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들으며 아이폰으로 아이리스 머독을 읽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허리에 무전기를 찬 남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알만 했다. 또 구간이 막힌 것이다. 플랫폼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 노, 아이 노"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나도 그 행렬에 합류했다. 이 나라에 점점 시니컬해지는 나를 느낀다.

지상에는 사람들로 가득 하다. 언제나 그렇듯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보인다. 하느님을 부르짖으며("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무리지어 걷는 영국 아가씨들. 역설적이게도 이 친구들은 맘 먹고 차려 입을 때가 가장 우스꽝스럽다. 좁은 도로, 4, 5층 높이의 석조 건물들. 예전에 학원 강사가 런던의 첫인상을 묻기에 시골스럽다고 대답했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시골스러웠다.

학교까지 걸어서 갔기 때문에, 잠깐 목 좀 축이며 쉬려고 에스프레소 카페에 들렀다. 마침 R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주로 우연히 만난다. 우리는 만나면 거의 철학 얘기만 한다. 그런데 오늘은 R이 "영국 오기 전에 뭐 했다고 했지?" 하며 사적인 것을 물어왔다. "용접사. 그러니까 공장 노동자." 그런데 우리 옆자리에 자그마한 동양 여자들 세 명이 앉았다. 곧 한국말로 "내일 교회..." 이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솔직히 나는 옆에 한국 사람이 있으면 불편하다. 나는 걷자고 말한다. 얼마쯤 걷고나서 나는 웃으며 말한다. "저 친구들 한국 친구들이야. 아마 저 친구들도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알았을 거야. 내 엉망인 영어를 듣고 말이야." "네 영어는 훌륭해." "재앙이지." 

내 영어는 엉망이다. 나는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R은 슬쩍 슬쩍 내 영어를 교정해 준다. 예를 들어 내가 We have to express our thoughts "in our own term." 이러면, "The most difficult part for me is the phrase "in my own terms", 이런 식으로 슬그머니 내 말을 고쳐 준다. 물론, too much times... 등등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엉터리 영어는 나도 그도 어떻게 감당이 안될 때가 많다. 가끔은 바른 영어 감시 경찰이 있어 나를 잡아 가지 않을까 하는 싱거운 걱정이 들기도 한다.

R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화가이기 때문에 경험론 전통의 영국 철학 풍토에 많이 힘들어 한다. 나는 그에게 자료를 읽고 정리하고 에세이를 쓰는 방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하고 있다. 걸으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어떤 사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요구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소 기계적으로 접근하라. 파인만이라는 물리학자 알아? 내가 파인만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이 있다. 너의 사상을 초등학생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서술해 보라. 그러면 개념어 하나를 사용하는데도 매우 신중해 질 수 밖에 없다. 정당화할 수 없는 개념어 사용은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서술된 사상이 바로 너 자신의 언어로 표현된 사상이다. 나중에 철학 전공자와 토론하거나 에세이로 작성하여 제출할 때는 그 사상을 압축하고 추상화하여 서술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는 지루하니까... 그렇게 압축되고 추상화된 사상은 매우 파워풀하게 보일 것이다...

도서관 앞마당에서, 나는 벽에 기대 서 있었고 R은 담배를 펴고 있었다. R이 물었다. "대학원 프로그램 행복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싶어했으니까. 삶에서 철학은 내게 거의 전부니까..." 가끔 하나만 외곬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것 말고도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R이 나의 영어를 슬쩍 교정해 주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예술도!"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예술도! 그리고 사람들..." 나는 손가락으로 R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친구..." 

도서관에서 허기질 때까지 공부했다. 지하철 일부 구간이 막혔기 때문에 낮에 걸었던 거리만큼 걸어야 했다. 드디어 역구내로 접어들었다. 연결 통로에서 자그마한 여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마치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지나치고 있었다. 나도 그의 앞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주의를 끌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위로 하며 팔을 들어 올리게 되더라. "Louder! (If you've got a voice that needs to be heard!)"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다. 전혀 충분하지 않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11-18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2-11-20 15:22   좋아요 0 | URL
영국, 런던 처음 왔을 때 여기가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그 대영제국의 수도인가? 생각보다 많이 아담하군... 이런 생각을 했었죠:) 아, 워킹 홀리데이 영국에서도 가능하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 거 같네요. 기회가 있으면 잡으시는 것도~:)
늘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노이에자이트 2012-11-1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에 머독<철학자의 제자>를 구입했어요.그런데 머독 작품을 읽으셨군요.무슨 소설이었나요?

weekly 2012-11-20 15:29   좋아요 0 | URL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 아래서>라는 작품입니다. 영어 공부용으로 반복해서 읽고 있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철학자의 제자>를 헌책방에서 아름다운 가격으로 구입했는데,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물 아래서>의 가벼운 필치(?)와 유머를 좋아하는데, <철학자의 제자> 등 머독의 후속 작품들의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하네요. 다 읽으시면 감상문 올리시겠지요? 꼭 찾아가서 읽어 볼께요~:)

