 국가 단위에서가 아니라 해당 기관들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 아니 어제 오늘부터 부랴부랴 국가 단위에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 사람으로서 내게 답답한 것은, 영국 정부의 잘못된 방향에 대해서 언론이 거의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국가적 재난 사태에 대해 정부에 힘을 실어 주고 국민적 통합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정부와 다른 목소리는 자제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한국의 언론들이 아무리 심각하게 정파적이고 비열해도 한국의 언론 지형이 영국처럼 획일적인 것보다는 지금의 사태에서 국민들을 더 안전하게 해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정부가 실수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승냥이 떼 속에서 한국 정부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투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에서조차 심각하게 정파적인 한국의 언론 상황은 물론 최악이지만, 정부가 영국 정부처럼 엉망인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 물론 그 근원에는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한국과 서구 사회가 서로 다른 경험을 겪었고, 그러므로 다른 관념, 다른 기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놓여 있을 것이다.


아침에 간 마트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명 보았다(어디서 구했을까? 혹은 확진자일까?). 계산원들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각 상점은 패닉 바잉 상태이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보면 감염세가 쉽게 줄어들 것 같지가 않다. --- 치료제나 백신이 어서 개발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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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에, 우리도 코로나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국의 이마트에 해당하는, 테스코에 장을 보러 갔다. 물(커피 만들 때 쓸 용도), 화장지(화장지가 다 떨어져 갔으므로), 파스타(사태 장기화 대비용)를 사려고 했었는데, 물을 제외하고는 선반이 텅텅 비어 있었다. - 여기서 질문! 파스타야 그렇다치고 왜 사람들은 화장지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 멋대로의 생각으로는 화장지가 문명적 삶의 마지노선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오늘 아침 근처 마트에 가서 화장지를 사는 데 성공했다. 개장 시간에 맞춰 갔는데도 카트들이 떼로 몰려들어서 옴싹달싹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사지 않았을 브랜드의 화장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도 곧 동이 나겠지 싶었다.)


엊그제 영국 총리가 봉쇄 정책에서 지연 정책으로 전염병 정책을 변경한다고 선언했다. 봉쇄 정책은 한국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발본색원 정책을 의미하는 것인 것 같다. 지연 정책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광범위한 확산을 막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니 과부하로 인한 의료 체계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검역, 역학 조사, 검사 등은 최소화하고, 중증 환자의 치료 위주로 해나가겠다는 뜻일 것이다. 총리는 경증 환자는 자가 격리(그러므로 자가 치료?)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다 만약 이탈리아처럼 중증 환자가 폭증한다면?) 


마트에 사람이 몰리고, 선반이 텅 비는 품목이 더러 생기는 것 말고는(아, 스포츠 경기들도 취소되고 있고 재택 근무가 늘고 있다), 아직 영국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못봤다. (그리고 나의 아내도 오늘 아침에 인도 출신 친구와 '기생충'을 보러 극장에 갔다. 기생충을 보고나면, 특히나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많을 것 같아서 차마 가지 말라고 말리지 못했다.)  

    

