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 B, u8 - 14
@P1: H, p.26, 27
@P2: M, ~ 1.62
-Free Will: Sam Harris, R
-Philosophical Occasions, W

1. 런던 호일스 서점에 갔다가 작고 얇은 "Free Will"가 눈에 들어오기에 사서 빠르게 일독했다. 자유 의지는 환상이라는 주장. 깊이 있는 책은 아닌 듯 싶다. 
2. 덩달아 비트겐쉬타인의 "Philosophical Occasions"를 샀다. 자유 의지를 다룬 부분을 급히 읽어 보았다. 소화해 낼 수 없었다. 
3.  마음의 평화. That's all I need to be produ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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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 B, u.1 ~ 7
@P1: H, p.1 ~ 26
@P2: M, ~l.6.2

1. 한국어로 포스팅을 하면 짧은 시간 안에 글을 마칠 수 있지만 생각이 생각을 부르나니 말이 너무 많아진다. 영어로 하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다. 포스팅을 자제하자니 나의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2. 지난 포스팅이 추천을 너무 많이 받았는데, 내가 생각한 바에 다들 공감한 결과인지 무척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얼마 전에 서광사판 에티카 번역에 대해 비판을 했었다. 그것은 역자에 대한 비판이었나?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차적으로는, 한국에서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주도한 학자들이 20년 동안 에티카의 번역 수준을 그 상태로 놓아 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삼차적으로는, 그러한 학자들이 진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놓아둔 한국의 스피노자 애호가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의 진짜 비판은 이차, 삼차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새로운 과학 정신"은 악역으로 이름 높다. 이제 어떤 사람이 나서서 그 책보다 더 두터운 분량으로 번역 비평 보고서를 냈다고 하자. 역서와 번역 비평서 중 어느 작업이 더 의미가 있는가? 절대적으로, 악역으로 이름 높은 "새로운 과학 정신"이라는 역서가 더 의미 있다! 이 역서에 대한 번역 비평서는 하등의 의미도 없다. 이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윤리라는 것이 있다. 힘든 일을 한 사람과 그에 편승한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누가 힘든 일을 하겠는가? 어떤 책을 번역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책에서 오역, 악역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특정 개념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는 후자의 두 사람은 사기꾼에 준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그리고 유일하게 가능한 번역 비평은 자신이 직접 번역서를 내는 것 뿐이다. 자신을 비판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비평의 자격을 주는 사회는 비윤리적인 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스피노자 저작의 서명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 저작을 직접 번역한 사람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스피노자의 어떤 개념에 대한 한국어 단어를 제안하고 싶으면 직접 에티카를 번역하여 그 속에서 하라. 그럴 여유가 없으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 입을 열고 싶으면 해당 저작을 번역하라. 이게 공정한 게임이다. 남이 완성해 놓은 작업물 위에 기생하면서 우월한 척 하지 말자. 그런 식으로 한국의 문화가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에티카의 라틴어 원전에서의 번역이 20년 전에 나왔다. 그리고 최근에 스피노자 애호가 한 분이 영문에서 번역을 새로 내놓았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은 차라리 영문에서 번역한 것이 이해하기에 낫다고 그 책을 구해 보려 한다. 이것이 문화의 진전인가, 퇴행인가? 이것이 퇴행이라면 누구 책임일까? 스피노자를 팔아먹은 젊은 학자들 책임일까? 아니다. 그에 휘둘리고 있는 나와 같은 일반 독자들 책임이다. 이명박의 책임이 아니라 그를 뽑아준 국민들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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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03 2012-07-0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7월 1일자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번역을 시도나마 해 본 사람입니다. 번역이 한 작품을 쓰는 것 보다 더 어렵단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예전에 축자역서에 질려 의역서를 선호했기에 님이 가독성을 보고 책을 고른다는 말 십 분 이해가 갔습니다. 예전에 번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번역하시는 분들이 주로 축자역을 바탕으로 번역하시더라구요. 하지만 무조건 가독성을 선호하다 보면 본래의 뜻이 퇴색되고 번역서의 특색이 사라지는 것을 봤기에 축자역, 즉 원문의 뜻을 살려 번역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가독성과 축자번역의 밸런스를 이룰 때 님이 말한 박종현 교수님의 원문에도 충실하며 가독성도 있는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번역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영어본 철학서적은 한국어 번역서에 반해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것에 대해 저는 단순히 독어와 영어의 문법의 유사함 때문인줄 알고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란 님의 의견이 저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자주 님 블로그에 들려 님의 철학적 사유 읽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남겨 약간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네요. 그래도 님의 글에 많은 부분 동감하고 있기에 용기를 내 댓글 남기고 갑니다^^

