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빌 가든에 다녀왔다. -발음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푸른 잔디, 갖가지 수목들, 연못... 이것 좀 봐, 저곳 좀 봐 하면서 떠들다 보니 내가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기념품 가게에서 노트 두 권을 샀다. 하나는 한국에 있는 이모에게 줄 것이고 하나는 내가 쓸 것이다. 이모에게 줄 것은 영국 분위기가 물씬 나는 표지로 골랐다. -그래봤자 메이드 인 차이나이긴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한 일년만 지나면 내가 많이 진보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는 즐거웠다. 나는 지금 많은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들에 답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많이 넓어지고 깊어질 것 같다. 일년 후에 지금의 내가 고투하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이 끔찍하게 쉽고 명백한 것들이라 짜증스러워 하는 나를 상상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반면, 일년 후에도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수준의 고민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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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디터를 이맥스로 바꾸었다. 안녕, JEdit. 제이에딧은 프래그래머용 에디터다. 그래서인지 들여쓰기에 문제가 있다. 문단 구별을 빈 줄로 할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들여쓰기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리 저리 해결을 찾아 보았지만 실패. Openoffice의 Writer를 시험해 보았만 나의 넷북에는 너무 무거웠다. 나는 끊임없이 Crtl + S를 누르는데 Writer의 반응은 두려울 정도로 느렸다. 결국 이맥스. 다이 하드.

2. 학원 가는 길. 나의 몸은, 마치 충직한 말처럼 등 위에 올라앉아 졸고 있는 주인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어느 역에선가 지하철을 갈아타 입구 바로 앞에 섰고 그 문이 열릴 때 내렸다. 발 가는 데로 걷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지금 집에 가는 길인지 어디 가는 길인지 모르겠더라. 구내에 붙어 있는 안내표지판을 보니 나는 킹크로스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렇다면. 습관은 생존에 도움이 된다.

3. 소논문을 해결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다 머리 안에 공동을 느껴 잠시 쉰다고 누운게 오늘 아침이다. 잘 잤다. 솔직히 이 소논문이 소용에 닿을지조차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것이 전부인양 붙들고 있다.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것이 전부인냥 붙들고 있지 않는다면 이 소논문은 결국 포기되고 말리라는 것이다. 소논문은 나의 충직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것의 충직한 말이 되어야 한다. 습관처럼 그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을 뮤즈 여신의 왕림이라고 부른다.

4. 어제 기차 간에서 비트겐쉬타이의 노트북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발견했다. 웬지 나에게 힘을 주더라.

I am almost inclined to give up all my eff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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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 물론 철학사적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다.

"It is indeed possible to make up words, but I cannot associate a thought with them."
                                                                    -비트겐쉬타인(현자와의 대화에서)

나는 전기 비트겐쉬타인에게서 이러한 얼굴을 더 일찍 발견했어야 했다!!!

(나는 5.542와 논고 초반부의 온톨로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찾아야 한다. 답은 헤르쯔의 역학 모델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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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나의 소논문의 오류가 드러나고 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한정된 자료를 갖고 급히 써낸 글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우길 수 있는 만큼은 논리가 선명하고 문헌 근거도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해답이 너무 쉬워 보인다는 것이다.

럿셀의 판단 이론-명제의 뜻-그림 이론으로 연결되는 구도는 맞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 간의 충돌을 과장했다. 그러므로 5.542에 대한 나의 해석은 너무 일방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형이상학적 주체에 대한 강조도 과도하다. 분명한 것은, 비트겐쉬타인이 형이상학적 주체를 통해 논리 공간 개념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논리 공간 개념을 형이상학적 주체(혹은 영원의 상 아래서 바라봄)와 연결시킴으로써 건축술적인 기교를 발휘한 것 뿐이다. -이런 장치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나는 비트겐쉬타인을 너무 관념적인 철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너무 쉬운 해답을 고안한 철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의미는 내가 그의 사고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 징표를 나는 나의 소논문의 조잡함에서 발견한다. -기분 좋은 아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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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 썼다. 내가 생각하던 논리대로 글을 완결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프린트해 달라고 해서 첫 페이지를 읽어보고는 기분이 안좋아졌다. 엉망이었다. 참고 문헌을 이용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심히 불안해 졌다. 일단 다 썼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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