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는 11월 초가 되면 밤마다 불꽃 놀이를 벌인다. 400년 전에 가이 폭스라는 사람이 영국 국회 의사당을 폭약으로 날려 버리려다 미수에 그친 걸 기념하는 거라나...


지난 토요일에 집 근처 나대지에서 하는 불꽃 놀이 축제에 다녀 왔다. 캄캄하고 바람이 엄청 부는 저녁이었는데 사람이 많이도 왔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장화를 신은 사람들(나대지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잔디로 덮여 있어서 장화가 정말 요긴하다), 그 추운 날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들, 그 추운 날 반바지 차림으로 나온 어떤 가족... 


한쪽에는 번쩍 번쩍 빛나는 놀이 기구들이 돌아가고 다른 쪽에는 햄버거나 칲스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또 다른 한쪽에는 목재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불을 붙인다. 


우리도 놀이기구를 하나 탔다. 한국보다 훨씬 오래 탈 수 있어서 좋았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놀이기구에 혼자 탔는데 안전바가 아이 가슴팍 정도에 오더라. 아슬아슬해 보였다. 부모가 도대체 누구길래... 하는 생각도 슬며시 들었는데, 놀이기구가 멈추고 나자 아저씨 하나가 아이를 데리러 들어왔다. 아이가 환하게 웃는데 앞니가 없더라. 아이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예전에 버지니아 워터라는 물 많은 공원에 갔었는데, 꽤나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아이 둘이 빤쓰만 입고 물에 들어가 있었다. 부모들은 지켜보고 있고...)


바람이 엄청 불어서 모닥불의 불길이 삼 사 미터 정도나 뻗어서 마치 태양의 표면을 보는 듯 했다. 친구 둘이 '모닥불 피워 놓고'를 불렀다. 사실 그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았다. 나중에 민박 하나 빌려서 진짜 모닥불 피워 놓고 놀자고 했다. 빈말 반 진말 반. -모닥불 피워 놓고 소주잔 기울이면서 밤새 두런 두번 나누는 이야기들을 상상해 보면 아련하기도 하다.


불꽃 놀이도 참 화려했다. 음악에 맞추어 폭죽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갖가지 색깔을 내며 가까운 하늘을 수놓았다. 평지이기 때문에 멀리 다른 곳에서 하는 불꽃 놀이들도 다 보인다. 우리 것 말고도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다섯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온 영국이 폭죽으로 뒤덮인다고 해도 빈말이 아닐 거 같다.


돌아가는 길. 그 많은 차들이 일시에 나대지를 벗어나 도로로 진입하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별 것 없다. 우리도 자동차 경적 소리 한번 들을 틈 없이 부드럽게 도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이탈리아를 다녀와서인지 이런 질서, 배려, 여유가 좀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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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날 친구한테 빌려온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두 권을 뒤적였다. 아래는 그 중 세 편에 대한 감상이다. 세 편은 찬찬히, 끝까지 다 읽었다. 적어도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면 이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말들을 늘어놓게 될 것 같다.