weekly 2012-07-03 19:26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예전에 번역을 하셨었다니 제가 번역에 대해 첨언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인 듯 싶습니다. 철학 관련 쪽이시겠지요? 저도 다음 학기부터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전공인으로 윤리를 하나 걸머지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서광사판 에티카는 나쁜 번역이다, 라고 말할 자유를 잃겠지요. 그럴려면 그걸 번역해 내야 할테니까요. (이런 걸 의무라고 이름붙여야 할지 자유라고 이름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비전공인들은 제게, 그거 당신 아이디어인가? 출전이 정확한가? 그 책 전부 읽고 나서 하는 소리인가?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할 의무를 갖게 되겠지요. (이걸 의문을 제기할 자유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제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전문가들에 대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게 정말 불만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을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전문가들도 많다죠? 이건 치명적인 독자 모독인데...-.-) 저는 나름대로 의무감이 투철한 독자였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 영국의 어떤 교수님에게 메일을 써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던 기억이 납니다(그리고 진지한 답장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최대한 예의를 기울인 것인데, 저도 나중에 이런 예의바른 비전공인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 don't think your paper works. First of all, comparing the relativity of colours to Einstein's special relativity theory is just nonsense... When you say "we are able to make primitive spatial and temporal judgements without a ruler or a clock", you just forget that when you feel hungry, you have your clock in your stomach.)

(댓글이랍시고 제 얘기만 했네요...-.-)

120703 2012-07-04 18:2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 또한 한국 전문가들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해외에서 공부해 온 저에겐 표절행위에 민감한 서양문화가 당연시 되는데요. 가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아무 죄책감없이 모방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윤리가 전공이시군요. 스피노자 에티카에 대한 논문을 쓰실 예정인가봐요. 철학서적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수학하게 되시다니 철학도라면 부러워 할만한 공부를 시작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weekly 2012-07-0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댓글을 너무 띄엄띄엄 썼나 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이긴 한데 대학원에서는 비트겐쉬타인으로 논문을 쓸 것 같습니다(1년 짜리 석사 과정에서 스피노자를 주제로 삼는 건 무모할 것 같아서요).

앞 댓글은 전문가 집단에 휘둘리지 않도록 일반 대중들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걸 지적한 것이랍니다. 알라딘에도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을 한번에 십여권, 이십여권씩 죽 추천하는 교수님이 있더라구요. 이럴 때 가장 상식적인 반응은 "직접 읽어 보고 추천하시는 거예요?" 라는 댓글일 텐데요... 한국에서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네요...-.-

저는 이런 걸 전문가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 대중의 문제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오역 지적에 있어서도 공개적으로 직접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프랑스어 시제도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인신공격 하는 경우까지 봤는데요. 한 전문가가 다른 전문가의 역서에서 오역, 악역을 발견했다면 역자나 출판사에게 먼저 알려서 해당 역자나 출판사가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 말입니다...-.- 이 분들이 이러는 건 물론, 공명심이고 독자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싶어서일 겁니다. 독자 대중들은 그렇게 계속 휘둘리고 있고요. 심지어는 제대로 된 역서 하나 안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비평하는 전문가 분도 계시는 데, "직접 번역은 해보셨어요?"라는 공박을 별로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독자 대중이 너무 너그러운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휘둘리는 거구요...-.-

안타까운 건, 전문가 집단들이 무혈입성식으로 얻은 권력을 이용해 독자 대중을 가지고 논다는 걸 겁니다. 예전에 서광사판 에티카를 읽다가 놀라서 대학원 다니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첫 몇 페이지의 극악한 번역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다 제 풀에 제가 나가 떨어졌죠. 지적할 게 너무 너무 많아서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서광사판 에티카는 그야말로 테러야~" 이러더군요. 전공자들은 서광사판 에티카의 번역 상태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나 누구 하나 이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개적으로 지적하든, 혹은 역자나 출판사에게 알려서든 말이죠. 번역 비평을 하려면 이런 것을 해주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역자의 학계 위치를 생각해서 문제 지적을 자제했다면 비겁한 거죠. 소장 학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시제 문제까지 집어 내는 분들이니까요... 저는 이 전문가 집단 사람들을 가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어판 에티카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 일반 독자에게 버젓이 서광사판 에티카를 추천하고 있으니까요(개념어 번역에 있어서는 약간 문제가 있지만 라틴어에서 직접 옮긴, 오역이 별로 없는 잘된 번역이라는 식으로). 저는 이런 걸 사기에 준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제가 앞선 댓글에서 윤리에 대해 이야기한 건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을 허다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으로 1년을 공부하던, 그 이상 공부를 계속할 기회를 갖게 되던, 이런 사기꾼은 절대 되지 말자는 자기 다짐을 한 것이고요. 전문가 집단은 지식 대중과 지식 사이의 간격을 좁혀 주는 데 그 존재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몇몇 지식 집단들은 그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미친 의사가 환자를 계속 받기 위해 환자에게 병균을 주사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암튼 건승하시구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얘기도 나누고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축하 말씀 감사하구요~^^)

qualia 2013-05-2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ekly 님의 핵심적 진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weekly 님의 위 의견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격론자들/쇼비니스트들도 그들 주장의 핵심적 진의는 올바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예외없이 비난 받는 까닭은 앞뒤 정황/컨텍스트/문맥 따위를 모두 거두절미하고 호전적으로 나대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만의 편협한 윤리도덕률에만 기대어 물불 안 가리고 함부로 첨벙대고 싸질러대기 때문입니다.

