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준 소논문 마감 시한이 오늘까지다. 그런데 아직도 500 단어 정도를 더 써야 한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끝날 것 같다.

오늘 할 일은 논고의 초반부 존재론과 후반부 형이상학에 일관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명제가 뜻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면 내가 할 일은 다 끝난다. 시작이 럿셀의 판단 이론이었으므로 마무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은 명백히 쇼펜하우어적 영향 아래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 비트겐쉬타인의 철학 안으로 유입되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동기와 이러한 유입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는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 아래, 말하자면 명제 이론적 주체가 포섭될 수 있을지를 탐색해 보았고 마침 문헌적 증거를 찾았다. 나는 이러한 관점(말하자면 세계관)이 물리학적 관점, 예를 들면 비트겐쉬타인이 자주 인용하는 헤르츠의 역학적 세계관과 융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쟁점이 옮겨짐을 느낀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말하자면 럿셀식의 인식 주체-객체 구도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을 19 세기 과학사의 한 논쟁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럿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헤겔식 관념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학사에서는 그러한 반발이 마흐에게서 발견된다. 둘의 성향과 관점은 다르지만 인식 대상(주로는 감각 자료) 위에 자신들의 전체 체계를 쌓아 올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마흐의 격한 경험론적 성향에 반대한 주요한 인사 중 하나가 헤르쯔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럿셀의 순진한 경험론에 진저리를 낸 사람이 바로 비트겐쉬타인일 것이다. 그렇게 헤르쯔와 비트겐쉬타인이 만나는 것 같다.

주체-객체의 구도는 이들에게 사라진다. 그 직접적인 귀결은 사고의 자율성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명제는 뜻을 가질 수 있다. 럿셀에게서 명제의 의미는 완전히 실재에 귀속된다. 그러나 비트겐쉬타인에 있어 명제는 완전한 의미에서 실재와 동등하다. 다만 실천에 있어 명제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 될 수 있으려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제한이 있을 뿐이다.

사고는 실재와 구별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물리학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궁극으로 삼는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가? 물리학은 마치 수학을 궁극으로 삼는 것 같다. 완전히 비물질적인 세계. 내 눈 앞의 이 사과보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원자들이 더 실재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식의, 어떤 것이 더 실재적이냐는 질문은 시대착오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다. 답을 한다면 종이 위에 적힌 수식 하나가 우주 전체만큼이나 실재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환상이나 미신없이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만큼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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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주체에 대한 언급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는 규칙을 환기할 뿐이다.

과학의 예를 들어보자. 과학, 예를 들자면 물리학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지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즉, 보편성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뉴턴의 역학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뉴턴이 한 일은 사과와 달의 운동에 동일한 방정식을 적용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뉴턴이 한 일은 사과와 달의 운동에 동일한 운동 법칙이 적용될 수 있으려면 그 방정식이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를 밝힌 것이다. 뉴턴이 한 일이 사과와 달의 운동에 동일한 운동 법칙이 적용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 아님에 주의하자.

이 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예로 들어보자. 이 이론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 이론은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상관없이 우주에 동일한 방정식을 적용할 수 있으려면 그 방정식이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인쉬타인이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상관없이 우주에 동일한 방정식이 적용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님에 주의하자.

보존 법칙은 선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떤 보존 법칙이 깨진다는 것은 그보다 상위 수준에서 다른 보존이 지켜짐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질량 보존의 법칙.

이런 것이 지시하는 것은 우주가 이해가능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진정 이해할 수 없는 것은(그러므로 신비한 것은) 우주가 이해가능하다는 것이다."(아인쉬타인)

비슷한 버전의 비트겐쉬타인의 말: "It is not how things are in the world that is mystical, but that it exists."(6.44)

