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읽는 책이 영어로 된 딱딱한 것들이다 보니 한국어 구사 능력이 퇴화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알라딘에서 리뷰들을 참고하여 주문해 본 책이 "고종석 문장"이었다. 그리고 놀랐다. 이 책은 좋은 한국어 문장을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자신의 다른 책에서 문장을 뽑아 자아 비판을 한다. 그런데 수사적으로 어떤 교정을 하건, 내 눈에는 그 문장들이 여전히 어설프고 어색하고 불명료해 보였다. 나는 좋은 문장이란 명료한 사고를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사는 나중 일이다. 혼란스러운 사고에서 나온 문장들을 수사로 가릴 수 있을까? 내가 고종석의 문장에서 본 것은 상투적이고 어설프고 불명료한 사고들이었다. 이런 것들로 좋은 한국어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실망했다가 아니라 놀랐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에 제정된 이래 한국인의 기본적 인권을 크게 제약하며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갈라놓는 거대한 빙벽 노릇을 해왔다."(267페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불명료하고 상투적이다.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갈라놓는?, 거대한 빙벽? 

"올해 대통령 선거의 예비 후보들은, 속마음이 어떻든, 보수적 유권자들의 표를 잃을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269페이지)

이런 말은 정말이지 하나 마나다. 올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다. 예비 후보라는 말도 어색하다. 이니셔티브를 취하다라는 말은 그냥 영어 번역체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국민의 무기력한 총화단결을 도모했다."(274페이지)

국민의 무기력한 총화단결? 문장 자체도 영어 번역체다.

"... 우리 정치 문화에서 군사 쿠데타의 가능성을 도려내는 커다란 공을 세웠다."(280페이지)

'~의 가능성을 도려내는'. 이런 어색한 표현은... 

"일거에 정치 군부를 숙청함으로써 군대의 문민 통제를 확립한 것은..."(281페이지)

군대의 문민 통제? 군대가 문민을 통제한다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영어 번역체다.

"백 교수가 그 책을 냈을 때의 나이를 훌쩍 넘기도록 나는 그 책의 중후하고 논리적인 한국어를 흉내도 못 내고 있지만, 위대한 정신의 그늘에서 한 시대를 살 수 있었던 것을 복되게 생각한다."(291페이지)

이런 어마 어마한 겸양은... 좀 민망하지 않나?

"북한 사회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지도자 곧 수령을 뇌수에 비유하는데, 어떤 기념물이 뇌수를 기념하든 아니면 몸통이나 사지를 기념하든 그 뇌수로서는 별 차이가 없다."(293페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역사의 진보가 담고 있는 핵심적 의미 가운데 하나가 개인의 자유의 확대라면..."(297페이지)

역사의 진보가 담고 있는 핵심적 의미?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겠지만...

"그러나 그 염치나 반성의 항진은 투쟁력의 수축을 의미한다."(337페이지)

도대체 무슨 말? 내 한국어가 퇴화한 것인가?

"다른 사회들에 견주어 우리 사회는 비교적 넉넉히 세속화된 사회다."(342페이지)

비교적 넉넉히 세속화된 사회? 일부러 이렇게 애매하게 쓴 것일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법적으로 보든 사실 관계로 보든, 김영삼 정부가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였듯이 새 정부 역시 제6공화국의 세번째 정부일 뿐이라는 것이다."(343페이지)

새정부는 제6공화국의 세번째 정부일 뿐이다. 끝. 이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서구의 보수 언론이 견지하고 있는 주지주의, 열린 사회에 대한 신념이 <조선일보>에는 없기 때문이다."(346페이지)

솔직히 나는 영국의 보수 언론(썬이나 데일리 메일)보다 조선일보가 더 격조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한다. 암튼, 주지주의, 열린 사회에 대한 신념 등은 뜬금없고 어설프고 애매한 말이다.

"사회적 선택의 배후로서의 그런 다수의 등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의해서 '대중의 반란'이라는 표현을 얻었다."(351페이지)

더도 덜도 아니고 그냥 영어 번역체. 물론 뜻도 불명료하다. 

이 밖에도 허다한 예문들이 이 모양이다. 이런 문장들을 이러 저러한 수사로 다듬는다는 것이, 좀 더 나은 어법으로 고쳐 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는 뒤엉킨 사고인데 말이다.