weekly 님의 논리대로라면, (극단적인 비유지만) 영화평론가 · 음악평론가 · 문학평론가는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겠습니다. 영화 제작자나 영화감독, 음악가, 소설가, 시인 등등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야 될 판이니까요. 물론 이런 역비판은 (번역비평 자격 운운하는) weekly 님의 지나친 과격성을 상기시키고 자가당착적 모순성을 드러내기 위한 풍자일 뿐임을 아실 것입니다. 분석철학 혹은 심리철학 하시는 듯한데요. 잘 아시겠지만, 그쪽 동네는 치밀한 논증의 싸움판입니다. 자기 주장 · 논증에 앞뒤가 맞지 않는 뻔한 오류를 저지르는 논증 실력으로는 뜨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번역비평에서의 “개념어” 오역 비평은 단순한 자구상의 오류 지적과 교정에만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weekly 님이 탁월하게 지적했다시피) 애플(Apple)의 디자인 철학은 단순히 외형적 꾸밈새와 조립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 소재의 속성/성질/물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에 기반해 혁신적 기능/성능을 구현하는 제품을 설계하고 만들어내는 것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개념어” 오역 비평은 대상 개념어(들)의 총체적 측면을 분석 · 검토하고 해당 학문분과나 특정 문맥에 맞게 재정의하는 심층적 작업입니다. 특히 한국 같이 인문학술용어, 철학용어, 과학기술용어, 의학용어 등등에서 학제간 공통용어들이 주먹구구식, 중구난방식으로 통일되지 않은 채 제각각 난립하고 있는 심각한 경우에는 개념어에 대한 오역 비평이 매우 시급한 실정입니다. 각 학문분과에서 드러나는 전문용어의 비통일성, 개념어의 난맥상이 학문 발전을 저해하고, 번역을 어럽게 하고, 번역서 읽기를 어럽게 하고, 학문간 소통/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거의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수들, 학계의 자칭타칭 지식인들 중 많은 수가 일단은 “밥먹구 합시다”가 기본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번역비평은 “원작의 번역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해야 하는, 훨씬 더 힘들고 심층적인 작업입니다. 번역비평 직접 해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weekly 님은 번역비평자들을 비난하면서 “편승”, “기생”, “비평의 자격”, 심지어 “사기꾼” 운운하시는데요. 하지만 weekly 님의 저 과격성을 제거하고 핵심 요지만 새겨들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은 합니다. 그러나 weekly 님의 쇼비니스트적 분개/비난 때문에 선의의 번역비평가가 뒤집어쓰게 될 누명을 생각해본다면, weekly 님이 너무 지나친 오류성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이런 비판성 댓글을 써올립니다만, 살펴보건대, weekly 님과 많은 주제/논점/관심사에서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적이 반가웠더랬습니다. 앞으로 어떤 더 많은 소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일입니다. 비판적 기질은 정말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기질입니다. 흔히 우리를 가리켜 단일민족이라고 하죠. 그래서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모두들 비판을 금기시하는 혈연사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 사돈의 팔촌 격으로 서너 다리만 건너면 혈연 · 지연 · 학연 따위로 연결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누가 오류를 저질러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게 우리의 모습이고 미덕입니다. 이것이 때로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한국의 치명적 약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비판 부재, 비평 부재 사회란 것입니다. “비난”은 난무합니다만...

영국에 나가 계시니 밖에서 조국을 한층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실 수 있겠습니다. 논문 쓰시고 학위 하시느라 매우 바쁘고 힘드실 텐데, 좋은 말씀 못 드리고 딴지만 걸었으니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성과 거두시고 건승 ·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2013-05-25 16:03)

weekly 2013-05-26 08: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제 블로그 글을 읽어보게 되는군요. 예전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역시나 곤혹스러운 일이구요...:)

말씀대로 제가 분명히 지나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번역비평이라는 분야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번역비평'이라는 말을 아예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번역비평 일반에 대한 것은 절대 아니고, 번역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논의들 중 극소수 사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개념어 번역 비평을 매우 소중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저는 개념어 번역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해당 분야 연구자들의 몫이라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 철학의 어떤 개념어에 대한 한국어 번역 제안이나 그에 대한 비평은 무엇보다도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개념어의 학제적 사용 추이 등에 대한 연구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 연주 비평자가 피아노 연주자 수준의 연주 실력을 가질 필요는 분명 없을 것입니다. 연주 능력과 그에 대한 비평 능력은 별개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예를 들어 하이데거 철학 개념어에 대한 한국어 제안에 대한 비평은, 그 자체가 철학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평자가 번역 제안자와, 적어도 동일한 수준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심도를 갖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비평을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주목하는 것은 번역비평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문제, 즉 정치입니다. 메타담론은 '평가적'이기 때문에 매우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매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그 일부 연구자들 중엔 대중적으로 매우 인지도가 높은 분도 있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도 있죠. 그래서 특히나 문제가 된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예를 들어 로자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네요. 가장 유명하고 가장 생산적인 분이잖아요?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저의 과격한 언사는 이런 분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 분 글 중 제 관심사인 '청갈색본' 번역비평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딱 문제 페이지만 읽고 쓴 인상비평이더군요. 저는 일반 독자들이 이런 비평글을 쓰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역비평을 표제로 한 글이 이런 글이어서는 안된다고 느낍니다. 번역비평에 대한 저의 그릇된 인식은 아마도 이런 글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한번 좋은 비판의 말씀 남겨 주신 것에 감사드리구요. 앞으로도 종종 말씀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1. 몇 달 전 한국에 있을 때 은사님을 찾아뵙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작정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다. 교수님이 플라톤 전공이셨던지라 이런 대화가 오고가기도 했다.

