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관념 이론을 명제 태도와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심리 철학 에세이 주제로 구상한 것인데, 스피노자에 과도한 시간을 쏟는 것을 정당화하려 만들어낸 알리바이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나중에 쫄딱 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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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과 에스프레소 카페에서 에티카 제1부 공리6에 대해 토론했다. R이 먀슈레의 에티카에 대한 책의 일부를 번역해 주어 그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가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 등이었다:

"In the idea and the objective content of what it represents in thought in so far as its content is external to it by nature there is no causal link." 

나는 이 문장은 단지 "In the idea and its object there is no causal link."로 고쳐 쓸 수 있다고 말했고, R은 나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고쳐 쓴 문장은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다. R은 먀슈레의 문장은 그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렇다면 그 깊은 의미를 제시해 보라는 나의 채근에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R과 토론을 마친 후 나는 도서관으로 갔고 에티카를 펴놓고 나의 주장을 검토해 보았다. 마슈레 문장의 "the objective content of what it represents in thought"는 단순히 the object of the idea를 뜻할 뿐이다. 그렇다면 "as far as its content is external to it by nature"는 "the objective content of what it represents in thought"와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저 문장은 쓸데없이 중복된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아주 나쁜 문장이라는 뜻이다. 나는 마슈레의 저 문장은 에티카 제2부 명제 5를 재진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Ideas... admit not the objects themselves, or the things perceived... as their efficient causes..."

이런 말을 왜 하는가 하면, 마슈레의 저 문장들을 검토하다가, 전에 한국에서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책을 읽으면서 든 느낌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트롱은 그 책에서 거침없이 스피노자의 저작들을 해명해 나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에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추상적인 문구들을 그보다 더 추상적인 문구들로 옮겨적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해명되지 않았다. 마트롱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스피노자가 마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처음 그대로 놓여 있을 뿐이다.

추상적인 문구들은 그보다 구체적인 단어들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나는 이걸 윤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해석자가 원저작자의 텍스트 안에 머물게 되고, 그래야 그것을 해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문구들을 그보다 더 추상적인 문구들을 통해 해명해도 된다고 하면 해석자는 임의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텍스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해석을 창의적인 작업의 하나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해석의 실패에 대한 증후로 받아들인다. 비슷한 일이 비트겐슈타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문헌들을 읽으면서 내가 받는 느낌은, "그게 비트겐슈타인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얘기일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요구하고 싶은 것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명은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쓴 문장들을 직접 인용해 나열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것이다. 어떤 창의적인 해석이라도, 그것이 해석인 한 이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철학에 있어서 문제는, 예컨대 해석의 실패에 대한 증후들이 심오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유포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적으로 비윤리적인 일이다. (물론, 먀슈레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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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1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2-11-02 19:18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스로",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철학에서든, 문학에서든 그 어디서든 말이죠. 저는 요즘 한국에 가면 꼭 서산마애삼존불을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삼존불의 얼굴이 영락없는 한국의 아이 얼굴이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표현해 낸 감성과 용기가 그처럼 독보적인 표현을 담은 불상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존경을 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영국에서 커다란 정원이 딸린 대저택들을 많이 방문합니다. 그런 저택들에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티브로 한 대리석상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지요. 제 눈에는 비싼 모조품으로 보여요. 일관되게 기하학적으로 정형화된 미를 표현한 신체들과 무표정한 표정들... 대저택 소유자들의 무미건조한 삶을 반영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지요. (이런 작품들에 비하면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얼마나 살아 있는지!) 스스로 사고하고, 느끼고, 발견하고, 그리고 그렇게 자기화한 것만을 표현하려는 노력, 이런 것만이 삶을 실존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지요. 저는 이 이외의 길은 알지 못합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씁쓸하게 말씀하셨지만 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침에는 책을 한권씩 아작 아작 씹어먹는 꿈을 꾸지만, 저녁녁에는 그저 그런 현실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할 뿐이다.

