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 예쁜 스페인 아줌마가 있다. 쉬는 시간에 혼자 넋두리같은 말을 잘 한다. 나한테 영국 온지 얼마나 되었냐기에 6달이 다 되어 간다고 했더니 자기는 2년이란다. 칠판에 "I miss my mother"같은 말을 큼찍하게 쓰더니 2년이란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고 말을 잇는다. 나는 숙제를 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대꾸도 못해주고 있었는데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버렸다는 말을 듣자니 나 역시도 6달이란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앞으로의 삶도 내가 의식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빨리 지나가 버릴 것이다. 나는 요즘 진학 문제에 막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막혀 있을 때일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답은 막혀 있는 것을 빨리 뚫어내는 것 뿐...


집중이 주는 피곤을 피하려 유튭에서 놀다 모처럼 피터 가브리엘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영국 냄새가 물씬 나는 아름다운 곡이다. 방황에 관한 노래, 모색에 관한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곡의 모든 버전이 다 좋다. 위에 걸어놓은 버전에서는 곡의 분위기와 멜로디가 오케스트레이션과 너무나 잘 맞는다(마치 오리지널 곡인 것처럼). 마무리 부분에서 베토벤이 부드럽게 접속되는 흐름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 곡이 방황과 모색의 노래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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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어제 런던에 있는 호일스 서점에 가서 중2인가 중3인 아이에게 선물로 줄 책을 샀다. 아무리 영어와 수학을 잘한다 하더라도 중2,3 아이에게 영어로 쓰인 수학이나 과학책은 무리인 것 같았다. 결국 리처드 파인만에 대한 만화책을 골랐다.


웹 검색을 하다가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Letter to Professor Feynman. 파인만의 철학, 혹은 인문학 혐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글이다. 나는 편지의 저자가 파인만에게 공정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렇다. 누구나 어떤 성향을 갖는다. 파인만은 깊이, 격조 등을 강조하는 문화적 취향을 철저하게 싫어했다. 그것이 파인만의 한 성향이다. 파인만은 그러한 성향을 자신의 탁월한 쇼맨쉽을 발휘하여 거침없이 드러냈다. 이렇게 드러난 것은 비판에 철저하게 허약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드러난 것은 과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의 저자가 한 일은 이 과장된 것, 허약한 것을 공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저자의 공박은 무의미하다. 


"[Feynman] wrote on [his] blackboard, prior to [his] last trip to the hospital, “What I cannot create I do not understand”. Some people may take this as a measure of [his] depth. I take it as a measure of [his] limitations."


나는 파인만의 저 말을 이 블로그에 인용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파인만의 깊이에 대한 증거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약 저 말이 파인만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파인만의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말하자면, 직접 경험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파인만이 경험하기에 비트겐쉬타인을 대단한 철학자로 치부하는 철학자들, 세잔의 그림 앞에서 경탄을 연발하는 비평가들,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문을 써대는 평론가들은 거의 다 가짜였다는 것이다. 파인만은 아마추어 드럼 연주자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다. 당연히 리듬에 대해 자신보다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의 존재, 색과 구도에 대해 자신보다 월등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언어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어떤 과학적 구도에 따라 해석되지 않는다고 그것들을 배척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태도였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파인만이 철학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언컨대 파인만의 주변에 뛰어난 철학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찮게도...


파인만은 기술자들을 존경했다.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 위의 편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할 때 나의 마음은 복잡해 졌다. 나도 반년 전까지 파인만이 존경하는 직군, 즉 용접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입으로 뭔가를 조잘대는 일을 하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관리부 사람이 내려와 내 옆에 쌓여 있는 코일의 인치수를 물으면 나도 그 사람의 위 아래를 쓱 쳐다보며 비웃듯이 말했었다. "30". 속으로는 "보면 몰라?"하고 비아냥 대면서 말이다. 나는 그것을 수도 없이 직접 다루었기 때문에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아도 제품의 인치 수를 바로 알 수 있다. 나의 으스댐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 제품과 무한할 정도로 반복되는 접촉.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기술자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공장 여기 저기를 다니며 뭔가를 주어다 쓱쓱 일을 해결한다. 사무실 사람들이 완벽한 무능 상태에서 얼어있는 장면과 뚜렷히 대비된다. 여기서 비밀은 경험과 관점이다. 기술자들은 도구를 다루기 때문에 그 도구들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관점을 갖게 되고 그것이 경험으로 쌓이게 된다. 사무실 사람들은 기성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하거나, 그것이 안되면 새로 구매하려 든다.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멋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히 기술자다.