그러나 이런 식의 언급들은 비트겐쉬타인 스스로의 금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금언을 어기는 것이다. 저런 언급들은, 우주에는 어떤 보편적인 법칙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증명할 수 없으므로 그에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느낌은 "신비롭다"는 감정을 동반한다... 라는 식의 말을 에둘러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 방정식은 우주의 구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주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측정치를 주면 결과값으로 우리가 일련의 숫자값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명백히 파인만주의자이다. 나는 파인만이 비트겐쉬타인보다 철학적으로 깊다고 느낀다. (물론 옆집 아저씨도 형이상학적 잡설에 짜증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파인만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물리학이든, 철학이든, 언어학이든 탐구의 전제로서 문제 영역에 대한 어떤 구조를 전제하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철저하게 도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조에 은연 중에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행위를 나는 철학적 유치함의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트겐쉬타인의 "논고"는 유치하다. 그 유치함이 "논고"가 끼칠 수 있는 해악 중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고"는 철학자가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을 때 쓸 만한 책의 전형과 같은 것이다. 말해질 수는 없으나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스스로 드러나는 것? 언어에 한계를 설정하고 그 한계의 장막 뒤에 어떤 가치를 숨겨두려는 철학적 사기.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 장막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언어적으로 분명하게 말해졌을 것이다.

드러난 만큼, 표현된 만큼만 존재한다. 더 많이 드러날 수록 더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 곧 선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피노자주의자다.

존재에 한계를 긋는 것을 나는 철학적 퇴행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한계는 그어질 수 없다. 신이 아니라면!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말은, 가능한 최대한 말하라는 의미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상정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를 긋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금지는 언제나 실패한다. 아 프리오리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 프리오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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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9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1-11-30 18:06   좋아요 0 | URL
하하 반갑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선택가능한 유일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나는 럿셀의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단초로 "논고"를 이해하려 하고 있다. 럿셀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근본적 비판은 명제는 뜻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 의미는 우리가 명제의 가부를 알기 전에 명제의 참, 거짓 가능성(이것이 명제의 뜻이다)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 명제의 그림 이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의 직접적인 귀결 중 하나는 그 참, 거짓의 "가능성"을 말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논리의 명제들이 그렇다. 이 명제들은 언제나(!) 참이다. 그러므로 토톨로기로 취급된다...

그러면 판단 이론 자체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최종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비트겐쉬타인은 "논고"(5.542)에서 매우 명시적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모호하다.

"It is clear, however, that A believes that p', 'A has the thought p', and 'A says p' are of the form '"p" says p': and this does not involve a correlation of a fact with an object, but rather the correlation of facts by means of the correlation of their objects."(5.542)

애초에 비트겐쉬타인은, 예를 들어 'A believes that p'를 인식 주체 A와 명제 p 사이의 이항 관계로 생각했다. 그러나 객체와 명제(혹은 사실) 사이의 관계란 개념을 불만족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이를 객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 혹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로 대치시키고자 했다. 결국 비트겐쉬타인은 인식 주체를 그 주체의 (말하자면) 심적 상태(사실)로 대체해 버린다. 그리하여 저 명제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즉, 각 사실들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로 대치된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를 주목한다. 하나는 이리하여 비트겐쉬타인에게 인식 주체란 개념이 파기되었다는 것이다. 5.542 다음 명제에서 비트겐쉬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is shows too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soul -the subject, etc.- as it is conceived in the superficial psychology of the present day."(5.5422)

