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inoza Problem. 네덜란드 레인스브르크 스피노자거리 29번지에 있는 스피노자 하우스에 가보지 않았었다면 난 이 책을 사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폰으로 샘플을 받아 첫 몇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 생각이 전혀 안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읽어나가자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내가 스피노자 하우스에서 집지기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소설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 하우스의 거의 모든 전시품들은 스피노자 자신의 것이 아니다,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도 어떤 사람이 스피노자 사후 작성된 물품 대장을 참고로 스피노자 당대의 판본으로 다시 사모아 놓은 것이다... 등등.

이 소설은 스피노자와 (나치의 이론가이며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로젠베르크의 삶을 교차해서 그리고 있는데 그 접합점이 바로 스피노자의 장서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여기서 로젠베르크와 동일시되고 만다. 내가 스피노자 하우스를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로젠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장서 목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나도 그도 스피노자 철학의 원천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게는 콘트롤 센터로서의 자아가 없다. 내 사유 안에 두 개의 경쟁적인 관념이 존재한다고 하자. "나"라는 자아가 있다면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자아가 없다! 그러므로 관념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워 이긴 관념이) 스스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도대체 스피노자는 이런 철학을 어디에서 베꼈는가? (이 책에 보니 아인쉬타인이, 독창성의 비결은 아이디어의 원천을 잘 숨기는 것이라고 했다더라.)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지만, 로젠베르크와 동일한 이유로 시작부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즉, 그 책들의 표지에 적혀 있는 라틴어, 히브리어 등을 알지 못한다는...-.- 물론, 로젠베르크가 스피노자의 철학의 원천을 알고 싶어한 까닭은 나와는 다르다.)

이 소설은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대화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한 언어로 진술한다. 소설적 장치들이 많이 포기되고 있지만 덕분에 읽기에 부담이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대화 상당 부분은 그의 저술들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이 약화된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약간 간지럽다는 느낌. 물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내게도, 그리고 아마 그 어떤 독자에게도.)

소설에서 로젠베르크는 자신이 숭배하는 위대한 독일인 괴테가 유태인 스피노자를 숭배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아마 저자가 책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이 테마를 좀 더 발전시켜야 했을 것이다. 독일의 국가 철학자 헤겔, 헤겔의 적대자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쇼펜하우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니체, ( 그리고 스스로를 철학자라 칭하는 나치의 이론가 로젠베르크) 다시 말하면 나치의 위대한 철학적 계보의 가장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스피노자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로젠베르크의 탐험 중에 속속 드러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럿셀은 그의 철학사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사랑스럽고 윤리적으로도 으뜸인 철학자라 소개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스피노자는 가장 사악한 인간으로 비난받았다고 덧붙인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사랑스럽고 조용한 은자의 철학인가, 아니면 냉정하고 독단적인 강자의 철학인가? 누구보다도 스피노자 자신이 자신의 철학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이미 독일어판과 프랑스판이 나와 있는 것 같더라. (스피노자의 대중성에 더하여) 나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렇듯 빠르게 번역판이 나왔을 것 같다. 적어도 내게 이 책의 백미는 로젠베르크의 탄생과 종말을 다룬 부분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과정을 (비소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마지막 장을 나는 긴장감 속에서 매우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로젠베르크의 탄생을 다룬 부분은 소설적 장치들이 매우 허술한 이 책에서 소설적으로 가장 빼어난 부분일 것 같다.

반유대주의 연설을 한 소년 로젠베르크를 학교 선생들이 불러다 꾸짖고, 괴테의 자서전에서 괴테가 스피노자에게 경외를 표현한 부분을 암기에 오도록 과제를 준다. 로젠베르크는 암기를 잘해오지만, 자신이 암기한 문장들의 의미를 묻는 선생들의 질문 앞에서는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더하여 자신이 숭배하는 괴테가 그토록 존경했다는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과연 누굴까, 하는 호기심은 그의 머리에서 결코 일지 않는다. 선생들은 낙담하면서도 안심한다. 로젠베르크가 치유불능임에 낙담하면서도, 그의 지적 능력으로 보아 유해한 인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He has a lack of curiosity that is, most likely, incurable."
"This young man has neither the intelligence nor fortitude to cause mischief by swaying others to his way of thinking."