("고종석 문장"을 내 돈 주고 사서 봤으므로 나는 이 책에 복수할 자격이 있다. 더구나 한글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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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0-0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ekly 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는 하고 싶은데요.
저도 우리 글을 너무 못쓰기 때문에 찔리는 점이 많으네요.

《나는 좋은 문장이란 명료한 사고를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사는 나중 일이다.》

위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명료한 사고를 명료한 글로 쓰기란 정말 어렵죠. 남한테 뭔가 깨닫게 하는(인식하게 하는)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는 안 하느니만 못하죠. 그런데 우리는 그 어떤 깨달음도 인식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글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봅니다.

weekly 2015-10-09 18: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하하, 저도 잘 못쓰는데요...:)
제 생각에는 잘 쓰든 못 쓰든 일단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군가 평을 해 줄테니까요. (그 누군가는 대부분 자기 자신이 되겠지만요.)
 

지지난 토요일 밤이었다. 근처 사는 친구가 불러 내어 기차 역 근처에 있는 펍에 맥주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친구네 강아지를 앞세운 채 좁고 어두운 인도를 따라 걷는데 저 멀리 앞서 걷고 있던 젊은 한쌍이 신경이 쓰였다. 남자 쪽은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여성 쪽은 엄청 짧은 검은 스커트를 입은 채 엄청 높은 구두 위에서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머리 카락이 검은 색이었다. 나는 동네에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을 본 적이 없다. 나의 결코 극복되지 않는 촌스러움과 오지랖은 저 여성이 동양인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보니 다행히도(?) 그냥 영국 여성이었다. 펍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이마를 탁 쳐야 했다. 평상시에는 퇴근 길 직장인들이 들러 칲스와 맥주를 마시며 담소하던 펍이 주말에는 시끄러운 춤곡을 빵빵 틀어대는 빠로 변하는 것이었다. 덩치가 있는 흑인 아저씨 둘이 펍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홀 안은 토요일 밤 흥청거리는 빠의 분위기에 딱 맞는 젊은 남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추석을 맞아 영국에 사는 가족을 만나러 한국에서 영국으로 갈 건데 혹시 필요한 책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다. 알라딘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다. 많은 리뷰와 좋은 별점을 받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에서 관심을 거둘 수 없었다. 제목을 보고, 그리고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를 읽고 나서, 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 문학상을 여럿 탄 젊은 작가가, 민음사같은 평판 있는 출판사의 기획 하에 이런 대중 영합적인 책을 내다니! 그러나 일단 읽자. 깔 권리를 얻기 위해 일단 읽자. 그래서 부장님께 이 책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좀 더 놀다가 김수행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도 이 분의 번역으로 "자본론"을 읽었었다. 책을 많이 사주어서 감사하다는 역자 서문을 읽으며, 역시 경제학자라 마음 틀거리가 다르구나... 하며 웃던 기억이 났다. 갑자기 이 분이 2014년 출판했다는 "자본론 공부"가 읽고 싶어졌다. 대중에 영합하는 소설 책의 판매 붓수를 올려주느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고 젊음을 불태우신 분의 저작을 사서 읽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부장님께 죄송하다고, 김수행 교수의 책으로 바꾸어 사 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부탁드렸다. 

부장님은 "자본론 공부"와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을 모두 사가지고 오셨다. 오랜 외지 생활을 하시다 한국으로 돌아간지 1, 2년 정도 되신 분이다. 한국 여성들은 참 피곤할 거라고 하신다. 회사가 있는 강남역으로 출퇴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여성들 팬티를 대 여섯 번 보게 되었단다. 눈 둘 데를 찾다 못해 핸드폰이나 들여다 보게 되었단다. 20년 가까이 유럽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50대 초반의 남성이 한국에서 겪은 문화 충격이다. 지지난 주 토요일 밤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한국 여성들은 계단을 올라갈 때 가방 등으로 엉덩이를 가릴까? 이러한 행동들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위선의 여성판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특징 짓는 피상성의 한 모습이라는 것도. 젊은 세대끼리는 학벌, 외모, 부모의 능력 등으로 경쟁하고 기성 세대는 기득권으로 젊은 세대의 도전을 막아내고 암컷성, 수컷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노년 세대들은 나이를 핑계로, 위계를 무기로 자신들의 설움을 외부로 배출한다.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킨다. 사회적 관계를 순화하고 관리하는 기준들은 유독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원초성만이 기준이다. 그것이 지역 감정으로, 세대 대결로, 외모 지상주의로, 백화점의 목소리 높은 진상 고객으로, 가능성 높은 스타트업 회사들을 박살내고 기술을 빼앗아 가는 대기업들의 행태로,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표출되든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의 전모 아닐까?

