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토요일 밤이었다. 근처 사는 친구가 불러 내어 기차 역 근처에 있는 펍에 맥주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친구네 강아지를 앞세운 채 좁고 어두운 인도를 따라 걷는데 저 멀리 앞서 걷고 있던 젊은 한쌍이 신경이 쓰였다. 남자 쪽은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여성 쪽은 엄청 짧은 검은 스커트를 입은 채 엄청 높은 구두 위에서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머리 카락이 검은 색이었다. 나는 동네에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을 본 적이 없다. 나의 결코 극복되지 않는 촌스러움과 오지랖은 저 여성이 동양인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보니 다행히도(?) 그냥 영국 여성이었다. 펍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이마를 탁 쳐야 했다. 평상시에는 퇴근 길 직장인들이 들러 칲스와 맥주를 마시며 담소하던 펍이 주말에는 시끄러운 춤곡을 빵빵 틀어대는 빠로 변하는 것이었다. 덩치가 있는 흑인 아저씨 둘이 펍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홀 안은 토요일 밤 흥청거리는 빠의 분위기에 딱 맞는 젊은 남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추석을 맞아 영국에 사는 가족을 만나러 한국에서 영국으로 갈 건데 혹시 필요한 책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다. 알라딘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다. 많은 리뷰와 좋은 별점을 받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에서 관심을 거둘 수 없었다. 제목을 보고, 그리고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를 읽고 나서, 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 문학상을 여럿 탄 젊은 작가가, 민음사같은 평판 있는 출판사의 기획 하에 이런 대중 영합적인 책을 내다니! 그러나 일단 읽자. 깔 권리를 얻기 위해 일단 읽자. 그래서 부장님께 이 책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좀 더 놀다가 김수행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도 이 분의 번역으로 "자본론"을 읽었었다. 책을 많이 사주어서 감사하다는 역자 서문을 읽으며, 역시 경제학자라 마음 틀거리가 다르구나... 하며 웃던 기억이 났다. 갑자기 이 분이 2014년 출판했다는 "자본론 공부"가 읽고 싶어졌다. 대중에 영합하는 소설 책의 판매 붓수를 올려주느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고 젊음을 불태우신 분의 저작을 사서 읽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부장님께 죄송하다고, 김수행 교수의 책으로 바꾸어 사 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부탁드렸다.
부장님은 "자본론 공부"와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을 모두 사가지고 오셨다. 오랜 외지 생활을 하시다 한국으로 돌아간지 1, 2년 정도 되신 분이다. 한국 여성들은 참 피곤할 거라고 하신다. 회사가 있는 강남역으로 출퇴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여성들 팬티를 대 여섯 번 보게 되었단다. 눈 둘 데를 찾다 못해 핸드폰이나 들여다 보게 되었단다. 20년 가까이 유럽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50대 초반의 남성이 한국에서 겪은 문화 충격이다. 지지난 주 토요일 밤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한국 여성들은 계단을 올라갈 때 가방 등으로 엉덩이를 가릴까? 이러한 행동들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위선의 여성판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특징 짓는 피상성의 한 모습이라는 것도. 젊은 세대끼리는 학벌, 외모, 부모의 능력 등으로 경쟁하고 기성 세대는 기득권으로 젊은 세대의 도전을 막아내고 암컷성, 수컷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노년 세대들은 나이를 핑계로, 위계를 무기로 자신들의 설움을 외부로 배출한다.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킨다. 사회적 관계를 순화하고 관리하는 기준들은 유독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원초성만이 기준이다. 그것이 지역 감정으로, 세대 대결로, 외모 지상주의로, 백화점의 목소리 높은 진상 고객으로, 가능성 높은 스타트업 회사들을 박살내고 기술을 빼앗아 가는 대기업들의 행태로,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표출되든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의 전모 아닐까?