나: 박종현 번역의 국가를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 유려한 번역이라면 도저히 원전에 충실한 것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 아냐, 아냐. 박종현 교수님 번역은 원전에 아주 충실한 번역이야. 그러면서도 가독성이 아주 좋지. 그래서 박종현 교수님이 탁월하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잘 읽힐 수 있게끔 번역해내기가 힘들어...

교수님과 나는 계속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번역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의 질이 뛰어나지는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는 박종현 교수님 수준의 대가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그에 얽힌 얘기들...

(그때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도 참으로 아름답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려하여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번역은 박종현 교수님의 것이 아니다. 박종현 교수님의 훌륭한 번역에서 많은 계발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전적으로 내 인상에 불과하지만...)

2.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은데 일반 독자들은 전혀 그런 느낌을 받는 못하는 번역서들이 왕왕 있는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학문적으로 아주 충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번역본의 일부를 원문과 비교해서 살펴 본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일반화해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면, 전공자들이 학문적으로 충실하다고 말하는 번역은 거의 원문에 대한 축자 번역이라는 것이다. 즉, 원문을 옆에 펴놓고 나란히 읽어 갈 때 도움이 되는 번역을 전공자들은 좋은 번역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런 번역이 가장 나쁜 번역처럼 여겨질 수 있다. 심한 경우 그런 번역은 거의 기계 번역과 같은 수준으로 보일 테니까(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 번역이 적절한 예가 되겠다). 

3. 나의 경우 한국어 번역본을 고르는 기준은 무조건 가독성이다. 중역이 아닌 원전에 대한 번역, 학적으로 정선된 술어의 선택 등등은 내게 부차적이다. 순수이성비판 번역이 새로 나왔다 해서 둘러 본 적이 있었다. 역자의, 문장 구조 하나까지 충실히 옮기려 했다는 말에 내 속은 쓰려졌다. 구역과 신역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펴들고 맨 마지막 문장을 비교해 보았다. 구역은 관계대명사절을 안고 있는 문장을 두 문장으로 잘랐고, 신역은 그대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신역이 무엇을 얻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렇게 해서 신역은 가독성을 잃었고 판매 부수를 하나 잃었다는 것이다.

4. 철학 서적 번역에 대한 비평의 많은 부분은 개념어를 얼마나 적절하게 한국어 단어로 옮겼는가에 집중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비평을 게으른 비평이라고 여긴다.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것은 책을 읽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비평이라는 것!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누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로 옮겼다고 하자. 아마 철학에 조금만 조예가 있는 일반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엉터리 같은 번역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판의 칼을 들이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자. 존재와 실존은 어떻게 다른가? 실존 대신 존재로 옮기면 안되는 건가?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쓸데없는 걱정들 말라고. 사르트르가 그의 책에서 하는 일이란 결국 존재(실존)라는 말에 대한 다양한 맥락들을 제공하는 것이지 않은가? 설사 어떤 비전문가가 실존이라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말 대신 존재라는 말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단어의 쓰임에 대한 전체 맥락이 제공된다면 독자가 사르트르의 명제를 오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내 말의 요지는, 특정 개념들에 집착하고, 원문의 축자적 의미를 따라가는 번역보다는, 맥락을 잘 풀어주는 번역이 훨씬 의미있다는 것이다.

5. 해석가들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의 의미를 한정지으려 한다. 그러나 그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고안한 용어들에 한가지 분명한 뜻만을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낱말들은 놓여지는 맥락마다 진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은 서로를 향해 똑같은 문장을 사용하여 비판을 한다. "당신은 ~라는 말을 여기 저기서 부주의하게, 부적절하게, 혼란스럽게, 때로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런 비판을 받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 그때 내가 좀 실수를 했지요...")

6. 여기서도 다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개념어에 대한 확고한 대용어를 한국어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정력의 소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 개념이 그 맥락에서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 훨씬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축자 번역(그리고 개념어 번역에 대한 과도한 집착.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은 맥락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려는 아주 적절한 핑계라는 것(물론 해석적 중립성을 내세우지만). 앞서 이야기한 가독성이란 결국 역자가 원문을 읽고 앞뒤가 맞게 잘 이해한 것을 한국어로 풀어줄 때 나타나는 현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반면, 축자 번역에 특징적인 것은 이해를 아주 희소하게만 담고 있다는 것. 