몇 년 전 영국에 처음 와서 어학원을 다닐 때였다. 젊은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하나 같이 물어보는 것이 정말 한국 여자들은 성형 수술을 많이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학원 토론 주제가 한국의 성형 수술 문제였다. 열 댓명 되는 수강생들 가운데 나, 한국 여학생 둘, 이렇게 세 명의 한국인이 끼여 있었다. 강사 왈, 정말 성형 수술을 많이 하냐? 여학생 왈, 그렇다. 왜? 취업 등에 도움이 되니까. 강사를 포함한 대다수 수강생들 놀람. 강사 왈, 그러면 그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없느냐? 한국 여학생은 이 질문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성의 외모가 취업에 영향을 그렇게 분명하게 미친다면 이는 사회적 문제다, 그렇다면 정부나 여성 단체 등이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거나 촉구하거나 하지 않는가? 한국 여학생은 남성도 성형 수술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니 꼭 여성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회가 외모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많이들 한다,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 참다 못해 내가 말했다.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불편해 한다, 이것이 잘못되었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한해서는 여성들이 먼저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여학생은 한 마디로 나의 말문을 닫게 했다. 너희 기성 세대들이 이런 사회를 만든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강사가 한국 여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본인 자신은 성형 수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도 어딘가를 고칠 건가? 한 학생은 눈(코였던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칠 거라고 얘기했다. 다른 학생은 아마 고칠 거 같다고 얘기했다. 다시 한번 강의실에 놀람의 파도가 울려 퍼졌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놀라서 너는 충분히 예쁘다를 연발했다... 