노이에자이트 2012-11-21 08:18   좋아요 0 | URL
하하하...올려볼까요? 그물 아래서는 아직 국내에서 번역이 안 된 것 같아요.

weekly 2012-11-21 18:06   좋아요 0 | URL
"Under the net"은 국내에선 <그물을 헤치고>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네요. 저도 한국 있을 때 이 번역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술술 읽히는 잘된 번역이었던 것 같아요. 평소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철학자가 쓴 소설에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데, <그물을 헤치고>는 철학자가 썼을 법한 소설(예를 들면 사르트르의 <구토>)의 냄새를 거의 풍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님이 독후감 써서 올리시면 당근 찾아가서 읽어 볼께요~

노이에자이트 2012-11-22 10:27   좋아요 0 | URL
오...번역이 되었군요.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weekly 2012-11-23 19:39   좋아요 0 | URL
:) 좋은 하루 되시길~

2012-11-18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2-11-20 15: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글을 재미있게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뾰족하고, 혼자 생각에 꽉 막혀 사는 글들인지라...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늘 행복하시길 기원할께요~
 

영국 비비씨 드라마 디 아워 시즌2가 시작되었다. 유일하게 방송 시간 기다려 가면서 보는 텔레비 프로그램이다. 비비씨에서 다운받아다 이동간에도 본다. (요즘 기차간에서 책을 잘 보지 않는다. 영화나 테레비 방송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 북을 듣거나 그런다.)

디 아워의 작가는 여자다. 전형적인 남자들의 세계(정치, 첩보, 음모...)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여성 작가의 정체성을 찾아내기가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성적인" 어떤 것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주인공 중 하나인 프로듀서 미스 롤리. 작가는 롤리를 확실한 신념을 가진 유능한 프로듀서로 그리지 않는다. 롤리는 끊임없이 변명을 해대며 툭하면 말을 버벅댄다. 롤리가 여성스러운 매너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고, 그런 전통적인 여성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그러나 실력면에서는 다소 엉성한 언론인으로 보인다면, 그건 작가의 의도대로일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 롤리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여성성을 초월하는 것으로도, 여성성의 전형으로도)

진행자 헥터의 아내 모니. 헥터는 유명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기인이고, 모니는 곱게 자란 전업 주부다. 헥터는 자신의 유명세를 만끽하며 유흥을 즐긴다. 헥터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작가는 그렇게 바람을 피우는 헥터와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며 그를 기다리는 모니를 대조해 보여준다. 여기까지인가? 아니! 식당에서 식사하며 직장 일만 이야기하는 헥터에게 모니는 "당신은 나를 지루하게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어쩌면 헥터를 밖으로만 돌게 한 사람이 모니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모니가 남편 헥터를 기다리며 음식을 장만하다가 남편이 진행하는 시사 프로그램 대신 드라마를 보는 장면을 보여 준다. 헥터가 원하는 것을 모니가 줄 수 없고, 모니가 원하는 것을 헥터가 줄 수 없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여성 자신에 대한 여성 자신의 이런 냉철한 시선은 매우 드물다. 또 하나의 예로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 아래서"라는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어렵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정치적으로 위험한 농담들이 대범하게 오가고 있다.

디 아워의 작가도, 그물 아래서의 작가도 영국 출신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국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질을 말하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농담 소재로 써먹는데 다른 누구네들보다 대담하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이 나라 사람들이 내성적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너가 최고야!" 이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걸 쑥스러워 하는걸지도 모른다. 대신 "넌 정말 최악의 쓰레기야!", 이렇게 돌려 칭찬하는 걸 더 맘 편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될 것이겠지만... 역으로 말하면 영국 사람들이 그만큼 국제화가 덜 되어 있다는, 다시 말하면 촌스럽다는 뜻이 될 지도...) 예를 들면, 리틀 브리튼이나 오피스같은 비비씨 히트 작품들은 자기 자신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까는 내용이 전부다. 이런 영국적인 기질이 여성 작가에게 적용되면, 디 아워나 그물 아래서와 같은 작품이 나오겠지. 현실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나는 지금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디 아워를 보자. 배경은 50년대, 60년대 영국이다. 남성 언론인, 정치인들은 예쁜 무희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클럽에서 유흥을 즐기고 고급 정보를 거래한다. 손톱에 곱게 매니큐어를 바른 가정주부들은 집에서 남편이 귀가하기를 하염 없이 기다린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소양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똑똑하고 예쁘고 교육 잘 받은 일단의 여성 언론인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고위급 남성들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프레디는 매우 유능하고 진보적인 언론인이지만, 자신의 동료였던 여성이 상사가 되자 이렇게 말한다: "너가 프로듀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널 이용해 먹기 편해서야. 여성은 까다롭고 감정적인데 도대체 왜 쓰겠어? 적당히 굴려 먹다가 임신했다고 잘라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진보적인 언론인 프레디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적인 언론인 롤리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는 유능한 여성이 있어 조직과 시대에 대항하면서 슈퍼맨같은 활약을 한다? 그것은 판타지지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판타지는 언제나 증후일 뿐이다. 

