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강사가 휴가를 가서 다른 반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한 반에 한국인이 네 명이나 되었다(1/3). 우연히도 수업 주제 중 하나가 성형수술이었다. 수업 교재는 BBC 다큐먼터리이었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의 한 클리닉에 내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성형수술은 딱 좋은 토론 주제다. 학생들 사이에 토론을 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 학생이 4명이나 포진해 있는 클라스에서 성형수술을 주제로 다룬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한국이 성형수술 대국인 건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강남의 어떤 구역에만 클리닉이 400개나 된다고 소개했다. 심지어 한국의 7번째 성장 동력이라는 얘기까지 하더라(난 믿지 않는다). 다큐먼타리에서는 한류붐을 타고 아시아 여성들이 수술을 받으러 한국을 찾는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었다. 한 중국 여성은 수술을 통해 김태희처럼 예쁜 보조개를 갖게 되었다...


한국인 두 여학생이 토론 내내, 거의 90%의 점유율로 이야기를 했다.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는 취업에 있어 일순위는 실력이 아니라 외모라는 것. 강사는 놀라워 하며 몇 가지를 계속 지적했다. 첫째, 성형수술이 혹 남성 위주의 사회를 전제하는 것은 아닌가? 둘째, 직원을 뽑는데 외모를 일순위로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 아닌가? 셋째, 사회가 온통 외모에 집착하는데 대한 아무런 토론이나 반성이나 문제제기가 없는가? 넷째, 비용이 상당한데 그걸 어떻게 충당하는가?


한국의 세 학생들은 외모에 집착하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고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저 한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도 그저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는데 끝까지 참지는 못했다. 그러한 현실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많다, 다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혹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핀잔을 받을까봐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성형수술에 대한 토론이나 문제제기는 사실상 억제된다. 첫째,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자기 만족이기 때문이다(한 한국 여학생은 성형수술이 남성 본위의 사회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만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둘째, 그것은 사회가 강요하는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한국 학생들이 내내 이야기한 취지가 이런 것이었다). 


보다시피 토론을 억제하는 장치는 분명히 기만적이다. 한쪽에서는 그것은 개인의 선택사항이니 입을 다물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가 요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요점은, 그러니 입을 다물라는 것이다. 그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성형수술을 하건 말건은 개인의 기호겠지만 외모가 구직에 있어 일순위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는 현실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판 의식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분명히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외모에 대한 강요가 강력한 남성 본위 사회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성형수술이 일종의 자기만족이라거나 남성 역시 외모가 중요시되고 있다는 이야기로 이러한 현실을 가릴 수는 없다. 채용에 있어 외모가 일순위로 적용되는 경우는 대부분 여성에 있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강사가 제기한 문제들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첫째, 남성 본위의 사회를 반영하는 것 맞다. 둘째, 실력보다 외모? 난 잘 모르겠다. 나중에 다른 친구와 이야기해 본 결과, 요즘은 실력이 뛰어난 친구가 외모도 뛰어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셋째, 사실상 문제제기는 없다. 그것은 주로 여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언급하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 즉, 여성 스스로가 문제 제기를 해주어야 사회가 편안하게 그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성형수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아마 투자로 생각할 것이다. 취직에 있어서나 결혼에 있어서나. (나는 영어가 짧아서 이걸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아마 나의 이러한 생각들에서 분명한 편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형수술의 문제를 주로 여성의 영역으로 한정시키고 있다는. 나는 분명히 그걸 인정한다. 그러니 이런 식의 말싸움 뿐인 문제제기는 하지 말자. "니네들 남자들이 예쁜 여자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 나는 해결책을 찾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공감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유럽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을 때 남성들이 수혜적으로 그러한 권리를 여성에게 준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외모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할 수록 남자들은 안심을 한다. 외모가 주요한 기준이 되는 한 여성들은 남성들의 부차적 경쟁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이 문제에 있어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얘기다. 그럼 누가 나서야 하는가? 당연히 여성들이다. 여성부, 여성단체들, 여대 총학들... 이미 충분히 하고 있을까? 그 사정까지는 내가 파악해 보지 않았다. 그저 껍데기만 이야기만 하고 마는 시사 프로그램 몇몇을 보았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한국에서의 불평등한 성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말하자면, 속물적인 상업주의에 곁들여져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학원 시간이 변경된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학원에 한 시간이나 늦었다. 수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학생 카페에 가서 하이데거를 읽었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문자는 항상 종이장이라는 이차원을 넘으려 발버둥친다. 우리는 종종 성공적인 발버둥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 오즈라는 이스라엘 작가의 소설들. 하이데거를 다 읽고 나는 그저 가방에 책을 쑤셔 넣을 뿐이었다. 마치 현란한 특수 효과들로 가득 찬 스타워즈 2탄을 극장 맨 앞 자리에서 보고 난 직후처럼 내 머리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시간이 남아 또 헌책방에 갔다. 버나드 쇼우의 "성 조안"과 플라톤의 "테아이테투스"를 샀다. 버나드 쇼우는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인정받는 극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렇고 영국에서도 그렇고 버나드 쇼우 작품을 찾기가 힘들다. -한국에서는 교보문고 외서부, 영국에서는 헌책방 서너 곳. 집에 오면서 "성 조안"을 읽었다. 단순한 대화체 문장들. 나는 긴장하며 읽었다. 읽으면서 꼭 극장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엊그제 런던 레스터 스퀘어의 헌책방 몇 군데를 돌아 책 몇 권을 샀다.