장강명의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뚝딱 읽었다. 읽고 나서 적어도 작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첫째, 문학상을 여럿 탄 작가답게 작가로서의 최소 기준은 충족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의 이러한 자의적인 기준에 조정래의 최근 소설들은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한국 문학계의 거장들,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신경숙 등등, 당신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둘째, 이 소설은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우리 시대에 대한 좋은 보고문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이러한 장점은 작가적 역량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작가는 자신이 취재한 것을 기자스럽게 옮겨 놓았을 뿐이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는 순전히 취재원의 리얼리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자스러운 객관성은 있지만 작가스러운 통찰력과 치열함은 전혀 없다. 김수영의 말을 빌면 불순함이 없다. 사상적 빈곤함, 피상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화자는 20대 후반을 향하는 여성이다. 집은 가난하지만 홍대를 졸업했고, 평균은 가는 외모에, 나름 사는 집안의 순정파 남자 친구가 있고, 나쁘지 않은 직장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호주로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왜? 라는 질문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소설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이 점이 이 소설을 그나마 읽을 만한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화자 자신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고, 그러므로 작품에 리얼리티를 부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작가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 같다.) 도대체 홍대를 나온 나름 재원인 여성이 왜 호주로 이민가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 할까? 화자는 명시적으로 신분 향상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화자 스스로 잘 알 것이다. 화자는 접시 닦기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영원한 비주류로 살아야 한다. 불안한 미래에의 도피? 자신을 끔찍히 생각하는 남자 친구와 결혼하면 되지 않는가? 남자 친구는 집안이 나름 부자인데다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호주에서 생존해 내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아 실현? 아, 화자는 삶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화자의 동생이 베이스 연주자와 사귄다고 했을 때, 화자는 동생의 선택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베이스 연주해서 얼마만한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화자는 호주가 아니라 한국에 속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베이스 연주자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을 가야 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한국이 화자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인간적이고 여유있는 삶을 위해서? 글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호주에서는 야근이 일상적이지도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퇴근하면서 뒤통수를 의식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 호주에서는 가능한데 한국에서는 왜 불가능한가? 예를 들어 화자는 한국에서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매주 불러도 한 달에 20만원 밖에 들지 않는다며 좋아한다. 호주에 비해 한국이 인건비가 엄청 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명한 대비 앞에서도 화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호주가 좀 더 인간답고 여유로운 사회라면 그것은, 화자 스스로도 호주에서 카페 서빙을 하면서 저축을 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노동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한 통찰이 전혀 없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 이민을 가는데 어떤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꼭 있어야 하는가? 이러 저러한 사정이 이리 저리 엮이다 보면 이민을 결심하게도 되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렇다. 그래서 장강명의 소설 제목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호주의 어떤 점에 이끌려 이민을 간다고 말할 그런 긍정적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것이지만, 그 싫음이 한국 사회가 개성을 억압하고 스트레스를 강요하기 때문인지, 김태희나 이건희 아들급으로 태어나지 못한데서 오는 열외감때문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화자가 호주나 다른 나라에 가서 한국과는 다른 삶의 격조 안에서 살게 될지, 교민 사회에 잘 적응하여 기득권자로서 한국 유학생이나 워킹 홀리데이 온 사람들을 적당히 착취하면서 살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만일 후자라면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읽은 두 세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이런 미심쩍음이 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화자는 아이엘츠 시험을 보러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난다. 친구들은 여전히 시어머니 욕을 하고 회사 상사 욕을 한다. 이미 호주라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해 본 화자는 친구들에게서 뭔지 모를 얄팍함을 느낀다. 물론 작가는 이 얄팍함의 근원을 더 파고들지 않는다. 우리가 작가를 대신해 보자. 한국 사람들은 얄팍하다. 왜냐하면 자기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 주제가 항상 남을 욕하는 것이 된다(아니면 자식 이야기 등등). 욕 대상이 시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회사 상사가 될 수도 있고 정치권이 될 수도 있고 한국 자체가 될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얄팍하다. 왜냐하면 모든 비판에서 자신은 열외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시어머니를 욕한다면 나는 앞으로 그런 시어머니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내가 회사 상사를 욕한다면 나는 앞으로 그런 상사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런 자기 반성에서 한국 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일상적으로 욕을 한다. 그거 자기 모순 아니야? 하고 물으면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답답해서 그냥 하소연 해 본 거야. 그냥 하소연도 못해? 그냥 하소연? 그래서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려 한다. 급하다는 데 정말 급한 거야? 중요하다는 데 정말 중요한 거야? 죽겠다는 데 정말 죽겠는 거야? 그러다 결국은 한국 사람이란 자신의 이익에 맞춰 상황을 정당히 조작하고 둘러대는 종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국 사람들이 항상 신뢰보다는 자신의 이해 쪽을 선택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나는 한국 사람과 비즈니스하는 러시아 사람으로부터도, 대만 사람으로부터도 한국 사람들이 "얕다(shallow)"고 하는 평을 들어 보았다. 그 말을 듣고 난 나의 반응은 "이 사람들이 한국을 좀 아네!"였다. 자기 모순이나 책임감에 무감각한 것을 미성숙하다고 한다면 한국은 참으로 미성숙하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최근에 나는 유럽의 시리아 난민 사태에 대한 네이버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들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터키나 요르단 등으로 탈출했다. 거기에 지금도 수십,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있다. 난민촌은 기본적으로 생존만을 허락한다. 자국 노동 시장에 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터키 정부 등은 난민들의 노동을 금한다. 그러나 시리아 난민 중 일부는 어떻게든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 그 돈을 자금으로 해서 유럽을 향한 고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럽으로 향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상당수는 교육을 받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나마 배우고 기술 있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푼돈을 모아 유럽으로 떠나는 것이다. 난민촌에 있어 봤자 교육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버려진 세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인 것이다.

자, 상황이 이렇다.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서 어떤 댓글을 기대했겠는가? 던져주는 빵을 가만히 받아 먹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 주려는 시리아의 젊은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한국 사람들은 정말 감명받지 아니 하겠는가? 바로 우리 부모님들 모습 아니던가? 오호라, 댓글은 저주 일색이었다. 지붕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매국노로까지 비방을 당했다. 이슬람 사람들과 테러리스트를 동일시했다. 헝가리 국경에서 경찰과 충돌한 난민들에 대해 온갖 비난이 난무했다. 독일이나 북유럽으로 가려는 시리아 난민들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난민들을 입국 시키지 않으려는 유럽 국가들이나 헝가리도 이해해 줄 수 밖에 없다, 참 해결책이 없다, 안타깝다... 이 정도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정녕 한국에서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적인 발상인 것인가? 난민 문제와 직접 이해 관계가 없는 나라의 국민들 중 난민들에게 이토록 일방적으로 적의를 보이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 이토록 싸나운 사람들이 어디에 또 있을까? 나는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한국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엎고 유럽으로 대장정을 벌인 시리아 젊은 아버지들에게 그들은 말한다. 그럴 힘이 있으면 왜 조국에 남아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가? 이런 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만약 이런 것이 말이라면 한국의 모든 사회적 약자는 똑같은 말을 들어야 한다. 왜, 좀 더 노력을 못하니? 좀 더 의지를 보여봐. 최저 임금을 안주니 일을 못하겠다고, 그런 정신 머리로 쯧쯧쯧... 