7. 이러한 맥락 드러냄이 없는 철학서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분은 한국어판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는 거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영어판을 읽으니 이해가 잘 되더라, 그러나 다시 한국어판으로 돌아와 읽으니 또 이해가 안되더라, 그러나 아무래도 이건 역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와 독어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일 것이다... 라고 말하더라. 비슷한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번역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읽으면 이해할만 한데 한국어로 읽으면 그야말로 형이상학이 된다! 이걸 고전 그리스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극이 커서 그렇다고 양해해 주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박종현 교수님이 충분히 증명해 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독어와 한국어 사이에서만 그 간극을 인정해야 할까?

8.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어가 영어에 비해 많이 추상적인 언어라고 생각했었다. 영어를 옮긴 글들이 원문에 비해 추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나는 비슷한 말을 들었다. 라틴어 문헌을 번역하는데  있어 영어가 라틴어의 생생한 구체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우리가 바보가 아니라면 라틴어>영어>한국어 순으로 각 언어가 구체적 현상을 제대로 포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사유가 시작된 곳에 생생함의 권리가 놓여 있다. 사유가 전달되는 과정이 곧 추상화의 과정이다. 추상화되지 않으면 사유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가 추상화의 외피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사유가 아니다. 즉, 그것은 고유의 생생함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때 "고유함"이란 사유가 처음 발생했던 그곳의 고유함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지금 이곳, 그 사유가 전개되고 있는 바로 이 맥락에서의 고유함이 그 사유가 드러내야 할, 그리고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 생생함이다. 만일 이 명제를 긍정한다면 철학서들이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자명할 것이다. 즉, 축자적 번역을 지향한다는 말은 철학적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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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선생 2012-07-2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얼마전 국가 (박종현 역)을 읽었습니다만, 블로거님의 평가와 달리 저는 매우 블편한 독서를 했었습니다. 제경우에는 반대로 번역이 전혀 매끄럽지 않았거든요. 문장의 호응관계도 뭔가 어색하고... 그래서 영문판을 찾아 몇장 대조해 보았더니 확실히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윗글의 7번에 해당하는 경우죠. 사실 '국가'에 담겨진 내용이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읽히지 않아 짜증이 났었는데, 결론적으로 제 문장이해 능력에 문제가 있었는가 봅니다. 아무래도 제가 철학 전공자도 아니거니와 원문의 '참맛'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처지라 더욱 그런가 봅니다.

Weekly 2012-07-27 02: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국가를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 위 포스팅의 이야기는 제 기억에 남은 인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도 박종현 번역의 국가가 읽기 쉬운 글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문의 스타일을 반영한 때문인지 문장들이 무척 길고 단어들이 풀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피통치자"라고 하면 읽기에 더 쉬울 수 있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 예는 물론 제가 지금 즉흥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제가 박종현 번역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문장이 그렇게 늘어져 있으면서도 아귀가 딱딱 맞아서 번역문이 아니라 한국어 문장처럼 읽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잡한 사유를 개념어를 배제하고 일상적인 어법으로 풀어 쓴 것 같은 느낌... 플라톤 시대에는 개념어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단어들과 예를 가지고 추상적인 사유들을 표현해야 했었으니 박종현 번역이 그러한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한 이년 전쯤에 조대호 번역의 파이드로스를 나름 꼼꼼하게 읽었었는데 박종현 번역의 국가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의 은사님의 평가에 따르면 박종현 번역이 그리스어 원문에 아주 충실한 것이라 하니 이제 스타일의 문제가 남겠지요. 스타일은 개인의 취향이 되겠습니다만, 저는 플라톤 철학의 진수는 일상적이고 소박한 단어들로 추상적인 사유를 표현해 내려 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박종현 번역의 스타일에 높은 가치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문장 호응이 안맞는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악역에 해당하는 문장이 왕왕 있다는 것이니 이런 것은 논외가 되겠지요...

(박종현 번역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한국 밖에 있는 관계로 직접 책을 참조하지는 못하고 박종현 번역의 일부를 어느 분이 발췌해 놓은 것을 긁어다 아래 그대로 붙여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e)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pp. 92-93)

수경선생 2012-07-28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철학적 '무지자'의 애꿎은 투정에 이렇게 긴 글로 화답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첫 편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름'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내용인 듯합니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들은 아시다시피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원문의 엄밀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좋은 번역일른지 모르지만, '일상적인 대화'라는 관점에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런 식의 표현으로 대화를 했을까요? 구체적인 지적을 하자면 다시 책을 빌려 조목조목 따져봐야겠습니다만, 블로거님이 예시한 문장(정확한 인용이란 가정하에)만 보더라도 어의 중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실까요?