레이 몽크의 럿셀 전기를 살까 하다가 두텁고 10 파운드나 되어 안사고 말았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안사길 잘 한 거 같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럿셀이 직접 쓴 자서전과 회고록, 서신들이 있는데 또 무슨 전기가 필요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군다나 두텁기까지 하다면.


사 온 책 중에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독/영 대역본이 있다. 예전에 독/한 대역으로 읽은 적이 있다. 하이데거는 문제적 작가다. 그가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해설하는 것을 들을 때면 이 사람 천재군... 이란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플라톤 강의를 듣고 머리 속에서 폭풍이 일었다고 했는데 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하이데거가 자기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면 머리 속이 온통 의구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게 철학일까, 말장난일까?


나는 하이데거의 "진리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그를 아주 집어치우기로 다짐했었다. 하이데거는 거기서 고대 그리스의 어떤 개념에 대한 기존 해석들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다른 문헌들을 조사해 보니 하이데거의 비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기 위해 실증적 연구 결과들조차 무시하거나 왜곡한다고 판단했고 그에 대한 관심을 아주 끊기로 했었다.


아까 화장실에 하이데거를 갖고 들어가 역자의 해설 부분을 넘겨 보는데 "Heidegger has shown the way to a new human being rooted in the Being of being..."의 a new human being 부분에 책의 원주인이 밑줄을 치고 물음표를 달아 놓은 게 보였다. 여백에는 "Rubbish!!! Heidegger is anti-humanist & anti-political."이라고 연필로 갈겨져 있다.


이런 것 재미있다! 나는 헌책의 여백에 책의 주인이 이리 저리 코멘트를 남겨 놓은 것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이 헌책의 진정한 매력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이 책은 1956년도에 나왔다)


하이데거의 나치즘에 대한 태도는 두고 두고 이 학자의 족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철학자가 나치즘에 대해 순진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나치즘에 대해 순진할 수 있는 사람은 철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젊은 날의 스피노자에 대해 당대의 어떤 사람이 "스피노자는 상인을 하기에는 너무 순진하다"고 썼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스피노자가 보여준 인간 심리에 대한 심오한 통찰들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순진함만이 철학자에게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순진함이다. 나는 그러한 순진함이 한 인간을 철학자로 만든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혹은 정치에 순진했다고 말할 때의 그 순진함은, 우리가 용인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골 무지랭이가 나치즘에 순진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순진함을 용인해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하이데거는 문제적 작가다. 단언하건대, 그는 철학자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쓰레기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전체 철학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심오한 통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고, 어쩌면 우리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학원. 휴가 갔던 러시아 여학생 복귀. 얼굴이 시커멓게 탔고 눈화장이고 까만 매니큐어고 영락없이 클레오파트라 이미테이션. 이집트 갔다 왔단다. 이집션 닮았다고 해주었다. 한 계절을 잘 놀았구나. 부럽다...


워털루역. 또다시 연착. 7시 20분 차를 놓쳤는데 연착 중이었다. 피난민같은 엄청난 인파가 연착 중인 기차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왔고 나는 콩나물 시루같은 기차 안으로 몸을 끼어넣는데 성공. 못 타고 만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기차 문이 닫히는데 몸을 기차 안으로 더 깊이 박아넣지 못한 승객 둘이 기차 밖으로 탈락. 그들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허탈한 듯한 표정이 잠시 스쳐가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라. 차 안에도 차 밖에도 짜증스러운 표정들이 하나도 없었다. -신기했다.


비좁은 기차 안에서 럿셀을 읽었다.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 야망이 커짐을 느낀다.


집에 와서 밥 먹고 아무 것도 안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테레비를 봤다. 뉴스나이트에서 내내 힉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이처럼 큰 뉴스로 다뤄지는 게 신기했다. 아마 CERN에 영국 국민들의 세금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지금 CERN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인류의 가장 커다란 지적인 모험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관심을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졸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지하철 연결 통로를 걷다 문득 내 발걸음이 빨라졌음을 느꼈다. 플랫폼이든 지하철 안이든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곳만 있으면 나는 책을 펴들고 럿셀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럿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나의 작은 논문을 아무 교수에게나 보내 버렸다. 한 이삼일 반응을 기다릴 것이고, 내가 기대한 반응이 없으면 다른 교수에게 보낼 것이다... 그 끝이 환한 빛깔일지, 암흑의 빛깔일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나는 하고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