한국은 미성숙한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일깨울 수 밖에 없다. 제삼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다 볼 도리 밖에 없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럼 어떤 사회를 원하는데?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이 김태희로 태어난 그런 평형 우주를 원하다면, 그럼 그냥 조용히 한국을 떠나라고 말해 줄 수 밖에 없다. 한국을 지금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 저러한 인간적이고 여유 있는 사회상을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 스스로는 그러한 사회상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느냐고 깐깐하게 물을 도리 밖에 없다. 만약 이 사람이, 예컨대 성형 수술의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무시한 채 성형 수술은 개인의 선택이니 제삼자가 왈가 왈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냥 조용히 비웃어 줄 도리 밖에 없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껍데기를 너무 많이 봐왔다. 우리는 좀 더 깐깐해져야 하고, 좀 더 자주 정색해야 한다. 더 이상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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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난민 사태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독일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나라들이 차례로 국경을 봉쇄하거나 국경 출입을 강화하고 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불과 얼마 전 메르켈의 우호적인 선언을 생각해 본다면 많이 실망스럽긴 하다. 그래도 독일을 이해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은 난민들이 몰려들고 있고, 그 중에는 시리아 난민이 아닌 사람도 끼여 있고, 테러리스트가 끼여 있다는 소문도 있고, 국민들이 불안해 할 수 있고 불만도 높아갈 것이고, 어쨌거나 독일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니 유럽 전체가 고통을 분담할 장치를 만들어 놓아야 하고 등등...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기에 적당한 때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메르켈이 위선자라고 주장한다. 혼자 지고지선한 척, 잘난 척 하더니... 쯧쯧쯧. 이 사람들은 독일이 지금까지 받은 난민의 수와 앞으로 받게 될 난민의 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독일이 난민을 더 열심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독일이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메르켈이 혼자 잘난 척 하더니 현실 앞에서 꼬리를 내렸다고 조소할 뿐이다. 이 사람들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인화의 "영원의 제국"을 보면 영조(정조인가?)가 책상을 발로 걷어 차며 화를 내는 모습에 주인공 화자가 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성군이 일개 평민들이나 하는 행동을 한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인화의 이런 멘탈리티는 물론 유치하다. 이런 유치함은 이인화를 어디로 이끌고 갈까? 허무주의. 이인화식 허무주의다. 세상에는 완전한 인간도 절대 선도 절대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많이 유치하다. 그런데 이인화는 이런 의미에서라도 허무주의자이긴 한 것일까? 아니다. 이인화는 무엇인가를 긍정하기 위해 세상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인화가 긍정하고자 하는 것은 박정희다. 박정희의 과를 물타기 하기 위해 이인화는 허무주의자가 되어야 했던 것 뿐이다. 절대선은 없어. 다 똑같은 놈들이야. 그렇게 세례를 베풀고 나서 이인화는 박정희를 자신의 영웅으로 모셔온다. 지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쓸데 없는 위장, 우회가 정말 짜증스럽다. 왜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철학적인 척 해야 하지?

김홍도의 "새벽을 깨우리로다"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어떤 대학생들이 경찰서 창문에 돌을 던지고 도망간다. 지켜보던 김홍도가 그중 한 대학생의 팔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당황해 하는 대학생에게 김홍도는 말한다. "너가 정말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도망치는 것이냐?" 경찰이 민간인을 곤봉으로 내려쳐도 김홍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대학생이 경찰서 창문에 돌을 던져도 김홍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학생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려 할 때 김홍도는 별안간 절대 정의의 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김홍도는 정말 절대 선의 심판관일까? 물론 아니다. 그는 단지 데모하는 학생들이 싫었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경찰이 죄다 잡아 갔으면 할 뿐이다.