글목. 나는 예전에 이 분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무소, 고등어, 예의. (여기까지다. 이후의 작품들은, 아마도 내가 삶에서 소설 읽을 여유를 찾지 못해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의 작품을 읽으며 화가 날 정도로 실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첫번째 문제는 이 분 글에 비문과 요령부득인 문장이 너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권리로 불평하자면 읽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리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가란 한국어 산문의 수호자 아닌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인 동시에 의료 시스템의 신뢰성에 대한 수호자이듯이 말이다. 이 정도로 비문 범벅인 소설 앞에서 나는 그저 할 말을 잃고 만다. 이러한 문장들에 한국어 산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가 수여되었다면 그건 이미 작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둘째는, 소설적 완성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 감정과 사상을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글목'의  화자는 툭하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그런데 왜? 독자인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감히 왜? 라고 물을 수도 없다. 소리 죽여 가며 아프게 우는 사람 앞에서 왜 울어? 라고 물어 볼 수 있나? 그래서 독자로서의 나는 정말 불편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소설의 독자이고 싶지 않았다. '글목'의 화자는 H라는 사람과 정서적 공감을 갖는다. 이제 독자도 화자-H와 같은 편에 서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독자로서의 나는 H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작가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실제 세계에서 H를 직접 만나고 그에 대한 어떤 감정을 갖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나는 H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화자-H와 뭔가를 공유할 수 있나? 그게 뭔지 알아야 공감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글목'에는 이런 장치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세번째는 사상성의 문제다. 나는 작가란 자신에게 일어난 감정, 사상 등과 거리를 유지하도록 초인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워낙에 탁월한 천재는 이를 무시해도 되겠지만... '글목'에는 이러한 노력이 철저하게 결핍된 흔적들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작가가 천재인 것 같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글목'에서는 분절되지 않은 별개의 사고들이 한데 뒤엉켜 급기야 폭탄으로 터져 버린다. 그 폭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만 말해 두자. '글목'의 작가는 개인이 어떤 외적인 사건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들어 삶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상황에서의 아픔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이를 말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고 위험한 사고가 끼여들어 버렸고, 그 결과로 이 작품은 정말이지 철저하게 부정적 의미에서 끔찍해져 버렸다. 즉, 사상적으로 매우 저급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국수. 친구가 추천해 준 작품이다. 아름답고 좋은 작품이다. 단 한가지 문제는, 이 분은 누구 누구의 아류라는 평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40 한국 여성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아마 작가의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누가 그런 얘기를 잔뜩 해 놓았다면?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그 이상의 스타일이 없다고 한다면?(정말?) 그렇다면 그런 스타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대신 누구 누구의 아류라는 딱지가 붙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군의 작가들을 보면서 한국 문학에 특징적인 매너리즘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갈한 문장들과 완벽한 구성을 갖춘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은 한국의 흔한 매너리즘 작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조용필을 모창하여 조용필 이상으로 잘 부른다 한들... (나는 국수의 작가가 풍금의 작가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쓴다고 느꼈다.)

옥수수. 역시 친구가 추천해 준 작품이다. 우화적 장치를 가진 작품으로 재미있다. 단 한가지 문제는,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옥수수'는 한국 문학에 흔하디 흔한, 슬럼프를 겪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다루고 있다. '가볍게' 라는 말에 주의하자. 예를 들어 '옥수수'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금융 전문가로 일하다가 한국의 작은, 문학 전문 출판사 사장으로 전직한 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이 타이틀만 제껴놓고 보면 그 사장이란 사람은 문학 소년적 과거가 있는 졸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인물의 사실성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이 작품은 우화니까 그냥 우화로 읽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볍게, 재미있게 읽고 던져버려도 작가가 섭섭해 하지 않을 작품일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 한국어 산문에 관한 최고 권위의 상 중 하나가 주어졌다. 왜? 이 작품이 어떤 성취를 하였기에? 나는 도저히 모르겠더라... 