(서양 사람들은 마스크 쓰는 것을 싫어한다. 싫어한다? 이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라면 차라리 마스크를 쓰고 동네나 동네 번화가를 다닐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유난떤다는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동양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에 비해 주위의 시선을 더 의식한다는 말은 반쪽만 맞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다. 다만 그 시선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문화마다 다를 뿐이다. 서양에서 그 시선은, 예컨대 털털하고 쿨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젊은 남자가 용모에 너무 신경을 쓴다면 주변으로부터 게이냐는 질책을 받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정말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할 것이다. 병이 더 광범위하게 퍼지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하나 둘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면, 그리고 마스크 수급이 원활해지면, 그때서야 마스크를 쓰는 것이 쿨함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는 예외 조항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 오랜 만에 블로그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여튼 아까 유튭으로 한국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미국 NBC 방송에서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한국에 대해 취재한 것이 있었다. 박원순 서울 시장과도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박원순 시장에게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얻은 교훈 한 두 가지를 말해 달라 하자, 박원순은 투명함과 신속함을 들었다. 후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전형적으로 한국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전자transparency는 지금까지는 서양적인 가치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찾아보면 동양의 사상적 근저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가치이지만... 나는 한국 정부가 투명성을 정책의 가장 커다란 기조 중 하나로 표방하고, 그것을 정책의 강점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대단히 뿌듯함을 느낀다. 좋은 정부란 시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정부이고, 이번 정부는 투명성이 얼마나 위대한 가치인지를 잘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직 한국이, 그리고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그래프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이번 사태가 운명과의 싸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바이러스가 지수적으로 확장하는 그래프가 있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른데도 감염 추이가 얼추 동일한 그래프를 따라가는 것 같다. 인간의 개입이 그래프의 기울기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인구의 반 이상이 감염될 수 있다는 경고를 통해 일종의 숙명론을 받아들였다. 반면 한국은 공격적인 발본색원 정책을 통해, 감염자 수준을 일정 수치 아래로 억제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듯 하다. 이 믿음은 한국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고, 당국의 정책 판단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정부는 이런 식의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의 공공 의료 자원은 이번 사태가 아니더라도 현상 유지에 급급한 수준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 운명과 씩씩하게 맞서 싸워서 최종적으로, 너무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Wish people were all happy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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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는 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영화 기생충을 보게 되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탔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그게 칸느 대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튼 기대를 잔뜩 안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조금도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웃음거리와 적당한 긴장감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깔끔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인의 추억’을 개봉관에서 봤었고, 그러므로 봉준호가 천재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감독에게 이 정도 작품은 소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그만큼 내게는 이 작품이 가벼운 오락 영화 정도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살며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 영화에 칸느를 줬을까?” 아내의 대답은 이랬고 나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일본 영화 같잖아. 서구 사람들이 일본 스타일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계급 우화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관객들과 심리적 수싸움을 벌이는 감독의 수완이 놀랍다는, 즉 기술적 차원에서의 감탄 말고는 이 영화에 돌려 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적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장면인, 이재민 대피소에서의 아버지의 대사를 보라. “무 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다.” 여기 영국 말로 filler, 즉 구색이나 맞춰 시간이나 때우는 식의 무의미한 대사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의 긴 나레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영감도 없고 뻔한 대사를 길게 늘어놓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두 계급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드러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계급의 절대적 고착 과정, 즉 한 계급의 필연적 전락을 다루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만약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계급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이 맞다면, 즉 웃기면서도 괴기스러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계급 우화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감독은 가장 피상적인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룬 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송강호 가족들은 반지하에 사는 백수들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사는가? 영화에서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는 딱 하나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계획이 있다. 그들은 그 계획을 깔끔하게 실현해 낸다. 코너링이 좋은 송강호를 비롯해 가족 각자의 개인기는 출중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반지하 방바닥에서 뒹굴며 그렇게 사는가? 답은, 주인집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그 집을 차지하게 된 반지하 가족들의 행태에서 드러난다. 그 반지하 가족들은 그 좋은 주택에서조차 반지하에서 살 때와 똑같이 술이나 퍼마시면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냄새는 반지하 집에 살면서 몸에 배인 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DNA이며, 그네들의 운명인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냄새 때문에 주인집 남자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냄새, 자신의 계급, 자신의 운명,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해석된다. 그리고 이 관점이란 하층 계급 사람에 대한 경멸의 관점이다. 예전에, 일베라는 사이트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그곳의 여기 저기를 구경해 본 적이 있었다.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자기 계급에 대한 혐오였다. “내가 중국집 배달을 하는데, 잘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고, 못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니, 진상들은 전부 못 사는 아파트에 몰려 있드라.” - 미안하게도 영화 기생충은 이런 관점에 머물러 있다. 아내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관점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이 영화가 우리 속의 아픈 무엇인가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말이다.



2. 크리스마스에 맞춰 아마존에서 타겟 메일이 왔고 거기에 켄 로치 감독의 BBC 시절 작품을 묶어 놓은 것이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치고 주문을 했다.  CD 6장. 한 장에 두 편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총 18시간 30분의 분량이란다. 지금까지 4편의 작품을 보았다.


