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R을 만남. R은 또다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 에티카 1부의 몇 가지 논점에 대해 나의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 토론은 끝남. 내 생각에 대한 R의 의견을 물었지만 R은 재빨리 나에게 동의해 버림. R은 자신이 인스퍼레이션의 부재와 싸우고 있다고 계속 말한다. 내 생각에, R의 문제는 모티베이션의 문제인 것 같다... 

박사전과정을 하고 있는 남자애를 만났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논문 하나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는데 잡지에 발표하고 싶어한다. 머리를 계속 매만지며 머리가 엉망이라며 웃는다. 이 주제에 몰두해 있느라 머리 손질할 생각도 못했네, 라고 잘난 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잘난 체를 무지 좋아한다. 논문 다 되면 보여달라고 메일 주소를 알려 주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고 문득, 내가 R에게 해 준 이야기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R에게 메일로 틀린 부분을 정정해 줄까 하다고 놓아 두기로 했다. 

목요일 강의 준비용으로 논문들을 읽는데 이빨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새벽 두시까지 공부한 역효과라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가서 포도주에 치즈를 씹어 먹고 원기를 회복하자. 기차간에서 가볍게 읽을 꺼리로 몽크의 "하우투 리드 비트겐슈타인"을 빌려 갖고 나왔다.

에티카 해석에 대한 나의 실수와 여러 논문들에서의 좌절이 나를 상념에 빠지게 했다.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는데 어떤 꼬마가 내 앞에 다가와 "왁"하며 소리를 질렀다. 꼬마 아이가 얼굴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난 그걸 재빨리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가면의 기괴한 형상에서 사람의 눈 코 입을 찾으려는 허망한 노력을 하다 전율을 느끼며 진정으로 놀랐다. 꼬마 아이에게 크나큰 만족감을 주었으리라. 내 뒤에서 꼬마 아이가 또다른 희생자를 찾아 "왁"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야, 내가 대박이었단다. 대박은 쉽게 오지 않아서 대박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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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별 일 없음. 오전 내내 비비씨를 보고 오후엔 아론 소킨의 스튜디오60 에피소드 세 개를 봄. 이 시리즈는 후반부로 가면 많이 지루해진다.

저녁이 되고 공부 시작. 에티카를 읽음. 월요일날 R과 스피노자에 대해 토론하기로 되어 있음. 조사와 사고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깨달음. 초조해짐. -일요일 밤부터 초조해 할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초조하게 살자고 다짐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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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런던에 나가 N이 이사하는 걸 도와줌. 무거운 짐가방 중 무거운 걸 내가 날랐다. 새로 이사 간 곳은 방이 세 개, 거실이 하나, 욕실이 하나, 부엌이 하나다. N은 집 치우는 것도 도와달라 했지만 손대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일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

나: 이봐,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고 네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집 청소는 너가 해야 할 일이야.
(내 속마음: 이봐, 내 시간은 공공재가 아니라구. 그리고 내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상대가 그걸 이용해 먹는다고 느끼게 되면 기분 참 더러워 지지.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라는 거 알아?)

칼같이 자르고(혹은 쿨하게 잘라 말하고) 학교로 갔다. 무의식적으로 도서관 서가로 가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요하킴의 "지성개선론" 주석서, 비트겐슈타인이 럿셀 등에게 보낸 편지 모음, 비트겐슈타인의 일기(철학 노트가 아닌 진짜 일기), 그리고 푸트남의 논문집. 이렇게 남독으로 가면 안되는데, 서가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일은 이렇게 되게끔 되어 있었다...

카페 쇼파에 기대 앉아 비트겐슈타인의 일기를 빠르게 훑어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위대한 철학자일까?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심오해서? 혹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아니면 성인, 혹은 현인에 가까와서? 이 마지막 사항은 비트겐슈타인에게 해당이 없는 것 같더라.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일기에서 느낄 수 있는 건, 혼자 사는 남자의 고독, 그러니까 사막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으니까...

푸트남의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갔다.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이란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논문을 스피노자의 주석서로 읽는다. 다시 말하면, 나는 R과 아프리오리/아포스테리오리에 대해 토론한 결과로 이 주제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R과 만나는 걸 피해 왔다. 이번 주 내내 나는 R에게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제 우연히 R을 학생 카페에서 만났던 것. 그 만남은 결국 푸트남, 그리고 다음엔 물론 콰인으로 이어질 것이다.)

도서관에서 푸트남을 읽다가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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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10-2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행복이란 기분 어떤지 잘 알것 같네요. 그게 왜 한국에선 어려운지!!