A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B 그 (통솔을 받는)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A-B 두 문장을 비교하자면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과 '말하고 행하는 것'을 구분하여 표현하기 위해 '통솔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것'이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A 문장에서는 바로 앞서 제시된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B 문장에서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와 '말하고 행하오'가 어색한 호응관계를 이루고 있고, '염두에 두고'가 반복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정확히 원문이 어떠한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이 정도로도 간단히 뜻이 통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그래서 트라시마코스 선생, 여타 어떠한 통솔을 맡은 사람이건 간에 그가 통솔자라고 한다면 자기에게 편익이 되는 쪽보다는 자신에게 통솔을 받거나 혹은 자신이 통솔하게 되는 이들에게 편익이 되도록 생각하거나 지시할 거요. 게다가 말하고 행할 때도 또한 이에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겠지요.

조금 더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영문판과 대조해 보아야겠습니다.

Weekly 2012-07-29 18: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의 원칙은 역자가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고(물론, 이 이해에는 해석이 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번역하는 하는 한에 있어서, 번역문의 스타일은 역자의 선택사항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번역문에서 저자인 플라톤이 무의미하게 어의를 중첩하였을 경우, 즉 나쁜 스타일로 글을 썼을 경우, 역자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저는 역자의 선택사항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그것이 나쁜 스타일이라는 확증이 있어야 하고, 나쁜 스타일임을 주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굳이 교정해야만 하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단지 어의가 중첩되었고, 중첩은 나쁘므로 중첩을 해소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플라톤의 스타일이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걸 살려준 박종현의 선택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수경 선생님께서는 생각이 다르시겠지만요...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논의를 하려면 저 문장의 앞뒤 맥락을 살펴야 하는 등의 수고가 따르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호응이 어긋나게 번역된 문장들은 악역에 속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예시한 문장에 한해 말씀드린다면, 저는 박종현이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 한 문장을 옮기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그리고 그 결과물은 얼마나 훌륭한지요! 저 문장의 영어역을 한국어 문장으로 옮길 생각을 하면 저는 암담합니다. 단어들이 풀어져 있어 문장이 늘어졌는데, 곳곳에 쉼표를 치면서도 호응을 유지해야 하고, 절대 외국어 번역문의 냄새를 나게 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통치 행위를 한다."고 대의만 전달해 주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저는 이런 번역도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박종현의 것보다 나은 번역이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번역은 원문이 극도로 난해하든지, 원문의 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플라톤의 특수성에는 플라톤이 훌륭한 철학자 이전에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번역자들은 플라톤의 스타일을 가능한 살려주어야 하는 임무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수경선생 2012-07-3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그리스 원전을 읽을 만한 능력도 없는 처지라 더이상 사족은 달지 않겠습니다. 더군다나 Weekly님께서는 철학 전공자이시고 영국에서 유학도 하고 계신 것 같으니 아래 영문본을 옮기는 것으로 저의 어리석은 지적을 마치려 합니다.

Then, I said, Thrasymachus, there is no one in any rule who, in so far as he is a ruler, considers or enjoins what is for his own interest, but always what is for the interest of his subject or suitable to his art; to that he looks, and that alone he considers in everything which he say and does.

- Scott Buchanan, He studied philosophy at Balliol College, Oxford as a Rhodes scholar between 1919 and 1921. He continued his studies in philosophy at Harvard University and received his doctorate in 1925.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플라톤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써 누구보다도 훨씬 간결하면서 명료하고 논리적인 언명을 구사하였을 것이며, 적어도 박종현 선생의 번역이 플라톤의 스타일을 그대로 옮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weekly 2012-07-31 18: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수경선생님께서 달아주신 댓글들에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그릇된 인상들에 대해서는 정정을 하여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은 맞지만, 졸업 후 10 여년의 세월 동안 철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었기에 철학 전공자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블로그 사이트에서 그런 인상을 피웠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이겠지요. (저는 작년 여름까지 거제도에서 용접을 하던 노동자였습니다.)
또, 작년 여름에 영국에 건너와서 이번 가을 학기부터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할 예정인 것은 맞지만, 영국 체류의 대부분은 어학 코스를 밟는 과정이었고, 대학원엔 아직 등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에 있어 저는 수경 선생님과 같은 일반인이지,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댓글들 중에 수경선생님 겸손이 지나친 점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설사 학계의 대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그렇습니다. 철학은 아무 유보없이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플라톤이 알려준 소크라테스가 철학한 방법이겠지요...

예시 번역문에 대해 제가 구체적인 비평을 피한 것은, 단순히 제가 그리스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 하자면, 저는 수경선생님이 수정한 문장이 박종현의 문장보다 명확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통솔을 받거나 혹은 자신이 통솔하게 되는 이들에게" 같은 대목은, 아주 나쁜 한국어 문장이고, 그러므로 철학적으로도 틀렸습니다. 그 이유는 박종현본이든 영역본이든 다시 한번 살펴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일반론적으로 얘기해서 철학자가 어의 중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한 것을 하나로 묶어서 번역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철학자가 지시어를 빈번하게 사용한 문장들은 번역자가 어의중첩을 무릅쓰고라도 지시어를 명확하게 풀어주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저는 믿습니다. 철학은 이해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철학적 무지자로 자칭하시는 분께서 전혀 명쾌하게 읽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번역을, 끝까지 명쾌하고 훌륭하다고 고집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원글에서 제가 말한 것과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진지하고 사려 깊은 댓글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은 무척 덮다니 건강에 유의하시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을 나누도록 하지요. 