몇 년 전 영국에 처음 와서 어학원을 다닐 때였다. 젊은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하나 같이 물어보는 것이 정말 한국 여자들은 성형 수술을 많이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학원 토론 주제가 한국의 성형 수술 문제였다. 열 댓명 되는 수강생들 가운데 나, 한국 여학생 둘, 이렇게 세 명의 한국인이 끼여 있었다. 강사 왈, 정말 성형 수술을 많이 하냐? 여학생 왈, 그렇다. 왜? 취업 등에 도움이 되니까. 강사를 포함한 대다수 수강생들 놀람. 강사 왈, 그러면 그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없느냐? 한국 여학생은 이 질문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성의 외모가 취업에 영향을 그렇게 분명하게 미친다면 이는 사회적 문제다, 그렇다면 정부나 여성 단체 등이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거나 촉구하거나 하지 않는가? 한국 여학생은 남성도 성형 수술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니 꼭 여성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회가 외모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많이들 한다,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 참다 못해 내가 말했다.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불편해 한다, 이것이 잘못되었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한해서는 여성들이 먼저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여학생은 한 마디로 나의 말문을 닫게 했다. 너희 기성 세대들이 이런 사회를 만든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강사가 한국 여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본인 자신은 성형 수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도 어딘가를 고칠 건가? 한 학생은 눈(코였던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칠 거라고 얘기했다. 다른 학생은 아마 고칠 거 같다고 얘기했다. 다시 한번 강의실에 놀람의 파도가 울려 퍼졌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놀라서 너는 충분히 예쁘다를 연발했다...
장강명의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뚝딱 읽었다. 읽고 나서 적어도 작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첫째, 문학상을 여럿 탄 작가답게 작가로서의 최소 기준은 충족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의 이러한 자의적인 기준에 조정래의 최근 소설들은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한국 문학계의 거장들,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신경숙 등등, 당신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둘째, 이 소설은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우리 시대에 대한 좋은 보고문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이러한 장점은 작가적 역량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작가는 자신이 취재한 것을 기자스럽게 옮겨 놓았을 뿐이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는 순전히 취재원의 리얼리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자스러운 객관성은 있지만 작가스러운 통찰력과 치열함은 전혀 없다. 김수영의 말을 빌면 불순함이 없다. 사상적 빈곤함, 피상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화자는 20대 후반을 향하는 여성이다. 집은 가난하지만 홍대를 졸업했고, 평균은 가는 외모에, 나름 사는 집안의 순정파 남자 친구가 있고, 나쁘지 않은 직장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호주로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왜? 라는 질문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소설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이 점이 이 소설을 그나마 읽을 만한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화자 자신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고, 그러므로 작품에 리얼리티를 부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작가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 같다.) 도대체 홍대를 나온 나름 재원인 여성이 왜 호주로 이민가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 할까? 화자는 명시적으로 신분 향상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화자 스스로 잘 알 것이다. 화자는 접시 닦기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영원한 비주류로 살아야 한다. 불안한 미래에의 도피? 자신을 끔찍히 생각하는 남자 친구와 결혼하면 되지 않는가? 남자 친구는 집안이 나름 부자인데다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호주에서 생존해 내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아 실현? 아, 화자는 삶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화자의 동생이 베이스 연주자와 사귄다고 했을 때, 화자는 동생의 선택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베이스 연주해서 얼마만한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화자는 호주가 아니라 한국에 속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베이스 연주자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을 가야 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한국이 화자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인간적이고 여유있는 삶을 위해서? 글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호주에서는 야근이 일상적이지도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퇴근하면서 뒤통수를 의식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 호주에서는 가능한데 한국에서는 왜 불가능한가? 예를 들어 화자는 한국에서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매주 불러도 한 달에 20만원 밖에 들지 않는다며 좋아한다. 호주에 비해 한국이 인건비가 엄청 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명한 대비 앞에서도 화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호주가 좀 더 인간답고 여유로운 사회라면 그것은, 화자 스스로도 호주에서 카페 서빙을 하면서 저축을 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노동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한 통찰이 전혀 없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 이민을 가는데 어떤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꼭 있어야 하는가? 이러 저러한 사정이 이리 저리 엮이다 보면 이민을 결심하게도 되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렇다. 