물론, 그는 나치의 이론가가 되었고, 그의 손으로는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그 이론에 대한 댓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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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다녀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스피노자가 내 머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피노자를 주제로 한 소설을 읽었고, 럿셀의 철학사를 스피노자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고, 듣고 있는 오디오북도 스피노자에 대한 것이고, 여호와 증인 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도 계속 스피노자를 의식하고 있었고... 물론, 영국에 오기 전부터 스피노자는 내 머리를, 그러므로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피노자에 대한, 너무 유명해서 닳고 닳았지만 그럼에도 진리임에 틀림없는 두 개의 명언. 첫째, 헤겔. 당신이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면 철학자도 아니다(내 멋대로 버전이다). 둘째, 베르그손. 철학자는 두 개의 철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것,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의 것. 그러니 만일 스피노자에게 감화를 받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의 원천을 찾아 스피노자를 연구하려 든다면 세상엔 단 하나의 철학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철학이라 선포하는 사람도 있단다. 아, 나 역시 그걸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정말로 거대한 사업이다.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에 와 있지만, 스피노자를 연구 테마로 삼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무모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늙었기 때문이다.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사상의 원천을 연구하는 과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그저 불가능한 사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약이 오르는 것은 스피노자 전집의 양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함에도 스피노자의 철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늘상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만한 거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부분도 있고, 재고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고전 철학자인 것 같다. 그의 저술들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러나 한편 스피노자 철학의 결정판이라 할 에티카에 대한 번역은...-.- 나는 이렇게 말해 두고 싶다. 한국에서라면 당신과 스피노자 사이에 서광사판 에티카라는 깊이 모를 계곡이 존재한다고. 서광사판 에티카 제1부를 읽고 난 결론은, 그 번역을 통해 스피노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는 것. (검색을 해보니 에티카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고 하더라. 이북으로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되는 거 같다. 책만 좋게 잘 되어 있으면 몇 날 몇 칠을 두고 그 책을 칭찬하면서 놀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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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존재인 신이 창조한 완전한 인간 아담이 어떻게 신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나? 이런 질문에 (넓은 의미의)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런 답변에는, 그럼 너가 말하는 자유의지가 도대체 뭔데? 라는 질문이 따라 붙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이나 철학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질문은 굉장히 현학적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현학적인 질문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윤리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복잡하다. 에덴 동산이 있었고, 그 가운데 선악과가 있었고, 신은 아담에게 그걸 먹지 말라고 했다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다. 신의 피조물인 뱀이 있었고, 신이 아담에게 반려로 만들어 준 이브가 있었고, 유혹(!)이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이렇게 전화한다. 유혹이 있었더라도(혹은 시험이 있었더라도)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걸 이겨내어야 했다. 아담이 이겨내지 못했다면,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건 아담의 잘못인 것이다. (세상에 죄를 끌고 들어온 건 아담인 것이다. 신이 아니라.)

똑같은 이야기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게도 적용된다. 카인은 신이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는 데 질투를 느껴 아벨을 살해한다. 신이 카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사람들은 카인의 제사가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건 너의 추측일 뿐이다.) 신이 카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된 직접 원인은 아니다. 신이 제사를 받아주건 말건 카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카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까.

보다시피 자유의지 이론은 어떤 그릇된 일의 원인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신이 아담을 유혹했지만 아담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그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신이 이유를 대지 않고(신은 이유를 댈 의무가 없다) 카인의 제사만 받지 않았지만 카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살의를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살인은 카인의 책임이다. 틀렸나?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틀렸다. 아담이나 카인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는 맞다. 그러나 그것이 신을 면책하지는 않는다. 