weekly 2012-08-0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경선생님께

남겨주신 이메일 주소는 제가 잘 간직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 정보 노출 문제가 염려되어 본의아니게 수경선생님의 댓글을 급히 지웠습니다. 무단으로 수경선생님의 댓글에 손에 댄 점 양해를 구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지난 기록들을 몇 개 읽어 보았다. 안달해 하는 모습들. 영국에 오기 전이나 그 후나...-.- 에세이 쓴다고 낑낑 매는 모습을 되돌아 보며 안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기고만장한 자신감. 뭘 몰랐을 시절. 나는 지금 엄청난 벽 앞에서 떨고 있는데... 언어의 벽, 너무 오래 학교를 떠나 있었다는 자각, 내가 주로 공장 노동자였으므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마는 문화적 괴리감, 한국도 아니고. 얼마 전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철학 강연을 하나 들었다. 나 답지 않게(?) 강의실을 둘러 보며 나 같은 사람(검은 머리를 한 유색 인종)을 찾게 되더라. 없더라. 얼굴에서 스마트함이 풍겨지는 잘 생긴 백인들 틈에서 나는 고작 강사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앉아 있었다. (다행히 주제가 아주 낯선 것이 아니었고, 또 프리젠테이션 도구를 활용한 강의였기 때문에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강의 끝무렵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가며 사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연회 끝나고 열린 다과회에 참석할 배짱은 없었다...)

기고만장했던 시절의 기록들 중 하나엔, 이제 테마를 잡았으니 1년 정도 후에는 엄청나게 진보해 있겠지! 하는 대목이 있다. 그로부터 7, 8 개월이 지난 지금의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렇게 지난 버린 시간의 크기가 내게 충격을 준다. 나는 전혀 진보하지 못했다. 나의 테마에 대해서든 다른 무엇에 대해서든. 아직 4 달 정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나는 또 안달이라는 익숙한 옷을 껴 입을 것 같다. (정확히 일년 전 이맘 때쯤 나는 공장 생활을 그만 두었었다. 삶의 단계를 특정할 수 있는 날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다. 그걸 측정의 도구로 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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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적 문제가 앞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냉소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도한 진지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으뜸의 윤리는, 그러므로 으뜸의 유혹은 "정직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비트겐쉬타인의 말대로). 다시 말해 무의미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 철학적으로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해 버린다. 무의미한 문제에 진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척" 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어떤 문제에도 "척" 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은 철학적 문제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로서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출신 배경(작년 이맘때까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어떤 배타성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배타성은 어떤 확연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아다시피 그러한 경계선은 존재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철학적 문제 앞에서 보이는 냉소는, 역으로 우리가 철학적으로 진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한 그것은 나를 다시 그 앞으로 불러 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냉소와 더불어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냉소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기억하라, 경외만이 존재하는 문제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답들로부터 탐구를 시작한다. 함정은 질문이 "이것이"가 아니라 "이것이란"으로 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일차적인 답변들은 모두 기각될 운명이다. 아다시피 플라톤이 그의 대화들에서 한 일이 이것이다. 일상적인 답변들을 물리치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를 명확히 해나가는 것. 그러나 대화는 언제나 철학적 막장, 철학적 혼란, 철학적 경련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후대의 소심한 주석가들은 철학은 해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철학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비트겐쉬타인은 플라톤의 질문의 사기성에 주목한다. 플라톤이 한 일은 단어를 일차적(즉,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사용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노동의 고역에서 면제된 무료한 지성이 창조해낸 고상한 공허다. 비트겐쉬타인의 공격은 가혹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쉬타인을 우리의 전제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는 나의 밖에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사유들 중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사유가 나를 선택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그 사유에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때고 그 사유는 나를 내적으로 분열시킬 것이다. 그 사유는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걸 좋아하든 말든. 내가 그걸 선택했다고, 혹은 배척했다고 믿든 말든.)

플라톤의 대화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창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질문 방법을 창시한다. 동시에 그 질문에 적합한 답변의 형태를 선험적으로 제시한다. 플라톤의 대화란 그러한 새로운 교과에 맞게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내용이 전부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그 교과에 철학이라는 이름(피타고라스에게서 빌려온?)을 붙이고 가장 보편적인 학문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플라톤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그것의 보편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하이데거는 플라톤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내면서 (플라톤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구상(혹은 복원)해 내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철학은 "구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플라톤 철학, 그러므로 서양 철학사 전체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대단히 의미있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묻는 것은 성급한 짓일 것이다(예를 들어 하이데거 자신이 예비적 사유자라면 본 사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어쨌거나 그 작업들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어제 런던에 가는 데 아이폰을 충전해 놓지 않아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예비로 들고갈 종이책으로 고른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독영 대역으로 분량이 작았고 행간이 넓었다. 예전에 한번 읽고 가볍게 던져 버렸던 책이다. 어제의 두 번째 독서에서는 나를 꽉 붙잡아 버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러나 보통 하듯 "철학"의 정의를 탐구하려 하지 않고 "무엇인가"라는 말을 천착해 들어간다. 그 "what"에 대한 천착을 통해(다시 말하면 질문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새로운 보편성을 암시한다. 