+ 근데 정말 런던피플은 성격이 다른가요? ㅋㅋ 다들 런던피플 성격 거지같다고 ㅋㅋ

weekly 2012-10-22 06: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핫하,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회든 경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자기만족처럼 보이는 일에 시간과 돈을 쏟아 넣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한국은 그에 대한 압박이 좀 더 심하고, 영국은 좀 더 관대한 것 같지만, 제가 느끼는 행복감의 배경은, 여기가 영국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동네 사람들 등의 시선과 압박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크겠죠...^^

음... 제가 아직 영국 친구가 하나도 없고, 영국 사람들과 많은 접촉이 있는 것도 아니라, 객관적인 척 하고 잘 모르겠다고 해버리면 세상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겠죠?^^ 스페인 친구들이 영국 날씨와 영국 사람들 성격을 싸잡아 비판하는 건 많이 봤습니다. 내성적이고 사귀기 힘들고, 차갑고, 술 들어가기 전과 후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다는 거죠. 제 개인적 경험으로 봐도 영국 사람들과 접촉하는 게 제일 힘듭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저는 제 영어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영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은 상대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나누려고 합니다. 영국 사람들이 이런 데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 사람들 끼리도 서로 관계를 맺는 데 힘들어 한다는 건 영국 사람들 스스로 인정하는 바이구요. 또, 온세계가 다 영어를 들고 말을 걸어 오는 상황에서 영국 사람들이 영국 밖의 세계에 무관심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능한 것 같습니다. 제 친구는 영국인들과 일하는데, 평소에는 찬바람이 쌩쌩 돌다가, 어떤 화제에 대해 우연히 얘기를 나누게 되면 참 친절하고 얘기도 잘한다는 군요. 그래서 서로 친했졌나 하고 생각하면, 또 어느날 갑자기 찬바람이 쌩쌩 돌고...^^ 문화적인 차이가 크겠지만 우리 기준에서 보면 사귀기 힘든 사람들인 것은 맞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성격 드럽다고 소문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런 백인네들만 보다가 펍 입구에서 쫄딱거리며 먼저 말 걸어오고 한국 잘 안다며 희죽희죽 웃어주는 흑인 친구들 보면 정말 귀엽고 정감이 가지요. 스킨쉽이 저절로 될 정도로~^^

Forgettable. 2012-10-22 10:27   좋아요 0 | URL
한국이 아니라서가 정답인듯. 요즘 또 떠나고 싶어서요.

런던이 특히 심한 것 같더라구요. 친구도 많이 사귀신 것 같아서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ㅋㅋ 제 친구는 영국 시골에서 왔는데 제가 런던사람 캐릭터 물어보니 뭐 한국의 서울 사람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 편견은 어떤 책에서 런던피플을 마구잡이로 욕해놓은 것을 보고 진짜인가 호기심이 동했던 거였거든요. ㅋㅋㅋ 여튼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한 주 시작 잘 하세욤! 일기(?)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weekly 2012-10-2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은... 친구 몇 명 사귀지도 못했는데 글로 써놓고 보니 풍성해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혹시 의도한 거?)^^ 저에게 공정하게 말하자면 제가 친구 만드는 데 별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을 거 같기는 합니다(영국 놈스러운 건가?^^).

엊그제 런던 동부쪽, 베스날 그린, 헤크니 이런 동네에서 놀았는데 그 동네는 분위기가 참 다르더라구요. 특히 베스날 그린 쪽은 영국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소도시를 연상케 하더군요. 헤크니의 한 가게에서 커피랑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먹는데, 가게 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게 퉁퉁한 흑인 아낙이 다가와 뭐라 한 마디 하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씨유 레이아" 하고 가는데,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정겨운 풍경을 보는 듯 했습니다. 반면 역근처 펍 앞에서는 백인 청년들 너댓이 모여 간헐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놀래키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엔, 유색 인종들아, 너그들 머릿수를 암만 늘린들 여기 영국은 우리 땅이야! 하고 시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너그들 말이 맞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죠. 저야 단지 여행객일 뿐이지만, 헤크니의 퉁퉁한 흑인 아주머니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한 주 되세요~^^
 

D2에 관한 짧은 보고문을 만듦.

N과 집을 보러감. BBC 드라마 이스트엔더스와 똑같이 생긴 동네였음. N은 흥분해서 1 분만에 계약하기로 결정함. 나는 너무 빠른 결정이라며 계속 우려를 표함.

N: 내 직관이 행복해해.
나: 난 내 직관을 믿지 않아. 여자들이라면 경우가 다를 수 있겠지만...
N: 너 섹시스트야?
나: 헐~

R과 만나 아프리오리 논증의 증명력과  아포스테리오리 논증의 증명력 등에 대해 토론함. 잠정적인 결론은 아프리오리/아포스테리오리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 예를 들면, 에티카 제1부 공리 6. 참인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일치한다, 는 아프리오리한가? 

(나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의 방법론에 관심이 많다. 엊그제 학교 도서관 서가를 처음으로 돌아보았다. 그동안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었다. 사고 싶었던, 그러나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이라 속만 태우던, 요하킴의 "지성개선론 연구"가 거기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퇴락한 그 책을 집어 들고 냄새만 잠깐 음미하다 책장에 도로 끼워 넣었다. 주제를 넓히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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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많이 했다.
오늘 한 것 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옹호한 것. 텍스트 지원이 가능한지 검토할 것.

(N네 집주인이 일요일까지 방을 빼라 했다 한다.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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