이런 것들은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이라는 개념의 고전적인 예다.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후원을 한다는 사람에게 왜 국내 아이들에게는 후원을 하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국내 아이에게 후원을 한다는 사람에게 그 돈을 왜 자기 부모에게는 쓰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후원을 하다가 경제적 사정 등으로 끊은 사람에게 그럴 거면 애초에 왜 후원을 한 것이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 선행을 한 것에 대해 선행의 절대적 기준을 들이대며 비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전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피곤하다. 현실에서 마주치면 정말 갑갑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주로 네이버 댓글란에 몰려 있는 것 같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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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한국 뉴스들에도 많이 나오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유럽은 지금 난민 문제가 가장 큰 이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나라가 독일이다. 그리고 가장 찌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나라가 영국이다.

독일은 자신의 나라에 들어오는 시리아 난민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었다. 이유 규정에 의하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이런 선언을 하면 더 많은 난민이 몰려 들텐데 말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가벼운 농담으로 대응했다. 메르켈이 더 이상 정권을 연장하고 싶지 않은가 보군, 독일은 출생율이 낮으니까 세금을 내 줄 젊은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을 거야...

여론 조사에 의하면 독일에 들어오는 시리아 난민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일 국민은 93%에 달한다. 물론 이에 반대하면서 경찰과 싸우는 네오 나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의 93%라면 사실상 독일 국민 전부 다가 아닌가? 놀랍고 대단했다. 독일 국민들은 세계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 적어도 나는 독일을 존경한다. 그래서 곧 쏘세지에 맥주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독일과 달리 영국은 유럽의 강국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려 한다. 기본 입장은 난민은 못 받겠고 돈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은 영국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다. 지난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20% 정도의 지지를 받았고 이 정당의 주된 타겟이 바로 이민자 문제였다. 집권 보수당이 이 극우 정당과 경쟁하려니 이번 난민 사태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걸로 경쟁한다는 것은 둘이 똑같다는 것이다.)

관망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영국이라는 해는 완전히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유럽의 리더는 독일이고 유럽의 수상은 메르켈이다. 독일이 수행하는 역할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독일이 수행하는 역할이 독일에게 자기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할 때도 독일은 그 역할을 피하지 않았다. 자기 이익의 추구라는 골든 룰보다는 보편적인 가치(이번 경우에는 휴머니즘)라는 틀 안에서 사태를 보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일은 세계인들로부터 존경을 벌었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탁월한 정치인은 탁월한 교사다. 메르켈을 포함한 독일 국민들은 보편적 가치에 대해 세계인들에게 훌륭한 수업을 해주었다.)
  
난민 사태와 관련해서 네이버에 들어가 댓글들을 좀 읽었다. 물론 실망했다. 독일에는 기꺼이 존경을 표하면서도 스스로가 독일처럼 행동하여 존경을 받을 가능성은 닫아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 원리다. 동양 고전을 빌어 말하면 소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끝까지 생존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생존만이 우리의 지상 과제이다.

얼마 전에 쿠바와 미국이 국교 정상화를 했다. 대단한 뉴스였다. 저 조그만 섬 나라가 한때 제3세계 운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이, 예를 들어 예술가를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쿠바는 자기만의 뭔가를 갖고 있나? 그렇다. 베트남은? 알제리는? 북한은? 태국은? 등등. 이 모든 나라들의 고유성에 대해 우리는 긍정할 수 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다. 그러면 한국은? 한국에서는 걸린다. 한국은 최근 북한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여 저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대해 공동 군사 시위를 한 나라 아니던가? 직장인이든, 예술가든, 한 나라든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주류에 파묻히려고 하는 것을 찌질하다고 한다. 찌질하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경을 버는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최근 역사가 우리에게 부단히 가르쳐주는 것은 찌질하게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인 듯 하다. (다행히 요즘 영국도 충분히 찌질해서 내게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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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떤 (한국) 아이에게 철학 수업을 해주었다. 현재 사립 초등학교 5학년이고 내년에 이튼 학교 진학이 확정된 아이다. 많은 부분 아이 엄마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다.