(새로 부임해 온 상사에게 끊임 없이 변명을 해대며 습관적으로 말을 더듬는 롤리는 내게 진상 캐릭터라고 구박을 받는다. 그렇다. 롤리는 타협을 했고 타협을 통해 자리를 보존했다. 그러나 종종 보면 그런 사람들이 대형 사고를 친다. 타협한 사람들은 조직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롤리가 과도하게 무능하게 그려지고 있는 첫 편을 보면서 이야기 전개를 이렇게 예상해 본다. 결국 롤리가 큰 건을 하면서 뭔가를 보여 줄 거라고. 아니면, 작가는 더욱 진한 현실성으로 나의 판타지를 박살내 버릴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게티에 문제에 대한 개괄적인 에세이 초고를 하나 썼다. 개괄적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배가 산으로 갈까 하는 등의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고심하고 있는 사상을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게티에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 개략을 쓰고 나서 무척 흐뭇했기 때문에 나에게 상을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학생 카페에 가서 신라면 컵라면을 사 먹었다. 1 파운드. 전에 학생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데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었다. 옆에서 금발 머리의 여학생이 흐르는 콧물을 닦아 가면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나도 먹고 싶었지만 영국까지 와서 무슨 컵라면이야,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이러면서 참고 있었다. 먹어보니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맵고 독하더라. 그러나 어쨌든 싸다. -이렇게 알리바이용 점을 하나 찍어 둔다.

(학생 카페에는 한국 학생들이 더러 더러 있다. 어떻게 아냐고? 한국말로 신나게 떠들고 있으니까. 엮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가능하면 한국말을 못알아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 같다. 언젠가 공부를 하고 있는 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학생이 한국말로 "여기 앉아도 되요?"라고 묻더라. 나는 미소와 손짓으로 그러라고 했다. 보통은 "우쥬 마인드~" 이러면서 같은 테이블의 빈 자리에 앉는 것에 양해를 구하는데, 이 친구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중국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떠벌리고 있던 개떡같은 영어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짐작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몬스터 2012-11-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여기 친구를 위해서 떡볶이 요리를 해 줬었거든요. 요리가 산으로 갔다고 동생한테 문자 보낸게 생각나서 살짝 웃었습니다. 무엇이든 근본을 바로하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 말로 댓글 남겨도 괜찮겠지요 (아..소심..ㅎㅎ)

회사 동료중 나이 지긋하신 분 중에 한 분 , 컵 신라면 무쳑 좋아하십니다. 을마나 자주 점심으로 드시는지..ㅎㅎ

글 잘 읽고 가요. 하시는 일 건승하시길..

weekly 2012-11-17 19:0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영국 사시는 것 같으네요. 블로그 둘러 봤는데 한 두 다리 건너면 아는 분일 것 같기도...:) 말씀 감사드리구요~ 저는 어제도 컵라면을 먹었네요:) (신라면은 너무 독해서 다른 걸루~)

좋은 주말 되세요~
 

토요일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바람 쐬러 나갔다가 도서관 앞마당에서 R을 만났다.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서둘러 변명을 해대기 시작했다. "다른 공부하느라 스피노자를 읽지 못했다. 스피노자를 읽고 일전에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고 나서 너한테 연락하려 했었다..." R은 자기도 스피노자를 읽을 틈이 없었다며 웃었다. 나는 두통이 있어 바람 쐬러 나왔다고 했고 우리는 같이 에스프레소 카페에 갔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의 두통은 사라졌다. 나는 스스로를,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도 알지 못하는 스타일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할 때 그 문제 영역 일반에 대한 기초에서부터 접근하곤 한다. 시간이 많이 드는 방법이다. R은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며 공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R은 로크의, 실체에 대한 복합 관념이 왜 적합한 관념이 아닌가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 나도 R처럼 다소 가볍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다음 주 토요일날 R의 집에 R의 작품을 보러 가고, 또 친구들과 조각 전시회에도 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아직 대영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등에도 가보지 않았다. 지하철 역 구내를 지나다가 바하의 콘서트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보고 핸드폰으로 찍어 놓았지만 감히 거길 갈 생각도 못하고 있다. 그래, 좀 더 여유를 갖고 살자...

