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다. 개인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다. 어제, 추천서 등록을 포함하여 대학원 지원 과정을, 이제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데드라인을 넘겨 버린 학교도 있었다. 힘들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다. 학점은 입학 요강의 기준점을 한참 하회하고, 학교를 떠난지 너무 오래 되었고, 사회 경력도 전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추천서는 내가 받을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좋은 분들에게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실제 어떤 내용이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두 분을 너무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만 가득하다. 에세이와 자기 소개서는 내가 나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원 시기가 매우 늦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더 빨리 에세이를 쓰고, 더 빨리 자기 소개서를 써낼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자기 소개서를 서둘러 완성했더라면 내가 지금 만족하고 있는 수준만한 것은 결코 못되었을 것이다. -내가 게으름을 부린 시간들은 사고가, 아이디어가 충분히 익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게으름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모조리 다 털어넣었다는 생각에 후련함을 느낀다. 만일 어떤 학교에서도 오퍼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자산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리라. 나는 깨끗이 포기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기 때문이다. 짐작하겠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반대와 염려와 설득과 애원을 다 물리치고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나는 내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만일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새로이 정의해야 한다. 내게 그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지금 내게 어떤 한 단어가 허용된다면...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 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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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어느 갤러리에서)


오늘 저녁 한국으로 돌아간다. 진학 문제를 매듭짓지 못해서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오로지 나의 게으름 탓이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 하나. 프랑스에 갔었던 것. 프랑스는 나에게 많은 좌절을 주었었다. 파리 대학가 서점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던 스피노자에 관한 책, 나는 그걸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상심을 했었다. 위 사진 속의 갤러리, 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구내 계단에 걸터 앉아 갤러리에서 제공하는 가벼운 알콜 음료를 홀짝 홀짝 마시며 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선남선녀들이 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알콜 음료를 마시며 환담하는 걸 지켜 보면서 나는 또 좌절감을 느꼈었다. "저 사람들 지금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한 껀 올리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는 걸까?" 나는 시무룩해 했었지... 나는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었지...


세잔의 고향 엑상 프로방스 어느 카페. 와인 한 잔을 시켰더니 올리브를 작은 접시에 같이 내오더라. 세잔이 파리에서는 와인을 시켜도 올리브를 서비스로 내주지 않는다고, 파리 놈들은 쫀쫀하다고 시골사람답게 투덜댔었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올리브는 맛있었고 영국에 와서 테스코에서 올리브를 살 때마다 꼭 엑상 프로방스에서 맛 본 그 올리브와 비교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더라. 엑상 프로방스의 것은 그냥 집에서 담근 올리브이리라. 카페에는 한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노인들이 많았고 카페 아가씨는 일을 잘 하고 싹싹했고 손님이 뜸할 때는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피워 댔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신선한 경험들이었다.


영국에서의 경험들은 나의 틀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셰익스피어, 베토벤, 서점, 피쉬 앤 칲스, 철학, 논문... 그것들은 나의 틀 안에서 부드럽게 소화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예쁜 옷을 입은 영국 아가씨들이 워털루 역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반가왔다. 영국에서 논문을 쓰고, 이러 저러한 주제로 교수님들과 토론을 하면서 나는 내가 작거나 약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강하다, 무자비하다, 확고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신하게 되었었지. 나는 부서질 필요가 없었고, 좌절을 느낄 필요가 없었고, 놀랄 필요가 없었다. 아니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이제 떠날 말미에 느끼는 것은, 이 말미에 내가 너무나도 게을렀기 때문에 다시는 게으르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또 하는 나 자신이다. 진학을 위해 퍼스널 스테이트먼트를 쓰면서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고 그것이 하기 싫어서 계속 도망치고 게으름을 부렸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도박벽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면 결국은 써질거야 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곤 했던 가여운 남자... 그러나 내가 머리에 떠올려야 할 사람은 도스토옙스키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마 빠삐용일 것이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죄는 무엇인가? 시간을 낭비한 죄. 나는 시간을 낭비했는가? 내게 재능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영국에서 내가 느낀 것은 부드러운 접속감이었다. 그 부드러운 접속이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프랑스에서 내가 느낀 것은 단절감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좌절감을 주었다. 그 단절을 메울 시간이 내게 있을지 겁이 났다. 차라리 이런 기분을 되새기면서 귀국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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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끝냈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는 거의 망작으로 변해가더라. 후반 몇 편을 건너 뛰고 최종회의 절반 정도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청을 끝냈다.


이 작품을 정치 드라마라 할 것이면 세종과 정기준이 그 무슨 바위 위에서 호위 무사들이 대치하는 가운데 벌인 논쟁이 하일라이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좀 심심한 편이었다. 첫째, 둘의 관점은 이미 밝혀질 대로 밝혀진 상태다. 구태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논쟁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칼로 상대의 목을 겨누다가 베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는 장면이 한 회에도 수도 없이 나오다 보니 대치 장면이 전혀 긴장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작가가 필요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작품은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훌륭한 배우(대표적으로 한석규)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즐거움이 아니라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큰 축은 태종-세종 사이의 정치 철학적 견해 대립, 세종-정기준 사이의 정치 철학적 견해 대립이다. 그런데 세종이 태종과 대립하면서 동시에 정기준(더 정확하게는 정도전)과도 대립할 수는 없다. 곧바로 묻자면 세종은 왕권강화파인가, 그 반대인가?