그러나 기술자들이 아인쉬타인의 방정식을 만들 수는 없다. 기술자들은 자신의 경험으로 강화된 매뉴얼에 고착되어 있다. 아인쉬타인이 달리는 차에서 나온 빛의 속도에 차의 속도를 더하면 안된다는 제안을 하면 가장 크게 반발할 사람들은, 말하자면 기술자들일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여태까지 그렇게 벡터를 더해서 잘 해왔는데!


파인만은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과 일한 경험을 즐겁게 회상한다. 문제가 하나 주어지면 갖가지 시각에서 가능한 모든 아이디어가 제출되어 토론되는 과정. 고급 과학자들이 자신의 명성에 구애됨 없이 엉터리같은 아이디어도 기꺼이 제시하여 검토하게 하는 과정. 만약 거기에 기술자들이 앉아 있었다면 그네들은 결코 틀릴 것같은 말은 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제시한 아이디어가 반박당하면 얼굴을 붉히다가 스패너를 날리거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파인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제도에서 일할 때 나는 동료 한분과 방을 같이 썼다. 그 분은 타락한 여고생 이야기, 치정에 얽힌 살인극 같은 리얼리티 드라마를 좋아했고 나는 그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분은 책을 읽지 않았고 나는 밤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책을 읽고 거기서 새로운 사고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분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장 영역을 떠나면 그분과 나는 공통 관심사가 거의 없었다. 그 분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등등... 


나는 여전히 공장에서 손으로 직접 일하시는 분들을 존경하지만, 그분들의 한계도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분들을 존경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에 맞추는 것은, 계속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분들과 동일한 레벨에서 지속적으로 작업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파인만이 기술자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평범한 기술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자신의 발랄한 아이디어들을 계속 자제한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파인만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파인만이 그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고급 취향들을 경멸했지만, 그렇다고 대중 문화를 칭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CSI와 같은 뻔하고 뻔한 범죄 수사물이나 살인, 호러, 외계인을 다룬 그렇고 그런 소설들... 파인만이 브라질에 가서 고등학교에서 사용될 과학 교과서를 검토하다가 모든 교과서들이 다 쓰레기라서 경악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파인만이 그 분야의 위대한 전문가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논리가 다른 수 많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수준의 눈에서 보면 쓰레기같은 소설들, 쓰레기같은 음악들, 쓰레기같은 영화들, 쓰레기같은 철학들... 그러나 그러한 수준에 만족하고 그것을 즐기는 대중들(파인만 자신도 드럼 연주자로서 쓰레기같은 음악을 생산했다는 평을 다른 전문가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 파인만이 브라질의 과학 교과서에 경악을 했다면 다른 분야에도 경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그래서 파인만은 단순한 직관과 풍부한 깊이를 가진 강의를 대중에 제공하고자 기획했던 것 같다. 둘은 융합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결과가 쉬운,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기술자의 입장에서 보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록(난 1권만 읽었다)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리라. 기술자들은 파인만의 교과서보다는 차라리 파인만이 경악해마지 않았던 브라질 교과서를 선택할 것이다. -이런 것이 파인만의 딜레마다. 만일 파인만이 이해될 수 없다면 파인만은 그의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인물들에게 따르는 어쩔 수 없는 그림자다.   