주제는 faith. 아이가 신앙인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belief와 knowledge를 구분하고 knowledge의 기반이 belief일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이었다(말하자면 신앙의 가능 근거를 미리 마련해 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아이는 둘을 구별해 낼 줄 알았다. 놀리지는 솔리드한 푸르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게다. 물론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회의가 강하게 엄습해 오긴 했다. 초등학생이 도대체 왜 안셀름의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대해 토론 해야 하는가? 그럭 저럭 토론을 끝마칠 수 있었지만 아이가 얼마나 소화해 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에게 키에르케고르의 아브라함 사례를 가지고 키에르케고르와 신앙지상주의와의 관계를 논하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키에르케고르를 신앙지상주의자로 분류한 교재에 대한 내 나름의 복수였다. 그러나, 물론 키에르케고르를 이런 식으로 다루어선 안된다는 등등으로 내가 교재에 불만족을 표한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가 학교 선생님한테 온 이메일을 보여주었다. 방학 동안 놀지 말고("anything is better than nothing") 뭐든 읽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스어, 라틴어 단어 공부할 것, 시사 뉴스 흐름을 결코 놓치지 말 것 등등. 12살부터 16살까지의 필독 리스트도 첨부되어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도 있었고 "풍요의 사회"도 있었고 사무엘 헌팅턴도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데 아이가 밥 먹는 내내 (내가 밥 먹을 때 보는) 시사 주간지에서 눈을 떼지를 않았다. 보통 같으면 한 마디 했을 텐데 어느 순간 나도 아이에게 특권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아이와 오스테러티 정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물관 요금을 유료화하는 것은 싫다는, 다행히도 아이스러운 의견을 내주었다.

이런 것이 이른바 영국의 엘리트 교육이구나 싶었다. 영국은 엘리트 학교와 일반 공립 학교의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동네에는 강이 흐르는데 일요일마다 요트, 커누로 분주하다. 강 주변에 어떤 사립 초등학교 요트부 요트 격납고가 있다. "공립" 학교 다니는 어떤 아이에게 물어 보았다. "너도 요트부에 들었니?" 아이는 대답했다. "요트부는 사립 학교에나 있어요." 공립 "중"학교에서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배운다(나는 그걸 두고 장래 황색 저널리즘의 독자를 만들어내려는 수작이라고 비아냥 거렸었다). 반면 사립 "초등" 학교에서는 니체의 짜라투스투라에서 인용한 문구가 시험 문제로 등장한다. 공립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공부를 하루 정도 봐 준 적이 있었다. 사다리꼴의 면적을 구하라는 문제가 있었고 아이는 공식을 이용해서 잘 풀었다. 그러나 그 공식을 유도할 줄은 몰랐다. 아니,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도 유도할 줄 몰랐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수학은 언제나 100점이다. (한국 사람이니까.) 수학만 그런 것이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길기 때문에 각설하기로 하겠다. 내가 영국의 공립 교육 제도에 지극한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결론만 이야기해 두자. 바보 만드는 교육...

영국의 이런 극심한 엘리트 교육과 공립 교육의 격차에 비하면 한국은 격차가 그다지 심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교육 제도가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영국은 계급 사회고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배경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보편 교육을 지향하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은 보편적으로 고학력이 요구되는 수업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국 학생들 고생이 심하다. 그런데 엘리트들의 수준에서 보면 일부 선별된 영국의 엘리트 학생들의 수준이 당연히 한국 학생들을 압도할 것이다. 영국의 엘리트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이미 아이가 아니라 사회의 지성인으로 대우받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도 엘리트 교육을 강화해야 할까? 글쎄... 나는 여전히 제도적 엘리트 교육에 반대하는 쪽에 생각이 기운다. 초등학교때부터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을 논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반드시 대학교때 처음 안셀름을 접한 사람보다 안셀름에 대해 더 나은 논문을 쓴다는 보장은 없다. 영국 엘리트 교육의 표준과 같은 사람이랄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이 거둔 성취는 엘리트 교육을 밟지 않은 사람에게는 접근 불능의 수준인 것일까? 아마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소화하지 않은 유산은 단순히 짐일 뿐이라는 괴테의 말에 동의한다. 아직 자신의 관심과 입장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하게 입력되는 자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사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사고를 계발하도록 지도받는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출력되는 사고는 현실과의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한낱 연습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연습을 그렇게 오래해야 할 필요가 도대체 무엇인가?

더 해야 할 얘기가 있으나 줄여야 겠다. 결론만 말해두면 내 생각에는 엘리트 교육은 어떤 문화권들(영국이나 프랑스 등)이 이러 저러다 보니 (역사성과 사회성 속에서) 만들어낸 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보통 교육을 상당히 낮은 수준에 방치한 채 이루어지는 엘리트 교육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본다. 엘리트 교육을 수행하는 사람도 이런 것을 잘 아는 것 같다. 아까 말한 사립 초등 학교 엄마에 의하면 이튼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 언제나 제1순위의 덕으로 가르치는 것은 "겸손"이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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