이동 중에 요하킴의 지성개선론 해설서를 읽는다. 책의 장정, 딱딱하고 두껍고 색이 바랜 책장, 그 안에 담긴 명료하고 단아한 문장까지, 난 요하킴의 책을 사랑한다. 갖고 싶다. 복사본 말고, PDF 파일 말고, 하드 커버의 단단하고 단아한 바로 이 책을 갖고 싶다. 아마존에서 180 파운드에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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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이 좋은 에스프레소 카페를 알려 주었다. 아무 생각없이 첫 모금을 넘기다가 감탄사를 떠뜨렸다. "여기가 이 근방에서 최고로 에스프레소를 잘 뽑는 데야. 내가 널 여기 데려온 이유이기도 하지." R은 지난 주에 다른 학교에서 들었던 에티카 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제2부 명제7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카페에 앉아 이 문제에 대해 같이 토론했고, 추워서 자리에서 일어설 즈음에는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R이 토론 내용을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내용을 정리하고 나니 모든 게 명확해 보였다. 스피노자가 명제7을 증명하는데 공리6을 이용하지 않고 공리4를 이용한 이유는? 즉, 공리6은 무엇을 하는 것이고, 공리4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모든 게 너무 당연해 보여서 에티카의 이해에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감흥마저 사라져 버렸다. 도서관을 나서서 비가 간간히 뿌리는 가운데 우산도 받쳐 들지 않고 지하철역 몇 개를 지나쳐 걸었다. 오늘의 감흥이라면 단연코 그 에스프레소 가게야...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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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맘 먹은 대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위에서 Strictly English라는 책을 읽고 오전에 비비씨를 보고, 오후에 장보러 다니고... 그러다 보니 지난 주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일요일이 지나갔다.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해 온 것들 평가해 보고, 해야 할 것들 계획해 보고, 마음만 급해 하느라 오랫 동안 메일을 드리지 못했던 분들께 메일 드리고, 영어 공부 좀 하고, 폴더에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는 pdf  파일들 정리하고... -이 마지막 것만 했다. 

원래 내가 의도했던 것은, 현재 내가 코를 박고 있는 일에서 거리를 두고, 내가 어디쯤 와 있나 돌이켜 보고, 그렇게 코를 박고 있느라 신경쓰지 못했던 분들을 돌아다 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을 거다. 온전한 하루, 아니면 반나절 동안, 지금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서 떠나 보는 것,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유튭에서 진중권과 간결이라는 사람의 토론 동영상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간결이 자신의 주장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이 도드라졌지만, 그런 것은 토론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판단은 제삼자인 시청자가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던 것 같다.

아마 누구라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비판할 수 있으리라. 사유와 연장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실체라면 둘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까? 만일 어떤 사람이 사유가 양자역학적 뒷구멍을 통해 물리 세계의 법칙들을 간섭하지 않으면서 연장과 상호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려 한다면, 누구라도 "그거 억지같은데..."라고 짧고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혹은 그 후계자)가 옳고 틀리고가 아닐 것이다. 비판자로서의 내가 옳고 틀리고가 아닐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세계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게다. 데카르트의 경우라면, 우주에서 물리 법칙이 관철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하는 심오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내게는 이런 것이 진정으로 의미있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극장과 현실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진중권과 간결의 토론,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분명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보인다. 현실은 훨씬 풍요롭고 다채롭다. 예컨대, 두 가지 논점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면, 두 논점 모두 비판점을 갖고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두 논점이 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논점을 빠르게 각하해 버리는 것도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빠름이 우리의 명민한 시민적 판단력을 보증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빠름이 깊이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스티브 잡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제품을 만들고자 하느냐고. 스티브 잡스의 대답은, 시장에 혁신을 가지고 오는, 경쟁자보다 몇 년 앞선... 따위의 수식어를 달고 있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아, 물론 스티브 잡스는 수사법의 대가이고, 타고난 장사꾼이고... 다 맞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러한 표면에 집중하여 스티브 잡스의 말에 귀를 빌려준 것이라면, 그건 정말 시간 낭비다. 그런 거 집어내려고 진중권-간결의 토론회를 봤다면, 그런 정도 비판을 하려고 데카르트를 읽는다면, 그런 것은 다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적 논점에 대한 판단 기준을 스티브 잡스식으로 말한다면, 예컨대, 어떤 판단이 나의 자식에게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판단하라! 그리고 책임지라!)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철학적 논제를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끌 수 있는 문제로, 그 논제 자체를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일 게다.

그것이 극장의 일인지 현실의 일인지를 가르는 것은 나의 실존성이다. 그것이 나와 관련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나는 빠른 판단을 하고 극장을 나서면 그만이다. 만일 그것이 나와 관련 있는 일이라면, 그러한 일에는 오히려 신중한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일에 대해 우리는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체적이란, 내 스스로 판단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와의 관련성 아래서, 나의 가치의 연결망 아래서 판단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극장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우리는 실존 안에 존재하든지, 그냥 무로 남아있든지이다. 지나치게 살벌한 조건이다. 우리가 실존의 무게로 무너지지 않도록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 바로 유머와 웃음이리라. 물론, 자연의 선물에 냉소는 들어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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