나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럿셀리안 독트린에서의 이탈이다. 인식론적, 혹은 심리학적 주체 개념에서 탈피한 후 비트겐쉬타인은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을 끌어들인다. 나는 이것을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노트북을 읽고보니 쇼펜하우어의 영향인 듯 하다.-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 형이상학적 주체는 세계를 한계 짓는다. 어떤 식으로? 세계를 언어적(논리적) 공간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예컨대, 눈은 우리의 기관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세계(감각 자료)와 만난다(유아론). 마찬가지로 언어는 형이상학적 주체의 기관이고 형이상학적 주체는 그것을 통해 그것의 세계와 만난다( 이 역시 유아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체 안의 사실들이다. 말하자면 스피노자적 우주의 양태들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논고 서두 부분의 존재론이 펼쳐지는 공간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주체 안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These correlations are, as it were, the feelers of the picture's elements, with which the picture touches reality"(2.1515) 같은 문장들이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 측면은, 5.542이 선언적, 혹은 방법론적인 명제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5.542에서 비트겐쉬타인은 'A says p'를 '"p" says p'의 형태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명제가 언급되는 모든 맥락에서, 즉 바라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언급하는 그 모든 맥락에서 그것을 명제 자신이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겠다는 것이다. 논고 전체에서 명제는 그렇게 다루어 진다. 그리고 그렇게 다루는 이유는 명제를 말하고 판단하고 믿고 바라는 식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논고 전체를 이런 맥락에서 파악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전제에서 논고가 일관되게 이해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형이상학적 전제는 완전한 헛소리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헛소리를 기반으로 한 명제들이 일관되게 해석되고 유의미한 결론들을 산출할까? 잊지 말자, 우리의 모든 명제들, 사상들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이런 헛소리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만일 우리가 철학자라면 그것들이 전부 헛소리임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사다리임을 안다. "He must, so to speak, throw away the ladder after he has climed up it."(6.54)

이상이 논고에 대한 나의 이해 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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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말이다:

"My work has extende from the foundations of logic to the nature of the world." (Wittgenstein's notebooks, 79)

거기에 나는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나는 알았노라고.

어제 나의 고민은 사태(Sachverhalt)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였다. 사태의 위치가 애매했고 심지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비트겐쉬타인이 실수한 것일까? 그러다가 비트겐쉬타인의 노트북에 딸려 있는 서신 발췌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읽었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atsache[사실] and Sachverhalt[사태]?" Sachverhalt is, what corresponds to an Elementarsatz if it is true. Tatsache is what corresponds to the logical propduct of elementary propos when this product is true. The reason why I introduce Tatsache before introducing Sacherhalt would want a long explanation."(Wittgenstein's letter to RUssell, 1919)

사태를 비트겐쉬타인의 실수로 넘겨 버려서는 안되리라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저 밑줄 친 부분(내가 쳤다)을 이제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대략은 이렇다. 출발은 럿셀의 판단 이론이다.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가장 근본적인 비판이자 대안은 다음과 같다:

"we must be able to understand a propostion without knowing if it is true or false."(notebooks, 98)

(나는 이런 말을 나의 어떤 친구에게 하기가 너무 두렵다. 그 친구는 철학에 문외한이라 바른 소리를 너무도 잘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 아니야? 저런 거 하는 게 철학이야? 정말 말장난이네...ㅉㅉㅉ")

럿셀은 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비트겐쉬타인은 저 기준을, 스스로 판단하기에, 충족시켰다. 나는 지금 논고 전체를 저 문장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자. 럿셀과 비트겐쉬타인의 철학적 야망은 같았다. 즉, 인간의 심적, 정신적 상태를 최대한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럿셀은 이 기획에서 좌초했다. 판단 이론의 실패가 그 적나라한 징표다. 좌초한 이유도 명백하다. 럿셀이 자신의 철학의 기초로 영국의 경험론적 전통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나는 이걸 럿셀리안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이제 비트겐쉬타인에게 주어진 과제는 저 기준을 충족하되 인간의 심적 상태에 대한 언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해"라는 단어를 공적인 어떤 것으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다시피 비트겐쉬타인의 해답은 명제의 그림 이론이었다. 그림 이론이란 명제가 현실에 대한 모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태"라는, 말하자면 잠재적인 사실을 도입하여! 이런 맥락에서 사태, 대상, 명제의 뜻(sense), 논리적 형태(logical form)에 대한 요구 등에 대한 논의가 딸려 나온다.