소녀시대보다 스트라빈스키가 더 뛰어난 음악을 제공하는가? 이걸 질문이라고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파인만이 브라질 과학 교과서의 저렴한 품질에 경악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중 누구는 소녀시대가 만들어낸 제품에 경악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자신이 직접 읽고 공부할 교재로 하나를 선택하라면  파인만의 교과서보다는 브라질의 과학 교과서를 택할 사람이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찬가지 경우가 소녀시대와 스트라빈스키에도 적용될 것이다. 소녀시대/스트라빈스키, 브라질 교과서/파인만 교과서 사이의 간극은 매우 분명하다. 전자는 생각할 필요, 이해(감상)에 드는 에너지를 최소한 시킨 작품이고, 후자는 그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작품이다. 나의 기준으로 말하면 후자는 무한한 산출성을 갖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산출성은 우리가 직접 곡을 만들고 물리학을 연구하고 철학을 할 때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철학을 연구해 보아야 플라톤이 왜 철학의 신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창조 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파인만의 말이다. 이때 우리가 이해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의 깊이다. 창조 활동은 우리에게 잣대를 준다. 위대한 작품에 비교했을 때 나의 작품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잣대. 나의 작품에 들어간 공력과 비교했을 때 저 위대한 작품에는 어느 정도의 공력이 들어가야 했을까 하는 잣대. 그리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좌절감. 경외감. 그러한 좌절감, 경외감의 크기가 곧 그 작품의 깊이다.


파인만은 수학자들을 놀려 먹는 것도 좋아했다. 파인만의 성향과 관심, 재능에 비해 수학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어려운 학문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신포도" 취급을 한 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인만은 수학자들이 자신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파인만은 수학이라는 학문의 깊이를 수학자라는 살아있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직접 경험해 보고 인식했을 것이다. 파인만은 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경우, 파인만이 지속적으로 철학자들을 놀려먹는 것을 놓고 볼 때 파인만은 결코 좋은 철학자를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만약 파인만이 베토벤의 교향곡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파인만으로 하여금 베트벤을 경외하도록 이끈 음악가가 주변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나는 단순하게 생각한다. 주변의 멘토가 없었어도 당신은 베토벤을 경외한다고? 첫째, 당신은 진정으로 베토벤을 이해하고 경외하는가? 둘째, 세상에는 파인만같은 사람, 즉 스트라빈스키보다는 소녀시대를 경외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


결론은 이렇다. 우리 모두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일 수 없다. 당신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그 분야의 위대한 작품을 나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소개시켜 주어야 한다. 당신이 파인만이라면 물리학이 얼마나 흥미있는 학문인지를 당신의 깊이(즉, 실존)를 통해 나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화가라면, 피카소가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지를 당신의 깊이를 통해 나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철학자라면 당신의 철학의 깊이를 당신의 실존의 깊이를 통해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는 어떤 음악, 어떤 철학 작품, 어떤 물리학 이론이 아니라 음악가, 철학자, 물리학자... 등등이 된다. 즉, 문제는 실존이다. 그래서 다시 묻자. 예를 들면 진중권은 미학에 있어 소녀시대인가, 스트라빈스키인가? 나는 두말할 것 없이 전자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미학에 관한 글들에서 결코 그의 깊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위대한 교사라면 그것은 파인만이 학생을 교사로 만들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학생을 영원한 구경꾼으로 만든다. 첫째, 그렇게 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둘째, 그 자신 교사이지 못하기 때문에. 위대한 교사는, 위대한 전문가는 그 분야의 즐거움을 느끼고 전달해 줄 수 있다. 즐거움은 창조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없이 자신의 분야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다른 이의 이야기를 다시 전달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거기엔 허세가 잔뜩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종종 지나치게 야만인스러운 데, 그런 허세의 현장을 발견하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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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영국판 "오피스" 전편을 몰아서 보았다. 한 마디로 감동. 블랙 코메디에 대한 정의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이런 식의 코메디가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지 궁금해 졌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미국판 오피스 클립을 몇 개 보았다. 미국판 오피스에서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국판은 다큐멘타리같은데 말이다. 댓글들을 읽으니 미국판은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영국판과 다른 길을 간다고 한다. 좀 더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영국판은, 내 느낌으로는 진하디 진한 블랙으로 간다. 여기서 우리가 감히 웃어도 될까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친구랑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그런 "블랙" 코메디를 영국적인 특성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걸 어떤 "지역적" 특성으로 간주하기가 무척 망설여졌다. 나는 그걸, 말하자면 코메디의 정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피스"의 공동 작가 중 하나이자 주인공 역을 연기한 Ricky Gerva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edy is above all about empathy in my opinion and I think as an actor the more you empathise with a character the more engaging he will be to an audience."