이 책을 빌려 준 친구는 천천히, 심심할 때 읽으라고, 숙제하듯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내 느낌을 말하자면 이제 숙제 끝이다. 다 읽지도 않았지만 더 읽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구태여 읽으면서 화내고 실망하고, 때로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라는 부커상이 뉴질랜드의 20대 작가에게 돌아갔다. 최연소 수상이자 역대 수상작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작품이라고 한다.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작가의 인터뷰를 조금 봤는데, 소설이 두꺼운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이고, 지금 뉴질랜드에는 자기와 같은 (비슷한 수준의) 젊은 작가들이 많다고 하더라. 젊은 작가들은 이전 세대 작가들과는 스타일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하고. 인터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파구는 각자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소설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니 하는 말들을 흔하게 듣는데 십중팔구는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의 자기변명이라고 본다. 그런 위기는 없다. 단언컨대 없다. 위기가 있다면 소설가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철학자의 위기일 뿐일 것이다. 이상문학상작품집을 보라. 거기엔 심지어 한국어 문장의 위기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어 문장도 제대로 못쓰는 소설가와 그에 대한 비평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현실이 그 위기라는 것의 실체다. 그 위기는 마치 숙제의 위기와 같을 것이다. 개학 전날 밤을 새가며 과제물을 해치우면서 중얼거리던 말. 큰일났다. 대충이라도 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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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오고나니 로마는 마치 꿈결 속의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날씨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로마의 한낮은 덥다. 영국은 바람 불고 춥고 구름이 잔뜩 끼었다가 별안간 햇볕이 나고, 그러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비가 내리는 그런 날씨다. 벌써 로마가 그리워진다.

로마에는 딱 3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음식은 이탈리아식으로만 먹었다. 피자, 파스타, 라자냐, 그리고 피자, 그리고 또 피자...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포도주. 포도. 올리브. 피자 가게는 아주 널려 있었는데 민박집 근처에도 맛있는 피자 가게가 있어서 세 끼니를 다 거기 걸로 먹은 날도 있었다. 화덕에서 구워낸 것처럼 빵맛이 좋았다. 아침마다 먹었던 커피. 처음엔 에스프레소를 먹다가 오히려 아메리카노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생콩을 간 듯한 약간 비릿한 맛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돌아오는 날 민박집 주인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로마에서 피자만 진탕 먹었다, 뭔가 추천해 줄 만한 이탈리아 음식 없냐,고 했더니 피자는 나폴리가 원산이고 로마는 파스타란다. 그러면서 고기를 넣은 파스타, 버섯을 넣은 파스타 등등 다양한 파스타를 맛볼 수 있을 거라나... 속으로 웃었다. 그래봤자 다 파스타 아닌가! (로마 있는 동안 딱 하루 비가 온 적이 있었다. 이 민박집 주인이 날씨가 안좋아서 안됐단다. 오우, 천만에~)

런던에서는 정장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로마에서는 정장 입은 사람들이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를 탄다. 로마에는 언덕이 많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많고 도로 주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도 많다. 차선 구분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어느 광장 앞 도로는 교통량이 엄청난 데도 신호등이 없다. 횡단보도 표시는 되어 있는데 신호등은 없고, 차량이 일이미터 간격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 곳을 사람들은 어떻게 건널까? 그냥 몸빵으로 들이민다. 그러면 차가 선다. 나도 몸빵하며 이런 도로들을 무수히 건너 다녔다. 재미있더라. 

로마에서는 영어가 특권적 위치의 언어가 아닌 것 같았다. 영어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등의 언어 중 하나로 취급되는 것 같았다. 콘센트 사러 가게에 갔었는데 점원과 말이 전혀 통하지 않기도 했고, 물을 사러 갔는데 "워터"라고 하자 점원이 "아쿠아?" 라고 되묻기도 했었다. 그래도 라디오 음악 방송에선 거의 팝송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관광객으로 로마를 스쳐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한번은 트럭 하나가 빵 하고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기에 쳐다봤더니 길가 어떤 사람한테 인사를 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또 한번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시비가 붙었는데 오토바이 뒷 좌석에 탄 젊은 여자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규칙을 꼬박꼬박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덜한 것 같고, 솔직한 것 같다는 유추를 해보았다. 영국 사람들은 남과 깊게 엮이는 상황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런 데 별 의식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사람들이 아마 정이 많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나 터키 사람들도 정이 많을런지 모르겠다. 한 친구가 이스탄불로 배낭 여행을 갔는데, 거기 사람들이 초면인 이 친구를 결혼식에 끌고 가서 잘 먹여 주었다고 하더라. (물론 이 친구는 여자다.) 이런 얘기를 다른 친구 하나와 하다가,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다들 민주주의에는 문제가 있는 나라구나... 하며 웃었다. 네덜란드같이 인간관계가 칼날같은 나라는 민주주의 제도의 우등생이다. 반면, 인간 관계의 경계선이 복잡하고 애매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회에서라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역시 제대로 된 토대를 확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 경우에 속할 것이다... 