카드 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하면 신용불량자가 많이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이렇게 양산된 신용불량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한다. 그들은 자산을 합리적으로 운용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정책 당국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책적 이유에서든) 카드 발급 기준에 대한 감독 관리를 느슨하게 하면 신용 불량자가 양산되리라는 것은 거의 자연 법칙과 같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예전 직장 동료네 아이가 성적이 안좋아서 내가 공부를 좀 봐 준 적이 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아이 방에 텔레비젼이 있더라는 것. 부모들은 거실에 누워 테레비젼을 보다가 가끔 아이가 공부방에서 테레비젼을 보는지, 공부를 하는지 감시하더라는 것. 공부방에 테레비젼이 있더라도 아이가 (자유) 의지를 갖고 그것을 이겨내야 하지 않나? 기독교의 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스피노자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공부를 하는데는 많은 에너지가 투여된다. 비탈 위로 돌을 밀어올리는 것과 같다. 테레비젼을 보는 것은 비탈 아래로 돌을 굴리는 것과 같다. 돌을 어디로 굴리겠나? 이것은 거의 자연 법칙과 같다. 여기서 자유의지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스피노자적 해법을 말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감시를 안해도) 아이가 집중해서 공부를 할까? 단순하다. 아이를 공부하는 환경에 넣어주면 된다. 엄마든 아빠든 거실에서든 침실에서든 책을 읽고 공부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환경이 되어주면 된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비탈의 기울기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할게 공부 밖에 없을 테니(아이는 이 환경에서, 자신이 공부를 하는 관념과 부모가 옆에서 공부를 하는 관념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거실에 누워 테레비젼을 보는 관념 대신! 닥터 후의 말대로 휴먼 싸이콜로지란!).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치가 있고 (같은 말이지만) 부하가 걸리는 일을 하고 나면 우리는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 뿌듯함이란 자신의 힘의 증진(그것이 학력이든 지식이든 육체적 강인함이든)에 대한 자각일 뿐이다. 반면 테레비젼을 보면서 소비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우울해진다. (그것은 우리의 약해짐에 대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의지란, 신이, 정책 당국자들이, 부모들이 면책을 하려는 뻔한 술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육이란 우리의 의지를 기르는 과정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과 물리학 논문이 놓여 있을 때 물리학 논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훨씬 부하가 적게 걸리는 일임에도. 그러나 그 사람은 아마 텔레비젼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물리학 논문에서 더 큰 재미를, 그러니까 자신의 힘의 증진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자유의지 따위는 논외가 된다. 내가 물리학 논문을 앞에 놓고 공부하는 것은 (1등을 하겠다는 명예욕 등에 동기화되어서든 뭐든) 단순히 그게 더 재미있기 때문인 것이다(그 사람을 고문하려면 테레비젼 하나 달랑 놓인 방에 가둬두면 된다.). 재미를 느끼는 것이 자신의 힘의 증진을 느끼는 것이고 그것이 행복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스스로 동기화되어 스스로 작용하며 스스로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다(물론 다 똑같은 말이다). 우리가 가능한 한 스스로 동기화되어 스스로 작용하며 스스로의 힘을  표현할 때 우리는 이것을 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신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물론, 똑같은 이야기다) 아무 쓸 데가 없다. 이론적으로 자유의지란 원인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자유의지는 외적 원인과 내적 원인을 혼동하는 징후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외적 원인을 내적 원인이라 선동하는 것이다. 어떤 광고. 귀하가 이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궁극적으로는 "나"란 어떤 개체, 어떤 본질은 존재치 않는다. "나"가 없음에 자유의지의 공간이란 도대체 어디이겠는가? 이 역시 스피노자의 이론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피노자에게 배웠다고 믿는다. 그가 틀리지 않았기를. 내가 잘못 배우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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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들과 세 시간에 가까운 대화. 그분들은 막 떠났고, 난 점심을 먹으려 칩스를 데우고 있다. 

욥기가 주제였는데 우리는 적당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성경을 끝까지 읽어볼 것이고, 물론 훌륭한 고대의 문학으로, 그리고 읽다가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거나 당신들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연락하겠다고 했다. 

두 분 중 한 분은, 우리는 선량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뜻에 있어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헤어짐의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유쾌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두 분 중 한 분은 매우 실망한 표정이었다...-.-

두 분들과 약속을 지키느라 나는 욥기를 읽었다. 고대의 문학들에는 삶의 생생함이 펼쳐져 있다. 욥은 신과 악마의 내기의 대상이 되어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온 몸에 종기가 돋는 고통을 당한다. 욥은 신심을 가지고 이 고난을 꿋꿋이 버텨내는가? 그렇지 않더라! 차라리 죽음만 못하다고 끊임없이 하소연한다. 자신은 의로우며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모르겠다며 신하고 직접 담판을 붙고 싶어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역할을 맡은 이는 신이었다. 그가 기껏 욥에게 나타나 한 말이라고는 나의 강함과 위대함을 너는 알아라! 였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이 말은 그의 의로움은 내적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신이 그에게 준 복락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의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이 그에게 있으나 혹은 없으나. 신이 그에게 복락을 주나 혹은 고난을 주나.

욥기를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스피노자를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결과로 신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바랄 수 없다고 했다. 악마와 신이 벌인 내기는 바로 이 명제를 두고 한 것이었다. 욥은 간혹 신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확신에 있어서는 꿋꿋했다. 친구들이 욥을 꾸짖으며 이러한 고난을 당하면 자신을 반성하고 몸을 낮추는 것이 도리라고 그렇게도 말했어도 욥은 꿈쩍도 않고 오히려 친구들을 위안자가 아니라 고문자라고 비난했다. 당신이 옳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비판자가 이렇게 묻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옳다면 내가 옳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욥이 신과의 담판을 원한 것은, 자신이 과연 의로운지를 묻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의로운데 어떤 이유로 내게 이런 고난을 주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은 단지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욥 앞에서 뽑내고 겁주고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움에 있어 욥은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움에 있어 욥은 진정한 신의 대적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신에 있어 신 자신의 의로움이란 정의불능이겠지만 말이다. (데카르트에 있어 의지는 절대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내적 자발성으로 정의된다. 그것의 존재에 외적 원인이 필요치 않은 것. 그러므로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내적 자발성에 의해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댓가로 신이 자신을 사랑했으면 하고 바랄 수 없다! 그것은 형용모순이다.