나는 이 분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블로그에 비슷한 의견을 쓰기도 했다. 재능있는 작가나 배우는 아무리 비윤리적인 인물이라도 그에 섬세한 결을 부여하여 관객들로부터 감정이입을 빼앗아올 수 있다. 서투른 작가나 배우는 그런 섬세한 결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서툴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작품에 대해 어떤 것은 좋다, 어떤 것은 나쁘다는 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지, 이 작품은 나의 성향에 맞는다, 저 작품은 안맞는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도 많다. 줄여야 한다. 어짜피 나는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로 끝날 이야기다. 그리고 나로서는 당신 역시 스피노자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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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조정래의 소설에 크게 실망했단다. 조정래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품이 아니라면서 오랫 동안 화를 내었다.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책이 내 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난 몇 줄 읽어보고는 바로 책을 집어 던졌었다. 벽을 두드려 보면 그 집이 오래 갈 집인지 어떤지 알 수 있다. 그 소설에서 조정래의 문장은 완전한 날림이었다. 그 친구는 날림 공사를 한 시공사에 화를 내듯이 조정래에게 화를 내었다.


우리는 한참 빌리 엘리어트, 이문열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의 한 문장 "이제 그 겨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맞나?)를 읊자, 친구도 그 귀절을 안다며 맞장구를 쳤다. 좋은 작품은 좋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인가... 좋은 문장에서는, 내 관점인가 모르겠는데, 작가가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이문열이 좋은 소설가이긴 하지만, 안타까왔던 것은, 그의 작품에는 항상 이문열이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선택"은 아주 대놓고 나댄 작품이고. 이문열이나 조정래같은 대단한 작가들도 참을성을 잃고 하고 싶은 말(해야 할 말이 아니라!)을 함부러 내던지는 실수를 하는구나... 하는 점에서 나는 차라리 위안을 받는다. 그분들이야 망작을 하나 냈으면 잠깐 괴로워 하다가 새로 좋은 작품을 쓰면 될 테고... 그런데 이문열도 다시 좋은 작품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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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공사가 있어서 동네 스타벅스에 갔다 왔다. 아침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나는 맬컴의 비트겐쉬타인 회상록을 읽었다. 재밌다. "[An explanation] must be public."(p 47) 같은 문장이 나의 주의를 잡아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의 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테제는, 어떤 기준계를 상정하는 한 모든 판단은 측정이다, 라는 것이다. 거의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떤 토론의 참여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동의할 수 없다는 말 이상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쉬운 게임이다. 나는 그에게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어댄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조깅하는 모습을 본다. 한 겨울에 짧은 바지만 입고 그렇게들 뛴다. 사실 영국은 춥지 않다. 나는 보일러를 켜지 않고 살고 있다. 복싱 데이때 선물로 받은 두툼한 잠바도 입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영국에 와서 한국의 뭔가를 그리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이다. 심장의 압박, 머리에서 흘러 내리는 땀, 그것을 식혀 주는 바람, 발 아래 놓인 전경, 정신의 휴식 등등... 아쉽게도 영국에 와서는 산을 보지도 못했다. 한창 머리가 복잡할 때 나는 산을 무척 필요로 했었다. 영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나도 짧은 반바지를 하나 사서 포레스트 검프처럼 끊임없이 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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