(로마가 그리워져서 톰 행크스 주연의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를 보았다. 친구네가 준 것인데, 원작 소설의 초반부를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도 엉망일 거라고 생각하고 아예 볼 생각도 안하고 있던 차였다. 뽀뽈로 광장과 카라바조의 베드로 작품이 나오는 장면을 보니 반갑더라. 포로 로마노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영화는 그래도 볼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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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0-2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여행하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한다지만,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영어권 국가빼고는 영어 안 통하는 나라가 많죠.특히 옛 공산권 국가와 지중해 국가들...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는 영어도 안 통하거니와 그들이 영어를 말해도 발음이 영 이상하다네요.

weekly 2013-10-28 17: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뭐 영어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탈리아에 한 일년 살면 제가 지금 영어 하는 정도만큼은 이탈리아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얼추 단어만 보고 때려 맞출 수 있는 게 꽤 되더라구요...
 

10월22일부터 25일까지 로마 여행을 다녀왔다. 같은 유럽이라지만 영국과 이탈리아는 많이 달랐다. 날씨, 사람, 건물, 음식 등등... 짧은 여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딱 하나만 기록해 두자.

로마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신문을 읽었다. 어떤 화가가 카라바조의 '나자렛의 되살아남'이라는 작품을 보고 자신이 매너리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얻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나는 이번 로마 여행을 위해서 이탈리아의 화가들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카라바조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기사가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로마의 어떤 성당을 찾아갔다. 카라바조가 그린, 마태를 주제로 한 작품 세 개가 벽면에 붙어 있는 성당이었다. 그 작품들 앞에 서자마자 나는 비행기에서 읽은 신문 기사의 그 화가가 말한 매너리즘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성당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스타일이나 주제를 취급하는 방법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아니, 카라바조의 것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은 비슷한 스타일과 비슷한 주제 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마태 연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태와 천사라는 작품이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원래 작품은 성당측이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카라바조가 같은 주제를 다시 그린 작품이 지금 성당에 붙어 있는 그림이고 처음에 그렸던 것은 이차대전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태 연작 세 작품 중 다시 그린 마태와 천사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한 작품이긴 해도 내 눈에는 힘이 가장 떨어져 보였다. 원래 작품이 그대로 걸렸었더라면 세 연작은 더욱 빛났을 텐데... 성당 안 기념품 코너에서 갈등하다 나는 결국 마태와 천사 대신 마태의 부름이라는 작품의 프린트를 5 유로에 샀다. (지금 내 방안에 있다. 놀라운 작품이다.) 

뽀뽈로 광장에 있는 성당에도 카라바조의 그림이 한 점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 나는 그걸 보러 갔다. 성당 안에는 긴 나무 의자들이 늘어 서 있었고 맨 앞 줄에는 할머니 네 분이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역시나 성당의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며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이라는 공간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마련된 것일까?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은 신자들에게 성스러움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카라바조의 그림들은 그러한 목적에 잘 부합하는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바조는 신, 신적인 경험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화가인지를 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버리고 싶어졌다. 5 유로나 들였는데... 나는 갈등하고 있었다.

뽀뽈로 광장에서 뻗어나가는 길 한 쪽에 괴테가 묵었던 집이 있었다. 거길 찾아 갔는데 시간이 늦어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지하철을 타러 다시 뽀뽈로 광장 쪽으로 올라가는데 멋진 아리아가 들려오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 소프라노가 돈통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석조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는 길이라 소리의 울림 효과가 아주 좋았다. 아름다웠다. 노래가 끝나자 저절로 박수가 쳐졌고 그래서 1 유로를 돈통에 넣어 주어야 했다. 