욥은 신이 있든 없든 의롭게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욥의 의로움을 정의할 것이다. 그것말고 욥의 의로움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스피노자주의자다. 욥은 최고의 스피노자주의자다. 혹 내가 틀렸을까? 그렇다면 깨우쳐 다오.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 분들은 신을 사랑의 신이라고 했고, 나는 그것은 사랑이란 말에 대한 불명예가 될 것이라고 반박했을 뿐이다. 나는 당신들의 신은 끊임없이 충실을 요구하는 신이라고 말했다. 충실의 두 항과 사랑의 두 항을 생각해 보라. 신-충실-인간, 신-사랑-인간. 충실은 외적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사랑은 나의 내적 자발성의 표현이다. 둘은 서로 다른 인간을 전제한다. 나는 여호와 증인들에게 욥기에서 사랑의 신이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고 한사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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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에 한국에서 친척들이 놀러온다. 게임을 좋아하는 친척 아이가 아이패드로 게임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단다. 내 아이패드로...-.- 아이패드는 어느새 나의 가장 친밀한 도구가 되어 버렸는데...-.-

요즘 나는 거의 모든 책을 아이패드와 아이폰에서 읽는다. 우연히 "The Spinoza Problem"이란 책을 전자책으로 구입했는데 아이폰으로 기차간에서 읽어봤더니 아주 좋았다. 시험 삼아 럿셀의 철학사를 구입하여 아이패드로 읽고 있는데 역시 좋다. (헌책방에서 5 파운드에 산 럿셀의 철학사가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다...) 그래서 이제는 가능한 모든 책을 전자책 형태로 읽기로 했다. 얼마전 헌책방에서 스티븐 핑커의 책을 발견하였다. 가격은 10 파운드 미만. 아마존 킨들 버전을 검색해 보았다. 9 파운드 미만. 계산 끝. 덩달아 이제 헌책방 나들이도 끝일 것 같다. 어제는 콰인의 고전 하나를 전자책으로 샀다. 애플의 아이북스보다는 아마존의 킨들 스토어에 책이 더 많더라. 콰인은 아이패드용 킨들 버전으로 산 것이다. 

전자 기기로 책을 읽는 장점. 편하다. 손에 아이폰만 하나 들고 있으면 에스컬레이터 타고 오르내리는 잠깐 사이에도 책을 읽을 수 있다. 붐비는 기차 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웃기게 말하자면 독서의 이동성이 극대화된다. 아이패드는 약간 문제가 있다. 크고 무겁고 미끌미끌해서 손에서 떨어뜨리기 쉽다. 반사가 심해서 햇빛 아래서 읽기 불편하다. 나는 집이나 까페 등 실내 공간에서만 아이패드를 이용한다. 그리고 아이폰는 좀 가벼운 것을, 아이패드는 좀 무거운 것을 읽을 때 사용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책을 무척 지저분하게 읽는다. 수많은 밑줄과 메모들로 다시는 거들떠 보고 싶은 않은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다. 전자책은 책을 깨끗한 상태로 되돌려 준다. 내가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더 좋아하게 된 두번째 이유다.) 

iTunes U. 어마어마하게 많은 강의들이 있다. 나는 요즘 철학 강의 하나를 골라 듣고 있다. 잘 때 침대까지 아이패드를 들고 가서 듣다가 꾸벅꾸벅 존다. (좀 위험하다. 졸다가 아이패드를 손에서 놓쳐서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아이패드가 입 근처에 떨어지면 꽤 아플 것이다.) 

영어 공부. 싸고 유용한 앱들이 많다. 

비비씨 아이플레이어. 비비씨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이용하고 있다. 구태여 실시간으로 테레비 앞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요즘 텔레비젼 켤 일이 별로 없다. 유로 2012 볼 때 정도만 빼고...

영화는 노트북에서 DVD를 돌려 테레비 스크린으로 본다. 영화는 혼자 보는 것이 아니므로.

쓰기. 아이패드와 이이폰은 쓰기에 매우 유용한 도구들이다. 아이패드로 쓴다. 그걸 아이폰에 동기화시킨다. 이제 아이폰으로 써놓은 것을 보면서 아이패드로 다시 노트를 한다. 개인적으로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이렇게 이용할 때마다 본전을 뽑았다는 생각에 흐뭇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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