나는 늘 하이데거가 "진지한" 철학자인지 의심스러웠었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진지하고 거대한 작업의 계획서라는 것을 의심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사유의 한 요소로 파고들어올 것이다. 관념은 그것이 살아있는 관념인 한 경탄과 혐오("존재와 시간"을 처음 읽고 난 훗설의 반응)와 같은 모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사유란 동화와 이화의 변증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철학자를 만났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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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2015-06-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도한 진지함 때문에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너무 딱딱하고 공격적인 사람 앞에서 그 문제가 왜 중요하지 설득시키려고 하다보면 갑자기 화가 나서 힘들어지더라고요.

철학이나 다른 학문이나 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사람들이 그 학문을 개척하고 있고...저는 그냥 제 인생시간 때우려고 공부하는 학생에 불과하고요., 공부하다가 비트겐슈타인 붙잡고 있다보면 또 흥분해서 뭔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스스로가 병신같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 주변에서 도덕적 해이가 어떻고 왜곡이고 뭐 이런 소리 듣다보면 그냥 돌아버릴 것 같네요.

weekly 2015-06-28 04: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넘겨짚기로 말씀드리면... 우리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의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철학도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탈레스 시대부터 똑같은 고민이 있었으니 이 고민의 역사는 참으로 장대하네요.:)

답은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 여유와 철학적 재능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일생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면 귀명창으로 남으면 되고요. 진지한 작가와 사상가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격려해 주는 거죠. 진지한 분들은 외로우므로... 철학에 대해 과도한 진지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 외의 옵션이 있을까요?

아,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고 있는 옵션이 있습니다. 철학을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끝장내는 것이죠. 제 경험을 곁들여 말씀 드리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도들에게 매우 위험한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항상 철학이냐 아니냐, 삶이냐 아니냐라는 절대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이니까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학에 대한, 삶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념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현실은, 삶의 현실은 항상 철학과 삶에 대한 정의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절대주의 화가들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 나아갈 곳이 없죠. 회화의, 혹은 철학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 말고는. 회화, 철학이 열정의 대상이라면 왜 선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죠? 절대주의자들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색채와 형태를 마음껏 추구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진지한 질문은 항상 실질적인 질문으로 환원될 것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느냐, 철학적 재능이 있느냐, 철학적 열정이 있느냐... 나머지는, 제 생각에는 다 거짓 고민들입니다.

이종호 2015-07-28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철학자들은 물음을 질병처럼 다룬다.-비트겐슈타인, PI 225

내가 선생님한테서 무엇인가 배우기 전에 나는 내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생각들로 밤에 잠을 자기 어려웠다. 나는 정신과의사한테서 약을 받아 먹었다. 나는 물건을 던지고 부수었다. 입에서는 아무런 표현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리 지를 줄만 알았다.

물음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나를 가르쳐 주신 한 선생님은 나를, 그 주제와 연관된 방식으로, 개인적으로 공격했다. 나는 화가 났다. 선생님은 내가 그 물음을 나의 질병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내가 느낀 고통은 나에게 그것을 해결하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나는 글을 썼다. 선생님은 나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 고통이 내가 한 발짝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끔된다. 그 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약도 먹고 자해도 했다.

2.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오랫동안 많은 생각들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성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남들보다 더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자동적으로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치를 취한다. 나는 그런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고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
만약 내가 분명한 태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멈추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분명한 태도로 남들보다 더 성장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공부할 수 있다. 그렇게 공부하면 나는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물음을 질병처럼 다루고 싶지 않다. 나는 물음을 공처럼 다루고 싶다. 그런데 남들보다 뛰어나야 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집착 때문에 계속해서 나는 고통으로 가야될 것만 같다. 나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어쨋든 나는 아직 주어진 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것같다. 더 많은 압박을 통해서 결국에 더 잘하겠다는 욕망이 나를 귀찮게 한다.

weekly 2015-07-29 14: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포트란이란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한 배커스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상적인 분야(과학, 철학, 문학 등등)에 종사하는 사람은 일상의 번잡하고 지루한 일을 피하고자 그런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이런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심한 동기를 가리고자 이런 분야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어마 어마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의 전기 자료를 보면 이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죠. 아니 허영 그 자체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물론 허영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스피노자도 허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구요. 허영은 긍정적인 맥락에서 열정, 비전, 진지함, 심오함 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허영은 이러쿵 저러쿵 해도 결국은 허영인 것 같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을 질병처럼 다룬다는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허영 속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종호님의 말씀대로 철학적 문제들을 공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철학자들이 하는 작업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 보이니까요.

추상적 작업에서 허영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인식에서 끌어낼 수 있는 윤리는 허영에 압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스스로에 완전히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종호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노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이 곧 선의 절대적인 정의이지요.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