이에 대한 논쟁은 한글 창제에 대한 논쟁으로 대체된다. 작가가 그린 세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세종은 봉건 군주의 한계 안에 갖혀 있는 인물인가, 그것을 뛰어넘는 인물인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세종은 사농공상, 반상천의 위계 질서의 옹호자인가, 아니면 그것의 최종적인 혁파를 수용하는 인물인가?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글을 만들었지만 신분 질서의 혁파는 수용할 수 없었다면, 이것이 세종의 한계이자 모순이자 고민이라면, 이 한계, 이 모순, 이 고민은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세종이 군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들의 이상을 수용하면서도, 저 자신은 그런 장치들의 견제를 받고 싶지 않아했다면, 이 또한 세종의 모순이자 고민이 된다. 아, 작가들이여, 제발 이 모순, 이 고민들에 주목하라. 제발 이 모순, 고민들에 정면으로 부딪히라. 그것만이 당신들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능한 이런 질문들, 이런 모순들을 피해나갔다. 작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탓, 즉, 작가의 대담성이 부족한 탓이다(천재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고민하며 괴로와 하는 세종의 입에서는 "사랑"이니 "책임"이니 하는 추상적인 낱말이 튀어나와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다. 한석규가 고민하는 척, 괴로와 하는 척 하는 사람을 실제로 고민하고 괴로와 하는 사람으로 그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진한 민망함으로 남을 뿐이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배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 본다. 배우의 연기를 충분히 감상하려면 작가와 감독의 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배우의 연기는 그 작품의 가치와 완전히 동등하다.)


그런데 통속 사극에 이런 깊이를 요구하는 게 타당한가? 그렇다. 당신이라면 한석규가 완전 허접한 대사를 읊고 있는 꼴을 보면 기분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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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 therefore unable to reach our goal. The task arises of proving the impossibility of solving the problem…” (by Hilbert)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철학의 그것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철학자들은 게으르다. 비트겐쉬타인의 "논고"가 그토록 짧은 이유다. 비트겐쉬타인은 "논고"의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에서 거둔 성취의 결과물이 얼마나 작은지에 대해 말한다. 그 성취의 결과물이 작으면 작을수록 비트겐쉬타인에게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 "논고"의 성취의 결과물은 정말로 작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비트겐쉬타인에게 영예가 될까? 정말로 게으름이 영예가 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건전한 눈에는 "논고" 같은 철학서가 허깨비로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건전한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똑같은 주제로 거듭 되돌아온다. 철학에 강한 열의를 갖고 있음에도 진학을 하지 않았던 이유... A4 한 장 짜리 자기 소개서를 쓰는데 무려 일주일을 소비하고도 끝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 철학은 해결책이나 제안들의 총합이 아니라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들의 자취로 정의되며, 그것으로 가치를 평가받는다... 라고 나는 늘상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힐버트의 위의 인용문이 철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긍정하기에는 나는 너무 건전한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행스러운 것은... 더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 목요일 비행기를 타야 하니 그 전에 모든 것을 완료해 놓아야 한다는 것... 내가 보기에 철학을 하는 진짜 방법은...(내 머리 속에는 완결된 문장이 들어 있지만 여기 적지는 않겠다. 내가 만일 훗날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면 그때 이 문장들을 써먹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충분히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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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새벽까지 친구들, 친구들의 동료들과 와인과 위스키를 곁들여 떡국을 먹고 파운드화와 유로화로 고스톱을 치며 놀았다. 영국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이야~


화제 중 하나. 어떻게 셜록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BBC에서 하는 셜록 홈즈에서 홈즈는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수 있을까? 결과를 보고하겠다.


-. 셜록 홈즈가 병원 옥상에서 뛰어 내린 건 맞다. 그러나 밑에 대기하고 있던 청소차나 그 밖의 안전 장치로 떨어졌다.

-. 홈즈 주변으로 몰려 든 행인들은 모두 홈즈가 사전에 섭외해 놓은 사람들이다. 자전거로 왓슨을 친 사람은 물론이고.

-. 왓슨이 홈즈의 맥을 재는데, 홈즈는 맥을 뛰지 않게 하는 장치나 약을 복용한 상태였을 것이다.

-. 홈즈의 시신을 처리하는 등의 문제는 몰리와 홈즈 형의 조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의 가장 약한 고리는, 홈즈가 청소차로 떨어졌다면 모리어티의 부하들도 그걸 봤을 거라는 것. 왓슨의 눈을 속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리어티의 부하들의 눈도 속여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부분은 드라마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왓슨은 계속 이동하는데 왓슨을 저격하려는 스나이퍼는 어떤 건물 계단에 계속 걸터 앉아 있다.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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