켄 로치가 BBC에서 한 작업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던 ‘Cathy come home’은 두 번을 보았다. 한번은 혼자서, 또 한번은 아내와. 1970년 영국에서 순진하고 선량한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전락을 거듭하다 결국 홈리스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뺏겨 버린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더블 인컴이었다가 출산 때문에 남자만 돈을 벌어야 했는데, 운전을 하던 남편이 차사고를 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내와 한참을 토론을 했다. 그 젊은 부부가 만일 유죄라면, 그것은 모던 사회의 엄중함에 무지한 죄라는 것이다. 한번 집을 줄여 이사하면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집을 줄여서는 안된다. 수입 총액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는 한 있던 수입원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된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 쪽이 직장을 포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러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 등등. (두 남녀 주인공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그들이 홈리스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켄 로치는 주택 보급률이 너무 낫다는 현실과 아이를 홈리스 부모에게서 빼앗는 관료제 기구의 잔인함에 촛점을 맞춘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의 전후 첫 세대가 성년이 되어 교육, 결혼, 취직, 주택 마련 영역에서 맞닥뜨리게 된 사회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추상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의 일상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모던' 사회는 IMF를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실존적 이유(살아남는 것과 일정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 때문에 결혼과 출산, 다시 말하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계기들을 포기하게끔 강요하는 사회가 정의상 모던 사회인 것이다. 


(영화는 밝고 선량하던 캐시가 각종 보호소를 전전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쉽게 화내고, 책임을 남들에게 돌리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가족을 재건하는 일이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편은 더 이상 캐시를 보러 오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게 된다. 이미 노숙의 길에 접어 들었지도 모른다. 세상 어디든 젊은 남자에 대한 보호 장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까. 그리고 이쯤 되면 이 두 젊은 부부는 하층 계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게 된다. 뻔한 진상 짓을 하며 가족에 무책임한 사람들! 영국말로는 쉐임리스라고 한다. 그들에게 보내는 경멸은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안도이기도 하다. )



3.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은 로저 워터스의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도 전곡의 작사와 거의 모든 곡의 작곡을 로저 워터스가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월’은 주인공 핑크의 탄생부터, 그가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는 과정, 그리고 기어이 그 벽을 부수고 마는 장면까지를 묘사하고 있는 컨셉트 앨범이다. 핑크가 벽을 쌓는 이유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모던 사회의 실존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안전해질 수는 있지만 새로이 고립감이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연대감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연대감이다(즉, 파시즘). 문제는 벽 자체를 허무는 것 뿐이고, 핑크는 결국 벽을 허문다. 그러나 ‘더 월’에서 핑크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벽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상정되는, 매우 흉측하게 생긴 벌레라는 존재로부터 벽을 허물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사르트르의 유명한 “우리는 자유롭도록 처단되었다” 라는 명제에서처럼 우리는 벽을 허물도록 처단되었을 뿐이다. 즉, 사르트르의 명제에서 자유는 일종의 징벌이기 때문에 자유를 회피할 방법을 계속 모색하게 되는 것처럼, ‘더 월’에서 핑크는 벽을 부수라는 징벌에 대해 새로이 벽을 쌓을 궁리를 늘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에서의 회피와 벽을 쌓는 행위는 우리 존재의 영원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순환성의 깊이 있는 구조가 락 앨범인 ‘더 월’을 주조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더 월’을 듣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을 배경으로 독립성 있는 곡 위주로 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 그대로를 듣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에서는 싱글 컷이 가능한 독립적인 곡들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들리게 될 위험이 있다. 나는 취향상 후자의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컨대 ‘컴포터블리 넘’ 같은 곡들을 싫어하게 되고 만다. 

앨범의, 짧지만 인상적인 곡은 ‘The Thin Ice’ 라는 곡이다. 가사의 구절인 “If you should go skating / On the thin ice of modern life . . .  / Don't be surprised when a crack in the ice / Appears under your feet” 거의 우리의 관용구가 되었다. The thin ice of modern life보다 정밀하게 우리 시대의 실존을 정의할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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