노래에 감동된 채 뽀뽈로 광장을 통과하다 보니 카라바조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성당이 다시 눈 앞에 나타났다. 아마 카라바조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나는 저 성당에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저 성당 안에서 빛과 어둠, 침묵과 할머니들의 나지막한 기도 소리에 둘러싸여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었다. 즉, 나를 그러한 경험 안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카라바조였다. 종교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영속케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일 것이다. 나는 카라바조의 노력이 성소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달았다. 카라바조를 버리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여행 마지막 날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가서 카라바조의 점쟁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역시나 그의 작품은 거기에 전시되어 있던 다른 모든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강력한 존재감은 정말 경이적이다. 로마에서 이런 화가를 발견하게 되어 정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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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따지고 보면... 비슷한 데가 있긴 하다. 

둘 다 이공대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메르켈은 양자역학 관련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쓴 학자 출신이고 박근혜는 숫자에 무척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예를 들면 대통령후보자토론회때)

둘 다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박근혜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후광을 누린 아시아 여성 정치인 중 하나인 것이고 메르켈은 자기 힘만으로 큰 사람이다.

그런데 둘 다 약간 꼴통스러운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 자기 고집이 있어 남이 뭐라하든 꿈쩍도 않는다. 옆에서는 애가 탄다. 

그렇게 애를 태우다 메르켈은 최종적으로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이번 총선에서도 이겼다. 유로존 위기 탓에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선거에서 다 날아갔는데 메르켈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메르켈이 이번 총선에서 이긴 후 영국의 일간신문 가디언에서는 이제는 메르켈의 시대다, 입 닥치고 메르켈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야 겠다, 는 취지의 말을 했다. 독일 내 여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삼자 입장에서는, 메르켈은 정치적 뚝심과 판단력에 있어 비판자도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박근혜도 분명 꼴통스러운 면이 있다. 자기고집이 강해서 남이 뭐라하든 꿈쩍도 않는다. 의사결정도 상당히 늦어서 주변 사람들 애를 태운다. 그런데 최종결론이라 내놓은 것을 보면 항상 안좋은 쪽으로 기대를 넘어선다. 그래서 박근혜도 결국 비판자의 입을 다물게 한다. 항상 기대 이하라면 기대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 블로그에서 관련된 말을 많이 했다. 여기 영국에만 와봐도 한국이 얼마나 아이를 안낳는 나라인지 느낄 수 있다. 여기 시내에 나가보면 아이 둘 이상을 안고 유모차에 태우고 손잡고 해서 데리고 다니는 젊은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한국이 직면한 가장 커다란 폭탄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때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확하다. 다행히 한국은 담세율에 있어 아직 여유가 있고 의지만 있다면 이 문제를 풀어내는 데 박근혜 이상의 정치인이 없다. 그런데 박근혜는 사람 애만 태우다가 상상 이상의 폭탄을 떠뜨리곤 한다. 예를 들어 이번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을 해내야 한다. 연금 개혁이라고 해 봤자 더 내고 덜 받는 쪽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정부로서는 3D 일일 뿐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시작부터 기초연금 문제를 잘못 건드렸기 때문에 연금 개혁에 나설 힘을 이미 잃었다. (물론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아주 먼 미래도 아니고 10년, 20년 후의 미래를 국가적으로 대처하는 비젼을 위해 야당과 정치적 책임을 공유하는 것은 국민을 설득하는 데 있어 필수일 것인데 박근혜는 야당을 포용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비젼 없이 행동하는 정치인을 비젼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은 분명 번짓수가 잘못된 것이리라. 이미 아무 기대도 없는데 기대하는 척 글 쓰는 것도 우습기 때문에 이제 이 블로그에 정치글은 쓰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 기대할 것이 없다는 나의 단정이 틀렸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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