똑같은 맥락에서 "My fundamental idea is that the 'logical constants' are not representatives"(4.0312)라는 문장도 이해된다. 단순히 대표할 어떤 것이 세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올바른 논리적 표기법이 갖춰야 할 기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논고"의 논리학에 대한 언급들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논고"가 그리는 세계상이란? It is as it is. 내가 느끼기로 이 세계는 철학자들에게 아주 친숙한 세계다. 철학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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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7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1-11-27 17:18   좋아요 0 | URL
럿셀의 판단 이론을 비판한 후 비트겐쉬타인은 노르웨이 오지로 혼자 연구를 하러 떠나려 합니다. 그때 럿셀이 비트겐쉬타인에게 대강 구상만이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하여 비트겐쉬타인이 구술해 준 것이 "Notes on logic"입니다. 이 문서에서 비트겐쉬타인은 "명제의 가부를 알기 전에 우리가 아는 것, 즉 명제의 뜻(sense! meaninig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합니다. 당시 비트겐쉬타인이 갖고 있던 해답은 명제의 양극성 이론입니다. "[A] proposition has two poles, corresponding to the case of its truth and the case of its falsehood. We call this the sense of a proposition."(notesbooks, 99) 그러나 이 이론은 여러가지로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비트겐쉬타인은 방법론적인 방향전환을 하여 우리가 명제의 뜻을 알 수 있으려면 세계와 명제가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에 대해 탐구합니다. 그 결과가 논고의 서두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명제들입니다. 논고 자체의 논리로 보건 문헌적인 증거들로 보건 이 이야기는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논고 전체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 중 하나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논고 전체를 한 단어도 빼먹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는 야망에 붙잡혀 있답니다. 그러나 아직 덜된 상태에서 논문을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속이 좀 상합니다.

암튼 말씀 감사드립니다.^^
 


(http://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salvator-rosa-philosophy)

어제 오전에 일이 잘 안되길래 털고 일어나 내셔널 갤러리에 갔다. 가볍게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런던이 이런 게 좋다.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무료다. 다빈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건 유료다. 신경을 자극받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겼다. 내년 이월까지라는 것만 확인해 두었다.

이 방 저 방 거닐면서 그림들을 둘러 보았다. 내 요즘 취향은 방에다 걸어두면 어울릴 만한 그림이라서... 추상화가 더 구미에 당긴다. 그래서 고전 작품들로 가득한 벽들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적당한 주의만을 기울이며 그림들을 둘러 보았다.

그러다 이 그림이 눈에 딱 들어왔다. 왜냐고? 스피노자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목을 확인해 보니 "Philosophy"다. 게다가 저 손에 들린 라틴 문구는, "Be quiet, unless your speech be better than silence"란다...-.-

그대의 말이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 말할 가치가 없는 것임에도 말하기를 고집한다는 것은 그대가 비윤리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럿셀은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몇 년이 지난 후 호된(severe) 비판이었다고 회고한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에 좌절하여 심지어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받고는 학문함에 있어 처음으로 자신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 모든 기록들은 그의 개인적 기록이나 서신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공적인 기록에 있어서는, 심지어 그의 자서전에도 이 사건이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럿셀은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데 전혀 게의치 않는 사람임에도 말이다. 럿셀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까... 이런 걸 생각하다보면 내 가슴도 아프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이 비판의 학적인 측면을 매우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비판의 윤리적 측면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추측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은 아마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문제를 이해하고도 책을 계속 쓰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건 선생님이 사악하다는 뜻입니다." 럿셀의 상처는 자신이 사악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음에서 오는 상처였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런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비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철학은 철학함 자체가 항상 문제시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라, 저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모세의 십계명이다. 젠장, 보지 말았어야 할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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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1-2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문제를 이해하고도 책을 계속 쓰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건 선생님이 사악하다는 뜻입니다." 럿셀의 상처는 자신이 사악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음에서 오는 상처였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부분에서 빵~터졌네요..ㅋㅋㅋㅋㅋ 사악하다는 한 마디 때문에 연구를 포기하다니..그러고보면, 럿셀은 참으로 윤리적이었네요. 역시 럿셀은 정치를 하면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ㅎㅎ

weekly 2011-11-27 17:23   좋아요 0 | URL
아마 실제 그런 대화가 있었다면 비트겐쉬타인이 사용했을 단어는 "dishonesty"였을 겁니다. 당시의 무어나 비트겐쉬타인, 럿셀 같은 사람들을 특징짓는 단어는 아마도 지적 결백성, 혹은 지적 결벽성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