R이 쓴 에세이 초고를 읽고 검토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그와 관련된 작업을 했다. 두 시간을 작정했지만 무려 5시간을 그 일에 매달렸다. 많은 문제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나는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서너 가지 정도 정해놓는데 한번도 그 일들을 다 마친 적이 없다. 한 두 개가 최대한이다. 류비셰프처럼 한 항목에 두 시간 정도씩 할당하여 처리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예정한 시간을 훌쩍 뛰어넘고도 아직 까마득한 작업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류비셰프의 방법은 내게 맞지 않는다. 문제를 파악하는 데만 해도 두 어 시간이 걸린다.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 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네 다섯 시간은 필요하다. 즉, 나한테는 한 항목에 대한 최소 할당 시간이 4 시간 정도이다. 차라리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하나의 문제에 최소한 네 시간을 투여해야 한다는 것이 하루에 한 두 문제를 다루어도 족하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하루에 두 어 개 이상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결론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철학에 있어서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양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질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시간당 넘어가는 페이지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철학에서 스피드가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얼마마한 시간이 걸렸든 충실하게 숙고되어 넘어간 페이지들, 고되게 사고를 기록한 노트의 페이지들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철학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두 번 생각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결론이 공부를 더 열심히,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일이다. 학기가 시작된지 이제 한 달 여가 지났다. 그래, 탐색전은 끝난 것이다.

어제 공부를 하다가 문득 느낀 것이 있다. 내가 로크를 다루든, 스피노자를 다루든, 비트겐슈타인을 다루든, 인식론 상의 문제, 혹은 심리 철학 상의 문제를 다루든, 내가 어떤 기반, 어떤 관심 위에서 그 문제들을 다루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바로 그 기반, 바로 그 관심은, 명제 태도라는 철학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내 손에 우연인 듯 들어와 있는 램지의 철학 논문들도 바로 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관심은 작년 연말에 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대한 작은 논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마 나의 석사 학위 과정은 이 개념을 명확히 바라 보기 위한 장치들을 만들어 내는데 바쳐질 것 같다. 말하자면 이 개념이 나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유학 기간 중 매일 매일 꼬박 꼬박 블로그에 일지를 기록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잘 안될 것 같다. 할 말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고, 할 말을 줄여야 한다는 것도 문제다. 가끔씩, 한 두 마디 하겠지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11-14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2-11-14 20:08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합니다. 실은... 어제 R이라는 친구가 철학 공부를 그만 두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R은 그림과 조각에서 경력을 만들고자 하는 친구인데 철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긴 하지만 거기서 재미를 찾아내지는 못하는 상태였던 게지요. 만약 이 친구가 철학에서 경력을 만들 야망을 갖고 있었다면 저는 중도 포기를 오히려 반겼을 것 같습니다. 그건 마치 피아노에 열정을 갖고 있지만 손가락 운동 신경도, 귀도 그리 예민하지는 않은 피아노 연주자 지망생과 같은 경우일 테니까요. 그러나 이 친구는 예술의 길을 걷고 있고 앞으로도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저는 작가, 화가, 음악가, 영화 감독 등등은 모두 사상가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 훈련이 이 친구의 진로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고, 그래서 일단 학기는 마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어짜피 학비도 다 냈잖아?). 너가 흥미를 갖고 있는 철학에서 fail하지 않고, 거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된 상태에서, 즉 철학 애호가가 된 상태에서, 철학을 떠나도 그때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에세이 쓰는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은 내가 도와 줄 수 있다(반대 급부로 저는 이 친구에게 프랑스어를 배울까 생각 중입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철학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동기화, 즉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저 엄청난 철학 문헌들이 종이와 잉크 낭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 여럿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판국이고... 말씀하신 것처럼 경제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졸업 후 전망 문제도 있고, 길게는 이천년, 짧게는 수십년 동안 수많은 연구자들의 집중된 탐구로 난도질 되어 있는 문제들에 대해 내가 지금 새로이 제기하고 있는 이 아이디어가 과연 새로운 것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가까운 회의도 있고... 그러나 아마 이 모든 것들이 이 공부의 여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일 겁니다. 피아노 연주자에게 피아노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피아노가 그의 우주일 수도 있고, 쓸모없는 나무통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피아노가 쓸모없는 나무통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가 피아노 안에 있는가, 혹은 그 밖에 있는가를 통해 결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무화의 가능성 위에 가치를 세우되 그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는 한에서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일 테지요. 그것이 곧 여정이라는 말의 정의일 테구요... 격려되는 말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계에 복귀했을 즈음에 생산된 자료들을 위주로 공부하고 있다. 혼란이 김처럼 모락 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내가 "논고"에 대해 어느 정도 선명한 이해를 갖고 있었던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던가? 욕실의 김서린 거울처럼 모든 것이 희뿌연해 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