그래서 장강명의 소설 제목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호주의 어떤 점에 이끌려 이민을 간다고 말할 그런 긍정적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것이지만, 그 싫음이 한국 사회가 개성을 억압하고 스트레스를 강요하기 때문인지, 김태희나 이건희 아들급으로 태어나지 못한데서 오는 열외감때문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화자가 호주나 다른 나라에 가서 한국과는 다른 삶의 격조 안에서 살게 될지, 교민 사회에 잘 적응하여 기득권자로서 한국 유학생이나 워킹 홀리데이 온 사람들을 적당히 착취하면서 살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만일 후자라면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읽은 두 세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이런 미심쩍음이 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화자는 아이엘츠 시험을 보러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난다. 친구들은 여전히 시어머니 욕을 하고 회사 상사 욕을 한다. 이미 호주라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해 본 화자는 친구들에게서 뭔지 모를 얄팍함을 느낀다. 물론 작가는 이 얄팍함의 근원을 더 파고들지 않는다. 우리가 작가를 대신해 보자. 한국 사람들은 얄팍하다. 왜냐하면 자기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 주제가 항상 남을 욕하는 것이 된다(아니면 자식 이야기 등등). 욕 대상이 시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회사 상사가 될 수도 있고 정치권이 될 수도 있고 한국 자체가 될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얄팍하다. 왜냐하면 모든 비판에서 자신은 열외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시어머니를 욕한다면 나는 앞으로 그런 시어머니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내가 회사 상사를 욕한다면 나는 앞으로 그런 상사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런 자기 반성에서 한국 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일상적으로 욕을 한다. 그거 자기 모순 아니야? 하고 물으면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답답해서 그냥 하소연 해 본 거야. 그냥 하소연도 못해? 그냥 하소연? 그래서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려 한다. 급하다는 데 정말 급한 거야? 중요하다는 데 정말 중요한 거야? 죽겠다는 데 정말 죽겠는 거야? 그러다 결국은 한국 사람이란 자신의 이익에 맞춰 상황을 정당히 조작하고 둘러대는 종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국 사람들이 항상 신뢰보다는 자신의 이해 쪽을 선택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나는 한국 사람과 비즈니스하는 러시아 사람으로부터도, 대만 사람으로부터도 한국 사람들이 "얕다(shallow)"고 하는 평을 들어 보았다. 그 말을 듣고 난 나의 반응은 "이 사람들이 한국을 좀 아네!"였다. 자기 모순이나 책임감에 무감각한 것을 미성숙하다고 한다면 한국은 참으로 미성숙하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최근에 나는 유럽의 시리아 난민 사태에 대한 네이버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들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터키나 요르단 등으로 탈출했다. 거기에 지금도 수십,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있다. 난민촌은 기본적으로 생존만을 허락한다. 자국 노동 시장에 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터키 정부 등은 난민들의 노동을 금한다. 그러나 시리아 난민 중 일부는 어떻게든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 그 돈을 자금으로 해서 유럽을 향한 고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럽으로 향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상당수는 교육을 받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나마 배우고 기술 있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푼돈을 모아 유럽으로 떠나는 것이다. 난민촌에 있어 봤자 교육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버려진 세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인 것이다.
자, 상황이 이렇다.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서 어떤 댓글을 기대했겠는가? 던져주는 빵을 가만히 받아 먹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 주려는 시리아의 젊은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한국 사람들은 정말 감명받지 아니 하겠는가? 바로 우리 부모님들 모습 아니던가? 오호라, 댓글은 저주 일색이었다. 지붕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매국노로까지 비방을 당했다. 이슬람 사람들과 테러리스트를 동일시했다. 헝가리 국경에서 경찰과 충돌한 난민들에 대해 온갖 비난이 난무했다. 독일이나 북유럽으로 가려는 시리아 난민들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난민들을 입국 시키지 않으려는 유럽 국가들이나 헝가리도 이해해 줄 수 밖에 없다, 참 해결책이 없다, 안타깝다... 이 정도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정녕 한국에서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적인 발상인 것인가? 난민 문제와 직접 이해 관계가 없는 나라의 국민들 중 난민들에게 이토록 일방적으로 적의를 보이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 이토록 싸나운 사람들이 어디에 또 있을까? 나는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한국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엎고 유럽으로 대장정을 벌인 시리아 젊은 아버지들에게 그들은 말한다. 그럴 힘이 있으면 왜 조국에 남아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가? 이런 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만약 이런 것이 말이라면 한국의 모든 사회적 약자는 똑같은 말을 들어야 한다. 왜, 좀 더 노력을 못하니? 좀 더 의지를 보여봐. 최저 임금을 안주니 일을 못하겠다고, 그런 정신 머리로 쯧쯧쯧...
한국은 미성숙한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일깨울 수 밖에 없다. 제삼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다 볼 도리 밖에 없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럼 어떤 사회를 원하는데?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이 김태희로 태어난 그런 평형 우주를 원하다면, 그럼 그냥 조용히 한국을 떠나라고 말해 줄 수 밖에 없다. 한국을 지금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 저러한 인간적이고 여유 있는 사회상을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 스스로는 그러한 사회상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느냐고 깐깐하게 물을 도리 밖에 없다. 만약 이 사람이, 예컨대 성형 수술의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무시한 채 성형 수술은 개인의 선택이니 제삼자가 왈가 왈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냥 조용히 비웃어 줄 도리 밖에 없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껍데기를 너무 많이 봐왔다. 우리는 좀 더 깐깐해져야 하고, 좀 더 자주 정색해야 한다. 더 이상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